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80년대 일본 버블경제에서 넘어옴)

バブル景気 / Japanese asset price bubble

버블을 통하여 "공짜 점심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경제의 대원칙이 재확인되었다. 버블 안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1]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블이 한번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 1993년 일본 경제백서 中[2]

1 개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코카콜라 광고
[3][4]

거품경제 말기인 1990년 도쿄시내를 촬영한 영상

1980년대 일본 대중가요 동영상 모음.
시간 없는 위키러는 28분부터 감상해보자. 여자 김흥국
20세기 역대 최악의 거품경제. 이 버블경제로 일본은 무려 1500조엔[5] 이르는 자산이 공중분해 되었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의 비정상적인 자산가치 상승 현상을 통칭하는 말. 거품경제 붐에 의해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 가치가 실질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부풀어 올랐고, 결국 거품은 터졌다. 거품경제가 붕괴된 후 맞이한 잃어버린 10년은 당시 일본의 특이 현상으로 취급되어 세계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유연하지 못했던 일본 관료들의 병크를 비웃었고 이는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미국에서 똑같은 짓을 하면서 일본은 오히려 연착륙에 성공한 것이 아니냐는 재평가마저 나오기도 했지만 미국은 세일가스등 넘사벽 자원과 기술로 2016년 현재 가뿐히 위기를 어느정도 넘겼다는 평가.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어쨌든 버블이 붕괴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반면교사로 여타 선진국들에서 참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한국은 거주용 부동산 등 일부 자산에서 버블이 형성되어 있으나 애초에 이 정도로 심각한 버블이 형성될 만한 국제적 신뢰도[6]가 없기 때문에 일본처럼 치명적인 버블이 형성될 가능성은 낮고, 비슷한 사례로 통하는 것은 결국 미국에서 일어난 그것 정도.

2 1980년대 세계 경제를 장악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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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IBM 2위 엑슨 4위[7] 그리고 7위에 위치한 기업은 다름아닌 도쿄전력

이 당시(1988년) 주식 시가 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순위. 무려 2/3(33개)가 일본인데 그 중에서도 상당수가 은행인것에 주목할 것. 또한 더 유심히 봐야 할 것은 87년 매출액에서 1,000억달러 이상을 찍은 기업은 일본의 은행들과 다이와증권을 제외하면 제너럴 모터스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20위까지 일본 기업이 아닌 기업이 4개 밖에 없다.(...) 게다가 압도적인 시가총액 1위 NTT의 시가총액은 2위 IBM의 3배가 넘는다. ㅎㄷㄷ 여담으로 버블 붕괴 이후 재편된 21세기 현재 일본의 은행들은 상태가 매우 견실한 편인데, 이는 버블이 터지면서 은행에 워낙 데인 것이 많았던 일본이 뼈를 깎는 개혁 와중에도 특히 은행권에 그 여력을 집중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저 표의 은행들은 다 어딘가와 합쳐져서현재 일본의 3대 메가방크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당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명했던 말이 "도쿄땅을 전부 팔면, 미국땅을 전부 살 수 있다."[8]

3 원인 및 배경

3.1 배경

기존의 부동산 불패신화도 있고 오일쇼크의 여파도 잦아들었던 차였고 일본의 수출도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만 갔지 결코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산시장이 활성화 되었고 기업들이 재테크로 돈을 벌었다는 소리가 나돌았고 이에 혹한 기업들과 중장년층들이 노후자산 마련을 위해 자산시장에 대거 뛰어들었다. 거기에 80년대 중반이후 성장률이 부진해지자 일본 정부가 금리 인하라는 (지금기준에서는) 최악의 카드를 꺼내들어 상황을 개선하려 하였고, 이에 기업들과 중장년층들이 이때다 싶어서 빚을 내서 자산시장에 더욱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당시의 버블은 광기가 되어 일본 경제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결국 일본 정부는 1989년 금리 인상이라는 악수를 두게 된다. 물론 금리 인하가 자산시장 버블의 요인이 되었던 만큼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 한 것이겠지만, 이것은 급격한 경착륙을 불러왔다. 이후로도 일본 정부는 불량 채권 회수에 미비하게 대처하면서 경기침체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중심인 생산가능인구가 1992년 정점에 도달한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자산거품붕괴로 인한 단발적이며 일시적 경기침체는 이후 구조적이며 장기화되었다.

4 진행과정

4.1 주식거품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재테크를 벌이고 있었는데, 1984년에 일본 대장성은 "투금계정"이라는 불법계정을 합법화함으로써 일본 기업들이 주식이나 채권 등에 돈을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일본 기업들은 자본이득세를 한 푼도 안 내고 일본 증권사들의 투금계정에 돈을 넣어두고 재테크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1980년대에 진입하면서 성장률이 둔화되자, 정부에선 일본은행을 윽박질러 기준금리를 5.00%에서 2.50%까지 떨어뜨리게 된다. 이는 은행들의 대출폭풍을 가져와서 엄청난 양의 돈들이 각종 자산들에 쏟아지기 시작했다.[9] 이는 일본 기업들의 재테크 수익을 높여주었고, 다시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면서 더 큰 재테크 수익을 갖다주는 순환구조가 형성되었다. 엄청난 악순환이었던 셈. 1985년 투금계정의 잔액은 9조엔이었으며, 1989년에는 40조 엔까지 팽창했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기업들의 현금흐름은 신경쓰지 않고, 재테크로 불어나는 자산만 보고 달려들었다. 이것도 일본 기업들의 수준을 부실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언제든지 흑자도산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주식의 밸류에이션 평가지표인 PER가 60을 넘었다.

