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봉

全道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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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복무대한민국 해병대
기간1966년 ~ 1998년
임관해병학교 35기[1]
최종계급중장
최종보직해병대사령관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사령관
21대 이상무22대 전도봉23대 이갑진

1 소개

대한민국군인.

2 생애

1942년 10월 10일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2]에서 태어났다. 종교개신교(장로교)이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고 1966년에 졸업하여 해병대 사관후보생(해병 35기)에 입대하였다. 임관 후에 소위로 교육을 받던 중에 1966년 8월 8일에 발생한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때라 참여자 대부분은 주동자를 제외하곤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갔고 그 역시 3개월만에 재입교하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임관은 동기가 아닌 후배들인 38기와 하였다. 1968년청룡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소위나 대위 때 당한 징계나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약점 등으로 진급이 어려울 거라 해병대 장교단 내에선 예상했지만 결국 살아남아 1996년해병대사령관까지 영전한다. 당시 국방장관은 1966년 습격사건 당시 공군비행학교[3]당직사령이었던 이양호였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베트남전 당시 죄수들로 구성된 수인소대를 이끌었다고 하더라...

1974년에는 옹진호 사건으로 두 번째로 헌병대에 가기도 했다.[4] 하지만 동정 여론으로 한 달 보름 만에 복귀했다. 나중에 1984년에 자신이 수감됐던 헌병대의 헌병대장을 맡았다.전역 후에는 환경운동을 하고 있다.

1981년 이후로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유일한 해병대사령관이다.

3 여담

부인 류명자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인 전진용과 셋째인 전진윤은 해병대 으로 복무하였고 둘째인 전진서는 아버지처럼 연세대를 나와 해병소위로 임관하였다.

월남전 파병시 사회의 전과자나 해병대에서 영창 경험이 있던 해병들을 모와 수인소대를 만들었다. 워낙 지원자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영창에있던 범죄자들을 끌어 왔다고 한다. 여기에 소대장을 해병대 공군비행장 습격사건의 주범으로 퇴학당하며 깡(???)을 인정 받은 전도봉을 장교 부족 때문에 복직시키고 대신 파병 보내어 소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수인출신 해병들은 소대장 말 대신에 자신들의 두목을 지시에만 따랐다.
월남전 파병시 사회의 전과자나 해병대에서 영창 경험이 있던 해병들을 모와 수인소대를 만들었다. 워낙 지원자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영창에있던 범죄자들을 끌어 왔다고 한다. 여기에 소대장을 해병대 공군비행장 습격사건의 주범으로 퇴학당하며 깡을 인정 받은 전도봉을 장교 부족 때문에 복직시키고 대신 파병 보내어 소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수인출신 해병들은 소대장 말 대신에 자신들의 두목을 지시에만 따랐다. 결국 참다 못한 전도봉이 두목을 영창으로 보냈다. 그러자 해병들이 수류탄 핀을 뽑아들며 두목을 다시 데려 오라고 난동을 피웠다고 한다. 이에 전도봉은 자신의 말빨과 인격으로 그들을 엉엉~ 울도록 감복 시키며 수류탄 핀을 다시 꼽게 했고 이후 부대를 잘 다스렸다는 일화. 물론 의심이 가는 일화이긴 하다.

수인소대, 형벌부대식으로 묘사를 하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사회 "문제아"들을 군대로 싹 보내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흉악범들이 아니고 비교적 죄가 무겁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자면 동내 건달들이나 정부에게는 골칫거리들이었던 학생 운동가들이었다.[5] 여기서 "군대 갈래, 아니면 깜방갈래"라는 반강제식으로 해병대에 착출되는 가능성도 높았고 실제로 옛날에는 징집기수도 존재했다. 하지만 월남에 파병가는 것은 오히려 지원자가 넘쳐서 매번 지원하면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였다. [6] 물론 월남에간 지원자들 중에 "전과"나 "기록"이 있는 군인들이 있었는건 사실이지만 지원자가 넘치는데 거기서 수인소대를 따로 만들어 모았다는거는 의심해야할 내용이다.[7] 그리고 수기록에는 자신이 "깡"으로 인정받아서 운좋게 파병가는 걸로 끝났다는식으로 적혀있는데, 육군같은 다 부대에서도 장교가 부족해서인지 밀수나 비교적 가벼운 범죄로 걸린 장교들은 형무소 대신 월남 복무로 형을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8]

임기 중, 현 해병대 병들이 겨울의 행사나 휴가외박근무복 위에 입는 코트#를 제정토록 했다.[9] 이 때문에, 해병대원들이 한 때 이 코트를 전도봉 코트라 부르기도 했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동영상이 있다. 출처 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시대별 해병대의 모습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는 사료이다.

