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

(삼당합당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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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위 도표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얼마 안 남겨둔 2003년 가을에 나왔다.
그 탓에 아직 창당을 준비중이던 열린우리당이 "국민참여통합신당"으로 표기되어 있다. 95년에 창당된 통합민주당이 통일민주당으로 잘못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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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창당연에서 술잔을 나누어 든 3당 합당의 중심인물 4인방. 좌측부터 박태준,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진행 순서1990년: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과 과정
1민주정의당(1981년)통일민주당(1987년)신민주공화당(1987년)
2민주자유당(1990년)



당시 보도 뉴스. 앵커는 엄기영.

1 개요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에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초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사건. 본격 운동장이 기울어지게 된 시발점이자 새누리당의 생일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로 인해 13대 총선을 통해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이 순식간에 여대야소로 뒤바뀌었고, 평화민주당이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1] 그리고 호남 VS PK VS TK VS 충청도의 4자 구도로 이어져 왔던 국내의 지역대결 구도가 3당 합당 후에는 호남 VS 比호남으로 단순화돼 호남이 본격적으로 고립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2 배경

1987년 12월 16일 치뤄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양김(김대중 & 김영삼)의 분열에 의해, 군사 독재 정권의 후신인 민주정의당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례민주당 1석[2], 무소속 9석이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면서 여소야대 국회가 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 분위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장 제도권 정치인 국회 운영에서도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던 제1당 그러니까 집권당이 독식하던 국회 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처음 만들어지고[3] 모든 법률안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된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가진 결과 어떤 정치세력도 혼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집권당의 날치기와 이를 막기 위한 야당의 국회점거농성, 일명 국회공성전이 유일하게 없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각자의 원칙과 주장을 목청높여 외치면서도, 공개적으로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민주주의 정치 본연의 모습이 살아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소야대는 한국정치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5.18 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제5공화국의 권력형 비리 등 과거 군사정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국회 청문회가 TV생중계가 되면서 전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4] 곧바로 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로 수십여명이 구속되거나, 정계에서 강제 퇴출되었으며, 전두환은 백담사로 귀양을 떠나야 했다. 이와 함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국민성금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으며, KBSMBC는 그동안 독재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것을 반성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간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자신들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적 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전교조가 탄생했고,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했으며,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운동이 태동했다. 학생운동과 재야에선 금기시되던 통일 논의에 불씨를 당기면서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 여러 건의 무단 방북 사건이 일어났다. 즉,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억압에 의해서 감춰져 있던 사회 각 분야의 모순들이 일제히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당 그리고 보수 언론 등 기존의 주류 기득권 세력들은 이런 현실을 매우 불안하게 보았다. 정점에 선 독재자를 중심으로 마치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모습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여론을 살피고 야당과 타협하면서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현실은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이며, 유약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는 다양한 목소리는 각 분야에서 군대식으로 조직되있던 기존 질서를 흔들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위엄이 사라졌다, 정부가 사회 불만 세력에게 질질 끌려다닌다, 국회가 경제 발목을 잡고 있다, 공권력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등의 이야기가 계속 나왔으며, 노태우물태우라는 조롱섞인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지금 몇몇 보수언론이 하는 소리랑도 묘하게 비슷한데?

노태우민정당은 이런 현실을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한 방에 판을 바꿀만한 해결책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합당을 통한 정계 대개편이었다. 사실 1992년 차기 총선과 대선까지 지역 대립에 기초한 4당 구도가 계속 갈 거라고 본 사람은 드물었다. 4당 체제에 만족하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위의 문단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당의 불만과 위기 의식에 대해 길게 서술하였지만, 나머지 야 3당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선 김대중평화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호남과 수도권 일부[5]만으로는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6]

김영삼통일민주당은 제2야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총선에서 평민당에 뒤진 것이 온건 이미지 때문에 고정 야당표를 놓쳐서라고 판단해서 한동안은 강경한 대여선명투쟁[7]을 외치다가, 큰 성과가 없자 유신 본당이라 자처하던 김종필한테 접근해서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합당 냄새를 피우는 등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평생을 권력의 핵심부에서 보내던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은 말년의 야당 생활이 달갑지가 않았다. 거기에 3공, 4공을 거치며 내각제가 옳다는 신념을 가지게 돼 내각제를 외치고 있었지만, 확고부동한 직선제 지지 여론을 넘을 수가 없었다.[8]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온갖 종류의 정계 개편 시나리오가 떠돌아 다니고 있었고, 언론에서도 수시로 기사화하고 있었다.[9][10][11] 1989년 12월에는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노태우 대통령 탈당, 민정당 해체, 양당제 정계 개편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다가, 당 내분으로 사퇴하는 소동까지 일어났을 정도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뒤에...