일본 증시가 이렇게 폭등하자, 일본 정부에서는 NTT에 대한 민영화작업을 시작했는데, 공모가와 공모주식 수를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공모청약에 몰려들었으며, 상장 시초가가 120만엔이었다. 그럼에도 단 이틀만에 25%가 추가상승했고, 2주만에 정확히 두배인 240만엔까지 치솟았으며, 1989년 연말에는 400만엔 부근까지 치솟았다. 이쯤 되면 정말 개똥 막장이다[10]

당시엔 수백만엔대를 호가하는 NTT보다 주가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주식이 폭등하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뜰 것이라는 예상에 주가가 폭등하기도 하는 등 막장 증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4.2 부동산거품

일본에 작고 아담한집이 많아보이는 이유가 일본인들이 큰집보다 작은집에 살기를 좋아해서 그런것이 아니다

본 항목은 위에서 언급한 KBS스페셜 '욕망과 혼돈의 도쿄, 1991년'의 나레이션을 많이 차용했다. 버블붕괴 전후의 시대상

성층권을 넘어 중간권을 돌파해 우주 한복판을 날고 있었던 주식거품은 부동산버블로 합리화되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토지가격이 50배 정도 뛰어오르는 동안 소비자물가지수가 단 두 배 오르는 기현상[11]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일본 국민들에게 토지불패신화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 당시 일본 부동산버블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 같다면 기분 탓이다.

기준금리가 2.5%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은행들은 대출경쟁을 벌였다. A은행에서 8% 금리를 제시하면 옆 B은행에 가서 7.5% 대출을 제안받고, 다시 그 옆 C은행에서 7% 대출을 받아가며 토지 투기가 벌어졌다. 당시 토지가격의 200%까지 담보가 인정되었으며[12], 지속적으로 지가는 올라가기만 했다. 부동산 버블이라고 뉴스가 연일 나오는 현재 한국의 수도권 LTV는 50% 수준인 걸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어이 없는 담보율인지 계산이 나온다.

처음에 도쿄 중심가(미나토 구)에서부터 시작했던 부동산 광풍은 도쿄 전역을 넘어서 요코하마, 오사카, 나고야, 교토 등 일본 주요도시들로 확산되었다.[13] 1988년에 도쿄 지가는 1987년대비 3배가 폭등하기도 하는 등 이쪽도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었다. 역시 주식거품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니 더 많은 대출이 가능해져 계속 올라가는 악순환이었다. 당시엔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고[14][15] 이 당시 도쿄 황거 지가가 캘리포니아주 전체 지가와 맞먹었다. 물론 당시 미국은 1987년 검은 월요일 하루동안만 주가 22% 폭락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이건 역으로 따진다면 암만 월급이 오른다해도 집을 살려고 하는 데에는 택도 없어진다는 얘기나 마찬가지 때문에 당시에 내집 마련을 꿈꾸던[16] 당대 일본 월급쟁이들에게 상당한 재앙이었던지라 100년 만기대출같은 황당한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고, 집값이 싼곳에다가 집을 사기위한 직장인들로 인해서 지바현이나 사이타마현, 가나가와 현, 도쿄 중서부지역[17]의 인구가 급증하기도 했다.[18] 더군다나 공공임대아파트의 공급은 이에 훨씬 못미쳤기에 청약할려고 해도 경쟁률이 턱없이 높아서 청약같은건 꿈도 못꿨다는 슬픈 얘기도 있다.

당연히 이들 난개발 지역들도 땅값이 폭등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더 심각한 것은 버블이 꺼진 후에도 사이타마나 지바의 땅값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미 도쿄에서 한번 유출되기 시작한 인구가 도쿄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사실 영원히 못 돌아오게 된 거나 마찬가지지만 사이타마나 지바의 수요층으로 편입되어버린 것이다. 1981년 대비 1991년(버블 붕괴 시작할 때)의 사이타마나 지바 땅값은 3배~4배 정도 상승했는데, 2015년 현재까지도 그 수준에서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대기업 종사들은 보너스가 왕창 나오던 시절이었고 중소기업도 인력부족으로 봉급을 왕창 올렸던때인건 맞기 때문에 집을 사는것만 포기하면(...) 생활 자체는 풍족하기는 했다. 그래서 당대 일본 문화산업이 초호황이었던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는 의견도 있는데 암만 월급 잘받아서 돈모아봤자 집 사는데 턱도 없는 수준이니 집 사는 것에 신경끄고 문화생활이라도 즐길려는 젊은층이 많아서 그렇다나(...)