1993년 계룡대근무지원단장(준장) 시절에 군내 행사로 개최된 전군노래자랑에 참가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관련영상 나와서 개똥벌레를 불렀다.[10] 뒤에서 박수치는 해병들이 인상적이다.

해병대 예비역들 이야기를 보면 제1해병사단 군수참모(대령) 시절에 실수한 병의 책임을 물어 선임하사관을 땅에 묻었다는 얘기도 있다. 나중에 꺼내줬다고. 관련글 증언자가 있는 걸로 보아 어느 정도는 실화인 듯하다. 김포시에서 제2해병사단 예하 대대장 하던 시절에 권총사건도 유명하다는데 아는 해병 있으면 추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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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사령관 시절, 예하 장병들에게 FM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대놓고 복장 규정을 무시하고 다녔다. 전투복에 철제 계급장 부착은 금지되어 있음에도 이를 달았고, 1998년부터 육군과 해병대 간부는 전투모에 철제 모장 부착은 허용됐으나 전도봉 장군은 육군 및 해병대용이 아닌 해군 개리슨 모에 다는 작은 크기의 계급장을 다는 위규를 저질렀다.

해병대에서 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이러한 기담들도 있긴 하지만 해사 출신이 아니라서 해군 수뇌부와 부담없이 각을 세울 수 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11] 그는 같은 지역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과 친하게 지냈고 비해사 출신인 그가 등용된 배경을 많은 이들이 이런 인맥도 작용했다고 보았다. 어쨌거나 비해사 출신으로 해병대의 전력강화 등에 직접적으로 발언할 기회가 많았고 이탓에 직속상관인 해군참모총장 안병태 제독이나 유삼남 제독과 그리 사이가 좋질 못 했다고 한다. 관련글[12]

2002년 12월 16일, 대법원 3부(주심 변재승 대법관)로부터 뇌물약속죄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 벌금 500만원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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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명찰 해병대 아니랄까봐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 이름

2014년 지방선거 당시에 새누리당 소속으로 거제시장에 나가려고 예비후보 등록하였으나 여론조사 경선에서 권민호 후보에게 밀렸다. 권민호 후보는 49.6%를 득표하여 2위인 유승화 전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16%), 전도봉 전 해병대사령관(6%)을 제쳐 후보가 되었고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현재에는 이재오, 최병국(1942) 등과 함께 늘푸른한국당 창당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1.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으로 퇴교당했다가 재입교한 탓에 38기로 재임관하였다.
  2. 출생 당시에는 통영군 관할이었다.
  3. 현재는 제5공중기동비행단이다. 다만 이는 주둔지를 얘기하는 것이고 역사를 계승한 부대는 사천에 위치한 제3훈련비행단이다.
  4.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인 옹진호에 휴가 나가는 해병대원을 태우기로 했는데 민간인만 태우고 가려고 하자 해군 고속정이 해병대원을 태우지 않음 호위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배가 돌아온다. 빡돌았던 해병대원들은 선장과 배의 경찰을 구타했고 배가 인천에 도착하자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5. 문제인은 특전사로 착출 된것으로 유명하다.
  6. 사병 기준으로 파병가면 미국으로부터 약 20~40불을 매달 지급받았으며 지금 돈으로 치면 엄청난 돈이다.
  7. 실제로 백마부대에서 복무한 참전용사와 청룡부대 출신 참전용사 말에 의하면 사회에 기록이 있는 사람이 월남에 온적은 있지만 그들만 따로 모아 부대를 만들었다는건 처음 들어 본다고 한다. 특히 청룡부대는 여단규모라 파월 해병대중 수인소대같은 파격적인 것이 존재했다면 모를리가 없다.
  8. 물론 "비교적"이다, 밀수도 큰 범죄 맞다.
  9. 그 이전에는 근무복 위에도 야전상의(실잠바)를 입어야 했다. 그런데 저 코트 부대피복이라 가끔 자대에 자기 사이즈 없으면 지금도 야상 입어야 한다. 게다가 지금은 야상 위장무늬 옷이라 보기 더 이상하다. 현재는 해병1191기부터 개인피복으로 바뀌어 신병훈련 때 지급된다.
  10. 사실 이거 갖고 장군, 제독들 사이에선 체통 떨어진다고 말이 많았다. 가곡도 있고 군가도 있고 그런데 유행가를 부르냐는 것이었는데, 문민정부로 넘어가던 시점에서 보자면 탈권위적이고 민간에 호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꽤 시의적절했던 일이라 정부 쪽에선 좋게 봤다고 한다.
  11. 일단 통상 해군참모총장이 상관에다 계급도 높고 무엇보다 해사 선배이기에 해사 출신 해병대사령관은 해참총장과 대놓고 반목하기는 부담스럽다.
  12. 이 글을 보면 해병들이 해병대 창설을 한 손원일 제독이나 해병대 복제 지원을 한 정옥근 제독을 높게 사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