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edrich II, 1712년 1월 24일 ~ 1786년 8월 17일
프로이센 역대 군주 |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 | 프리드리히 2세 | →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1 개요
훗날 독일을 통일하게 되는 프로이센의 발판을 마련한 군주
강철대오 정예무비 독일군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확립한 사람
Friedrich der Große (영문 표기는 Frederick the Great). 라틴어로는 Fredericus Rex라고 한다. 동명의 독일 군가도 있다. 현대 독일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명. 그리고 초기 근대 시대의 유럽을 대표하는 명장 중 하나.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이며[1] 합리적인 국가 운영을 통해 프로이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반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여 군림하는 군주가 아닌 봉사하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으며[2], 결국 국가와 신민에 대한 그의 '봉사'가 그의 의지대로 이루어져 그의 재위기간 동안 프로이센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된, 즉 다른 나라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전쟁을 벌였다.
2 생애
그의 생애를 요약하자면 "배경, 실력, 운 모두를 갖춘 18세기 유럽의 먼치킨 군주."[3]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건 하술된 부분 참조.
2.1 군사국가의 감수성 넘치는 왕세자
소년 시절 어머니의 배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아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여 독일 문화를 경멸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사학을 함께 배웠지만 문학과 플루트 연주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무인 기질이 충만한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노여움을 샀다.[4] 사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매우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데다 가족들을 학대했기에, 프리드리히 2세가 아버지를 닮아 단순 무식한 돌쇠형이었다고 하더라도 성장 과정은 좋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음악, 시, 문학 등에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결코 집안과 왕국의 군국주의 전통을 거부하진 않았다. 어릴 적부터 왕위 계승자임에도 힘든 군사훈련을 묵묵히 받았으며 타고난 재능 덕에 빼어난 성과를 보였지만 워낙 많았던 지적 호기심과 풍부했던 감수성 때문에 부왕과 충돌한 것...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형 둘에게도 사망 원인을 제공했으며, 맞으면 맞을 수록 강해진다는 생각에 허구한 날 자녀들을 두들겨 패며 학대했다.[5] 더군다나 사촌이며 약혼자 였던 영국 아멜리아 공주와의 혼약이 아버지의 개입 탓에 무산되자[6], 이를 견디다 못 한 프리드리히 2세가 18세 때 친구와 함께 어머니의 친정인 영국 궁정이라 쓰고 '외갓집'이라 해석한다으로 탈주하려다 붙잡혀 감금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당시 친하게 지내던 청년 귀족 장교 2명과 함께 계획을 실행하던 도중 발각되어 친구 중 한 명은 영국으로 탈출하고 한 명은 붙잡혔는데,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는 재판이 불가능했지만 함께 체포된 친구에게는 '탈영'을 죄목으로 2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왕의 권한으로 이 판결을 번복하고 왕세자의 친구는 사형, 왕세자는 왕위 계승권을 비롯한 모든 신분을 박탈한 뒤 마찬가지로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간신히 말려 요새에 감금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7] 결국 프리드리히는 창문 너머로 친구의 사형 집행 및 죽은 친구의 목이 자신이 갇힌 방을 바라보도록 내걸리는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으며, 난생 처음 보는 끔찍한 장면에 프리드리히가 충격을 받고 기절하자 이에 화가 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오히려 자식을 '바보 같은 놈'이라 욕하며 저놈은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니 같이 참수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이에 곁에 있던 왕비와 모든 신하들, 왕족, 이 막장테크 아버지의 꼰대짓에 충격을 받은 외국의 동업자들(타국 왕들)까지 부왕을 뜯어말렸고 이 덕에 프리드리히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이런 막장이니 가정적으로 불행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영국 왕실인 하노버 가문의 방계 집안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펜(Braunschweig-Wolfenbüttel)'가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결혼하였으나[8] [9], 이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평생토록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7년 전쟁 이후 몇 년 만에 만났을 때엔 '살이 좀 찐 것 같다'는 말만 전했다고 하며, 이러한 냉랭함으로 인해 둘 사이에 자녀가 태어나지 않아 결국 조카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10]그나마 결혼의 대가로 부왕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덕에 라인스베르크 별궁에서 독서와 음악으로 그 동안의 울분을 달랬다.