버블시기 도쿄 지가는 1981년 대비 정점(1990년)에서 전체적으로 5배 이상 폭등했지만 그 이상 폭등한 지역을 보면 도쿄 메트로 긴자선 연선을 타고 땅값이 폭등했다!!! 특히 아오야마나 신바시, 아사쿠사같은 동네는 무려 10배 이상 폭등, 아오야마는 15배나 폭등해서 신기록을 갈아치웠던 곳이다!

또한 이 시기에 민영화된 국철은 부채 청산을 위해 시오도메 화물역 부지(현재의 시오도메 시오사이트 부지)를 매각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지나치게 높은 토지가격으로 인해 과열 경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매각 보류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화물역 기능이 철거된지 10여년이 지난 97년에 들어서야 겨우 개발될 수 있었다.

2000년대 도쿄, 오사카 등 일본 대도시들의 주요 거점 스카이라인은 거의 이때 결정되었다.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 롯폰기, 우에노, 오다이바(이상 도쿄), 우메다, 난바, 텐노지, 쿄바시(이상 오사카), 나카교(교토), 미나토미라이(요코하마) 등 1990년대 이후에 완성을 본 일본 주요 대도시 상업지구들은 신주쿠, 시부야, 우메다, 난바 정도 빼면 원래 1981년까지만 해도 한숨 나오는 빈민가내지는 놀고 있는 공지였다. 지가 폭등으로 이 동네에 주거지구를 남겨두는 것보다 상업지구로 철저하게 재개발하는 것이 몇 배나 남는 장사가 되면서 부동산 개발 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했고, 이 부동산 회사들이 자체적인 도시계획을 짜고 부지들을 지방자치단체나 소유주로부터 싸그리 사들인 뒤 1986년부터 전부 오피스지구로 재개발하게 된 것.[19]

이에 따라 한국의 건설사들이 자체적인 도시개발 능력이 딸리는 것에 비해 버블 붕괴로부터 살아남은 일본 건설사들은 자체적인 도시개발 및 건축기술을 축적하여 1990년대 이후에도 전 세계적으로 신도시 개발 수주를 따내고 있다.[20] 파산해버린 부동산 업계들과 건설사들의 미분양 물량마저 살아남은 회사들이 인수하여 완공하게 된 것이 2000년대 이후의 일본의 스카이라인.

5 돈지랄

5.1 자국에서의 돈지랄

거품경제 시절에 대한 2ch의 회상.근데 사이트가 사이트인지라 신뢰성은 보장할 수 없다

돈지랄이 풍년인 시대였다. 외제차 수입이 급증해 벤츠 주력모델이던 W201 190E[21]는 너무 많이 보급돼 고(故)벤츠로 불리웠으며 BMW 3시리즈는 롯폰기 코롤라[22]란 별명이 붙었다. 호기로 술집 단골 아가씨에게 그 자리에서 가게 하나를 내준다는 말도 있었다.

프리터도 이 때 유행하고 있었다. 언제든 취업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새로운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 쯤으로 취급받았다. 애초에 면접만 받으러 가도, 교통비로 쓰라며 3만엔에서 5만엔까지 꽂아주는 시대였으니 면접만 보러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을 정도.

테마파크도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노동시간 최장국가중 하나였고[23] 당연히 당시에는 주당 44시간 노동제를 체택했기 때문에 야근은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에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건 당연지사였었는데 국내외에서도 여러모로 태클을 받는 일이 많아지자 1980년대 중반부터 차츰 노동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는데 때 마침 시기가 버블때랑 겹치게 되면서 여가시간도 늘어나고 돈도 넘치지 해서 테마파크붐이 일게 된것, 후나바시 시에는 일본 최대의 실내스키장인 자우스[24]가 생기는가 하면 미야자키현에는 한때 세계최대의 워터파크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오션 돔이 생겼다. 하우스텐보스도 비슷한 흐름을 타고 생겨났으며 그외에 여러 지방도시들에도 테마파크나 박물관같은데가 생겨났다. 물론 80년대초에 생긴 도쿄 디즈니랜드가 흥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일조한 듯 했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시망했고 일례로 오션돔도 거품이 꺼지더니 세계최대 워터파크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파리만 날리다 2000년대 중후반 망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25]] 더 안습인 건 탄광산업이 사양세로 접어들때 생명줄로 버블을 타고 볼거리들을 유치하려다 그 볼거리들마저 거품이 꺼지자 도시까지 끌고가서 망한 동네도 있다. 천조국 본점 후광 도쿄 디즈니랜드 정도만 제외하면 버블시대에 생긴 테마파크중 살아남은 곳이 있다고 해도 불황때문에 여전히 힘들다. 하우스텐보스조차 예전만 못하다고.

우후죽순으로 생겼던 대형시설들이 2010년대 이후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곳을 보자

굳이 장점을 꼽자면 도시권을 개발하고도 돈이 남다 보니 이 돈이 지방도시까지 퍼져서 어지간한 시골같은 데서도 우리나라 지방의 문화인프라와는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의 문화인프라 같은 게 많이 확충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구감소가 만회된건 아니다보니 지금 대가를 치르는중(...) 앞서 말한 테마파크의 난립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같은 맥락으로 현재 일본의 기업들이 아이디어(혹은 독창적인) 제품을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버블경제의 영향이라 분석하는 의견도 있다. 기업이 기술부문에 R&D를 투자하고도 남아도는 잉여의 돈으로 괴상한 제품을 만든것. 그시절 일본의 자동차, 제품등을 보면 괴랄한 것이 돈지랄로 보이는게 많다(...)