총선이 여소야대로 끝나고 난뒤 정권 핵심부에서 나온 첫 번째 방안은 민주정의당(129석)[12]신민주공화당(35석)의 합당이었다. 이러면 164석으로 국회 과반수를 훨씬 뛰어넘는 숫자이며, 두 당의 뿌리와 정체성이 비슷하기 때문에[13] 합당 후에도 별다른 잡음이 나오지 않고, TK충청권을 중심으로 보수층을 확실하게 끌어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거기에 권력의 단맛을 아는 김종필신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이 합당에 적극적일 것이란 점도 충분히 예상가능했다.[14] 그러나 합당에 반발해서 김대중김영삼이 다시 손을 잡고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을 합쳐 거대한 단일 야당을 만들 위험성이 있었으며, 박정희 & 전두환의 피를 이어받은 두 당이 합치면 그 당시 국민들이 염증을 내는 군바리 색채가 오히려 강화돼서 다음 선거에서 잘못하면 중도표를 모두 잃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민주정의당 + 신민주공화당 시나리오는 유야무야 그냥 묻혀져 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여소야대에 시달리던 노태우 정권 핵심부에선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1989년에 봄을 기점으로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하는 정계개편론이 불거진다. 이때 놀랍게도 노태우 정권은 김대중이 이끌던 평화민주당과의 합당을 구상했다. 이 합당이 성공하면 무엇보다도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국민대통합이란 걸출한 명분을 내걸 수 있고, 일거에 군사 독재 정권의 색채를 지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의석수도 199석으로 단독 개헌선인 200석에 단 1석 모자라는 초거대 여당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평민당 내에서 뚜렷하게 진보적 목소리를 내고 있던 재야 출신들은 당연히 이탈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평민당은 민주 보수 성향의 야당으로 호남에 기반한 당 주류 세력들은 진보 좌파성향과 제법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당시 평민당김대중 총재는 제1야당으로 책임감 있는 정치 세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지와 다르게 상당히 온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공개적으로 평민당은 '온건 중도 정당'[15][16]이라면서 급진적인 학생 운동, 전투적인 노동 운동과 선을 그었다.

참고로 이런 현상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하던 시절에는 독재정권에 반하는 좌우 세력들이 모두 대동단결하여 소위 범민주세력을 형성해서 민주 vs 반민주(독재) 구도를 형성했는데, 이걸 무리하게 현재에 적용하면서 반민주->보수, 민주->진보로 기계적으로 이해하면서 벌어진 착각으로 인한 현상 중 하나라고 보면 편하다. 애초에 반민주가 보수라는건 진정한 보수를 욕보이는거다 가짜 보수가 판치는 나라 물론 급진적이거나 전투적이라는게 어떤 배타나 폭력성향을 말한다면 그건 진보나 좌파랑은 거리가 멀지만, 실제로 군사정권 시기 범민주진영의 다수는 반공주의, 민족주의, 사회적으론 진보적이나 경제적으론 시장경제를 신뢰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으며 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려는 좌파(사회주의, 사민주의 등 포함) 세력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제도권 정치 바깥에 존재하던 소수의 좌파세력이 비판적 지지론을 내걸고 활동하였을 뿐이다. 게다가 일단 한국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 있었기 때문에 좌파 정당이 클래야 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소수나마 60~70년대 내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 있던 통일사회당이나 40~50년대부터 활동하면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던 혁신계 인사들이 몇 있긴 했지만, 법과 권력의 통제하에 이들은 성장할 수 없었고, 툭하면 잡혀갔다(...). 80년대에 새로이 등장한 NL, PD 계열을 비롯한 소위 운동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철저히 제도권 밖에서 활동했다.

