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아시안 게임
역대 하계아시안게임 | ||||
9회 | → | 10회 | → | 11회 |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 → |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 → |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
개최국가 : 대한민국
개최지역 : 서울특별시
개회식 : 1986년 9월 20일
폐회식 : 1986년 10월 5일
1 개요
88 올림픽의 신호탄
1986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개최된 제10회 하계 아시안 게임. 하지만 여타 아시안 게임과는 다소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였는데, 2년 뒤 개최될 서울올림픽을 대비한 일종의 리허설 성격으로 아시안 게임을 치렀다. 실제로 올림픽 때 쓰게 될 서울종합운동장을 그대로 아시안게임 주경기장으로 활용. 단, 선수촌의 경우에는 따로 건설했다. 아시안게임 선수촌은 잠실종합운동장 건너편에, 올림픽 선수촌은 올림픽공원 동편에 지어놨다.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종합 국제대회였던데다 앞서 말했다시피 2년 후에 열릴 올림픽을 대비한 리허설 무대였기 때문에 국민적 관심이 컸다.
2 유치과정
원래는 1970년에 개최 할 뻔 했지만 그 당시 제3공화국이 북한의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 등 군사위협이 있었던데다가 서울시가 각종 건설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서울시의 재정이 별로 안 좋아서[1] 태국의 방콕에게 유치권을 위임하면서 사실상 개최를 포기하게 되었던 것을 16년만에 개최하게 되었던 대회였다.
사담 후세인이 나선 이라크의 바그다드는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북한의 평양직할시까지 후보로 나온 터라 한국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그다드는 당시 가장 불리했는데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진 상황에 제대로 후보로 내세울 게 있어야지.... 물론 이라크 측은 전쟁을 일찍 끝낸다고 밝혔었으나 알다시피 전쟁은 1988년까지 이어졌다. 가장 큰 상대가 북한 평양이었다.
하지만 1981년 9월 30일 19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확정되면서 덩달아 아시안게임도 서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되었고 이에 바그다드와 평양이 모두 유치를 포기했다. 결국 올림픽 버프를 받아 서울이 수월하게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결국 북한은 뭐하러 능라도 경기장을 지었는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3 경기장
- 골프 - 한양CC
- 농구 - 잠실실내체육관
- 레슬링 - 국군체육부대 상무체육관
- 배구 - 한양대학교 체육관
- 배드민턴 -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 복싱 - 잠실학생체육관
- 볼링 - 동서울볼링장
- 사격 - 태릉국제사격장
- 사이클 - 올림픽 벨로드롬
- 수영 - 잠실종합운동장 수영장
- 승마 - 과천 승마공원, 원당종합마술경기장
- 양궁 - 육군사관학교 화랑양궁장
- 역도 -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 요트 -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
- 유도 - 새마을88체육관
- 육상 - 잠실종합운동장
- 조정 - 미사리 한강 조정 카누 경기장
- 체조 -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 축구 - 잠실종합운동장, 동대문운동장, 구덕운동장, 한밭종합운동장, 무등경기장, 대구 시민운동장
- 카누 - 미사리 한강 조정 카누 경기장
- 탁구 - 서울대학교 체육관
- 태권도 -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체육관
- 테니스 -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
- 펜싱 -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
- 하키 - 성남종합운동장
- 핸드볼 - 수원실내체육관
당연한 얘기지만 2년 후 1988 서울 올림픽과 종목별 경기장이 거의 대부분 같다.
4 경기 결과
대한민국은 금메달 93개, 은메달 55개, 동메달 76개를 획득하여 금메달 94개, 은메달 82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한 중국에게 한 끗 차이로 밀렸다.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아시안 게임에서 종합 우승을 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안습.[2] 금메달 수가 아닌, 전체 메달 수에서는 대한민국이 1위라(대한민국 224개, 중국 222개) 엄청난 성과를 보인 아시안 게임인 것은 맞다. 그리고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많이 이용했다.[3]그리고 28년 후에 초반 1위를 달리는데.....
대한민국은 복싱 12체급을 전부 우승했다[4]. 도리어 태권도는 8체급 중 하나를 놓쳤다.
일본 유도가 대한민국에 개발살이 났다. 금메달 8개(7체급+무제한급, 남자부만 실시) 중 대한민국이 6개, 일본이 2개를 가져갔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편파판정, 자국 버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비판을 받는 경기이기도 하다.
유치경쟁에서 밀려서 감정이 상한 북한에 동조한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라오스, 몽골, 남예멘, 시리아가 대회를 보이콧하였다.[5] 시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불참국들은 2년 전 올림픽에도 불참한 반면,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불참국들은 2년 후 열린 1988 서울 올림픽에 모두 참가하였다. 물론 북한은 죄다 보이콧을 날렸지 이에 따라 참가국 수가 직전 대회인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직후 대회인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보다 적었다. 그냥 중국 빼고 공산권 몽땅 불참이라고 보면 맞다. 하지만 중국 하나 덕에 이들의 부재감이 사라진 듯.[6]
하지만 북한은 보이콧만으로도 모자라 이 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아랍계 테러범에게 사주를 내려 1986년 9월 14일,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바람에 5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서울올림픽도 보이콧한 상태에서 약 1년 뒤인 1987년 11월 29일에는 1988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방해할 목적으로 미얀마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킨다. 이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다.
5 마스코트
이름은 호돌이(Hodori)이다. 1988년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와 이름이 같은데 아시안게임 당시에는 위의 마스코트를 사용하였다.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프로토타입(?) 되시겠다. 호랑이보단 고양이같다?
