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현

(캐넌히터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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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같이 등장한 LG 트윈스 시절 오오 꽃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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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시절. 자신의 현역 마지막 경기인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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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1군 타격코치 시절. 오오 꽃중년

이름김재현(金宰炫 / Jae-Hyeon Kim)
생년월일1975년 10월 2일[1]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광진구[2]
학력서울성동초 - 신일중 - 신일고
포지션우익수 좌익수[3] 지명타자[4]
투타좌투좌타
신체조건177cm, 79kg
프로입단1994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LG)
소속팀LG 트윈스 (1994~2004)
SK 와이번스 (2005~2010)
지도자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5~2016)
응원가LG 시절 : 동요《모두다 뛰놀자》[5]
SK 시절 : 뚜띠 - 짝짝짝 [6] [7]

1994년1998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2005년 한국프로야구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자
보유 기록
1998년 한국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MVP
2007년 한국시리즈 MVP
2005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출루율
SK 와이번스 역대 주장
강성우
(2005)
김재현
(2006)
김원형
(2007~2008)[8]
SK 와이번스 역대 주장
박경완
(2009)
김재현
(2010)
이호준
(2011)

1 개요

캐넌 히터

데뷔하자마자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고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장식한, 그야말로 시작과 끝이 화려했던 선수.

LG 트윈스, SK 와이번스의 외야수. 등번호는 LG 시절부터 7번을 달았다.

엄청나게 빠른 배트 스피드와 호쾌한 타격 폼[9]으로 캐넌 히터란 별명을 깆고 있었다. 이 별명은 그의 타구가 마치 캐넌처럼 힘이 넘치는 것에서 비롯된다.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는 궤적이 아닌, 낮고 강하게 관중석을 향해 날아가는 라인 드라이브성 홈런이 전매특허였다. 일명 캐넌포.

훌륭한 선구안으로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 높기 때문에 "사륜안"이란 별명도 있다. 은퇴한 시점에서 통산 사사구 역대 3위.

타석에 들어설 때 나오는 흥겨운 트롯 스타일의 홈런 송이 유명하다.

2 선수 경력

2.1 혜성같은 데뷔,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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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타격 솜씨 봤지?

1994년 2월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졸 자유계약으로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입단 과정에서 오키나와 007 작전으로 불리는 유명한 비화가 있는데, 1993년 말 김재현이 오키나와에 국제대회가 있어 대표로 차출되었고, 당시 연세대학교 입학이 내정된 김재현을 잡기 위해 LG 프런트가 급히 오키나와로 건너가 시한이 만료되기 직전에[10] 계약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전부터 대학과 프로 팀 간에 선수 스카웃 문제를 두고 갈등이 있었는데 그것이 더 심해졌고, 입단 TO를 채우기 위해 친구이자 신일고 동창인 포수 조인성연세대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데뷔 시즌에 20-20을 달성하면서[11][12]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94 시즌은 LG 역사상 최고의 신인 대박을 친 해인데, 그 해 김재현과 함께 입단한 선수들이 1픽 유격수 유지현[13]과 2차 6라운더 1루수 서용빈.

2년차가 되던 1995년에 기량 하락을 겪었고, 1997년에는 신장염으로 한 시즌을 통으로 날린데다 2002년~2003 시즌 초반 고관절 부상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2002년에는 당시 거의 커리어 하이 수준의 성적을 찍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고관절 부상으로 인해 시즌 도중 하차했으나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KS 엔트리에 들어갔다. 대구에서 열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2루타성 타격을 하고 타점을 올리면서도 절뚝거리면서 1루로 간신히 걸어나가 팬들을 감동시킨 드라마틱한 장면이 있다.

그가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병규가 등장하여 맹활약을 펼치면서 이병규에게 가려지고[14], 다행히 고관절 수술을 받아 치료까지 마쳤지만, FA 자격을 취득한 2004년 말 FA 협상에서 구단 측이 고관절 부상 관련 '각서'[15]를 제시하자 LG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SK 와이번스에 이적하였다. LG 트윈스는 보상 선수로 SK 내야수 안재만을 받았다.

2.2 캐넌의 재기,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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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이치로?

SK로 이적한 후 팀의 중심타선을 맡아 2005 시즌 타율 4위, 출루율 1위를 기록하면서 7년 만에 다시 골든글러브 지명타자를 받는 등 맹활약하였다.

