안성희(安聖喜, 1932년 7월 31일[4]-?[5])
1 소개
안성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용가, 안무가로 문학 평론가 안막, 일제강점기 조선의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 부부의 딸이다.
2 생애
[6]
1932년 7월 31일 안막과 최승희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안승자(安承子) 였으나 후에 안성희로 개명하였다.[7] 모친의 피를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이며 모친 최승희에게 직접 무용을 사사 받았다.[8] 6살부터 모친과 함께 무대에 섰다고 한다.[9].[10] 최승희의 최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무용가 김민자[11]가 이 당시 안성희의 보모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12][13][14]
광복 후 최승희의 모교인 숙명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20] 부모가 월북을 하자 부모를 따라 월북하였으며[21] 모친과 함께 북한, 중국, 소련에서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가다[22], 1953년 소련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학교로 발레 유학을 떠났다.
유학 생활 도중 1956년 모스크바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 '집시춤'으로 1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귀국 공연에서는 김일성이 공연을 관람하였고, 공연 후에는 그녀에게 직접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조선족으로 최승희의 제자이자, 당시 이 공연을 관람하였던 김예화의 증언에 의하면 이 날 안성희는 자신이 직접 안무한 여러가지의 춤을 추었지만 관객들이 제일 열광했던 춤은 바로 '집시춤' 이었다고 한다.
이후 공훈배우가 되어 모친과 합작하여[23]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함과 동시에, 1963년에는 국립 평양무용극원[24]의 원장이 되어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25] 국립 평양무용극원의 원장을 처음 맡았을때 안성희의 나이가 불과 31세였으니, 이건 북한 정부가 그만큼 그녀의 능력을 인정 하였다는 뜻이다.
물론 북한에서 이렇듯 안성희를 높이 띄워준 건, 후에 다시 서술되겠지만, 최승희를 견제하기 위한, 혹은 최승희가 없어도 우린 그녀의 딸을 이용하여 북한의 무용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64년에는 인민배우가 되어 아버지가 숙청되어 생사를 알 수 없고, 어머니가 연일 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승승장구 하였지만... 최승희가 대본을 쓰고, 안성희가 안무와 연출을 맡아 1964년 공연했던 무용극 <옥련못의 이야기>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혁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과 난도질을 당했고, 결국 이 작품이 최승희의 마지막 작품이 되면서, 최승희는 자신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무대에 다시 설 수 없게 되었으며 무용 생명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옥련못의 이야기> 공연 이후 안성희에게도 비판의 화살이 갔지만, 안성희 본인이 대본을 직접 쓴게 아니고 안무와 연출만 맡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르기만 했다는 자기비판을 하는 선에서 대충 넘어갔다고 한다. 이후에 안성희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 안무한 <당의 딸>이라는 무용극은 김일성에 충성을 다하는 어떤 여인의 삶을 그렸는데, 안성희로서는 어떻게든 북한의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한 노력, 혹은 일종의 최후의 발악 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살아 남기 위한 노력도 결국 부질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안막이 카프 계열 문학가 들과 함께 1958년 숙청당한 이래, 모친 최승희마저 결국 1967년에 숙청당한 후, 결국 그녀도 자취를 감췄다. 그 이후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북한 사회의 특성상 연좌제로 같이 숙청당한 걸로 추측된다. 한때 안성희가 최승희의 숙청 후에도 남동생 안병건과 함께 피바다가극단에 소속되어 안성희는 무용 안무를 담당하고, 안병건은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소문은 일본에 살고 있는 어떤 교포 음악가에 의해 바로 반박 되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도 피바다가극단에 가보았지만, 안성희나 안병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10년 넘게 최승희에 대한 자료를 모아 2002년 최승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던[26] 정수웅은 1992년 러시아에서 과거 소련 시절 KGB 에서 일했다는 사람으로 부터 "안성희가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고 증언하였지만, 역시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저 증언을 한 사람이 정말로 KGB에서 일했었는지도 모르겠고.....
최승희의 제자로 무용가로 활동하다 탈북한 김영순[27]의 증언에 의하면 최승희와 안성희는 북창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8]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납북, 탈북 수기에 최승희가 딸 안성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하려다 붙잡혀서 총살당했다고 적었지만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신상옥 감독은 이 수기에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대부분 잘못된 정보였던 걸 보면[29], 이 이야기 역시 잘못된 정보일 확률이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최승희가 간첩죄를 뒤집어 썼을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 한 예로 1950년대부터 일본에선 최승희의 초청 공연을 계속 추진했고, 최승희 역시 일본으로 공연을 가고 싶어 했으나 공연은 번번히 무산되었고, 한 번은 일본 사회당의 대표단이 방북한 적이 있었는데, 최승희가 이들을 북한 당국의 아무런 허가 없이 만나서 자신의 무용단을 일본으로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승낙을 받아냈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그동안 해왔던 짓들을 볼때 북한 당국에서 이 면담을 문제삼아 뒷조사를 한 뒤에 최승희에게 일본 사회당과 연계하여 간첩 활동을 하였다는 누명을 씌웠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그런 누명을 썼다면 최승희는 더 이상 북한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느끼고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 총살 당했을 개연성도 충분히 있으니 신상옥 감독의 수기의 내용이 마냥 터무니 없는 소리만은 아닌 것이다.