여튼 이런 친정부적인 스탠스를 보여준 평민당은 노태우와의 영수 회담을 통해서 중간평가 공약[17] 철회를 주장[18]하였으며, 1989년 10월에는 12.12 군사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의문사 진상규명, 5공 비리에 대한 사법 처리, 방송민주화 등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국회 증언[19] 단 한 가지만을 조건으로 5공 청산 완료에 합의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 일관된 김대중의 온건 행보를 보고 노태우 정권의 핵심부는 충분히 합당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의 핵심이었던 박철언 정무장관이 김원기 원내총무를 통해서 합당을 처음 제안했고, 이후에도 여러차례 제안이 들어갔다. 1989년 겨울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김대중 총재에게 다시 제의하기도 했다.[20] 당시 합당의 조건으로 신당의 총재직은 물론이거니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에 대한 전권그럼 전 가카는?안습을 주는 방안까지 나왔을 정도로 노태우 정권은 합당을 통한 정계 개편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계속되는 노태우의 합당 제안에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키는 일이고 정치 윤리를 망치는 일이다”, "끝까지 야당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고 싶지, 합당을 통해서 정권을 잡고 싶지 않다"라면서 거절해버렸다.

한편 제2야당으로 전락해 숙명의 라이벌인 김대중과의 대권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했던 김영삼은 초기엔 김종필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평민당이 점점 부각되면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대립각과 선명성을 부각하던 김영삼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데다, 1989년 말 동해시 보궐선거에서 가신인 서석재 의원이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를 매수하려 한 혐의를 받아[21]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김영삼노태우 측으로부터 합당 제의가 오자 회심의 승부수로 이를 수락했고, 원래부터 민정당과 비슷한 성향이었던 김종필 역시 합류하여 1990년 1월 새해 벽두에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공개하게 되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을 민주자유당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슷하게 보수대연합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자유민주당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추정된다.[22] 이들은 합당 당시 개헌 가능 의석수인 200석을 훨씬 넘겼으므로 "내각제 개헌"을 비밀리에 약속했고, 각서까지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이 맡았고, 대통령을 대신하여 당 운영을 책임지는 대표 최고위원은 김영삼이 맡았다. 그리고 김종필민정당의 대표였던 박태준은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로써 노태우 정권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한 여당을 갖게 되었고, 합당을 거부한 김대중평화민주당만이 유일한 야당으로 남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지역주의 구도호남 VS PK VS TK VS 충청도의 4자 구도에서 호남 VS 非호남 양자 구도로 변하게 된다.

3 3당 합당 과정의 이탈자


(동영상의 6분 55초 부터)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항의하는 노무현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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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24] - 3당 합당에 반대하던 당시 노무현 초선의원.

삼당합당 발표 직후에는 통일민주당의 거의 모든 의원들과 원외인사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심지어 상도동계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최형우(정치인)조차 공개적으로 "나는 안간다"면서 합당거부를 선언하고 다른 합당거부파 인사들과 함께 새로운 야당 창당을 준비했을 정도. 이런거 보면 협상이 진짜 극비리에 이루어지긴 한 모양. 그러나 김영삼이 직접 1:1 설득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김영삼의 간곡한 설득에 최형우가 결국 마음을 바꿔서 합당동참을 선언했고, 그 뒤를 이어 시간이 갈수록 김영삼의 설득에 넘어가는 인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결국 통일민주당의 거의 절대 다수가 합당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민정당과의 합당은 야합이라면서 끝까지 이를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김상현(1935),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등이었는데 이들은 합당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과 더불어 민주당(1990년)을 창당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렀다.

김종필이 이끌던 신민주공화당에서도 대전직할시 동구 갑 선거구의 초선 김현 의원이 민자당 합류를 거부하였다. 그는 무소속으로 있다가, 상술한 꼬마민주당이 신민주연합당[25]과 합당하여 민주당(1991년)을 창당하자,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뜬금없지만 무소속이던 정몽준, 유한열[26] 의원은 삼당합당에 동참해서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

4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내 계파들의 권력투쟁

일각에서는 김영삼이 3당 합당 이후 여당으로서 정치 여로가 열리고 대통령도 수월하게 당선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절대 수월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주장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이냐면 당시 민자당내 최대 계파는 김영삼의 민주계가 아닌 노태우의 민정계였다. 3당 합당은 사실 사상과 기반이 전혀 다른 세력들이 어쩌다보니까 이해관계가 맞게 되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고로 김영삼이 이런 당내의 헤게모니를 장악해나가는 과정은 그동안 박정희 & 전두환과 싸우면서 겪었던 격렬한 정치 투쟁을 이젠 같은 당 안에서 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김영삼은 합당 당시 의원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한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27]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밀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치며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했다.