2007년에는 2할에도 못 미치는 극심한 부진에 빠져 1군보다는 2군에 있는 기간이 더 길었으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 한국시리즈에서 당시 두산 투수 오마이 숄더 임레기의 말을 따면 "던질 곳이 없어ㅠㅠ"라 할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2007년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2007년 아시아 시리즈 당시 SK 와이번스주니치 드래곤즈의 경기 영상. 볼 한 개를 골라내고 다음에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온 공을 귀신같은 속도로 때려서 홈런을 만들었다. 물론 캐스터와 해설자들은 극찬. 하지만 그 뒤에 들어온 이호준은...

2009년에는 주장이었던 박경완의 부상으로 새 주장으로 취임. 주장직을 달고 나서부터 방망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16] 2009년 막판 SK 연승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으며, 특히 9월 8일 기아전에서는 정근우의 빈볼 시비로 분위기가 흉흉한 가운데 타석에 들어서서 좌측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파울홈런을 쳤지만 야구계의 속설인 '파울 다음은 삼진'을 무색하게 만드는 만루홈런을 터뜨려 1,600안타-2,500루타의 대기록을 만들어냈고, 7회 고의사구로 개인통산 1,000사사구도 달성. 이날만 큰 기록 3개를 세우며 녹슬지 않은 노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2.3 은퇴

2009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2010 시즌 종료 후 은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워낙에 뛰어난 선수인데다 당시에도 기량이 많이 죽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팬들 모두가 그의 은퇴를 막고 싶어했지만, 본인의 의지가 너무도 확고하여 많은 SK 팬들은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야구 경기 종료 후 수훈선수로 발탁될 때마다 아나운서들이 은퇴를 미룰 생각은 없느냐고 항상 물었지만 그 때마다 그럴 생각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17]

2010년 10월 15일 인천 문학 경기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3타수 2안타 1볼넷 3타점을 기록했고, 팀이 스코어 5:9로 이겨서 김재현은 이날의 MVP로 선정되었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7타수 2안타 2볼넷 4타점 타율&장타율 .286, 출루율 .444를 기록했고, 팀이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한 덕분에 화려하게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2010년 12월 27일, "SK 동료들이 나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깨워주었다"는 말과 함께 코치 수업을 받은 뒤 SK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허나 한화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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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은퇴식을 2011년 4월 중에 가질 예정이었지만, 빡빡한 코치 연수 때문에 계속 미뤄졌다. 2011년 6월 25일 문학 LG전, 드디어 은퇴식 날짜가 되긴 했는데 경기가 우천 취소 되면서 그의 은퇴식도 동시에 빗물과 함께 쓸려가게 되었다. 그의 바람이 문학 LG전에서의 은퇴였기에 일부러 LG전에 은퇴식을 치르기로 계획했던 터라 다음날인 26일날로 은퇴식을 미루었지만 장마로 경기가 연이어 취소되면서 물건너 갔다. 어쩔 수 없이 9월 이후에 치뤄질 재편성 잔여경기[18] 중 주말 문학 LG전에서 은퇴식을 하려고 했으나 잔여 경기들이 전부 평일 편성, 결국 은퇴식을 치룬 날은 10월 1일 삼성전이었다. 영감님도 진즉 팀을 떠난 터라, SK팬들이나 2002년을 두사람과 함께한 LG팬들 입장에선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김재현은 은퇴와 관련해 LG 트윈스 공식 홈페이지 팬 커뮤니티 '쌍둥이마당'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김재현입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컴퓨터앞에 앉았는데,
무슨말부터 시작해야할지.....
올 한해 저희 에스케이 와이번스와 마지막 은퇴를 앞둔 김재현 이라는 야구선수를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고개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야구 선수 김재현은 더 이상 보실 수 없겠지만
제가 17년 동안 사랑한 야구를 그리고 그 세월동안 보잘 것 없는 저를 응원해주시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몇 자 글로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문득 돌이켜보니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데뷔 첫해 야구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우승을 하게 되어 너무도 많은 사랑을 팬
여러분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엘지트윈스에서 꼬박 10년을 함께했습니다.
고관절 수술을 하게 되면서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을 수도 있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야구를 아프다는 핑계로 초라하게 떠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오려고.
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믿음과 저를 기다려주신 팬 분께
과연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돌아 왔을 때 팬 여러분이 제 등번호 7번을 들고 잘 돌아왔다고 응원해주시는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제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전보다 훨씬 야구를 절실하게 책임감 있게 소중하게 여기며 운동하게 된 것이... 정말 소중했습니다. 매 타석 타석마다....
정들었던 친정팀을 떠나 에스케이와이번스로 이적 했을때도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낯선 팀에 와서 적응하기 쉬울까 걱정도 했었지만 따뜻하게 환영해주신 우리 에스케이 와이번스 팬 여러분들과 부족한 저를 따라서 인천까지 응원을 와 주셨던 모든 팬 덕분에 다시 마음을 잡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엘지에 있을 때나 에스케이에 있을 때나 팬 여러분들은 똑같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십니다. 친정팀이라는 추억과 이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에스케이와이번스의 나의 소중한 동료들과 아름다운 팬 여러분들께 무어라 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왜 그만두려하느냐 다시 아픈 것 아니냐고 걱정하시는데, 건강에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이 체력으로는 몇 년 더 뛰고도 남을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시점이 그리고 좋은 기억으로 떠날 수 있는 시점이 지금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야구선수 김재현으로 지낸 그 순간을 아마 평생 동안 그리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야구선수 김재현을 오래 오래 기억해주시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 할 것입니다.
이제 이런 글을 남길 일도 없을 것 같아 너무 길게 글을 남긴 것 같네요.
두서 없는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 순간 까지 저를 응원해주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준 우리 선수들과 팬 여러분께 다시한번 깊은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3 해설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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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시즌부터 SBS ESPN에서 해설가로 일하게 되었다. 초보 해설자이면서도 꽤나 달변가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일단은 호평. 그리고 5월 17일 롯데 자이언츠SK 와이번스의 경기가 SBS 중계로 잡히면서 처음으로 지상파 해설을 맡게 된다.