2.2 근면하고 현명한 군주
길고 우울한 청소년기/청년기 속에 살아야 했던 왕세자였지만, 그는 정치철학과 합리적인 사고에 있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정치에 관한 저술은 아마추어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프랑스의 볼테르와 서신 왕래를 하며 저술한 《반마키아벨리론》[11]에서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데, 자신이 쓴 책의 내용처럼 프리드리히 2세는 합리적인 사고와 '국가에 봉사하는 태도'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국왕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또한 부지런히 일하였으며, 관료 조직의 규모를 축소시키되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것은 당시까지도 군림하는 군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와 같은 주변 유럽 국가의 군주들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모습이었다. 또한 과학의 발달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 노력했으며, 이처럼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행보를 보임에 따라 여전히 지속되던 신교와 구교의 갈등을 피해 유럽 각지의 저명한 학자와 유능한 인재들이 프로이센의 날개 아래로 모여들어 프리드리히가 역설한 강력한 국가의 체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탄탄한 지식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게다가, 난폭한 아버지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무인 기질을 가졌던 프리드리히 1세가 많은 유산과 8만에 이르는 군사력을 남겨주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수도인 베를린을 화려하게 건설하는 한편, 국방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 덕에 프리드리히 2세 즉위 직후 8만 명 정도였던 프로이센의 군대는 총 19만여 명에 이를 만큼 거대하게 성장하였다(군대 규모를 총 인구 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시의 프로이센은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된 국가였다).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럽 정복을 꿈꾸는 타 국가에 대한 예방 전쟁, 즉 선제 공격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2.3 18세기의 유럽을 뒤흔든 명장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즉위하자 이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에 참가, 공업 발달로 많은 부를 쌓은 슐레지엔 지역을 뜯어냈다.[12] 이 전쟁을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프로이센의 약진을 주목하게 된다.
이후 포츠담에 '상 수시 궁전'으로 불리는 별궁을 세우고 학자, 문인과 함께 토론을 즐겼으며 볼테르를 불러 상주하도록 했던 때도 있었다.[13] 상 수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거대한 궁전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으며, 프리드리히는 이 곳에서 시종 몇 명과 검소하게 지냈다. 또한 베를린 시내에 국민들을 위한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 국민들도 품격 높은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당시 유럽에서 오페라 하우스는 왕과 귀족을 위한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또한 프리드리히 자신은 불가지론자로 여생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성 헤드비히 성당을 지어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프로이센에 패한 오스트리아에 실망을 느낀 영국은 든든한 동맹을 찾는 프로이센과 서로 이해가 일치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이해가 일치하는 구도가 형성되어 결국 프로이센과 영국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게 되는 이른바 동맹의 역전이 벌어진다(이 시기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다투던 전통의 강대국이자 라이벌이었다).[14] 이 동맹에 프리드리히를 무척 싫어한 옐리자베타 여제의 러시아 제국, 한 때 프로이센의 편을 들었던 스웨덴도 가담한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모였다 하여 삼부인 동맹이라고도 한다. 특히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획득을 위한 다방면의 물질적•군사적 기반이 필요했기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결국, 1756년에 일어난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를 시작으로 7년 전쟁이 발발하고 아메리카와 인도 등지에서는 프랑스 대 영국,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대 프로이센이 충돌했다. 오스트리아를 초반에 굴복시키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군한 프로이센군은 로보시츠, 리베레츠, 프라하 등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며 보헤미아로 진입했으나 콜린에서 패배하며 오스트리아를 무릎 꿇리지 못했고, 이 해 여름 동안 전병력의 1/3을 잃으면서 위기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인 1757년, 로스바흐에서는 42,000명의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22,000명의 병력으로, 로이텐에서는 8만이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36,000명의 병력으로 철저히 박살내는 신기에 가까운 무력을 선보였다. 더 무서운 건 이 격전의 와중에도 프로이센군이 입은 피해는 상대의 절반 이하였다는 것. 허나 다구리 앞에 장사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동쪽의 러시아, 서쪽의 프랑스, 북쪽의 스웨덴이 각각 동시다발적으로 진격해 오고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남쪽에서 몰려오자 결국 프로이센의 대군은 연전연패... 이 와중에 동맹국인 영국이 내각 교체로 인해 프로이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사태가 겹치면서 [15] 말 그대로 무참히 관광당했다. 결국 수도 베를린도 함락당하고 프리드리히 자신은 쫓기게 되어 목에 걸고 다니던 로켓에 담긴 독약을 생각하며 자살을 생각하는 등,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어려운 순간이었으나...