사실 이런 김영삼의 탈당 협박은 김영삼 본인에게도 큰 모험이었는데, 군사독재정권과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김영삼은 이미 민주진영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꽤 큰 출혈을 입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탈당을 한다 한들 옛 동지였던 민주화 세력에게서 예전만큼의 호응을 얻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막말로 오로지 대통령 하나 보고 그 모든 비난 감수해가며 3당 합당한건데 다시 김대중과 합당을 한들 명분에서 밀리는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먼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민주자유당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김영삼의 이런 행보에 박철언 등을 포함한 민정계는 강력히 반발했고 일부 민정계 강경파는 차라리 분당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낮은 정권 지지율과 함께 마땅한 대권후보도 없었고 김영삼이 김대중과 합당이라도 해서 혹여나 정권교체가 되면 정치보복이 두려웠던 노태우 정권 측은 결국 김영삼에 끌려다니며 그에게 총재직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삼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 재임 기간 도중 진행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사실상 패배했지만, 김영삼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자신을 흔드는 비민주계에게 전가하면서 오히려 여론을 반전시켰다. 이전까지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를 지명제로 하여 자신을 대표로 지명할 것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협박요구해왔으나, 총선 패배를 기회로 이용해 여론을 자신에게 돌려놓은 후 경선을 통한 대통령 후보 선출이라는 타협점을 마련한다.

그리하여 민정계인 이종찬김영삼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했고, 김영삼은 압도적인 표차로 이종찬을 누르고 민자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이에 평소 김영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이종찬, 김복동, 박철언, 이자헌, 유수호[28], 장경우 등을 비롯한 일부 민정계 의원들은 탈당했으나, 대부분의 민정계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당에 남았다.

이 탈당자들은 후에 현대그룹 명예 회장인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하거나 새한국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때 부산의 시민사회 비YS세력도 국민당에 합류했으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한편, 이러한 계파간 갈등을 두고 일부에선 당시 문화방송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정말 적절한 네이밍 센스다

시사 팟캐스트 방송인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김영삼민주자유당의 실권을 잡아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1시간 1분 5초부터 시작.

5 영향

3당 합당은 보수정당들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보수대연합"이라고도 하고, 또한 PK 지역을 대변하는 통일민주당과 TK 지역을 대변하는 민정당이 합당했다는 점에서 "영남 대연합" 혹은 "호남 고립화"라고도 한다.

문제는 이후 한국정치의 구태라고 볼 수 있는 지역구도가 고착화되었다. 안 그래도 성행하던 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키고, 지역주의에 있어서 호남을 거의 따돌리기 수준으로 내몰았다는 점에서 한국정치발전에 매우 악영향을 끼쳤다.[29] 한국 정치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하여 보수 우위의 구도로 만들어진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3당 합당이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호남고립화가 심화되고 경남과 경북의 연결고리는 강화되었다. 그동안은 오로지 민주vs독재 구도로만 가다보니 경제문제나 북한문제에 관해선 집권여당과 야당이 그렇게 눈에 띄는 큰 차이를 보이진 않았지만, 삼당합당을 통해 여당은 좀 더 오른쪽으로, 야당은 좀 더 왼쪽으로 가서 본격적인 보혁구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민자당 vs 민주당의 구도는 지금까지 큰 틀에선 깨지지 않고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이후 DJ는 집권을 위해 충청-경북권과 보수세력에 기반했던 JP의 자유민주연합과 손을 잡아야 했고(DJP연합), 이는 자민련과 밀접했던 박태준 등의 TK세력도 포함되었다.(DJT연합) 그로서 김대중과 경남 민주화 세력과의 연대 방안은 폐기되었고,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이뤄진 TK인사 등용과(노태우 계열의 김중권 등) 경제적 지원(지역기업 금융혜택, 대구 밀라노 프로젝트)[30]도 결과적으론 지역감정 완화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제16대 국회의원 선거가 대표적). 결국 DJ집권 및 보수세력과의 연정도 3당 합당 이후의 구도를 변화시키진 못했다. 이후 대구는 이명박 정권 하에서 의료도시 등을 추진하는 쪽으로 나가고 그 과정에서 강원도의 의료도시를 가져가 강원도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것이 강원도 도지사가 계속 민주당에서 나오는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2000년대 참여정부 집권 이후 김해 인근 봉하마을이 고향이던 노무현 대통령 및 주변의 PK(부울경) 세력들은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당내 호남 세력을 약화시키고, 인사와 예산에서 부산경남 일대에 어느정도 혜택을 베풀면서 3당합당 이후의 구조를 깨고 경남의 여권화를 추구하려고 노력했으나[31]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탄핵 역풍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세력과 강고한 지역감정의 벽을 넘진 못했고, 오히려 호남권에서의 지지만 일부 약화되며 정권기반 약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를 돌파하고자 한 대연정 제안은 한나라당에게 거부당했다. 이런 흐름은 친노 계파 중 하나인 정세균계가 본격적으로 당권에 복귀한 민주당과 그 이후 한명숙계가 당권을 잡은 민주통합당에서도 재반복되었고, 나름의 성과는 이루었으나 정권 탈환에는 실패했다. 다만 이와 별개로 대연정 거부 후 사실상 집권을 준비 중이던 박근혜 당시 의원과 유신+5공의 후신이던 친박계의 경우, 이명박 당시 의원을 앞세워 YS 세력 및 이상득계가 연합한 친이계에 의해 예상외의 공습을 받고 대권 및 당권에서 밀려나기도 한다.

