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10성 | ||||
아도 | 이차돈 | 혜숙 | 안함 | 의상 |
표훈 | 사파 | 원효 | 혜공 | 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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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曉
617~686
원효 진영, 무로마치 시대, 교토 고잔지(高山寺) 소장 |
1 소개
삼국시대 말엽 신라의 스님. 고승인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효대사가 불교계에 어떤 업적을 남긴 분인지는 모르고, 그저 해골물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스님 정도로만 알고 있다(...)이게 다 해골물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 불교 희대의 먼치킨이자 천재. 이름 그대로 한국 불교계의 "으뜸되는 새벽"과 같은 사람이다. 역사상 불교계 위대한 사상가들의 계보에서 첫머리쯤에 자리잡는 인물. 시호는 고려 숙종이 내린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2 출신
경상북도 경산시 출생[1][2]이며, 속성은 경주 설씨[3]. 이름은 사례(思禮)였으며,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의상은 진골 출신이지만 원효는 확실치 않으나 6두품 출신으로 추정하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4] 최근 중국에서 설씨 성을 가진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는 문구가 있는 것과,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소수설에 불과하다.
부처님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은 한 톨이 사발만하다나 뭐라나.
3 해골물을 마신 이야기
원래는 촉망받는 유능한 스님으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가던 도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서 물을 찾으려고 더듬거리다가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원샷 때리고 아 그 물 참 달고 시원하다고 좋아하다 다음날 일어나서 해골을 보고 한 차례 구토(...) 후, 썩은 물도 간절히 목이 말라서 먹으니 달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는 유학을 포기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를 통해 돈오돈수가 뭔지 보여주었다. 의상 스님은 그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고승들의 이야기를 담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 나온 것이라서 진위 여부를 가리기 어렵다.[5] 그냥 야사 정도로 정리하면 될 듯. 한편 일본 측 기록에서는 원효가 비를 피해 토굴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니 다음 날 그 토굴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자 그날 밤 도깨비가 우글거려서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는 진리를 깨닫는다는 전설이 있다.
사실 불교(혹은 종교 전체)에서 이 해골물 이야기는 표현이 다를 뿐 자주 등장하는 패턴이다. 신라 시대에 선종을 일으켰던 무염(수정바람)도 당나라에 공부하러 가던 중에 건강에 좋게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려 했는데, 하필이면 옆에서 소가 물을 먹는데다 농부가 발을 씻고 있었다. 이에 무염이 저만치 떨어져서 마시자 농부가 "도를 깨우치려면 한참 멀었구만. 왜, 소랑 내가 옆에 있으니까 더럽수? 어짜피 흘러가는 물인데."라는 식으로 살짝 면박을 주자 귀담아들었다가 당나라에 가서 교종을 버리고 선종을 받아들였다 한다. 이 역시 야사 수준의 이야기다. 근데 이 이야기, 요순시대의 인물 소부와 허유 이야기하고도 유사하다? 결국 지나가던 농부 덕이다
주제는 조금 다르지만,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에서도 두 노인이 성지 순례를 하던 도중 한 노인이 길가의 집에 물을 마시려 들르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집은 기근으로 식구 전원이 굶어죽어가고 있었고, 노인은 급히 빵과 물로 식구들을 구한다. 다시 성지 순례를 떠나려 하지만 이들을 돕지 않으면 고생하며 주님을 찾아간다 해도 내 마음에서는 주님을 잃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여행비를 털어 그들이 자립할 때 까지 도운 뒤 성지 순례를 포기하고 돌아온다. 친구가 물을 마시러 돌아간 걸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떠난 다른 노인은 혼자 성지순례를 하다 돌아간 친구의 환영을 성지에서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은 집에 들러 이야기를 듣고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순례는 받아들이셨는지 모르지만, 그 친구의 순례는 분명 받아들이셨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종교적 여행에서 마음을 중시한 사람은 남고, 체험을 중시한 사람은 떠났다는 점에서 비슷한 이야기. 따라한것 아님?