갑자기 한 줄기 구원의 빛이 그를 비추게 된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급서한 이후 1762년에 즉위한 독일 출신의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강력한 빠였던 것이다!!!
표트르 3세는 전쟁 이전의 영토를 기준으로 한 화의를 맺자고 제의했고,[16] 이로써 프리드리히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여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다음 해에 이르러 7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이 시기,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을 위해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유럽에서 일찌감치 손을 떼는 등 유럽 전선의 판세 자체를 뒤엎었다. 그러나 식민지 쟁탈전에서는 오히려 패배의 아이콘(...)이 되어 퀘벡 지역을 포함한 많은 해외 영토를 상실,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다만 승리한 영국의 부담도 만만치 않아, 갑자기 높아진 조세 부담에 대한 북미 식민지 주민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해 보스턴 차 사건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1775년에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17][18]
이후 폴란드 영토 분할에 참여하고[19]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하는 등 프로이센을 유럽 북부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폴란드는 망했어요 이처럼 화려한 전적은 단순히 군사력의 승리로만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학술, 교육, 복지 등을 크게 발전시켜 프로이센을 단순한 군사국가가 아닌 진정한 중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결과이기도 했으며 계몽군주답게 미국 독립전쟁 때 자신의 장교들을 파견, 대륙군을 크게 강화하는데도 한 몫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이 대표적(1776년 크리스마스 기습의 독일 용병과는 상관없다). 영국에게 물자 지원 중단의 복수를 했다
1772년에는 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서 서프로이센을 뜯어내며 그 동안 형식적으로 폴란드 왕국에 종속되어 있던 과거를 청산하고[20] 프로이센'에서는' 왕(King 'in' Prussia)에서 프로이센'의" 왕(King 'of' Prussia)으로 칭호를 바꾸었다.[21] 대왕이라는 칭호도 자기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닌 국민들이 헌사한 것. 말 그대로 먼치킨.
1786년, 노년의 몸을 이끌고 직접 군대를 검열하던 중 폭우를 맞고 발병한 폐렴으로 인해 7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사망하자 갓 독립한 미국은 조기를 올리고 예포를 쐈으며,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어머니의 적이었음에도 "이제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라는 말로 심정을 대신했다. 이후 유럽에는 프리드리히 대왕 빠들이 무지 양산된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프랑스의 나폴레옹[22] 등... 심지어 먼 훗날의 히틀러도 이 대열에 동참한다.
명언으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계몽 군주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구이기도 하다.
과인은 국가에서 첫째 가는 심부름꾼이다.(Ich bin der erste Diener meines Staates)
3 한계점
다만, 그의 모든 정신적•사상적인 면이 완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위의 명언만 보더라도, '백성'의 머슴이 아닌 '국가'의 머슴을 자처했다는 이유로 이를 국가주의적 관점의 시초라며 까는 시각도 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계몽주의적 관점을 통해 많은 진보를 이끌어 내었음에도 결국 계몽군주로 군림해 군주제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 했던 인물이다. 또한 그의 치세 동안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프로이센이었지만, 그렇다고 왕을 거역하거나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까지 용납되지는 않았다. 상 수시 궁전에 상주하도록 초청까지 받았던 볼테르가 프랑스에서 건너온 지 3년 만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일화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이후에도 그와 사상적인 교류를 지속하기는 했지만, 왕으로서 볼테르가 자신을 거역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또한 프리드리히는 토론과 같은 다수 인원의 정신적 교류 과정을 거쳐 사상을 만들어 가는 것보다, 특정 개인의 독자적인 사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던 인물이다. 즉,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 한 사람의 사상이 전 국가에 퍼져 국민이 이를 충실히 따르게 유도하는 구조를 가진 국가였다. 이는 당시에도 구시대적인 체제를 유지하던 프랑스 등의 다른 유럽 국가보다는 나았지만, 훨씬 수평적인 구조를 가졌던 영국에 비하면 더 경직된 것이었다.
