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px |
PC통신 업체중 하이텔의 이미지이다. |
목차
1 개요
PC를 통하여 통신을 하는 것. 자생적으로 생긴 용어가 아니고, "PC"+"통신"이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개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용어이다. 용어의 주창자는 전 한글과 컴퓨터의 부사장이자 드림위즈의 부사장을 지낸 박순백으로,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던 파소콘통신(パソコン通信)이라는 명칭을 직역하여 가져온 것. 1990년대 초반에는 '컴퓨터통신'이라 불렸다.
사전적 의미로 따져 보자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인터넷도 PC 통신이라고 할 수가 있으나, 실생활에서 'PC통신'이라는 단어는 '전화망을 이용하여 제공되는 비디오텍스, BBS 등의 서비스'를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기술적으로는 망에 연결만 됐다 하면 별다른 제약 없이 개방되어 있어서 이론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는 어떠한 컴퓨터라도 연결 가능한 인터넷과 다르게 PC통신은 고정된 전용 망 또는 일반 유선 공중전화망(PSTN)과 모뎀을 통해 연결되며, 연결되는 반대편에서 사전에 정해진 사업자 또는 개인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폐쇄적인 형태였다. 이 시대에 'PC통신'을 사용해본 사람들에게 'PC통신'이라 하면 텍스트만 주구장창 나오는 화면을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이때 쓰던 것은 VT, 지금 쓰는 것은 1990년 말에 발표된 WWW.
PC통신 자체는 일종의 PC를 이용한 데이터 통신이라 할 수 있지만 PC를 이용한 데이터 통신 자체는 PC통신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1984년 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이 그 시초로, 1985년 생활정보 DB, 1986년 화상정보 서비스였던 천리안[1], 1987년 한글전자사서함(H-mail)까지 여기저기 서비스되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8~90년대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여기에 대한 추억이 많다. 옛날 분들에게 PC 통신에 대해 말들을 하면 꼭 뻔한 말들을 하는데, 그중 몇 가지를 끄집어 내보자면.
- 모뎀에서 '삐~삐~'하는 소리, 속칭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접속된다.# 이 사운드를 샘플링해서 만든 노래도 있다! feed me의 dialup days. 맨 처음 도입부에서 나온다.
- 문제는 이 소리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소리 끄는 것을 잊고[2] 밤에 몰래 PC통신을 하다가 들켜서 매우 맞게 되는 주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 그래서 이 소리를 들으면 애증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면 게시판 주소로 들어가 게시물 번호를 타이핑해야 한다. 물론 검색기능도 있었으므로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았다.[3]
- 머드게임을 지겹게 해봤다. 그리고 전화요금 고지서를 받아보고는 경악했다.
- PC통신을 하던 중에 전화가 안돼서 혼났다. 또는 PC통신으로 중요한 것을 하던 중에 전화가 오는 바람에 통신이 끊겼다.[4] 이걸 통신장애, 줄여서 '통장'이라고 불렀다.
PC통신 사용자의 폭력성을 검증하기 위해, PC통신으로 한참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전화를 걸어 보겠습니다.
- 한달 전화요금이 10만 원 이상 나온다. 거기에 정보이용료까지 더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 나온다. 특히 인포샵 같은 곳에서 서비스되던 사설 BBS의 정보이용료는 분당 20원 같은 나름 양심적인 요금제도 있었으나 kbyte 당 2~3원 같은 괴악한 요금을 매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곳에서 자료를 받을 경우 전화요금 폭탄 맞기 십상.[5] 모뎀 샀다고 좋아하다가 20~30만원 폭탄이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결국 그 다음 수순은 부모님에게 죽을 정도로 맞는 것. 특히나 머드에 중독되어 잉여인간이 된 어떤 이는 총 이용 요금이 100만원 넘게 찍히는 경우까지도 있었다.[6] 이쯤 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도이다.
8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온 PC통신의 시기를 흔히 '낭만기'라고 부르며 이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이 시기에 대한 향수 같은게 으레 남아있기 마련이다. 80년대 사설BBS 엠팔을 다룬 당시 취재프로그램 [7]
별로 회수하고 싶게 생기지 않은 하이텔 단말기
여담으로 90년대 중반에는 한국통신(현 KT)에서 PC통신의 인기가 높아지자 01410 접속만 가능한(즉 채팅이나 정보 검색만 가능하고 파일 다운로드 따위는 안 되는) 브라운관에 키보드만 달랑 달려있는 단말기를 무상으로 대여해주기도 했다. 내장되었던 모뎀의 속도는 2400bps. 그런데 막상 한국통신에서는 사람들에게 대여해 준 후 회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이후에도 이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존재한다. 옥션 같은 곳에서 골동품 전문 업자들이 판매하기도 하니 혹시나 자신이 골동품 수집에 관심이 있거나 추억을 다시금 되새기고 싶다면 한번 찾아보자.
