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박희광 (朴喜光) |
예명 | 상만(相萬) |
출생 | 1901년 2월 15일 |
사망 | 1970년 1월 22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선산군 상고면 봉곡리 |
사망지 | 서울시 보훈병원 |
종교 | 무종교 → 천주교(세례명 : 시메온) → 무종교 |
분야 | 정치, 사회 |
가족 | 아버지 박윤하, 부인 유문기, 장남 박근용, 차남 박정용, 박정희, 박선용, 박수용 |
1 소개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통의부)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되어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던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만철연선 친일파 제거등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김광추(金光秋), 김병현과 함께 3인조 암살단을 조직, 활동하였다.
2 업적
박희광은 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통의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일본 영사관 습격,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 암살,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해 활동한 스파이 배정자(裵貞子, 일본식 이름: 다야마 사다코) , 이용구, 최정규 등의 암살임무(실패)와 항일 독립운동단체와 임시정부에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 했었다.
1924년 보민회 이용구와 대표적인 친일파인 일진회 최정규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뤼순(여순)지역 언론에 보도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사건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운동을 펼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으며, 친일파들에게는 두려움의 사건이었다.
박희광은 1924년6월7일 상해임시정부(김구 선생)의 지령으로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날 저녁 대서관(大西關)에서 군자금을 탈취하고, 금정관(金井館)에서 다시 군자금 300엔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일본, 중국 경찰과 총격전끝에 현장에서 김병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날 김광추는 총격적을 벌이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3 군자금 300엔의 가치
군자금 300엔의 가치를 '한길사'에 나온 자료를 근거로 추정한다면 다음과 같다.
1922년 가을 쯤 300엔이라는 돈의 가치를 추정한다면, 당시 찬거리로 5전(錢)을 내면 푸줏간에서 150g 정도의 작은 쇠고기 덩이를 주었다니까 600g 1근에 20전 정도. 지금의 쇠고기 값 횡성한우 1등급 국거리 600g기준 26,800원으로 잡으면 1전에 1,340원, 그 당시 환율로 100전은 1엔이니 300엔은 40,200,000원정도 추정된다. 당시, 권총 한자루를 구하는데 10개월이 걸렸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의 자금난을 고려한다면 군자금으로는 거금이라 할수 있겠다. (姜東鎭, ‘日帝의 韓國侵略政策史 –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길사, 1980, 394~395쪽)
일본의 물가상승 등을 고려하면 300엔은 2011년 가치로 31만 1천엔 정도 되는 돈이다.[1]
4 뤼순감옥 수감생활
박희광선생은 뤼순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 뤼순지방고등법원 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1924년부터 1943년까지 뤼순형무소(중국 뤼순지역)에서 신채호, 이회영, 우덕순, 김병현 등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었다. 선생은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출옥후에도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뤼순형무소 수감 독립운동가로써는 최장기 복역중 일본천황 즉위와 황태자 출생 등 두 차례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5 생애 후기
박희광의 업적은 증명할 방법이 없어 귀향생활을 하던중, 1924년9월1일자 동아일보 등에 사건과 선고공판 등의 행적이 증명되면서 1968년3월1일자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2년 후인 1970년1월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보훈병원에서 타계 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박희광선생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이라는 친필휘호를 내렸으며, 1983년 구미문화원, 구미시, 각계 인사들의 힘으로 경북 구미시 금오산 도립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대구광역시 두류공원 내 조각 공원에 흉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