프로이센의 군국화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점 역시 비판의 소지가 있다. 적극적인 '예방 전쟁'의 필요성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의 계획대로 모든 전황이 풀리기는 커녕 한 순간의 패배로 인해 턱 밑까지 칼날이 들이밀어졌던 7년 전쟁의 전개를 보면 군국화와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입은 피해가 적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 실제로 이 군국화 과정은 엄청난 무리수가 동원되었는데, 한 예로 프리드리히의 증조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大)선제후는 그의 치세에 일어난 '30년 전쟁'이 끝난 후 3분의 1로 쪼그라든 영토와 침체된 국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권장했던 것은 물론 아예 바람이나 간통 같은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 버렸던 적도 있었다.(이를 두고 '그래 봐야 다른 사전을 보면 된다.'고 하는 축도 있지만, 이러한 결정에는 '예전에 지키던 도덕 같은 건 일단 접어둬라.'는 속뜻이 있었다. 이처럼 특정 문자, 나아가 개념을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말살과 같은 형벌은 고대~중세 전 시기에 걸쳐 광범위한 영역에서 등장한다.) 심지어, 품행이나 정절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했다는 말이 남아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불가지론자였고 종교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에 국교인 개신교[23]신자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에 대한 차별에도 반대했으며, 심지어 보스니아 출신의 무슬림 용병을 위해서 베를린에 모스크를 지어주려고 까지 할 정도였다(...)
또한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예컨데 인구를 늘리기 위하여 미혼여성 및 과부를 강간하더라도 임신을 시키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속령을 발표라던가 국경지대 외국인 남성을 납치하여 군에 강제 입대시킨 것이 그 예이다. 특히 폴란드에서는 국경 지대의 폴란드인들을 강제 징집한 것 이외에도 화폐를 위조하여 폴란드 경제를 마비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것 때문에 쌍으로 욕을 먹는다(...)
종합해보면 군주제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백성들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 계몽 군주.
4 기타
훗날 프로이센으로 원정을 나선 나폴레옹은 그의 묘를 참배할 때 동행한 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모자를 벗게. 이 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린 여기 있지 못 했을 걸세."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한 후 제일 먼저 챙긴 물건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계와 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전리품이라고 히히덕거리기도….씹덕후스럽다
당시 모든 유럽의 황실이 그랬지만 그의 일상어는 독일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정무언어로 프랑스어를 썼고, 그가 남긴 모든 글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한 신하와 독일어 vs 프랑스어라는 주제로 키배를 뜬 적도 있을 정도.
이런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자기가 기르는 벚나무의 체리를 참새들이 먹어치우자, 화가 나서 자기 벚나무에 참새가 1마리도 오지 못 하게 막았다. 그러나 참새가 오지 않아 오히려 벚나무에 벌레가 꼬이고 병들어 버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참새를 내쫓지 않았다는 얘기. 그러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너무 명확하기에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훗날 먼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이 실제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 그것도 자기 집마당 정도가 아니라 대륙 전체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와 교훈은 창작(?)보다 훨씬 명확했다.
