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백린(盧伯麟) | ||
1875년 ~ 1926년 | ||
복무 | 일본군 대한제국군 | |
기간 | 1900년 ~ 1910년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11기 | |
최종계급 | 대한제국군 정령 | |
최종보직 | 군부 교육국장 |
1 개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대한제국군에서 대령까지 근무했다.
2 생애
1875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기주쿠대학과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어담도 당시에 동기로 같이 공부했는데 두 사람의 생애는 매우 달랐다. 다른 동기로는 윤치성, 김관현 등이 있다. 1899년 11월에 일본군 견습사관이 되었고 1900년에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에는 한국의 교육시설이 변변찮아 엘리트를 일본의 사관학교에 보내 공부시켰는데 그탓에 일본에서 일단 임관한 다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재임관했다.
1900년 대한제국군으로 복귀해 보병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에 육군무관학교, 육군연성학교[1]의 교관을 지냈다. 정위(대위)로 근무할 당시에 러일전쟁을 겪었고 관전사란 직책으로 일본군을 따라 종군하였다. 귀국 후에 정령(대령)까지 진급하여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학교장 등을 지냈다.
당시의 군인들은 일본에서 공부한 친일파가 많았지만 그는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 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진급에서 제외됐고 1907년에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1907년에 군이 해산되자 육군연성학교장에서 물러나고 국방부 역할이었던 군부의 교육국장으로 배속되었다. 당시 한국군에 남은 부대는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 정도가 고작이었고 이들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가 아닌 의장용 부대였다.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최종계급은 대한제국군 정령(대령)이었다.
퇴역 후에는 교육계몽 운동 등 독립운동을 펼쳤고 김구와 접촉하기도 했고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사업은 당시 돈으로 10만원을 잃는 등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1914년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했고 항공학교를 세웠다. 그 후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교관을 지냈다. 그는 구한말의 군인임에도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잘 알았기에 계속 공군력을 키우는 걸 강조했다. 이에 따라 노백린은 최용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에 임시정부에 참여해 활동했고 군무총장 등을 지냈다. 당시 임정활동은 극도로 어려웠고 그도 1926년에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녀인 노선경, 노태준[2], 노순경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62년에 노백린은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공무원단기학교 한국사 강사 신영식의 외조부이다.
3 미디어
2003년 출간된 오세영의 소설 창공의 투사에서 한인 비행사들과 함께 비행사 양성소 및 한인 비행대 설립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나온다. 엔딩 장면에서 그와 주인공 한주영이 비행사 양성소를 개소하면서 감격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공군전력 양성이라는 특이한 분야에 힘쓴 인물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대체역사물에서 공군참모총장=노백린은 등식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