하이텔 단말기는 전화국에서 대여해주었고 90년대 초에는 전자전시회 한 켠에 요즘 PC방처럼 부스를 차려놓고 사람들이 PC통신하기도 했다.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컴퓨터 보급율이 올라가면서 기능면에서 떨어지는 터미널은 인기가 없어졌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장부상 감가상각이 끝났는 지 무료로 가져갈 수 있도록 조치한 전화국도 있었다. 이 기계가 시리얼 터미널이라서 리눅스머신에 연결하면 그대로 한글되는 텍스트 터미널이 되었다. 당시까지는 리눅스 시작 화면은 텍스트화면었고 X는 따로 띄우던 때라 다중사용하는 용도로 쓴다는 무용담도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데, KT기준 01410 접속시 삐- 거리며 접속된다.
2 PC통신 환경
2.1 요금
저 중에 5번째 얘기는 1990년 이후에 PC통신을 접한 사람들 이야기. PC통신 태동기였던 1987~89년까지만 해도 전화요금이 도수제로, 시내통화는 한 통화에 20원이었다. 한 번 걸면 통화시간에 관계없이 전화 끊길 때까지 무조건 20원이었기 때문에, 이 때만 해도 전화요금은 사실상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시분제(시간단위 종량제)로 바뀐 것은 1990년으로, 3분당 20원의 요금을 매기게 되었다. 이 때부터 전화요금 10만원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이 시절을 살아온 세대들은 인터넷 종량제를 가장 격렬히 반대한다.
90년대 초반 기준 물가는 대략 과자나 아이스크림이 200원, 서울지하철 1구간 요금이 170원, 칠성사이다 한병이 300원하던 시절. 그런데 그 시절에 한 달에 몇 만원이라는 거금이 통신비용으로 나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2015년 지금도 휴대폰 요금 5~6만원 나오는게 비싸다는 여론이 많으니 물가 차이가 많이 나는 그 때는 오죽했을까. 한달 전화요금 10만원은 말할것도 없고, 아무리 적게 쓸려고 노력을 해도 보통 3만원은 나왔다.
이러다 보니 같은 시간에 말 한 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들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축약형 통신어체(ex: 걍, 방가방가 등)가 발달했다. 지금의 통신체의 밑바탕이 되는 어휘들은 이 때 거의 다 생겨났다. 오늘날엔 초딩으로 주로 쓰이는 ~딩 형식의 조어도 여기서 만들어졌다. 고등학생 유저를 고등어라 부르던 게 시작형으로 그 후 고딩으로 변형, 정착된다. 요샌 ~딩이 비속어 내지는 멸칭에 가깝게 쓰이지만 원래는 애칭에 가까운 말이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래서 읽고 싶은 글을 보면, 읽기보다 갈무리를 먼저 하고, 나중에 PC통신을 종료한 다음 갈무리한 것을 불러내서 천천히 읽던 게 당시의 풍경.[8]
원래는, 지역별로 전화번호라는게 있어서, 접속 에뮬레이터(이야기 등)에 전화번호를 입력해서 접속하는 방식으로, 각 동네별로 접속 전화번호가 다 달랐다. 설상가상으로 접속전화번호가 없는 지역의 경우에는 다른 지역의 번호를 입력해야하는데, 그러면 당연히 시외전화로 분류돼서 몇십만원 수준의 전화요금을 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9]. 그나마 1990년대 초반부터는 01410등과 같은 전용 번호를 입력하면 될 정도로 많이 편해지기도 했다. 이 전용번호는 전화요금 30% 할인도 적용되었다.
한편 지나치게 비싼 가격탓에 전용 번호에 한해서 정액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1997년 4월에 시작된 야간정액제는 014XY로 접속되는 전용망의 경우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공휴일은 전일에[10] 별도과금없이 접속되었었다. 요금은 한국통신은 2만원, 하나로통신은 1만7천원으로 보통 월정액 2만원 안팎.
그리고 PC통신과 일반전화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아예 PC통신 전용으로 전화선을 따로 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수능등이 끝난 수험생들에게 보증금을 받지 않고 싼 값에 전화를 놔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이것을 이용해서 전화선을 집에 하나 더 설치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참고로 전화에 보증금이 왜 붙었나 하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화기는 부유층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어서 전화 놓을 때 전화요금을 못 낼 경우를 대비해서 받아 두는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세집 빌릴 때의 보증금과 같은 개념으로, 해지시에는 돌려준다. 2001년 4월 15일에 전화 가입방법이 변경됨에 따라 폐지되었고 기존 가입자들에게는 보증금을 돌려주고 있다. 만약 집전화를 오랫동안 사용중이라면 이거 꼭 확인해보자. 단,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굳이 찾을 필요는 없는데 이런 설비비부담형 전화는 요즘 사용하는 집전화에 비해 기본료가 2000원정도 저렴하다. 연간 24000원정도 차이라는 소린데, 보증금은 보통 17~20만원 정도. 저 돈 찾아서 어디 은행에 넣어도 저만큼 이자가 안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자로 따지면 연 10%는 가볍게 넘는 상당힌 고금리이다.