4 승려로서
어쨌든 머리도 안 깎고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고 술도 마시고 마치 파계승이나 땡중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러가지 설법을 남겼다. 도끼 드립[6]으로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유학자 설총을 남긴 것도 유명하다. 그러니까 파계승 맞다. 그래서 원효는 무열왕의 사위이자 김유신의 동서가 되는 셈이다. 반면 파계를 통해 소성거사를 칭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재가자로 지내면서 활동하였으니 공식적으로 소성거사라고 부르는게 맞다는 주장이 있다.[7] 이외에도 금역(禁域)을 출입하는 데에도 거침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을 창시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무아미타불은 원효가 만든 것이지만 여기에 관세음보살을 넣은 건 의상이다. 따로 사용할 경우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즉 저 두 개를 붙여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것. 아미타부처는 내생을 주관하고 관세음보살은 현생을 구제하는 부처가 되지 못한 보살로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께 귀의합니다"란 의미로 내생을 보장 받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의상이 덧붙인 관세음보살은 현세구복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서로 별개이지만 묶어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화엄종의 기본이 되었다. 근데 화엄종은 제안한 사람은 원효고 완성시킨 사람은 또 의상. 둘은 친구로 당나라 유학길에 같이 올랐었다.
어쨌든 당대 스님으로서는 확 깨는 인상이었던 것은 사실. 절이나 암자에 앉아서 사람들이 올 때마다 불법을 전파하는 일반적인 스님들과 달리 그냥 길가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보면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의 선조? 다만 이 분은 부처극락 불신지옥 을 외치고 다니진 않았다.다만 그 깨는 행동 때문에 관련된 일화/야사도 많았다.
불립문자 주장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은 역설과 비유를 활용한 많은 저작을 남겨 말로 표현 못할 진리를 전하려 노력했다.[8]
5 후세에 끼친 영향
삼국유사를 통해 여러 일화를 남겨 그 쪽이 더 유명하지만,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 중 하나였다. 십문화쟁론으로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정리하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많았다.[9]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경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 한때 이보다도 200년 앞선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나왔으나, 오보로 판명되었다.
다른 저술인 십문화쟁론도 만만치 않은데, 인도의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 범어로는 Dignāga, 음역은 (대)역룡(大)域龍)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이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10]
학술적 의미에서 설명하자면, "한국불교는 원효에 대한 주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국내에서 원효를 주제로 쓴 박사논문이 160여 편이 넘는다. 말이 더 필요한지? 원효의 연구범위는 현세구복적 불교에서 논리학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내용의 수준 역시 동아시아의 최첨단을 달리는 내용들. 그 이후에 중국 뺨치는 불교 학자는 나오지 않았다.
중기 신라에 불교문화가 '현세구복적'(현실에서의 복을 비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원효가 주로 설파한 정토종(아미타 신앙)은 말 그대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이기 때문에 내세구복적으로 분류되고 있다. 신라 시대에 현세구복적인 불교로 가장 대중화 되었던 종교는 의상의 화엄종이다.
이 사람 덕분인지 양산형 무협지나 기타 국산 창작물에 등장하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승려나 도인들은 술이고 개고기고 뭐고 그냥 다 먹는다. 그리고 그게 현실화 되었는데...
분황사에 원효의 유골에 흙을 붙여 만든 원효회고상이 전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려 중기에 몽골군이 경주시에 불을 지르면서 분황사도 다 타버렸는데 그때 소실되어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원효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되었을텐데... 물론 남아 있었다고 해도 임진왜란, 아무리 늦어도 일제강점기 때 소실됐을 가능성도 높다.
의상, 자장, 도선 등과 함께 웬만한 고찰(古刹)들의 창건자로 매우 자주 꼽히는 승려이기도 하다. 물론 거의 대부분 믿을만한 이야기는 아니고, 원효의 유명세를 빌려서 절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절들의 창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 스님들이 평생 절만 세우다가 입적하셔도 모자를 판이다.
국내의 원효 관련 사찰분포. 척 봐도 뭔가 원효대사의 일대기하고는 십만 광년 떨어진 게 느껴질 것이다.(...)
서울특별시의 원효대교 및 원효로, 경산시의 원효로가 바로 이 원효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울 원효로는 원래 일제가 붙인 '모토마치(元町)'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를 광복 후 개명하는 과정에서 같은 한자(元)를 쓰는 원효로로 바꾼 것.[11] 경산 원효로는 진짜로 원효대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영화 괴물에서 해골물 처먹은 놈이라고 잠깐 언급된다.
6 대중문화 속의 원효
1977~1989년 방영된 KBS 전설의 고향(사실상 시즌1)에서 원효대사역에 임혁, 요석공주역에 한혜숙이 출연하였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과 요석공주와 맺어지는 줄거리를 담았다.