최승희가 숙청될 때 안성희가 자기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모친인 최승희를 고발하였고, 모친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소문일뿐,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이는 아버지가 숙청되고 어머니가 연일 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 딸인 안성희만 혼자 승승장구 했다 보니, 안성희가 부모를 자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한 제물로 희생 시켰다는 이런 류의 소문이 돈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만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의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수도 있는데, 모스크바로 발레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는 서양무용에 능통했고, 최승희는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조선 사람은 조선 춤을 춰야 한다."[30]고 항상 딸에게 자주 말했는데, 소련파 간부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를 내세워 모녀 간의 갈등을 민족파 VS 현대파의 대립구도로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모녀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두 모녀를 떼어 놓으려고 하였다고 한다.[31] 1959년에 안성희가 모친 최승희를 공개 비판했다는건, 아마 그녀의 자의가 아닌, 주위에서 강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승희는 1969년 8월 8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32] 안성희의 사망 날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최소한 1987년 이전에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승희가 공식적으로 복권된건 2003년이지만 1980년대 말부터 최승희에 대한 복권 기조가 있었고, 또 최승희의 숙청 당시 연좌되어 지방으로 쫓겨 났던 최승희의 두 조카 최호섭과 최로사가 사면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게 1987년이다. 만약 이때까지 안성희가 생존해 있었다면 안성희 역시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근데 그러질 못한 걸 보면 결국 그 이전에 사망하였다는 뜻이다.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1979년 한 정치범수용소에서 비참한 몰골의 최승희와 안성희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지만, 탈북자들의 말이 다 신뢰가 가는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 말은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안성희가 수용소에서의 혹독한 강제노동으로 인해 한 쪽 팔을 잃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역시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다. 다만 북창 수용소에 1975년부터 2002년까지 수감된 적이 있는 탈북자 김혜숙의 증언에 따르면, 이 수용소는 탄광에서 하루 16시간에서 18시간 이상의 혹독한 강제노동을 시킨다고 하며 허술한 안전 관리로 사망 사고나 중상을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이런 걸 봐서는 어쩌면 탄광 붕괴 사고나 폭파 사고 등으로 정말로 한 쪽 팔을 잃었을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는 지방으로 추방된 후 농사를 짓다 탈곡기에 한쪽 손모가지가 날아갔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재일교포 무용가가 1999년 북한을 방문하여 최승희의 제자이자 당시까지 북한 무용계에서 직접 활동하던 사람으로 부터 "안성희는 무용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농촌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을 하다가 탈곡기에 손목이 잘려 한쪽 손이 없는 상태 이지요." 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2003년 최승희가 공식적으로 복권되었을 때, 딸인 그녀 역시 공식적으로 복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작품 감상
1957년 제작된 소련과 북한의 합작 영화 <잊지 말라 파주블!>[33] 에 안성희가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안성희의 장구춤을 짧게나마 볼 수 있다. 영상의 2분 22초 부터 등장한다. 참고로 영상의 3분 4초부터 화면에 잡히는 노파는 분장이 저래서 쉽게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최승희로 추정되는데[34], 러시아의 자료에 의하면 최승희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형제의 모친 역으로 출연 하였다고 한다.
영화는 북한의 배우가 출연을 하고, 소련의 스태프들이 참여를 하는 방식으로 제작된것 같은데, 소련에선 이반 루킨스키 감독이, 북한에선 천상인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주인공인 두 형제로 박학[35]과 신세민[36]이 출연하였고, 상술한 대로 안성희가 여주인공으로, 최승희가 주인공 형제의 모친 역으로 출연하였으며, 평양에서는 1957년 8월 23일에 개봉하였고, 모스크바에선 1958년 4월에 개봉 하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남한이나 북한에서는 자료가 누락되어 있지만, 러시아에는 그 자료가 기록되어 있고,[37] 심지어 유투브에는 어떤 이가 이 영화를 러시아어 더빙판으로 올려 놓기 까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남한이나 북한에서는 누락된 안성희나 최승희의 자료나 혹은 그 외 북한 영화에 대한 자료가 아마도 러시아에 있을수도 있을거라 추측된다.