2.2 회선 환경과 속도
지금이야 전용선이나 100메가급을 넘어서 기가인터넷이니 뭐니 하지만, 예전엔 전용선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모조리 전화선을 통해서 통신을 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전화선을 이용한 만큼, PC 통신 도중에는 전화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방에서 모뎀으로 접속하던 중에 누군가가 전화기를 들면 전화기에서는 "치이이이익~~~"하는 굉음이 쏟아지고, 동시에 PC측에서는 접속이 끊기는 안습한 상황이 발생했다. 뭐 다운이라도 받던 중이었다면 그대로 망했어요. (이어받기 정도는 되지만...)
1995년 후반 ISDN이라는 것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한 개의 회선으로는 전화와 PC통신(인터넷)을 동시에 할 수가 없었다. ISDN이외에도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CO-LAN이나 TT[11]선같은 서비스를 통해 전화와 PC통신을 1회선에서 동시에 사용 가능했다. 문제는 그 당시 ISDN용 장비가 고가인데다가 이용료도 비쌌기 때문에 진짜 돈많은 사람만 이용가능했고, 나머지는 가격은 정액제였지만 서비스가 지역에 따라 제한되는 등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는 머나먼 당신이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안습한 현상이 지속되었다.
PC통신 속도는 80년대에는 1200bps와 2400bps가 주류였고, 90년대 초 9600bps를 거쳐 90년대 중반 14400bps, 28800bps, 33600bps를 차례로 거쳐,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에는 56000bps까지 향상됐다. 하지만 저 속도는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속도였고, 실제 속도는 회선 상황에 따라 대략 3~40000bps정도밖에 안 나왔다. 이런 속도가 감이 안 잡힌다면 2400bps는 1초에 2400비트를 전송받는 속도니까, 초당 대략 240바이트.[12] 1메가 전송받는 데 얼추 58분정도가 걸렸고, 나무위키의 본 문서(PC통신) 자체의 크기도 13KB 정도이므로 이 항목의 텍스트만 받는데 43초정도가 걸린다(...). 이게 어떤 속도냐면, 2400bps 이하로 접속했을 때에는 텍스트 나오는 속도가 읽는속도보다 느리며 9600bps정도 되야 속도가 맞는다. 당연히 2400bps 시절에는 자료실은 거의 있으나마나했고(그나마 자료 자체도 거의 없었다) 게시판이나 채팅 정도가 주 용도였다. 그래서, 백그라운드로 다운로드받으면서 게시판 글을 읽는다든가, 사진과 음악파일을 받으면서 재생하는 기능이 유행했다.
1990년대 후반에 56000bps시절까지 오게 되면 그래도 이미지 정도는 1분 이하(!)면 다운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그 당시엔 이미지 자체가 작았다. 1.4MB에 크기는 10cm 가량이 넘어가는 플로피디스크가 PC통신이 망할 때까지 꿀리지 않는 저장매체로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림 한장에 몇십메가 따위는 이 시절엔 먼나라 이웃나라 얘기였다!요즘도 그렇지 않나), 동영상은 여전히 시궁창이라 겨우 애니 한편 찾아서 받으려면 저화질이어도 반나절은 넘겼다.[13] 하지만 당대의 컴퓨터 용량사정을 봐선 이 정도 속도는 충분했다. 어차피 속도 때문에 큰 자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잘해봤자 MP3 정도나 동영상 클립 정도가 자료실에 있는 가장 큰 자료였다.[14]
재미있는 것은, 그 시절의 음성/동영상 클립을 가져다 현대의 코덱으로 비슷한 화질로 재인코딩 해 보면 용량이 상당히 줄어든다. 코덱의 압축기술이 그 동안 크게 발전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고압축 코덱은 필연적으로 높은 계산량을 필요로 하므로 용량은 줄어든다고 해도 그 당시 컴퓨터로 가져간다면 사용은 어렵다.
2.3 사용방법
먼저 준비를 갖춰야 한다. 컴퓨터 혹은 하이텔 단말기를 같은 것을 준비한 다음, 컴퓨터는 모뎀을 사다가 달고 전화기를 달 듯이 전화선을 모뎀이나 단말기에 연결한다.
컴퓨터에서는 이야기 같은 PC 통신용 터미널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명령어와 전화번호를 치면 자신이 가입해 있는 PC통신 서비스 회사를 찾아서 통신 터미널 프로그램으로 다이얼을 건다. 이 때 컴퓨터 스피커에서 기괴한(…) 소리가 난다.
접속이 된 다음은 ID와 패스워드를 입력하여 해당 서비스에 로그인을 한다.
접속되면 VT에서는 텍스트로서 기본 매뉴를 전달해주는데 각 메뉴별로 앞에 번호가 써있다. 하지만 PC통신에는 다양한 서비스와 게시판이 존재하고, 번호를 일일이 쳐서 들어가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므로 불편하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일일이 클릭해서 들어가는 것보다 좀 더 번거롭다고 보면 된다.