평가가 상당히 엇갈리는 해설 중 하나인데, 일단 목소리 톤은 상당히 좋다는 평. 해설가 데뷔 첫해임에도 긍정적인 평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경기 중에 화장실에서 선수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 썰을 자주 푼다. 그리고 출신은 속일 수 없는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실책 또는 아쉬운 플레이가 나왔을 경우 해설 중에 한숨을 쉬는 모습이 포착되며 SK에도 우호적인 해설을 많이 하는 편이라 LG나 SK의 상대가 된 팀의 팬들은 꺼리는 반응을 보이고, 특히 롯데 팬들은 김재현 해설을 굉장히 싫어한다. 차라리 양준혁이 낫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또한 어법에 안 맞는 말을 자주 구사하여 답답하다는 평도 많다.
말도 안 되는 비문 표현이 많아서 해설자로는 최악이라는 게 대세.그 욕 먹던 해설자인 진필중, 염종석보다도 평가가 안 좋다.

4 지도자 시절

4.1 한화 이글스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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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하자마자 화보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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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1일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 부임했다. 코치로서 첫 발을 뗀 것이니만큼 팀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김성근 감독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한만큼 감독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현역 시절 깔끔한 타격폼과 빠른 뱃 스피드 위주의 타격 스타일을 보였으며, 은퇴 기념으로 구단이 보내주는 몇 개월짜리 해외 나들이가 아닌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장기 연수를 받을 정도로 열성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코치로서 한화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 칰무원은 안 되겠지

사람들은 더 이상 김재현의 해설을 안 들어도 된다는 것에 기뻐하였고(...) LG 트윈스 팬들은 이상훈에 이어 왜 또 레전드 출신 코치를 타팀에 빼앗기냐고 프런트에 불만을 늘어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두산 2군 투수코치가 된 야생마와 한화 코치로 온 캐넌 사이의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LG의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모두 6668587667 초반에 LG에서 SK로 이적하여 은퇴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같은 시기에 원 소속 팀이 아닌, 완전 다른 팀의 코치로 프로 현장에 복귀했다는 것도 일치한다. 허나 이상훈잠실 라이벌 팀 2군에서 코치 역량을 검증받은 후 친정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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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지옥훈련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 훈련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모습. 그롬 헬스크림? 아니 코난 오브라이언 아냐 오세훈

2016년 시즌 후 사임했다.기사 일본인 코치 3명도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에 비판을 표하며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보아, 김재현도 비슷한 이유로 결별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임 후 삼성 라이온즈가 그에게 김한수 타격코치의 감독 승격에 따라 공석이 된 1군 타격코치직을 제의했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어서 영입이 힘들다는 기사가 떴다.