소련 영화 <일리야 무로메츠(Илья Муромец)>의 한 장면으로 안성희가 검무를 추는 모습이다. 이 영화 역시 유투브에 비록 저화질이긴 하지만 어떤 이가 올려놨으니 감상,
안성희는 이 영화에서 몽골의 무희로 분해 검무를 추는 장면으로 약 1분 가량 짧게 나오는데[38], 이 영화가 개봉된 1956년에 안성희는 모스크바 유학 생활 도중 '집시춤'으로 모스크바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는데, 아마도 그 영향으로 이 영화에 우정출연 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일리야 무로메츠[39]는 키예프 공국 시절의 고전 서사시의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저 여성이 안성희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꼭 영락 없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쪽 여성 같다.
4 무용가로서의 평가
"뛰어난 무용갑니다. 뭐니 뭐니 해도 안성희는 뛰어난 무용가 입니다..."-출처: 전황[40][41] 구술, 송혜진 채록, 『2004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48: 전황』,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안성희의 인상은 개성이 강하고, 눈은 크고, 이마는 약간 둥글었으며, 양 볼은 홀쭉했다. 그리고 입술은 매우 얇았고, 표정은 엄숙한 편이었다. 뒤에 안성희 선생이 우리 학교에 나와서 가르치게 되었는데, 무용지도를 할 때에 보면 엄숙했고, 설명이 매우 정확했으며, 그 기교 또한 표현적이었다. 나는 이때까지 우리가 배운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창피했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역시 안성희의 춤은 절도가 있고, 예리하며,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향란[42] 증언 -
최승희 춤 전수자인 재일교포 3세 무용가 백향주[43][44]의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안성희의 춤은 어머니인 최승희에 비해 육체적인 기교가 강하며, 그녀의 춤에는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장검무를 중국 경극의 검무에 기법적으로 응용한 춤들이 있다고 한다. 또한 한국 춤보다는 러시아의 민속춤과 발레, 중국 경극의 춤을 많이 도입하여 어머니인 최승희와는 상반된 성격의 춤을 추었다는 평가가 있다.
아울러서 안성희 본인은 자신을 최승희의 예술적인 후계자라기보다는 최승희와는 다른 계파의 독자적인 무용가로 여겼다고 하며, 충분히 그럴만한 역량이 있는 무용가였다. 반면에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강했던 최승희는 딸을 자신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있어서 최승희가 딸에게 내심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5 미디어에서
최승희를 다룬 창작물들에서 최승희의 딸인 만큼 당연히 등장한다. 1974-5년 TBC에서 금요 드라마로 방영한 반공 드라마[45] <최승희> 에서는 안인숙이 안성희 역을 맡았다. 최승희 역은 고은아, 이 드라마는 반공 드라마니 만큼 그 내용이 1970년대 버전의 근초고왕 혹은 광개토태왕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개판이며 심하게 막 나간다. 심지어는 안성희가 한국전쟁 도중 조선인민군 소좌에게 무참하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은, 안성희가 최현[46]의 성노리개가 되는 내용까지 나온다.
1995년 MBC에서 방영한 2부작 특집극 <최승희>에서는 이주영[47]이라는 배우가 안성희로 등장한다. 최승희 역은 당대의 인기스타였던 채시라[48], 채시라와 이주영은 이 드라마의 촬영을 위해 최승희의 수제자 김백봉에게 매일 4-5시간씩 한국무용을 배웠다고 한다. 충공깽스러운 건 이 드라마가 광복절 특집극으로 제작 되었다는 사실이다.
극단 <미추>에서 2003년과 2004년 최승희의 삶을 뮤지컬로 제작하여 공연한 적도 있다. 연출은 극단 미추의 대표 손진책이고, 최승희 역은 배우 김성녀[49]가 연기하였고, 안성희 역은 배우 최수현이 연기하였다. 이 뮤지컬은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에 대해 조금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는데, 안성희는 항상 어머니 최승희에게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애정을 갈구했지만, 유명인이었던 어머니는 딸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고, 그런 부분에서 애증이 있었다는 뭐 그런식으로 표현 되었지만, 물론 실제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극 중 최승희로 분한 김성녀가 부르는 향수의 무희의 음원이 올려진 링크, 김성녀의 보살춤 의상[50]
6 여담
이 항목의 내용은 사실 최승희 항목에 있는 내용과 모든 내용이 거의 중복되는데, 사실 그녀의 행적 자체가 남한에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대문에, 나무위키에 작성할 만한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안성희에게는 14살 아래인 안병건[51][52]이라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안병건은 10대 시절부터 작곡가로 활동하며 어머니와 누나의 무용극의 곡을 쓰기도 했지만, 최승희가 숙청된 후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엄마, 누나와 같이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변예술학교 교장을 지낸 조선족 무용가 조득현의 증언에 의하면 안성희는 바이올리니스트인 백고산을 좋아했으나, 백고산은 김두봉의 딸과 혼인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