또한, 위에서 잠깐 지나가듯 언급되었지만 음악에 관심과 조예가 대단히 깊었다. 1749년에는 그 유명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으로 초청했고, 프리드리히 본인이 바로크 시대의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아힘 크반츠에게 플루트를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곁에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측근으로 있었다.[24] 아무튼 본인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주위에 이처럼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았던 덕에 그는 인류 역사상 그리 흔치 않은 "군주 겸 작곡가" 가 되었다. 세종대왕 돋네 그의 음악을 직접 들어보자. 듣기 쾨니히그레츠 행진곡에 영향을 주었던 "Der Hohenfriedberger" 역시 그가 작곡했다는 주장도 있다.
300여 곡이나 되는 자작곡이 있고, 연주도 자주 한 탓에 천재(?)처럼 보일 지 모르지만 플루트 연주자로서의 능력은 잘 생각해 봐야 2류 정도였다는 게 당시의 평가이자 함정(...) 더군다나 바로크 음악의 시대가 끝나 가던 시절에 대략 반 세기 전에나 유행하던 스타일을 고집했던지라 그의 음악 취향은 좋게 말하면 고풍스러운, 돌려 말하면 "옛 음악에만 꽂힌" 고전 덕후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습의 기운이...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가곡 작곡하는 대통령쯤 되려나...?
집안 전체에 강하게 박혀 있는 밀덕후의 기질을 타고났던 지라, 당시 강선의 개념을 고안한 인물인 벤자민 로빈스의 저서 <새로운 포의 원리>가 발간되자 직접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번역을 맡겨 탐독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진성 중의 진성이자 성공한 밀덕 그 자체. 수학자가 번역한 군사기술 서적이라니 ㅎㄷㄷ..
커피를 좋아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그가 마시던 커피는 샴페인으로 끓여서 겨자로 맛을 낸(...) 것이었다고 한다. 강글리오? 너무 많이 마셔서 담당 의사에게 마시는 양을 줄이란 말을 들었지만, 줄여서 오전에 7~8잔, 오후에 한 주전자였다고.[25] 정작 다른 사람들이 마실 커피에는 과도한 세금을 물리고 그 유통을 통제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문화를 동경하기도 했다. 말년의 거처로 지은 상 수시 궁의 정원에는 중국식으로 설계한 다방(茶房)이 있는데, 건물 주변에 중국식 복장을 입은 동상을 세워 놓고 천장에도 중국 화풍을 흉내낸 그림을 그려놓았다고. 다만 중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좋아한 것은 아니고, 당시 유럽에서 중국의 도자기[26]가 유행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 이건 비단 프리드리히만의 경향이 아니어서, 이 무렵에 지어진 왕궁을 보면 중국산 도자기를 한가득 진열해 둔 방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프로이센에 감자를 보급하기도 했는데,[27] 당시 프로이센의 탄수화물 공급은 전적으로 밀에만 의존했기에 밀값이 요동치기라도 하면 식량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1774년 전국에 대흉작이 발생하자 이 문제를 해결할 구황작물, 식량 증대, 전투식량 확보 등의 목적으로 전국에 감자를 심으라 명했는데, 사방에서 '맛없어서 개도 안먹는걸 사람더러 먹으라니 너무하지 않냐'라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매일 매일 감자를 먹었다. 이로서 감자를 개도 안먹는다고 하면 왕한테 개만도 못하다고 디스하는 게 되는 셈(...)
이처럼 국왕이 직접 나선 덕에 감자 보급이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1778년~1779년에 걸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맞붙은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때는 두 나라의 병사들이 모두 하라는 전투는 안 하고 전투 식량 확보를 위한 감자 약탈을 더 열심히 해댄 탓에 '감자 전쟁' 이라는 별명이 생기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약탈 대상이 된 바이에른 지방의 농부들만 엄청나게 죽어 나갔다고. 프리드리히 대왕도 감자 보급의 공로로 '감자 대왕' 이라는 애칭을 얻었고, 현대에도 그의 무덤을 방문할 때 감자를 두고 오는 독일인들이 많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자라서 그런지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폐쇄적이고 인간 불신도 있었으며, 심지어 개의 충성심을 극찬하며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매우 고독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말년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이 세상을 뜨자 기르던 그레이하운드들만을 심적으로 가까이 했다고 하며,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애견들 곁에 묻어달라는 부탁도 남겼다.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영화 몰락에선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며 고뇌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루즈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이 표트르 3세의 활약(?!)을 재현해 주길 기대망상했던 것을 표현한 장면. 실제로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도 반공주의를 내걸고 소련에 맞서 연합국들과 강화하려 했으나 서방의 떨떠름한 반응과 소련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28].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는 독일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의 알프레드 프레데릭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 시기적으로도 조선의 정조와 겹쳐 간간히 비교되기도 한다.