이를 위해서 있는 것이 go 명령어이다. go는 지정된 키워드로 서비스를 곧바로 찾아가는 명령어로서, 예를 들어서, go humor라고 치면 유머 게시판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다. 이건 인터넷 사이트들도 본받아야 한다.[15]
그리고 각 서비스 별로 매우 다양한 명령어들이 있으며, 이는 서비스 제공사마다 달랐다.
그런데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 에듀넷은 대부분 명령어가 비슷했다. 이는 원래부터 하이텔의 014XY망이 국가 양대기간망 중 하나였기 때문인데, 01410 번호로 접속하면 하이텔로 바로 접속되는 게 아니라 일단 메인 서비스 화면이 뜬 후 별도의 서비스인 하이텔로 접속하여야 했기 때문.[16] 당연히 나우누리, 에듀넷, 유니텔은 하이텔 접속화면에서 접속할 수 있었다. 더럽게 느렸다 대신 한번 접속되면 수화기 를 들지 않는한 통장마왕 은 출현하지 않았다! 이후 01411 01412 고속접속(그래봐야 56K 가 최대 이지만)도 가능했다!
반면 천리안은 그런 거 없이 바로 01420이라는 전용번호로 접속했는데 이는 천리안이 전신이 KT(당시 한국통신) 기반이 아닌 '한국데이터통신'이라는 별도 기간망이었기 때문. 그래서 명령어체계가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자유게시판이라지만 사실상 정치시사 게시판이었던에 접속하려면 하이텔이나 나우누리는 go plaza 였지만, 천리안은 go word 라고 입력했다. 또한 게시물 검색에서도 하이텔 기반은 gl 명령어로 검색했는데 반해 천리안은 subj라는 명령어를 사용했다.
3 현재의 모습
1999년 3월 말 ADSL 기반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고 7개월 후인 10월 말에 국민PC가 국가 주도 하에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2000년부터 초고속 인터넷과 PC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PC통신은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각 가정마다 초고속 인터넷에게 처참히 발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안습에 안습을 거듭, 급기야 2004년에 천리안이 문을 닫고, 2007년 2월 28일에 하이텔도 닫고야 말았다. 기타 나머지 서비스들도 문을 닫은 상태. 마지막 남았던 나우누리 역시 2013년 1월 31일 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PC통신이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금도 일부 사이트 기사는 그 때의 향수를 잊지 못해 디자인을 PC통신 특유의 진한 파란색 바탕에 고정폭 폰트의 하얀색 글자로 해 놓기도 하고 있다. 정확히는 PC통신용 에뮬레이터, 지금으로 치자면 익스플로어나 파이어폭스에 해당하는 '이야기'나 '새롬 데이터맨' 같은 프로그램의 기본설정 값이 파란바탕에 하얀 글씨였다. 물론 설정에서 바꿀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유저들이 이 기본값을 고수했다. 그리고 하이텔의 직계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란은 2009년 만우절이벤트로 파란 화면을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채우기도 했었다. 알지롱 역시 파란 화면에 하얀 글씨를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있다.
대부분의 PC통신 사업자들이 포털사이트를 운영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긴 있으나 유니텔과 천리안을 제외하고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물론 유니텔과 천리안도 방문자수가 시망인건 마찬가지. 파란과 나우누리는 아예 망했다.
현채 추억삼아 HoneyJar BBS같은 사설 BBS도 운영되고있다. 방문자수가 시망이지만 운영자가 답글을 달아주는등 한번쯤 들어가보는것도 나쁘진 않다.
4 현재 남아 있는 PC통신의 영향
의외로 현재 존재하는 인물, 단체 중에 PC통신에서 출발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이우혁은 퇴마록을, 이영도는 드래곤 라자를, 전민희는 세월의 돌, 김경진은 데프콘을 하이텔에서 연재하면서 판타지 소설을 시작했으며, 커그도 나우누리 SF게시판에 활동하던 판타지 작가들이 연합하여 만든 커뮤니티이다. 소프트맥스는 PC통신 동호회에서 출발했고, 대한민국 힙합의 태동은 귀국파 + pc통신파였다. 사실 귀국파들도 영어 랩에는 능통하지만 한국 가사를 만드는 데는 좀 부족해서 라이벌이기도 하며 또 주요 고객층이기도 한 pc통신에 무지하게 신경 썼다는 걸 생각하면 영향이 크다. 국내 인디/모던락의 성장을 이끌던 것도 PC 통신이었다. 지금도 활동하는 언니네 이발관은 하이텔의 모던록 소모임이었던 "모소모" 회원이었던 이석원이 당시 지인들과 만든 밴드였고, 로다운30을 이끄는 윤병주는 모소모의 시샵이었다. 무엇보다.. 국내 인디의 전설이 아닌 레전드 델리스파이스는 모소모에서 회원들이 결성한 밴드다! 더이상 말이 필요한지? 이 나이대의 인디1세대들이 엄청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 PC통신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사람들은 매우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초창기 게임 멀티플레이 역시 PC통신 게임동호회[17]를 통해 시작되었고 스타크래프트까지 이어져 프로게이머의 효시가 되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도 나우누리 유머게시판에서 '견우74'란 아이디의 유저가 연재하던 것이다.[18]
인터넷 게시판의 형태도 PC통신의 유산이다. 맨 위의 스크린샷을 보면 알겠지만 PC통신 게시판의 번호, 제목, 아이디/이름, 조회수, 추천수 등이 나오는 형태는 순서만 다를 뿐 현재 국내에서 쓰이고 있는 인터넷 게시판의 형태와 똑같다. 이것은 PC통신 대중화 시절에 수많은 인터넷 게시판 프로그램이 나왔고, 이들 프로그램이 거의 대부분 PC통신의 게시판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2013년 현재 인터넷 게시판이 이런 식으로 발전하여 자리잡은 곳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고, 이것은 외국에서 개발된 포럼형 게시판이 국내에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9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 전화접속 서비스를 시도한 외국 BBS도 있었지만 전부 뭍혔다.