이후 지금까지 3당합당 이후의 지역구조는 대체적으로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 3당 합당 직후에 치러진 1992년의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2012년의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20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양새가 비슷하다는 것이 대표적인 증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을 비롯한 상도동계(김영삼계) 정치인 중 일부인 김덕룡, 심완구, 문정수, 김정수, 강삼재, 이신범, 노병구, 박희부, 최기선 등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반면 권노갑과 함께 양갑이라 불리는 중진이었던 한화갑과 같은 동교동계(김대중계) 정치인 중 일부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변화는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개혁 세력이 부울경 지역에 쏟아부은 노력이 어느정도 통했는지(?), PK지역에서 예전만큼 새누리당이 압도적인 포스를 보이진 못하고 있다. 우선 18대 대선 당시 PK 지역에서 문재인 후보가 40% 가까이 득표를 올렸고,[32] 2016년 4월 13일에 치른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야권[33]이 총 11곳에서 당선되고,[34], 총 13곳에서 선전하는[35] 성과를 내는 등 지역주의가 어느 정도 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3당합당에 대해, 민주진영에선 "호랑이 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말처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어 문민정부가 탄생하였고, 이로 인해 5공 세력의 상당수를 청산해내고 역사바로잡기 운동 등을 통해 군부독재의 잔재를 많이 쓸어냈다는 점에서 그 공을 일부 높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YS 집권기가 끝난 이후 거대보수정당이 이런 분위기를 지속하는데 사실상 실패하고 거대보수정당인채로 다시 군부독재 권위주의 정당 시절로 회귀하는듯한 모습이 종종 보이면서 과오가 더 크다는 시각도 아직 만만찮게 있는 편이다. 사실, YS집권기 이후 보수정당의 변화는 YS의 입지 축소와도 연관이 되어지는데, 이는 집권초기만 해도 압도적이었던 그의 대통령 지지율이 임기 시절 연이어 터진 대형 사고들과 최종보스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훅 내려간게 크게 작용했다.[36]

제13대 대통령 선거김대중4자필승론과 더불어 한국 정치의 구도를 영남+보수 vs 호남+진보[37]의 기형적인 지역 대결로 고착화시킨 양대 주범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나마 4자필승론은 이후 DJ, YS의 후회와 국회의 협공으로 어느정도 무마라도 되었지만 이 사건은 갈등의 골만 깊어갔지, 관계 개선 그딴 거 없었다. 이후 DJ, YS는 2009년 DJ 사망 직전 YS가 병문안 가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기까지 무려 20여년 가까이 티격태격한다.(...) 둘이 싸워서 피본건 결국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지지자들 결국 2사건은 민주화를 외치던 민주세력의 두 거목 김영삼과 김대중이 뭉치지 못하고 당장의 권력에 눈이 먼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민주세력의 정통성에 큰 오점을 남기게 한 흑역사가 되었고, 한국 정치사적으로도 지역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서 현대정치의 큰 후퇴를 야기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6 관련 항목