또 일본인들의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병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애정이 돈과 인력을 듬뿍 들인 매머드급으로 팽창한 것도 이 시기였다. 매년 2월 중순 혹은 하순에 도쿄의 실내체육관인 료고쿠 국기관에서 5000명(!)의 합창단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국기관 5천명의 제9 콘서트(1985~),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큰 이벤트 홀인 오사카성 홀에서 10000명(!!)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산토리 1만명의 제9(1983~), 히로시마 최대의 이벤트홀인 히로시마 선플라자에서 1000~2000명 규모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제9 히로시마(1985~) 같은 이벤트성 공연이 시작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이 떄의 영향으로 수많은 가수들이 교향곡 9번의 An Die Freude를 일본어로 커버했으며, 일본어 커버 버전 뿐만이 아니라 독일어 원곡 버전도 일본제 노래방 전기종에 수록되어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26]

5.2 해외에서도 돈지랄

일본의 부동산 광풍은 해외로 뻗어나가 미국의 록펠러 센터(미쓰비시가 매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일본인과 다른 미국인 투자자가 서로 파트너쉽을 체결해 매입)이나 콜럼비아 영화사(소니가 매입) 등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되려 미국에서 이거 우리 수출 살리려다 역관광당하는거 아니야?라는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역관광은 끝이 났지만.

조금 이르긴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약진에 대한 미국의 공포를 반영한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라이징 선"(1983년)이다. 당시 대세였던 웨슬리 스나입스, 티아 카리아, 숀 코네리가 출연하며 마이클 크라이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살인사건을 경찰이 해결하는 범죄 스릴러의 껍질을 쓰고는 있지만 실제 내용물은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재패노포비아로 가득한 사회물이다. 비단 이 작품 뿐만이 아니라 당시 헐리웃 영화 중 많은 수가 "미래에는 일본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블레이드 러너(1982년)에서는 LA의 길거리 음식으로 일본음식이 자연스럽게 팔리고 있으며, 가게 주인도 일본인이고, 전광판 광고로 기모노 입은 일본인이 나온다. 또한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도 미래에 기업은 일본 기업 외에는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시기 헐리우드 영화판은 은근히 반일 요소가 들어가고 일본인을 탐욕스러운 자본가로 묘사하는 영화 대사 및 캐릭터 등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게 로보캅 시리즈 3편이나 다이하드 1. 심지어는 이 당시 일본 자본의 해외 진출을 두고 치를 떨면서 록펠러 센터가 넘어갈 쯤 '일본이 제 2의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27]는 표현까지 나왔을 지경. 악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전부터 꾸준히 행해져 왔던 일본의 문화 홍보가 이와 맞물려서 영화 외에도 일본인과 일본 문화가 크든 작든 등장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가와 부동산이 뛰어오르면서 이를 담보로 한 대출이 급속도로 많아지면서 시중에 풀리는 돈이 급증하자, 넘쳐나는 돈을 써보기 위해 일본인들은 세계 명화(名畵)들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고흐해바라기를 3629만 달러에 낙찰해가는 등, 피카소르누아르를 비롯하여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오는 거의 모든 미술품들을 일본인들이 싹쓸이해갔다.

예술품은 경매가가 정해지면 그 경매가가 다음 경매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계속 거래가가 치솟을 수 있으며[28] 부를 과시하는 수단[29]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품이 꺼진 이후에 은행들이 담보로 압류한 미술품이나 조각품들이 원체 많아서 일부는 은행 창고에 그 가치도 인정받지 못한 채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30] 잠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버블 이후에 몇몇 명화들은 압류하고 있던 은행까지 도산해버려서 영영 찾을 수 없게 된 것들이 있다. 이런 작품이 대략 백여점 쯤 된다[31]. 대체 버블 시대 때 얼마나 쓸어간거냐

그 이후 1988년 초강대국소련을 제치고 미국 다음으로 가는 세계 2위 경제대국 타이틀을 달성하였다.[32]

다만 이 해외투자가 완전히 헛짓은 아니었는데, 막대한 해외투자 덕분에 일본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투자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국내의 버블에 미쳐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 대신 해외 투자에만 전념했더라면 현재 같은 꼴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문에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으나, 버블 붕괴 때와 같은 피해를 입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6 거품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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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2007년)닛케이 225

1990년과 1991년 수치에 주목해 보자. 그리고 일본 경제는 멸망했다

저는 그때 도쿄 증권 거래소의 지하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지금처럼 증권의 판매가 기계화되어 있지 않아서 '장서고 (badachi) "라고 사람들이 매매 교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거품의 절정기에 있었습니다. 가게의 개점 준비를 하고 10시 휴식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온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쁜 것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낮이 되어도 아무도 온 이는 없었습니다. 과연 이상하다고 생각해 주위 가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무서운 속도로 빵을 사더니 그대로 먹으면서. 무서운 스피드로 돌아갔습니다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오후 3시가 되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지친듯한 얼굴로 모두 입을 모아 "이제 일본은 끝났다." 라고 했습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일본의 버블이 끝났습니다. -어느 일본인