이미지 파일 포맷인 GIF도 PC통신의 산물이다. 미국의 PC통신 서비스인 컴퓨서브에서 자사의 이미지 서비스를 위해 개발한 포맷이기 때문이다. 통신망에 최적화된 포맷[19]이기 때문에 인터넷 시대에서도 JPG, PNG와 더불어 널리 쓰이는 이미지 포맷이 되었다.
5 당시 PC통신 업체
- 하이텔 - 전신은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운영했다 KT계열이 인수한 케텔이었다.(KETEL) 파란닷컴으로 넘어갔다가 2012년 6월 폐쇄.
- 천리안 - 데이콤의 PC-Serve가 전신인 서비스. [20]
- 나우누리 - 2013년 1월 31일 서비스 종료.
- 유니텔 - 삼성SDS에서 운영. 현재는 포탈 사이트로 변경. 그리고 플래티넘 회원 한정으로 전용 클라이언트 서비스를 여전히 지원하고 있다.
- 넷츠고 - SK텔레콤에서 운영. 후에 네이트로 흡수.
- 신비로 - 전신은 현대전자 시절 동사에서 근무하던 김택진 씨가 1995년에 만든 국내최초 인터넷 기반 PC통신 서비스인 '아미넷'이었다. 이후 1996년에 현대정보기술(주)로 이관되면서 '신비로'로 바뀌었다가 1999년부터 모기업인 현대그룹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온세통신으로 서비스가 넘어갔다.
- 엘림네트
- 채널아이 - LG멀티미디어인터넷이라는 회사가 운영. 후에 천리안과 합병됨 (현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
- 에듀넷 - 당시 에듀넷에서도 PC통신망을 구축하였으나, 21세기 초에 사라졌다.
- 미니넷
- 키텔 - 당시 잘 없던 무료 PC통신. 강원도를 주축으로 한 통신망이었다. 인터넷전화 붐이 일 때 갑자기 VoIP 업체로 갑툭튀하더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 KIS - 한국전력에서 운영하던 무료 PC통신.
- KIDS - 한국통신의 인터넷 IPS인 Kornet에서 운영하는 서비스. 텔넷으로만 접속이 가능하
고, 아직도 살아 있다. - 사설 BBS
6 PC통신의 어두운 면, PC통신 검열
요즘 세대들은 아예 모르는 사실인데, PC통신도 요즘의 인터넷 검열 못지않게 검열이 만연했다.
그 예시가 바로 1990년대부터 2002년 위헌 판정 이전까지 온라인망 최대 악법으로 통했던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의 단속)[21] 과 동법 시행령 제16조(불온통신)였다. 이러한 법 조항의 문제점은 1990년대 초~중반경 PC통신의 대중화로 인한 이용자 급증에 따라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 법으로 인해 정치나 시사 관련해서 민감한 게시글을 쓴 사람들이 정보통신부 명령에 의해 아이디 정지부터 게시판 폐쇄까지 당하거나 더러는 수사기관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다. <'98 사이버 권리 백서> 머릿말에서 정보운동가인 김영식 씨의 말에 의하면 PC통신 게시글은 아래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얘기했다.