  1. 다만 김대중의 야당 시절 스탠스 자체가 후술되어있듯 다소 오락가락한 면이 있으며, 3당 합당 이전엔 되려 통일민주당보다 온건 노선으로 집권 민정당에 협력한 적이 많았다. 실제 노태우 정권에선 통일민주당보다 평화민주당에게 먼저 합당을 제의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된 배경 항목 참조.
  2. 이것은 전남 신안군에 출마했던 평민당 한화갑 후보가 선관위에 의해서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자, 당선 후 평민당 입당을 조건으로 한겨례민주당의 박형오를 밀어준 결과였다. 박형오는 선거 이후 약속대로 평민당에 입당하였다.
  3. 이건 나라마다 다른데, 미국은 지금도 과반수를 차지한 제1당이 독식한다. 어차피 유력당이 민주당과 공화당 2개 뿐이지만.
  4. 이 때 5공 비리 청문회로 유명해진 국회의원이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5. 수도권 호남표 + 개혁 성향의 20~30대 야당표 + 비판적 지지의 진보표.
  6. 13대 대선 결과는 4자필승론이 헛소리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사실 4자필승론은 한화갑 머리에서 나왔다.
  7. 중간 평가 즉각 실시를 끝까지 외친 게 이 때문이었다.
  8.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온지 불과 2~3년 정도 지난 시점이다. 이때까지는 직선제가 곧 민주주의고, 내각제는 그들만의 야합이란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나중에 실제 3당 합당에서도 내각제 합의를 비공개로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9. 3당 합당을 아무런 조짐이 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문서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1989년 들어서 정계 개편과 관련해서 정말로 많은 언론 보도가 있었다. 구글링만 해봐도 과거 기사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물밑에선 정말 경천동지할 시나리오들이 논의되었고, 그 중에 한가닥 현실화된 것이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인 것이다.
  10. http://news.joins.com/article/2426169 두 김씨 또 힘 겨루기(정계개편 바람분다:3)
  11.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0/1830296_13421.html 김영삼 총재 민정당과 평민당도 포함이 된 온건 중도신당 창당구상.
  12. 친여 무소속 당선자 4명이 선거 직후 입당하였다.
  13. 둘 다 군사 독재 정권 출신으로 정치 노선이나 정책상에 큰 차이가 없었다. 굳이 꼽자면 김종필이 의원내각제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5공 시절 고초를 겪었다는 점 정도.
  14. 실제 김종필은 합당 제안을 듣자마자 무조건 OK를 외쳤다고.
  15. 과거 버전에 평화민주당이 세계 사민주의 정당들의 연합체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옵저버로 가입한 점을 들어서 진보정당이라고 서술했는데, 평화민주당은 리버럴한 기독교계 정당 연합인 Christian Democrat International (CDI)의 옵저버 가입도 추진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독교 정당도 아니었다. 평화민주당은 진보정당이라고 보기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자유주의 중도우파 정당에 진보 성향을 많이 보이는 재야 출신들이 일부 존재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 외 사실 2010년대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 유럽식 좌파들은 정치세력으로서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 민주당계 정당이 진보정당이라고 오해되기 쉽게 만든 측면도 있다. 다만 그렇다보니 반보수정당 스탠스를 유지하기 위해 사실상 진보정당이 해야할 스탠스를 종종 취하기도 한다.
  16. 언론이나 정치학자들도 대체로 과거부터 지금까지 민주당계 정당미국 민주당과 리버럴한 성격이 비슷하다고 보는 편이다. 실제로 김대중이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에드워드 케네드 상원의원을 비롯한 미국 민주당 인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고. 대외적으로도 맹목적인 친미주의와는 선을 긋지만, 아예 미국을 타도할려는 반미주의와도 궤를 달리한다. 참여정부 시기 열린우리당486세대에서 제기했던 용미론(用美論)이 이런 맥락이다. 애초에 반미가 왜 진보가 되어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넘어가자.
  17. 노태우는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에 당선되면 올림픽을 치른 후 국민 투표를 통해서 재신임을 묻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었다.
  18. 민정당은 우물쭈물거리는데 제1야당인 평민당이 대놓고 중간평가를 실시할 경우 정국이 혼란 속에 빠질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오히려 중간평가를 하면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당시 평화민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였던 김원기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총재를 비롯한 평민당 수뇌부는 아무리 노태우 정권이 5공의 연장선에 있다 해도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만큼 중간평가는 애초부터 말이 안 된다고 판단했었다. 이 때문에 선명투쟁을 외치면서 중간평가를 즉각 실시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주장하던 김영삼과 통일민주당만 뻘쭘해졌다. 김종필과 공화당은 애초부터 대통령제에서 중간평가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적이었다.