그러나, 드디어, 결국 1990년대 새해 첫날부터 주식에서 거품경제 붕괴의 전형적인 케이스를 타기 시작한다. 연말에는 연초 최고치의 절반수준으로 급감, 그리고 1990년대 후반에 IT버블로 잠깐동안 주가가 상승하나 싶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IT거품이 꺼지면서 그 절반으로 급하락. 국민들은 졸지에 알거지가 되고 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다. 정상적인 경제에서는 이러한 디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물론 저출산 고령화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본이 본격적으로 고령화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즉 심각한 디플레이션은 빼도박도 못하는 일본 거품 붕괴의 여파 때문인 것이 맞다.

이 시기 일본에 대해서는 <'버블로 고! 타임머신은 드럼 방식'>[33]이라는 바바 야스오 감독의 2007년 영화로 엿볼 수 있다.

7 각종 부정부패 사건

7.1 오노우에 누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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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입마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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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입마 완료
오노우에 누이(尾上縫)[34]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를 시작으로 레스토랑 여사장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산업은행으로부터 10억엔 어치의 채권을 구매한 것을 계기로 증권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레스토랑 가치의 1,500배에 달하는 3조 에 가까운 돈을 빌려 주식을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금융계의 큰손이 되었고, 그녀의 레스토랑에는 수 많은 금융계인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저택 앞에는 오후마다 금융계인사들이 서류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다음날 새벽 2시~3시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35] 사실, 이 사람들이 그녀의 저택에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두꺼비에게 매주 지내는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버블로 인한 전근대적인 정신세계로의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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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꺼비 의식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이 두꺼비 의식을 통해서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액수가 말이다. 에라이 차라리 파울이 더 믿음직스럽겠다

사람들이 모이면 누이는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원에 세워진 불상 앞에서 불경을 왼다. 누이 부인이 두꺼비 앞에 앉아서 신내림을 받게 되면, 그 순간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 신탁을 알려주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고 팔린 주식이 전성기인 1990년에는 무려 100억 달러[36] 에 달했다. 거품붕괴 이후, 오노우에 누이는 파산했으며, 가짜 예금증서로 첫 대출을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1991년 8월에 경찰에 체포됐으며, 그녀는 은행의 후원자들과 더불어 여러 해의 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녀의 파산으로 대출자들은 2,700억 엔의 돈을 잃었고, 일본산업은행장은 사퇴했으며, 은행 2곳이 도산했다.

7.2 리쿠르트 코스모스 사건

1988년 6월 가와사키의 하급 공무원 한 명이 외부에 양심고백을 함으로서 세상에 내막이 드러났다. 내부정보를 활용해 리쿠르트 코스모스[37] 주식을 매입하여 이익을 챙겼다고 시인하고 사임한 것이다. 당시 리쿠르트 회장이었던 에조에 히로마사가 자사 관련 입법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관료,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선물했던 것.[38] 이 사건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은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사임했으며, 대장성 장관도 물러났다.

거기다 타케시타 노보루 당시 일본총리도 리쿠르트 주식으로 1억 5,000만엔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이 몇달 뒤 드러났다.[39] 이 사건으로 타케시다 노보루 총리는 사퇴했고, 후임 우노 소스케도 불륜 혐의가 드러나며 자민당의 지지율이 급감, 소비세 신설문제와 함께 엮여 1989년 7월 23일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처참한 성적을 받게 된다.[40] 오죽하면 다음 해 치러질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중심의 야당연합이 압승하여 55년 체제가 끝장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면서 55년 체제 붕괴는 몇년 더 늦춰졌지만...

7.3 허영중(이토만) 사건

허영중 참조.

8 이후

Real_GDP_growth_rate_in_Japan_%281956-2008%29.png
(1956년~2008년)실질 GDP 성장률
파일:버블경제.jpg
(1985년~2013년)일본 정부부채 증가율

아직도 거품경제 침체의 늪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41] 이 시기를 통해 한국 경제는 일본 경제와의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199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일본이 2만 달러가 넘던 시절 한국은 5,000달러 중반 대 정도 수준이었다. 2014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약 28,700달러로 추산되는데 일본은 37,500달러 수준이며, 물가를 고려해보면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거기에 PPP로 평가하면 양국 소득격차는 더 줄어든다.(ppp기준만 따지자면 소국을 제외하고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한국 순이다 특히 이탈리아와 비교해보자면 200달러 정도밖에 차이안난다 아직 일본이나 영국, 프랑스와는 3,000달러 정도 차이가 난다 연봉 400만원 차이정도다.)