첫 번째 단계 : 검찰, 경찰, 안기부, 기무사 두 번째 단계 : 정통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세 번째 단계 : 상업통신망의 모니터링 요원 네 번째 단계 : 통신인들의 여론 재판 다섯 번째 단계 : 동호회 시삽 여섯 번째 단계 : 자기검열 |
대표적으로 1993년에 사노맹재건위의 게시글을 올리다 게시판이 이틀간 닫히고 운영자가 구속된 천리안 현대철학동호회 사건과 1994년 현철동 <공산당 선언> 게시 사건, 희망터 김일성 신년사 게시 사건, 1996년 대선관련 통신 단속, 한총련 CUG 폐쇄, <그들이 무장간첩인가> 게시글 사건이 있었고, 그 외에도 DC인사이드의 대표 김유식머튽님-은 이 일로 인해 보안분실까지 끌려갔던 전력이 있다. #
특히 1997년 8월 26일부터 9월 13일까지 통신검열 철폐를 위한 시민연대(이하 통신연대)에서 실시된 '통신연대 97년 검열백서 설문조사팀'이 실시한 설문조사 중 '정부기관과 통신업체의 검열에 대한 설문' 결과에서 응답자의 30%(29.8)가 검열이 있다고 응답했고, 다른 사람이 올린 글이 제재받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느냐는 문항에서는 73%(73.6)가 있다고 응답했다. 결국 10명중 3명이 직접 정부나 통신서비스 업체에 의해 제재를 받았으며 7명이 간접적으로 검열을 실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주로 정치/사회 이슈분야가 많았다. 이것이 PC통신망에서도 검열이 횡행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해당 조항은 2002년 6월 24일에 위헌 판정을 받고 그해 12월부터 '불법통신'이란 명칭으로 바뀌었고 시행령 제16조는 2003년에 제15조의 2(불법통신의 취급정지명령 등의 요청)로 바뀌었으며, 2007년 1월에 제53조의 경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옮겨지는 형식으로 폐지되었으며, 시행령 제15조의 2는 동년 7월에 폐지되었다.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자.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 (불온통신의 단속) ①전기통신을 이용하는 자는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량속을 해하는 내용의 통신을 하여서는 아니된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한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량속을 해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통신의 대상등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③정보통신부장관은 제2항의 규정에 의한 통신에 대하여는 전기통신사업자로 하여금 그 취급을 거부·정지 또는 제한하도록 명할 수 있다. <개정 1996·12·30> |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제16조 (불온통신) 법 제53조제2항의 규정에 의한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양속을 해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전기통신은 다음 각호와 같다. 1. 범죄행위를 목적으로 하거나 범죄행위를 교사하는 내용의 전기통신 2. 반국가적 행위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내용의 전기통신 3.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해하는 내용의 전기통신 |
- 관련 자료
7 해외의 PC통신
일본에서도 PC통신(パソコン通信)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애칭은 파소츠(パソ通). 한국통신이나 데이콤 등 통신회사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던 한국의 PC통신과는 달리, NEC나 후지쯔 같은 컴퓨터 제조회사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다. 유명한 PC통신 서비스로는 아스키의 ASCIInet, NEC의 PC-VAN, 닛쇼이와이[22]와 후지쯔가 합자한 NIFTY-Serve 등이 있었다.
다만 이쪽은 한국 PC통신보다 몰락이 빨랐다. 일반인들에게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1995년경부터 이미 쇠퇴기를 걷고 있었으며, PC통신을 운영하는 회사들도 빠르게 ISP로 주력 사업을 변경하게 되었다. 결국 ASCIInet은 1997년에, PC-VAN은 2001년에, NIFTY-Serve는 2006년에 서비스를 종료하였다. 한편으로 PC통신과 별개로 캡틴 시스템이라는게 있는데 프랑스의 미니텔과 비슷한 형태이며 이쪽은 사무용으로 주로 쓰였다. 어쨌든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2002년에 서비스 종료.
일본의 PC통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 만화를 읽어볼 만하다. PC통신 입문서와 러브 코미디를 섞어놓은 듯한 물건.
프랑스에서는 미니텔이라는 이름의 PC통신이 2012년까지 영업하였다. 이쪽은 갈라파고스화의 한 예로 거론된다. 해당항목 참조.
미국에서는 대형 PC통신으로 CompuServe와 AOL이 존재했었다. 현재는 두 회사(라기보단 이미 AOL이 CompuServe를 인수한 지 오래지만) 모두 인터넷 위주로 서비스를 재편한 상태. 그리고 미국은 사설 BBS 문화가 많이 발달된 편.
MSN은 처음 서비스 시작 당시에는 PC통신 형태의 서비스였다. 1년도 안되서 ISP 및 포털 사이트 체제로 변경되었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실패 사례로 남아 있다.
당연하겠지만 PC통신 자체의 역사는 한국보다 많이 빨랐다. 한국의 PC사정상 PC 자체의 보급은 8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지만 주변기기의 보급은 많이 늦게 시작되었다. 미국, 일본만 해도 80년대 중반이면 300bps 모뎀은 물론 음향커플러[23]를 이용한 PC통신, BBS가 대유행했다. 당연 한국에서 PC통신을 할 때 쯤이면 300bps 모뎀은 이미 단종되었다.
8 관련용어 및 통신사별 공공 게시판
- ANSI
- BBS
- CUG(Closed User Group) - '폐쇄이용자그룹'의 영어 약자. 주로 폐쇄적인 동아리들이나 진보/재야단체, 노동조합 등이 이용했다.