- ↑ 군주론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착한놈하고 나쁜놈이 싸우면 힘 센 놈이 이긴다(그러니 착한 일을 하려면 힘이 세야 한다)는, 달리 말하면 윤리적 가치 판단을 위한 도구의 차원이 아닌 정치/통치 기술 자체를 다룬 것. 반마키아벨리론은 군주는 자신이 아닌 신민들의 이익(공익)을 위해 봉사해야되는 존재로 군주의 개인적인 의사는 고려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 ↑ 그의 숙적이었던 합스부르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력은 있었지만, 배경과 운이 프리드리히만큼 따라주지 못한 비운의 군주였다.
- ↑ 꽃과 음악을 사랑한 유약한 군주란 개드립이 있는데,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누나에게 꽃 같은 건 싫다. 북치고 놀겠다고 해서 부왕을 흐뭇하게 한 적도 있다. 다만 성장하는 동안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피해망상과 정신착란으로 인해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아진 탓에 사이가 벌어진 것.
- ↑ 아들뿐만 아니라 아내도 허구한 날 두들겨 팼고, 가까이 있는 시종, 시녀, 신하들은 물론 병사들에게도 직접 줄빠따를 내리쳤으며 시내를 돌아다니다 놀고 있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주민들을 보면 그들도 손수 두들겨 팼던 탓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거리에 뜨면 그 모습을 본 주민들이 죄다 도망칠 정도였다. 후계자였던 장남, 차남과 삼남 프리드리히 외의 자식들은 심하게 학대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인 즉슨 '학대할 정도의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무슨 싱하형어찌나 심했는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죽었을때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가장 기뻐했다고 한다. - ↑ 어머니 조피 도르테아가 영국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의 딸이다.
- ↑ 이후 프리드리히가 즉위하자마자 내린 첫 포고령은 고문의 폐지와 법관의 독립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 ↑ 영국 왕실 하노버 가문의 방계. 훗날 프리드리히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이 가문으로 시집 장가를 가서 겹겹사돈이기도 하다
- ↑ 정작 이 당시 장인은 오스트리아 군 육군 원수였으며 처남들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군인으로 복무중이었다.(당시 유럽에서는 군주 가문의 자제라 하더라도 모국이 듣보잡 소국일 경우 큰 나라 궁정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훗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처남들이 휘하 장수로 큰 활약을 했으나 전쟁 후의 불화로 인해 프로이센을 떠나기도 한다.
- ↑ 이랬던 탓에 프리드리히가 동성애자라느니 고자라느니 하는 썰이 있지만 별 근거는 없다. 다만 왕비가 아닌 어떤 귀족 부인과는 젊은 시절의 로맨스(?)가 있었다고 한다.
- ↑ 정치와 도덕의 분리를 기초로 군주의 위엄과 백성에 대한 공포정치를 주장하던, 혹은 당시 그렇게 해석되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 ↑ 슐레지엔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전체 세금 수입 중 22% 가량을 차지하던 알짜배기 지역이었다. 또 개신교가 강세인 지역이었던 지라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이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깃발을 꽂자 호의를 보였다고.
- ↑ 다만 볼테르가 왕의 심기를 건드려서 3년만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볼테르의 작품을 읽어봐도 알 수 있겠지만 비꼬기를 좋아하고 입이 험하다). 하지만 평생 서신 교환은 계속되었다.
- ↑ 더욱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편에 섰다.