취업시장 역시 버블 붕괴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그래도 베이비붐(1971~1974년생) 세대가 취업을 준비할 때라 더 많은 일자리를 필요로 했는데 일자리가 왕창 줄었으니 스펙이 아무리 좋아봤자 취업문은 바늘구멍이었다.[42] 이 시기가 취업빙하기라 불리기도 했다. 이것이 일본 사회의 출산율 급감의 한 원인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43]

다만 일본의 대졸자 취업구조는 우리와 많이 달라서, 취업난의 개념도 좀 다르다. 일본은 대학 4학년 1학기가 시작하는 4월부터 공식적인 리크루팅이 시작되어(대기업의 경우는 설명회 등의 비공식적인 리크루팅을 그해 1월부터 시작한다.), 이르면 골든위크 전, 늦어도 졸업 전에 입사가 확정되는 시스템이다.물론 취활(就活-취직활동)은 3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다. 3학년 2학기가 되면 취직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빠른 경우 11월쯤부터 입사면접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년이 보장되며, 기업도 30년은 쓸 의도로 뽑기때문에, 일단 입사하면 이직이나 경력자 전직 등의 형태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간단히 말해 졸업식 전까지 결정된 회사가 이후 인생행로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졸업식까지 취직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이런 경우 정상적인 취업은 사실상 불가능.

한국처럼 휴학을 반복한다거나, 졸업을 미룬다거나, 졸업하고도 계속 도서관 다니며 취업준비하는 경우는 없다...기보다 불가능하다. 아주 작은 중소기업도 졸업 =신입사원이라는 공식이 박혀있다.[44] 따라서 졸업예정인 4학년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단 몇개월에 불과한 리쿠르트 시즌에 전인생이 걸린거나 마찬가지. 여기서 밀리거나 탈락하면 패자부활의 기회따위는 없다.[45]

그러다보니 누구나 채용오퍼를 서너개씩 받아서 느긋하게 골라가며 졸업준비하던 거품경제 시기와 비교해서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수치로는 일본의 고용시장은 다른 OECD국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안정적이다. 특히 청년실업율은 일부 유럽국가들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환상적으로 낮은 수준. 결국 눈높이 때문인 거 맞다.[46]물론 1980년대 호황기에 비해서 비정규직이나 블랙기업이 늘어나는 등 일자리의 질에서 보면 확실히 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건 한국을 비롯해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는 나라들이 여럿 있다.

실제로 2011년 기준 일본의 대학 졸업예정자의 취업확정율은 90%를 넘고, 잃어버린 20년 기간 중에도 90% 선이 깨진 것은 미국 금융위기가 폭발한 직후인 2009년 정도였다.

일본으로 넘어갈 듯 하던 세계경제의 패권이 다시 미국에 돌아오게 되자 미국에서도 엄청난 거품경제가 발생했는데, 빌 클린턴 시대의 IT버블이 그것. 다만 일본 거품경제 처럼 장기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IT버블 붕괴 이후 투기자본들이 대거 부동산으로 몰려들어가면서 부동산 거품이 발생했고, 정부에서 이를 방관하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며 일본 못지 않은 힘든 상황으로 된다. 이 사건으로 미국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아 국방비까지 크게 축소해야 했으며[47] 유럽도 남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거품경제 붕괴의 후유증을 톡톡히 겪으며[48] 아예 이웃마을이 힘들어져도 손 쓰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9 관련 문서