5 이야깃거리

5.1 고관절 수술과 지명타자 전향

고관절 부상[19]으로 선수 생명이 끝났다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재활에 성공한 케이스. 그러나 그 후 원래 포지션인 외야수 수비는 거의 보기 힘들게 되었다. 고관절 무혈성 괴사의 경우 수술에 성공한다 해도 일반인이라면 모르지만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무리하면 또 재수술을 할 수도 있었다고 카더라. 김재현이 그나마 2010 시즌까지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지명타자로 출장했기 때문이었다. 수비를 봤다면 그보다 훨씬 일찍 은퇴할 수도 있었다. 고관절 수술 이후 도루 능력을 거의 잃어버린 것도 아쉬운 점이다. 원래 매년 20도루 이상은 가능했던 준족이었다.

하지만 김재현이라면 역시 타격에 메리트가 있는 선수였고, 한창 LG 시절에도 외야 수비력은 거의 팬들의 눈을 썩게 만드는 수준의 수비력이었던만큼 고관절 수술 이후 지명타자로 전념한 건 본인을 위해서도 잘 한 일이긴 하다. 다만 외야 수비 연습은 팀내 다른 외야수들과 함께 꾸준히 받았다고 한다. 2009 시즌에 1루 대수비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1루수 플라이를 놓치는 실수를 저지른 뒤에, 이제 수비 연습도 안끼워준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 해 군산에서 벌어진 KIA와의 3연전에서 좌익수로 교체 출장한 적이 있고, 2010 시즌에도 한번 좌익수로 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유격수를 보던 김연훈이 좌익수 수비 위치까지 달려가 유격수 플라이를 잡아 냈는데 그때 김재현의 표정이 오묘했다.

FA로 SK 와이번스에 입단하고 2005년부터 2010년 시즌 종료 후에 은퇴하기까지 6년 동안 수비에 나간 적은 드물었다. 2005년과 2006년은 수비 출장 기록은 없었으며, 교체로 인한 대수비로 2007년 중견수 1경기 2이닝, 2008년 우익수로 2경기 11이닝, 2009년 1루수와 좌익수로 각각 4경기 7이닝과 2경기 2이닝, 2010년 1루수와 좌익수로 각각 1경기 1이닝씩 지명타자로 전업하고 24이닝만 수비에 나섰다.

고관절 괴사의 원인[20] 중에 약물이 있기 때문에 약물 복용이 의심되는 선수 중 하나로 지목받지만, 신빙성이 좀 부족한 점들이 약물을 복용할 경우 타자가 가장 크게 차이나는 점은 장타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김재현의 홈런 커리어 하이는 신인 때다. 약물을 복용하는 경우 많은 경우 살이 찌는데 김재현은 40살 먹어도 야구선수치곤 날씬했다. 거기에 더하여 소속팀 SK는 아시아 시리즈에 두 번 참여하면서 도핑테스트를 받았기 때문에 KBO 팀 중에선 약물에서 그나마 깨끗한 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냥 호사가들의 의혹일 뿐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고 정황 증거로 따져보면 약물을 안 했다가 맞기 때문에 음모론 수준.

오히려 이 고관절 부상에 가장 유력한 요인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소시적 문란한 사생활(…)이다. 1990년대 후반 LG에서 심재학, 최향남과 더불어서 가장 잘 노는 선수였던 만큼 술, 나이트 등 목격담도 수두룩하며 이 고관절 악화가 과다한 음주 등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약물보다 오히려 가능성은 높다고 하겠다. 오죽하면 당시 한 집에서 같이 살던 부인의 아버지, 즉 장인어른[21]이 김재현이 하도 놀러다녀서 차 키를 압수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가끔 구리 시내에서 LG 2군 경기장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타면, 나이 지긋하신 기사분 중에 젊을 때 김재현이 워커힐에서 술이 쩔어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데려다줬다는 증언도 나왔을 정도. 실제로 김재현 본인도 2000년대 들어서 김성근 감독과 그 당시 LG로 트레이드됐었던 양준혁을 만나고 많은 걸 배웠고 양준혁도 그 때 김재현한테 좀 배웠어야 했다 그 이후로 실제로 LG에서의 정신적 리더로 발돋움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다.[22]

그리고 김재현의 고관절 부상과 지명타자 전업은 앞에서도 말했듯 이병규에게 밀리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SK에서도 플래툰 시스템으로 묶이면서 누적 스탯을 상당히 손해봐야 했다.