- 갈무리
- 머드
- 무닉
- 번개
- 시삽
- 소모임
- 아스키 아트
- PC통신 유머게시판
- 큰마을 (하이텔)
- TE31 (하이텔 - 일명 서당)
- 미니텔
- 통신인 - PC통신 유저를 이르는 말.
- 통장 - '통신장애'의 줄임말.
9 에뮬레이터
9.1 범용 에뮬레이터
범용 에뮬레이터는 PC통신사에 상관없이 쓸 수 있었다. 초기에는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작동하는 방식이었으나 윈도우 등장 이후로는 명령어를 안 쳐도 텍스트를 클릭해도 되도록 변했다. 화면 자체는 그대로였지만.
- 이야기 - 도스시절 가장 유명했던 프로그램.
- 새롬 데이타맨 - 윈도우즈 등장 이후 가장 유명했던 프로그램. 웬만큼 PC통신을 즐긴 사람은 알 것이다.
- 신세대 - DOS 시절 말기에 나와서 잠깐 인기를 끈 프로그램이다. 이야기가 6.0부터 유료화되고 무료 버전의 버전업이 멈췄기 때문. 기능이 이야기 무료버전보다 좋은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거 쓰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후 PC환경이 윈도우로 넘어가면서 사라졌다. 한때 이야기의 기본 콘솔모드에서 프로그램을 강제로 프리징 시키는 다운안시(DOWN ANSI)가 유행했었는데 신세대의 VT220(확인바람) 모드에서 다운안시가 먹히지 않는 걸로 유명세를 타게되었다.
- 따르릉 - 김택진씨가 만들었다. 바로 그 분 말이다.
- 하이콤 - 한국통신(현 KT)에서 만든 프로그램. 하이텔 가입자 늘린다고 공짜로 배포했기 때문에 이거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쓰다가 이야기로 갈아타는 경우가 많았지만.
- 데이콤링크 - (주)한국데이터통신(현 LG 유플러스)에서 만든 프로그램. 천리안/PC-Serve 사용자를 대상으로 제작하여 무상배포하였고, 천리안을 통하여 서비스했던 학습프로그램은 이걸로 다운로드해야 구동이 가능하였다. 나중에 데이콤링크2(DL2)도 출시하였다.
- 하이퍼터미널 - 윈도우즈 95부터 지원. 윈도우즈 자체에 내장된 PC통신 에뮬레이터.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사실 이쪽은 PC통신 에뮬레이터보다는 통신 장비에 접속하기 위한 시리얼 콘솔 접속도구로 인기가 더 많았다.
- 한네트 - 아래아 한글에 포함된 프로그램. 윈도우 전용이며 3.0부터 97까지 수록되었다.
- 잠들지 않는 시간 - 새롬 데이타맨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프로그램이었다.
9.2 전용 에뮬레이터
각 통신사에서 제공했던 특정 통신사 전용 에뮬레이터.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설정을 조금 손보면 타 통신사도 접속은 가능했다. 범용 에뮬레이터로 해당 통신사에 접속시 현재의 인터넷 환경과 비슷하게 예쁘게 꾸민 아이콘과 화면을 클릭하는 방식으로 이용이 가능했지만 이 경우 속도가 좀 떨어졌다.그리고 겸사겸사 통신비도 더 나왔지 때문에 일부러 범용 에뮬을 쓰는 사람이 많았다. PC통신 접속 후 인터넷을 접속하던 초기 시절에는 웹브라우저처럼 쓰는 것도 가능했지만 일반 웹브라우저를 쓰는 게 더 나았다.
- 이지링크 - 하이텔 전용 에뮬레이터. 다른 전용 에뮬레이터에 비해 개발이 늦은데다 기능이 떨어져서 쓰는 사람이 적었다. 후에 하이텔99, 하이텔99 플러스, 하이텔2000으로 발전했다.
- 매직콜 - 천리안 전용 에뮬레이터. 이것도 개발이 조금 늦었지만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서는 기능도 괜찮고 버그도 적어 쓰는 사람이 있었다. 후에 천리안97, 천리안98을 거쳐 천리안2000으로 버전업되었다.
- 나우로 - 나우누리 전용 에뮬레이터. 나우누리 오픈과 함께 나왔기 때문에 쓰는 사람이 많았다. 버그도 적은 편이고 여러모로 안정적이었다. 버전 3.0때 웹브라우저와 통합하여 나우로 웹프리로 발전했지만, 버그가 쩔어줬기 때문에 결국 도태되고 만다.
- 유니윈 - 유니텔 전용 에뮬레이터. 다른 PC통신과 달리 유니텔은 전용 에뮬레이터가 아닌 경우 기능이 많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걸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프로그램 구성은 다른 전용 에뮬레이터보다 좋고 버그도 적었기 때문에 큰 불만없이 쓰였다. 후에 유니윈 스페셜 에디션까지 버전업되었다.