  19. 전두환은 사전에 서면통보된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하고, 개별적인 질의응답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89년 12월 31일 국회 본회의에 나왔다. 그러나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정작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두리뭉술하게 변명조의 연설만 하면서 야당 의원들이 명패를 던지면서 야유를 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20. 나중에 드러난 바로는 당시 이미 김영삼, 김종필 쪽과는 내각제를 고리로 합당에 대한 이야기가 풀려나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여기에 김대중까지 참여시킬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김대중 총재가 합의했다면 3당 합당이 아니라 4당 합당이 되어 일당 독주 체제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21. 곽노현 사건 당시 이 사건이 또 회자되기도 했다.
  22. 김영삼이 이 이름을 제안했다고 알려져있다. 초기 당명은 민주통일당의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23. 사진에서 주먹을 움켜쥔 가운데 인물이 노무현 의원이고, 그 오른쪽에 역시 눈을 부릅뜨고 외치는 사람이 김상현(1935)이다. 참고로 그 앞쪽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람은 김우석(정치인) 의원으로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 건설부(현 국토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한보그룹 장태수 회장한테 뇌물을 받은게 폭로되서 구속되었다.
  24. 노무현 당시 초선의원의 격렬한 이 항의발언이 끝나자마자 바로 뒤에, "신당 창당을 위한 만세삼창을 하겠습니다."가 나오고 자화자찬을 하면서 만세를 부른다.
  25. 평화민주당이 1991년 지방선거 패배 이후에 재야 세력 일부와 통합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26. 유진산의 장남.
  27. 내각제 합의 비밀 문서가 어떤 경로로 인해 언론에 노출되었는데, 이를 빌미삼아 의원 내각제를 할 수 없다고 깽판짓을 하였다. 애당초부터 의원내각제가 목표였던 김종필과 달리 대통령이 목표였던 김영삼은 의원 내각제를 할 생각이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JP 본인도 김영삼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누가 노출시켰는지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28.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
  29. 1980년대 후반만 해도 군부독재의 광주학살 은폐를 위한 호남 비하 공작과 실례들이 6월 항쟁 이후 약화되고, 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후보들 모두 지역감정 유발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조심하였으며, 특히 양김의 경우 몇몇 지역충돌에 대해 정권의 공작으로 비판하면서 지역 유세를 자제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3당 합당 이후 다시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움직임이 정치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고 보는 분석도 있다.
  30. 이미 섬유업에서 저가임금의 중국과 동남아가 강세를 보이고, 고급직물과 의류는 유럽이 강세인 상황에서 대구의 몰락은 경제적으로 불가피했다고 여겨지며, 이 사업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1. 심지어 2005년 제주도에서 열리리라 예상되던 APEC의 개최지가 부산광역시로 결정되자, 이 결정에 참여정부가 압력을 넣었다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다.
  32. 김대중이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PK 지역의 득표율은 20%에 불과했다.
  33.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국민의당.
  34. 울산광역시: 북구, 동구,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갑, 북-강서 갑, 연제구, 남구 을, 사하구 갑 , 경상남도 : 창원시 성산구, 김해 갑, 김해 을 ,양산 을.
  35. 울산광역시 : 남구 갑,을(각각 4%,3% 차이, 특히 남구 을은 송철호의 득표율이 40%를 넘었다), 부산광역시 : 남구 갑(45% 이상), 중-영도구, 해운대 갑(40%), 북-강서 을(새누리당:더민주:국민의당 = 49:38:11로 단일화만 하면 더민주가 가까스로 이길 수 있었다), 기장군(41%:32%로 9% 차이), 사상구(무소속 친박계 후보와 2% 차이), 경상남도 : 양산 갑, 의창구, 마산회원구(40%), 거제시(730표 차이), 진주시 갑(처음으로 30% 이상을 얻었다. 참고로 이 득표율은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 열린우리당이 얻은 24%보다도 훨씬 높다)
  36. IMF가 가져온 영향은 매우 컸는데, 일단 신한국당에 남아있던 민정계 세력이 확대되고 상도동계가 축소되는 영향을 가져왔으며, 상도동계가 축소되면서 김영삼이 그토록 투쟁했던 당사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결국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회창 총재가 물러난 2천년대 중반 들어서부턴 한나라당내 소위 친박이라 불리는 박근혜세가 급격히 커지게 된다.
  37. 사민주의 좌파 계열이 아닌 리버럴(자유주의 중도우파).
  38.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지역구도가 완화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