5.2 기타

  • 잘 알려지지 않은 흑역사로, 재활 중이던 2003년에 음주측정 거부로 입건된 적이 있다.[23] 문제는, 그전에 이미(1995년) 음주운전하다가 중앙선 침범해서 추돌 사고를 낸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사람을 치지 않아서 다행이기 망정이지 한번 그런 사고를 내고 또다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쉴드의 여지가 없는 악질 범죄다. 1995년 음주운전 당시에는 사고가 난 5일 뒤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올스타전에 출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같이 올스타전에 출장하기로 예정된 홍현우는 폭행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지만, 한화 이글스정경훈[24]으로 대체되었었다. 뭐야 이거.부자 버프?
  • 그의 은퇴 후 코치 전향에 대해 여러 모로 말이 많았다. 일단 그가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룬 LG 팬들은 은근히 그가 LG로 돌아와서 코치를 해 줬으면 하는 모습을 보였다.그런데 전술한 각서 파동 때문에 관계가 심히 의심된다 게다가 야생마같이 LG 프런트와 화해가 있으면 가능하겠지만, 서용빈이나 야생마라면 몰라도 꾀돌이와는 김재현과 견원지간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SK 팬들은 당연히 SK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김재현은 은퇴 후 해설자가 되었다가 한화 이글스의 코치가 되었다가 2년만 있다가 한화 코치자리에서 물러났다.
  • SK 선수였던 이진영LG로 옮긴 후 SK와의 홈 경기 때 SK 선수들에게 찾아와 "LG 선수들은 팬서비스를 위해 항상 펜을 들고 다녀. 사인해 줘야 하거든."이라고 말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김재현이 "야, 팬들에게 싸인이 아니라 승리를 줘라."는 말을 하여 이진영을 한큐에 데꿀멍시킨 적이 있다. 이는 OBS 불타는 그라운드에 방송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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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데! 싸인볼 더 좋아하는데! 지는 경기에 면역된 팬들은 싸인 더 좋아한다 카더라