  1. 다만 아래에 적혀있듯이 집을 투기목적으로 구입하는 사람이 아닌 살려고 구입하는 사람은 예외긴 하다.(...)
  2. KBS스페셜 '욕망과 혼돈의 도쿄, 1991년'의 마지막 나레이션. 일본 거품경제에 대해 아주 잘 그린 다큐이다.
  3. 참고로 CF속 미소짓는 여주인공은 마츠모토 타카미(松本 孝美, 1965년 생). 연인으로 나온 남자는 일본계 미국인인 켄 브레니스(ケン・ブレニス).
  4. 첫 번째 광고의 경우는 80년대 한국에서도 거의 똑같이 리메이크되어 방영되었었다. CM송도 한국어 가사였는데 당시 국내 반응도 매우 좋았다. 코카콜라 내부 정책에 따라 일본의 원본을 정식으로 로컬라이징한 것이다.
  5. 원화로 환산하면 1경 6500조 1000억원, 달러화로 환산하면 14조 6600억 달러이다
  6. 일본에 대한 일종의 신뢰가 있었기에 터질 정도의 버블이 형성된 것이다. 그나마도 일본 국가 자체는 한바탕 뒤집어졌으나 엔화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 위용을 짐작하게 한다.
  7. 이때 IBM은 PC 산업으로 엄청나게 잘 나가고 있었으며 엑슨은 뭐 말 안해도 안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세운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이 반독점법 미사일을 맞고 인수분해되며 나온 석유회사인데 이중 제일 큰 회사이다. 현재는 그 다음으로 컸던 모빌을 인수해서 엑슨모빌이 되었고 시가총액으로 세계 2위의 회사이다. 매출액이 약 400.(...)
  8. 도쿄땅은 현재도 매우 지랄맞게 비싸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 가는 사람들 중에서 본가의 지원 없이 도쿄에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 그러나 현재는 뉴욕땅값이 도쿄땅값을 능가한다는 사실.
  9. 한편 은행의 고위간부와 기업가, 그리고 이를 감시해야할 관료들이 서로 인맥으로 묶여있는 일본의 특성 때문에 당시 일본의 은행들은 무분별하게 대출을 해주곤 했다.
  10. 위 50대기업 시가총액 표에서 1위인 NTT항목을 보라. 2위와는 아예 자리수부터 다른, 몇 배 이상 큰 것을 알 수 있다.
  11. 일반적으로 토지가격과 물가지수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같이 움직인다. 지가가 50배 올랐는데 물가는 두배밖에 안 올랐다는 것은 땅값의 실질가치가 고스란히 25배 올랐다는 소리다.(...)
  12. 시장가격 10억짜리 땅을 가지고 있으면 20억까지 대출해준다는 소리. 이런 미친 물론 은행들이 '언젠간 두배가 될거니까 그정도쯤 쳐줘도 됨ㅎㅎ'하는 정신나간 생각에서 이런 담보율을 설정했다고 단순화시킬 수는 없지만(타 은행과의 경쟁, 실제 파산 비율 등도 고려해야 한다), 요는 그만큼 생각이 없었다는 자신이 있었다는 거다.
  13. 단, 농촌지역 제외. 솔직히 후쿠오카까지만 가도 당시 소득 대비해 큰 거품이 끼었다고 보기 어렵게 된다.
  14. 당시 토지 가격을 보자면, 미나토 구는 평당 1,900만엔, 스기나미 구는 350만엔을 기록했다. 오사카는 평당 200만엔, 나고야는 85만엔, 후쿠오카는 45만엔까지 치솟았다. 긴자는 평당 1억엔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2015년에 와서는 별로 비싸다는 생각이 안 들게 된다. 런던의 벨그라비아, 나이츠브리지만 해도 평당 최소 2,500만엔은 하기 때문에... 단 물가상승률을 무시하지 말자. 우리는 25~30년 전 가격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30년 동안 지속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었기 때문에 실질 가치는 명목상의 1900만엔보다 훨씬 높았다.
  15. 미나토구 중에서도 아자부나 아오야마 같은 곳은 평당 5000만엔에 육박했다. (출처:상기한 KBS스페셜)
  16. 물론 집값이 왕창 오르기전에 대도시 지역에 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꿀을 연신 빨아댔었다. 월급이 많이 오른건 물론이고 이런 저런 이유로 보너스나 수당이 왕창 나왔을때인데다가 거기에다가 집을 처분만 하면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거금을 손에 쥘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당시 고등학생이 세뱃돈으로 30만엔씩이나 받았다는 얘기도 심심치않게 들려올 정도(물론 당연히 케바케기는 했다.)라 한국에서도 이런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17. 타마지역, 이 지역은 한국으로 친다면 1970-80년대 강남이나 노원구 비슷한 지역이라고 볼수있다.
  18. 하지만 버블 붕괴후엔 상황이 반전되어서 상속을 받았다가 거액의 세금을 무는 바람에(이 경우에는 버블 시기에 재산신고해서 서류상 재산은 빠방했는데 막상 상속받을 시기가 되자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고, 설사 부동산이 팔리더라도 엄청나게 손해를 보기 때문에 세금감당도 못할 지경이 되면서 결국 파산하게 되는 것) 파산하는 일이 잦아서서 상속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웃지못할 일도 많았다고 한다.
  19. 한국과는 다른 것이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이면 공공기관에서 토지수용 후 전면개발한다. 공공의 수용이므로 감정가의 2배 이내에서 수용가가 결정된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공공의 수용이 아닌 민간이 토지를 다 사야 하므로 개중에 몇몇 알박기 등으로 인해 토지가가 무작정 올라갈 수 있다.
  20. 한국의 건설사가 자체적인 도시개발 능력이 딸리는 이유는 일개 건설사가 자체적인 도시개발을 할 수 없기 때문. LH나 지방공사가 도시개발을 하고 건설사는 단지 시공만 한다.
  21. 현재 팔리는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의 전신이다. 당시 상대는 BMW의 3시리즈.
  22. 토요타의 준중형 세단. 한국에서 흔히 쓰는 "강남 쏘나타"와 비슷한 표현이다.
  23. 연간 노동시간이 2,200시간 정도를 찍어줬었다. 참고로 OECD 노동시간 2위라는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이 2016년 2113시간이다.
  24. 지금은 망해서 이케아 일본 1호점이 생겼다. 그러나 이 이케아는 엄밀히 말해서 최초의 일본 1호점은 아니다. 일본에서 한번 실패를 겪은뒤 2000년대에 재진출해서 리부트로 1호점을 다시 세웠는데 공교롭게도 자우스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25.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이에대한 언급이 나온다.
  26. 물론 버블 당시의 일인지라 버블시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현재의 젊은 층들은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27. 공교롭게도 록펠러 센터를 매입한 미쓰비시는 2차대전 당시 대표적인 일본의 군수기업이었다.
  28. 물론 거품 꺼진 뒤에는 예술품 가격도 폭락했다.