6 이모저모
- 이 대회에 참가한 아시아 국가들은 2년 후에 같은 도시에서 열리게 되는 1988 서울 올림픽 대회에도 다시 참가하게 되어서 2년 간격으로 같은 도시에서 국제 대회를 경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은 19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을 양대 행사로서 정권의 부족한 정당성을 땜질하고, 위세를 과시하며 국민들을 스포츠에만 눈에 돌리게 하는데 했다. 하지만 그만큼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5공 정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 항목 참조.
- 대한민국 남자축구는 이 대회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아시안게임 출전 사상 3번째이자 20세기 마지막 우승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3위 -
목메달4강 - 3위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하여 28년만에 금메달을 획득했다!서울에서 우승하고 옆동네 인천에서 우승하는데 28년 걸렸다.
- 한편 1986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철도 수송의 후진성이 다시 드러났다. 당시 여객철도차량의 노후화라든지, 70년대 초 지어져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물동량이 시작된 경부고속도로를 필두로 한 도로교통의 급성장으로 철도교통이 얼마나 쇠락해갔던 것. 이런 후진성을 혁신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새마을호 PP 동차나 무궁화호 NDC 동차 등이 속속 개발되었고, 나아가 1987년 12월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공식적으로 경부고속철도의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게 된다. 실제로 2010년대 기준으로 현재 볼 수 있는 여객 철도의 골격이 이 때를 전후해서 형성되었다. 그 이전의 것은 2004년을 기점으로 쇠퇴해 갔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 이후 탄생한 새마을호 PP 동차가 27년을 달리고 2013년 1월에, 무궁화호 NDC는 24년을 달리고 2010년에 잠들었다.
- 태권도가 최초로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이 되었다. 남자부만 8체급으로 실시하였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7체급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땄다.
- 이때 조직된 자원봉사자회는 그대로 88년까지 이어져 계속 활동했다. 다만 86년 아시안게임 때는 자원봉사자들의 외국인에 대한 과잉친절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당시 86 아시안게임은 국가 규모로 여는 최초의 대형 스포츠 대회였기 때문에 시대 분위기상 자원봉사자들이 사명감과 긍지에 불타올라 경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을 좌석 앞까지 일일이 들어주기도 하고, 알아듣지도 못 하는 영어에 무조건 예스를 연발한다거나 심지어 외국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짐까지 들어주는 경우가 있었는데[7] 정작 내국인에 대한 친절은 이것보다 못 하여 비굴한 친절이라며 조직위 내에서도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점은 서울 올림픽에 가서야 다소 개선된다.
그런데 정작 28년 뒤에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이보다 후퇴한 모습을 보여준다
- 개최일 전날이 추석연휴기간 마지막날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편성된 추석특집프로그램 중에서는 아시안게임 참가선수가 나오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1986년, 1989년, 1996년에 나온 TV광고 영상 중에서 1분 29초 ~ 6분 23초 사이의 영상을 보면 서울아시안게임 특집프로그램 예고, 아시안게임 중계프로그램 예고, 아시안게임기간 중에 방송되는 특집 예능프로그램 예고와 추석특집프로그램 오프닝 영상이 나온다. 이중에서 추석특집프로그램 오프닝영상을 보면 '아시안경기대회 참가선수와 함께'라는 내용이 나온다.
- ↑ 1960년대 후반에
당대 건설업계에 빛을 준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세운상가 건설이나 강변북로 건설, 여의도 개발 사업, 고가도로와 지하도 건설,흑역사시민아파트 건설 등 각종 건설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이중 상당수가 당장 돈이 들어올리가 없는 사업이었던지(...) 서울시의 재정이 크게 악화되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말 그대로 모라토리엄 확정되거나 중앙정부에게 돈을 벌리거나 했을것이다. - ↑ 승부가 마지막 날 밤에야 결정된 터라 그 날 밤에는 경기를 중계해주면서 금메달 숫자를 자막으로 속보 띄워주기도 했다. 우리나라로서는 허재가 중국과의 농구 결승전 도중 발목부상을 당해 5분밖에 뛰지 못해 금메달을 내준 것 등, 당일 중국과 금메달을 겨뤘던 경기들이 아쉬울 따름.
- ↑ 편파판정 같은것도 있지만 아시안게임이 올림픽에 비해 개최국이 경기종목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권한이 더 많다. 양궁 같은 경우 이미 세계대회가 그랜드피타 방식(요즘의 올림픽 양궁을 생각하면 된다.)으로 경기를 한데 비해 서울 아시안 게임은 구식인 더블라운드 방식(육상이나 수영처럼 거리에 따라 세부종목을 많이 두는 방식. 당연히 금메달 수도 훨씬 많아서 김진호 선수가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개인전 단체전 2개만 있는 요즘 방식에서는 3관왕은 불가능하다.)을 채택했었다. 당연히 다른 나라도 자국에서 개최하는 아시안게임에 자국에 유리한 경기종목을 많이 집어넣곤 한다.
- ↑ 직전 대회인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는 7체급 우승했기에 원래 실력에 개최국 버프까지 받은 셈
- ↑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군이 점령 중으로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철수할 때까지 사실상 소련 식민지. 몽골/남예멘/베트남/라오스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다. 시리아는 김씨 왕조와 친분이 두터운 독재 정권으로 김일성 사망시 국가적으로 조기를 게양하기도 했고 현재도 대한민국과 미수교 상태이다.
- ↑ 사실 중국은 소련과 반목하는 사실상의 독자 공산 국가였던데다 한국과는 1983년 5월의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 잘 해결되면서 관계가 그리 나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차기 대회 개최를 천명한 마당에 서울 대회에 불참하게 되면 모양새가 매우 안 좋았던데다 아시안 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올림픽 개최까지도 노리고 있었기에 두말 않고 서울에서 개최된 두 대회 모두 참가했다.
- ↑ 중동에서는 남의 짐을 들어주면 하인 취급을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