1987년 KBS에서 방영한 '원효대사'라는 사극에서는 전무송이 원효대사, 유지인이 요석공주역을 맡았다. 마지막에 성인이 된 설총이 원효의 절로 찾아가니, 원효가 마당을 쓸라고 시켰다. 설총이 마당을 깨끗하게 쓸고 나니 원효가 그걸 보면서 '가을 마당에 낙엽 한 두 잎은 있어야지' 하면서 몇 개 흩뿌리는 걸로 마무리 한다.
1992년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에서 서학이 원효대사를 박주미가 요석공주역을 맡았다.
윤인완-양경일의 만화 신암행어사에선 이 인물의 이름을 딴 캐릭터가 나오지만,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실존인물에서 이름을 딴 등장인물들 처럼 이 인물 또한 원효라는 이름만 땄다. 요괴지만 단순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사는 정도가 아니라 쥬신군의 부대 지휘관이자 문수의 부하였기도 하다. 쥬신 붕괴 이후에는 원술을 부하로 두고 화산지대에 위치한 도시의 영주로서 용로에서 양귀비를 재배, 그 아편을 서양에 팔아 서양의 최신 무기들을 들여온다. 또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죄인들을 뽑아 기를 빨아들이기도. 자세 추가바람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7 원효의 교육사상
원효의 업적을 살펴보면, 제일 먼저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것을 들 수 있다. 중생과 성인의 차별을 철폐하고 서민교육의 둔내고 박다빈이 되었으며, 대중교화를 위해 선민사상, 골품제도, 종파의식 등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유심연기사상으로 종합될 수 있는데, 이는 모든 현상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모든 존재는 상대의 의존관계에 의한 인연의 작용이라는 것이다.따라서 원효는 교육의 목적을 자기의 인간됨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고, 자기 스스로의 수양과 노력, 의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개인 고유의 창의적 학습, 자기발견 학습과 관련이 있다.
[12]- ↑ 당시 신라시대때는 압량주(押梁州)였다. 공교롭게도 고려시대의 승려이자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도 같은 고향이다.(일연이 태어난 당시의 경산의 지명은 장산군.) 그래서 경산시의 도로 중 원효와 일연의 이름을 딴 원효로와 일연로가 있다.
- ↑ 경산시에서는 일연, 원효, 설총을 묶어 '삼성현'으로 부르며 도로명 주소로도 삼성현로가 존재한다.
- ↑ 원효라는 글자 자체가 '으뜸 원'자에 '새벽 효'자로, '설날'의 '설'을 한자로 쓴 것이다
- ↑ 참고로 원효와 그의 아들인 설총을 중시조로 두는 경주 설씨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신라의 6부의 촌장 가운데 한 사람인 '호진'의 자식인 '거백'이 '설'씨를 하사받아 '설거백'이 된 것을 가문의 시초로 삼고 있다.
- ↑ 진짜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셨더라도, 그것이 시체 썩은 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몇 년 전, 시체 썩은 물을 건강식품으로 사기쳐 팔다 붙잡힌 일당에 대한 뉴스가 나간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이걸 마신 피해자들은 마신 지 수 시간이 안 되어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심각한 중독 증상을 보였는데. 원효 대사가 진짜로 그런 걸 마셨다면 돌아가고 말고는 커녕 그 자리에서 앓아누웠어야 정상이다(..) 그냥 굴러다니던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고 보는 게 적당하다.
- ↑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내게 주려나(도끼자국 참조).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볼 텐데(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신라시대 섹드립 클라스 보소 - ↑ 이렇게 본다면 파계승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거사는 말 그대로 재가자이지 스님이 아니니까. 그리고 재가자의 경우에는 계율도 엄하게 지켜지지 않는다.
- ↑ 조동일,'한국문학통사1',지식산업사,2005,p190
- ↑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삼장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세 번 절했다고 나온다. 흠좀무.
- ↑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은 내용이 좀 다른데,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읽고는 "이 원효란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 거 아냐?"라고 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참고로 불교에서 '00의 후계'등으로 말하면 단순히 후계자란 뜻 이외에 특정 고승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즉 자기네 학파의 대스승의 환생자 대우를 받을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여긴 한술 더 뜨네 - ↑ 이 때문에 서울시청 도시설계 분야에서 오래 관료로 근무한 손정목 교수는 '일제 잔재 청산이 제대로 안 된 케이스'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원효대사가 서울과 딱히 관련이 있는 역사 인물도 아니고... 그래도 서울에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이름의 거리가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보기도 한다.
- ↑ 김현편저,'키위 교육학',북이그잼,2014,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