  29. 당시 돈 좀 있다 싶은 부동산 회사는 입구부터 명화를 사장실까지 걸어놨다고 한다. 미국인이 사업차 와서 이를 보고 뒷담화를 까기도 했다고 한다.(...)
  30. 미술품 특성상 제대로 보존처리를 받지 못하면 아무래도 손상이 쉽게 가게 마련이고, 이런 작품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봤을 때 과연 이전의 가치가 제대로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31. 보통 이렇게 소실된 미술품은 모조품 제작 등으로 전시회에 나오긴 하는데, 전시회 큐레이터가 '이는 진품이 아니며 진품은 소실되었다'고 말해주는 작품들이 있다.
  32. 물론 당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유가하락, 체르노빌 사건 등의 영향으로 경제가 침체되었을 때긴 했다.
  33. 타임머신 타고 17년 전으로 가서 일본 경제를 살린다는 코미디 영화.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 배우들인 아베 히로시히로스에 료코가 주연을 맡았다.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몇몇 있지만 당시 일본의 모습을 잘 나타냈기에 버블시대를 느끼고 싶다면 한번쯤 볼만한 작품이다. 풍자적인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깔려있다.
  34. 이명으로는 오사카의 흑녀, 거품 부인(Bubble lady).
  35. 그녀의 저택에 들어간 인물들 중에는 일본산업은행 총재와 같은 거물도 있었으며, 이외에도 JP모건 일본 지사, 야마이치 증권 등과 같이 내로라하는 증권사에서도 직원을 파견했다.
  36. 한화로 따지면 약 11조 8,750억원이다.
  37. 일본 굴지의 구인구직정보 회사인 리쿠르트의 자회사. 역시나 부동산사업을 하던 곳이다.
  38. 당시 주식을 받았던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총리, NTT 회장,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회장 등 약 50명이었다.
  39. 당시 총리를 대신해서 현금을 받은 비서는 자살했다.
  40. 그 이전에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자민당 참패! 타이틀이 뜨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차에 개선의석의 1/3(126석/ 총의석 252석)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총의석에서도 과반에 18석씩 미달하는 상황이 되니 자민당 입장에선 이보다 처참할 수 없는 선거결과였던 것.
  41. 다만 거품 붕괴의 후유증이 오래 간 만큼, 그 충격도 서서히 나타나서 1995년까지는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위협론이 아직 힘을 얻던 시기이기도 했고.
  42. 그 시기에 한 명문대생이 취직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서 전철역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적도 있다.
  43. 덧붙여서 베이비붐 에코 세대 중 상당수가 나이가 들어서도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경우가 상당하기에 소위 말하는 프리터족이나 니트족이 되어서 현재까지 일본경제에 큰 짐이 되어서 일본 경제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겨주었으며 또한 이들이 아이들을 매우 적게 출산하였기에(실제로 이들 세대가 출산정령기가 된 1990년대 후반기부터 2000년대까지가 일본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시기였다.) 미래에까지 큰 영향을 준셈이나 마찬가지이다.
  44. 이를 일본에서는 신졸(新卒)이라 부른다
  45. 물론 그 대신에 일본은 사회 전반적으로 다른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에 한국보다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긴 하다. 졸업 이후 뭔가 예술을 하고 싶다거나 사회운동을 하고 싶어서 취직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나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식으로 취업한 회사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회사보다는 조금 크리에이티브한 일자리, 혹은 그만큼 이직이 잦은 일자리들이다. 소위 말하는 '리크루트 수트'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의 인생과는 많이 다른 것.
  46. 고용시장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들만 보더라도 고용률이 70%를 넘으며(평균 65% 수준. 그 이하도 수두룩하다) 비정규직 비중도 평균 수준(근데 이건 비정규직의 정의가 기관마다 학자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청년 고용률도 정확히 평균.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낫다. 다만 가계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는데 이는 가구구조의 변화, 고령화가 제일 큰 원인이지 노동시장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OECD/중위 가처분 소득 참고. 물론 국가 경제의 문제라고 본다면 맞지만.
  47. 이 때문에 투자 대비 수익이 안 나오는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손 떼고, 중국 견제에 전념하고 있다. 아니, 그 이상 할 여력 자체가 없다.
  48. 물론 아이슬란드처럼 재빨리 극복한 나라도 있긴하지만 규모가 규모인지라...
  49. 이 때를 컨셉으로 잡은(...) 시리즈
  50. 이 때가 배경인 만화
  51. 이 극장판이 제작된건 잃어버린 10년이 끝나기 전이었고 주 스토리는 '잃어버린 10년'에 실망해 상상하던 '꿈의 21세기'와는 다른 모습이 펼쳐졌기에 20세기가 그리웠던 어른들이 다시 20세기로 추억을 재현하려 하나 노하라 일가가 20세기에 취해서 미래를 포기하기보단 가족과 함께 21세기에서 살기 위한 사투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의 회상 또한 이 극장판의 명장면, 아니 일본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회상이기에 더욱 깊은 감명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극장판은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19위에 꼽히는 힘을 보여주었다.
  52. 신격호가 도쿄 땅 50평 팔아서 세웠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물론 실제로는 일본 롯데의 주력 계열사들을 모두 동원한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