10 호스팅 프로그램
11 하드웨어
- ↑ 90년대의 천리안과는 다르지만 전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 ↑ 접속하기 전에 atm0라는 명령어를 입력하면 소리가 꺼지지만 이걸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몇몇 용자들은 과감하게 모뎀에서 스피커를 떼어냈다.
- ↑ 게다가 후기로 가게되면 대부분의 에뮬레이터 프로그램(이야기나 새롬 등)이 마우스로 게시물 번호를 클릭하면 게시물로 들어갈 수 있게끔 지원되고, 각 PC통신 업체에서 아이콘 클릭 위주로 동작하는 전용 에뮬레이터들을 선보이면서 이부분에 대한 불편함의 추억은 그리 많지 않다.
- ↑ 기본적으로는 접속중에 전화가 오면 그냥 통화중으로 처리가 되었지만, 전화국에 통화중대기 서비스를 신청한 경우에는 통화중 전화가 걸려올 때 뚜-뚜- 소리가 들리게 되는데 PC통신 중에는 잡음으로 인식되고, 결국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장시간의 PC통신 이용중 전화통화를 할 수 없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이를 이용하는 PC통신 이용자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자식이 PC통신을 너무 오래쓰지 못하도록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 끊어버리는 부모도 있었다는 사실.
자체 셧다운제 - ↑ 014XY 접속종료시 접속중의 정보이용료 표시기능이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이것이 0원으로 표시되는 버그도 있었다! 물론 요금청구는 제대로(...)
- ↑ 8~90년대라는 점에 유의할 것! 요즘 물가로 생각하면안 된다. 요새 물가로 치면 '2~300만원 정도는 족히 된다.
- ↑ 엠파스의 메일시스템과는 동명이적.
- ↑ 물론 이것 또한 14,400bps 이상의 모뎀이 대중화된 이후의 이야기이다. 저속 모뎀 쓸 시절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화면에 글 나오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느렸으니.
- ↑ 이때는 아예 시나 군 단위로 지역번호가 나가던 시점이라 군 경계 하나만 넘어도 시외전화로 분류되었다. 시외전화 지역번호가 지금처럼 광역시나 도 단위로 개편된 것은 2000년 7월부터였고, 이때는 이미 모뎀이 사양화되고 초고속 인터넷 전용선이 보급되던 시점이었다.
- ↑ 월 4만원 요금제가 해당되며, 월 2만원 요금제는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적용된다.
- ↑ Telephone to Telephone
- ↑ 2400비트는 300바이트지만 1바이트(8비트)마다 패리티와 스톱비트가 1비트씩 들어가므로 1바이트 전송시 10비트를 사용한다. 패리티를 생략하면 9비트.
- ↑ 당시 평균적인 PC성능상 고화질은 다운받더라도 재생이 힘들었다...
- ↑ 그냥 1.2MB 또는 1.44MB 자리 플로피디스켓 1개 에 들어갈 정도 의 자료! 가 아주 큰 용량의 자료 였고.. 당시 주로 쓰이던 386 또는 486 컴퓨터 를 사용하는 대다수 는 하드디스크 가 1GB 를 넘는경우 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560MB 짜리! 이거나 1.2GB 가 최고사양 이었다!
- ↑ DuckDuckGo에서는 '!'(!Bang) 기능이 있어서 '!namu'를 입력하면 나무위키로 이동된다.
- ↑ 2013년에 접속한 01410의 메뉴화면
- ↑ 대표적으로 하이텔의 개오동, 나우누리의 나모모. 특히 나모모는 동호회명부터가 나우누리 모뎀 플레이 모임 정도의 약칭이다.
- ↑ 이 당시 유머게시판의 글이 많이 출판되었다.
- ↑ 최대 256색이고, LZH 압축알고리즘 사용으로 용량이 작으며, 전체 파일이 다 받아지기 전에 개략적인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모뎀으로 GIF 파일을 받아본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다운로드를 시작하면 전체 모습이 아주 큰 픽셀로 거칠게 나오고, 다운로드가 진행될 수록 그림이 세밀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 참고로 데이콤은 LG가 인수, LG데이콤이 되었다가 현 LG U+로 합병되었다.
- ↑ 사실 해당 조항 자체는 전보와 전화가 주 통신수단이던 시절인 1961년에 제정된 '전기통신법' 제6조가 전신이며, 이후 1984년에 구 전기통신법이 폐지되고 신설된 공중전기통신사업법으로 이관되어 제80조로 바뀌었다가 1991년에 '전기통신사업법'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제53조로 바뀌었다.
- ↑ 닛쇼이와이는 북미의 콘솔용 주변기기를 통한 콘솔 멀티플레이어 중개서비스인 XBAND를 제휴해서 일본에 서비스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소지츠상사에 합병.
- ↑ 전화기 송수화기에 연결하여 삐~ 하는 신호음을 직접 만드는 장치. 당연히 속도는 300~1200bps가 한계. 국내에는 통신 관련 업체를 제외하고 일반인들에게 보급된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간혹 8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