- ↑ 이 자금, 물자 지원 중단으로 가용 병력이 15만에서 6만으로 쪼그라들었다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군 병사중 7할이 외국인 용병이었기 때문이라고. 자세한 것은 조지 3세 항목 참조.
- ↑ 물론 표트르 3세는 러시아 입장에선 최강 병크를 터트린 암군이 되었다. 결국 이 일 이외엔 한 것도 없이 반 년만에 아내에게 쫓겨난다. 로마노프 왕조 참조.
- ↑ 히틀러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죽은 후 위와 같은 전개를 기대했다. 영화 몰락의 후반부에 히틀러가 벙커 안의 자기 집무실에 걸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 나오는데, 턱 밑까지 칼날을 들이댄 소련군의 맹공을 연일 간접적으로 얻어맞던(...) 히총통으로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 공산주의를 내세워 유럽을 위협할 수 있는 소련을 경계할 테니 이미 반공을 천명한 독일과 반공 동맹을 세우기 위한 강화를 맺자고 하면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라고 희망했지만 이미 대세는 심각하게 기울어 소련군이 하루 종일 쏟아붓는 포화에 베를린 시내가 아작이 나고 있었으며, 나치의 만행이 점차 드러나는 와중에 미국이 독일과 강화를 맺는 것은 도의상 불가능했다.
- ↑ 이 일화는 스쿨데이즈의 패러디 형식으로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도 살짝 언급된다. 퐁파두르 부인은 키요우라 세츠나 로, 옐리자베타 여제는 사이온지 세카이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카츠라 코토노하로 묘사했고, 중간에 세카이가 죽어 나자빠진다...
- ↑ 폴란드는 이미 18세기 초반부터 이미 러시아의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흡수하기 전에 오스트리아와 합세하여 견제한 것이다.
- ↑ 15세기 경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패하면서 폴란드 내의 다른 영토를 다 잃었고, 동프로이센을 지켜낸 대신 폴란드 왕에 대한 형식적인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 ↑ in과 of의 차이는 꽤 크다. 동양으로 치면 in은 외왕내제와 비슷한 표현. 프로이센의 왕(King of Prussia)이 되기 전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왕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공작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을 겪는 동안 외국에서조차 프로이센 왕국 대왕 드립을 늘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과시.
- ↑ 나폴레옹은 자신이 최고라고 상각하는 7대 명장에 프리드리히 대왕을 포함시켰고, 그들의 기록을 반복해서 공부한 게 승리의 비결이라고 말했으며, 프로이센을 아작내고 베를린에 입성했을 때는 전리품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썼던 회중시계와 칼을 챙기며 희희낙락했다고 한다(...).
- ↑ 이미 선대부터 프로이센 귀족들은 루터파지만 왕실은 칼뱅파라서 왕국 개신교계에도 관용과 유연성이 필요했다.
- ↑ 대중들에게 유명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차남. 실내악 단원으로 있다가 훗날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로 가 악장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예산 감축에 따라 자신의 급료가 궁정 광대보다 낮아지자 미련 없이 떠났다.
- ↑ 출처-먹거리의 역사 하 마귈론 투생-사마 저
- ↑ 특히 인물 초상화가 그려진 청화백자.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일부러 주문제작했고, 도자기 열풍이 불다 보니 도자기에 그려진 초상화에까지 관심들을 갖게 된 것.
- ↑ 당시 프로이센에서 감자를 키우기는 했지만 사람이 먹는게 아니고 돼지먹이로 쓰는 작물이었다.
- ↑ 종종 친독일적인 입장의 서술자들에 의해 이러한 되니츠의 시도에 대한 소련의 반응이 '강짜를 부렸다' 는 식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몹시 편향적이고 억지스러운 논조라 봐야 할 것이다. 강짜라고 한다면 다른 나라에 먼저 쳐들어가서 온갖 만행과 패악은 다 부리다가 그 대가를 치를 상황이 되자
유치한정치적 술수로 빠져나가려고 했던 독일측의 시도가 오히려 강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