  • 쓴소리의 대가. 워낙 쓴소리를 잘 해서, 앞서 말한 이진영을 단번에 데꿀멍시킨 승리 발언은 뭐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똑 부러진 성격 때문에 친정인 LG 프런트에 제대로 찍혔을 지도.
  • 여담이지만 목소리가 대단히 좋은 편이다. 운동선수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목소리가 꽤 좋다. 해설자로서 첫 시즌을 보냈을 때 목소리만 호평받는 이유 역시 거북하지 않게 나오는 목소리 덕분일 것이다.
  • 해설자 시절 정말 말도 안되는 비문 표현이 많아서 당당히 최악의 해설자로 꼽혔다. 특히 김정준과 더블해설이라도 하는 날에는 늘 포털사이트 중계창 댓글에는 둘의 해설을 욕하는 댓글이 폭발했었다(...)
  • 조인성과 신일중, 신일고 동문이며 둘이서 신일고 야구부의 26연승을 이끌었다. 여담으로 조인성은 중학교 때부터 앉아쏴를 시전했다고 증언했다. 사실 '앉아쏴'는 당시 신일중 감독이었던 양승호의 작품인데, 당시 조인성이 비만이라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해서 앉아쏴를 가르쳤다고 한다(...)
  • 워낙 LG와 SK 양 팀에서 쌓은 스탯이 출중한지라 마구마구 게임에서 어느쪽의 레전드로 나오는지가 논란거리였는데 결국은 LG 레전드로 나왔다. 아무래도 출장연차나 누적 스탯에서 LG 시절이 앞섰기 때문이었던 듯. 더구나 홈런 커리어 하이가 94년과 99년의 21홈런이고 통산 타율이 3할에 육박하며 장타율이 4할 6푼인 전형적인 교타자를 카드 팔아먹기 위해서 파워형으로 내놓았다. 역시 뻥구뻥구 덕분에 LG올, M-L올, LG 세트덱 유저들에게 거의 필수 카드가 돼버려서 김재현 레전드카드는 한때 300만 거니가 넘는 고가에 거래되기도 했다. 뭐 살 사람은 다 산 지금은 싸다. 이후 본래 가장 출전이 많았던 좌익수로의 듀얼 포지션도 추가.
2014년 듀얼 레전드 추가로 SK 레전드 카드도 추가 되었다. 능력과 포지션 모두 기존의 레전드와 동일.
  • 박동희 기자와 인터뷰가 올라왔다. 여기서 그는 2007 시즌이 끝나고 자신을 트레이드해 줄 것을 김성근 감독에게 직접 요청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막연히 김성근 감독 부임 초기에 김성근 감독과 약간의 마찰이 있는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김재현의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과 매우 심각할 정도의 수준의 불화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물론 김재현이 마음을 다잡고 야구에 전념하여 2007년 한국시리즈 MVP까지 탔지만. 그리고 인터뷰 말미에서 2009년 최정을 패전투수로 만든 625 대첩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후반기 막판에 연승 신기록을 세우고도 정규시즌 1위를 못한 것을 지적했다. 그 경기가 1년 농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경기임을 역설하면서 김성근 감독의 실책임을 시사하는 뉘앙스를 풍겼다.하지만 그 다음 해 삼성과 한국 시리즈를 보고 그런 야구를 하고싶어 지도자의길을 걷겠다고 한 점 불화에도 불구하고 제일 존경하는 지도자중 하나로 뽑은 점을 보면 애증이 맞는말 하지만 은퇴선수인지라 이 인터뷰는 묻혔다! 그리고 2015년, 정작 김재현은 한화 이글스 1군 코치로 김성근 밑에 들어가 있다가 2016 시즌 종료 후 사임하며 김성근 감독과 결별했다.
  • 컴투스 프로야구 2012의 02년 레전드 카드로 올라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진이 SK때 사진이다.
  • '나는 야구감독이다'에서는 05김재현이 SK덱 코레기(...)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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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야생마가 LG로 돌아오게 되면서 쥐무원 노찬엽, 서용빈 꺼지고 캐넌의 복귀 역시 기다리는 LG 팬들이 많다. 지금까지도. 근데 진짜로 김성근과 결별하면서 2016 시즌 후 계약 만료도 아니고 스스로 한화의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LG 프런트야생마처럼 김재현을 다시 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사이가 나쁘다는 그 꾀돌이는 지금도 LG에 있고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볼넷장타율출루율
1994LG 트윈스125463.289134
(4위)
26
(5위)
321
(3위)
80
(2위)
81
(3위)
2155.495
(4위)
.376
1995116381.255971931556551345.438.348
1996117414.283117200116057749.411.372
19971군 기록 없음
1998122482.29514231
(4위)
3167670847.471.364
1999121453.287130171219475854.468.371
2000131464.30814332
(4위)
2116283681.457.415
(5위)
2001126428.325139291861811088.453.443
(4위)
200298296.334991401661501154.544.462
200350143.308448062113017.490.392
2004120373.300112183146256166.477.415
연도소속팀경기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볼넷장타율출루율
2005SK 와이번스120400.315
(4위)
126170197763280.500.445
(1위)
2006109356.28710216185142576.404.418
(2위)
200784204.1964011051926443.324.337
2008108297.31092173106046459.488.426
2009112289.30187180105145863.467.433
2010111267.28877170104841752.464.404
통산17시즌17705710.294168131020201939884115931
(5위)
.461.402
역대수상
연도수상내용
1994년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
1998년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
연도수상내용
2005년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
2007년한국시리즈 MVP 수상
  1. 실제로는 1974년생이라고 한다. 기사 참조.
  2. 당시엔 성동구였다.
  3. 마구마구의 영향으로 그가 전성기때 우익수를 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2002년 고관절 대퇴부 부상을 입기 전의 그의 외야 포지션 출장 비중은 좌익수가 압도적이었으며, 실제로 우익수를 본 적은 양준혁이 LG에 있던 시절인 2000년 ~ 2001년 도합 2년이 전부다. 참고로 데뷔 당시에는 중견수로 키우려고 하였으나 타구 판단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부실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좌익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1990년대 LG 트윈스의 홈경기가 열린 잠실에는 유독 3루쪽 외야가 먼저 자리가 찼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좌익수 수비를 나섰던 김재현 때문이라고 한다. 흠좀무.
  4. 사실 2002 시즌 부상을 당하기 이전에도 지명타자로서의 출장이 높긴 했다. 그 이유는 2002년에 데뷔한, 그리고 LG 역사상 마지막 풀 타임 신인 타자가 좌익수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중견수로는 이병규가, 우익수로는 매니 마르티네스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김재현이 외야에 설 자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5. 날려라 날려라 김재현↘~ 날려라 날려라 김재현↗~ 날려라 날려라 김재현↘~ 날려라 날려라 김재현~
  6. 따단딴단 따~라라라 김재현! 따단딴단 따~라라라 김재현! 날려라 안타! 날려라 홈런! 캐!넌!히!터!김!재!현! 짠짠짠짠 짠짠짠짠 짠짠짠짠 홈!런! 짠짠짠짠 짠짠짠짠 짠짠짠짠 홈!런!
  7. 이 응원가는 양성우가 물려받았다.SK 소속은 아니지만
  8. 원래 2008년 주장에는 이호준이 선임되었으나 시즌 초반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사실상 김원형이 주장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9. 코나미컵에서 일본 해설자는 김재현의 타격 폼을 보면서 '가장 완벽하다'라고 극찬했을 정도.
  10. 이 당시에는 고졸 선수는 지명 절차 없이 무한정 계약이 가능했고, 대신 일정한 날짜 내에서만 계약할 수 있었다.
  11. 재미있는 건 김재현의 20홈런을 허용한 상대 투수가 SK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이호준이었다는 사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투수였던 이호준은 이후 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했다. 이호준이 FA 계약할 당시 김재현은 농담조로 이호준에게 "내가 널 타자로 전향시킨(?) 값은 받아야겠다."라고 얘기했다 카더라. 그래서였을까. 김재현의 은퇴식에 시구를 맡은 선수 역시 이호준이었다.
  12. 현재까지도 KBO 리그 역대 최연소 20-20 가입 기록이다. 당시 김재현의 나이는 만 18세 11개월 5일
  13. 하지만 입단 동기임에도 유지현과는 사이가 원래 그리 좋지 못한 데다가, LG 시절 선수협 창단 때 크게 틀어져서 지금까지도 사이가 안 좋다고 한다.
  14. 통산 성적 등을 따져도 이병규에게 홈런 빼고 다 밀리며, 또한 국가대표 등의 커리어에서도 이병규가 앞선다. 다만 우승은 김재현이 4회로 앞서지만, 이병규는 주니치에 있을 때 일본시리즈 우승이 있다.
  15. 요약하자면 경기 중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도 구단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내용.이런 상황에서 임수혁같은 케이스가 나오면....? 생명의 위험을 느낀 김재현은 당연히 SK로 이적해 버렸다. 잊지 않겠다 쌍둥이 그리고 트윈스는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16. 아이러니하게도 2009년 SK 막판 연승 중심에 김재현이 있다면, 2009년 기아의 돌풍속에도 김상현이 있었는데 이 두 선수 다 LG에서 놓아준 선수들. WBC에서 대활약해 준 KIA의 이용규까지 포함시키면 LG의 속은 더 쓰리다. 기아나 SK의 팬들은 '아리가또 LG', '믿고쓰는 쌍둥이표'하며 감사 아닌 감사를 내비치지만 2009년 경기 중 배터리 다툼, 2009년을 7위로 마무리한 LG 팬들의 마음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겠다.
  17. 인터뷰에서 항상 떠밀리 듯이 은퇴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여력이 있을 때 멋있게 은퇴하는 걸 꿈꿨다고 한다. 자신을 통해 이런 전례를 남기면 노장 선수들에 대한 대우나 시선도 달라질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역시 레전드는 달리 레전드가 아닌 듯.
  18. 8월 2일~4일 문학 LG전은 코치 연수 스케줄과 맞지 않아 불가능.
  19. 정확한 병명은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
  20. 고관절 괴사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지목되지만 정확한 원인은 잘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한다. 스테로이드를 접할 이유가 없는 일반인들 중에서도 고관절 괴사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21. 참고로 김재현의 장인은 코스닥 상장기업이자 동국제강 제1협력업체인 기전산업의 김종원 회장. 클라스가 남다르다!
  22. 클로저 이상용의 등장인물인 안준민이 이 시기의 김재현을 모티브로 했다는 추측이 있다.
  23. 당시 김재현의 차량엔 코치였던 정삼흠이 동승하고 있었는데, 안그래도 무능한 코치로 팬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던 정삼흠은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서 시즌 후 LG의 코치에서 잘렸다.
  24. 그리고 정경훈미스터 올스타가 되었다. 감독 추천으로 뽑혔으나 하필 그 날 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서 선발 출전을 못한 권준헌(당시 태평양의 유일한 3할 타자)만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