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36살의 리스트. 버러바시 미클로시(Barabás Miklós) 그림 |
1 개요
최고의 기교를 가지고 있는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후세에 피아노 꿈나무들에겐 역적이라 카더라[1]
피아노의 왕, 피아노의 귀신, 피아노의 파가니니 유부녀 킬러
피아노 연주자들의 원망을 사는 존재 테크닉 초보, 작은손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마도 가장 욕을 많이 먹었을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와 더불어 비 피아노곡들을 피아노버전으로 편곡해 접근성을 높인 위인
Franz Liszt(1811년 10월 22일 ~ 1886년 7월 31일).[2] 헝가리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쇼팽이 제시한 피아노 기교를 퍼뜨리고 발전시켰으며, 교향시 양식을 창시한 초기 낭만파의 창시자 중 한명. 피아니스트들과 피아노 전공자들에게 살인적인 기교로 악명높다.
슈만, 쇼팽, 멘델스존 등처럼 요절한 동년배 천재 음악가들과 달리, 별다른 잔병치례도 없이 대단히 건강하게 장수해서 동기들 중 몇 안되게 초,중~후기 낭만파 일대를 전부 풍미할 수 있었던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서양 음악계, 나아가서 전 세계적으로 음악계에 남긴 영향력 역시 대단하다.
일명, 피아노의 왕(The Lord of the piano)이라 불리며, 쇼팽과 함께 19세기 피아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3] , 상술했듯이, 바그너와 함께 19세기 서양음악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4]
리스트가 피아노 음악에 미친 영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쇼팽이 2집의 연습곡(etude)으로 자신의 테크닉에 대해 정리/완성하고 특유의 시적인 리리시즘(lyricism)과 서정성으로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주었다면, 리스트는 그에게 바톤을 이어받아 피아노의 기교적 가능성과 표현력에 대한 극한을 추구하고 이에서 비롯되는 최고의 화려함과 효과를 구현했다. 또한 최초로 악기 하나만을 위한 독주회를 실행했으며(후술) 공연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한편 연주와 작곡 외에도 당대의 많은 후배 작곡가들의 스승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였으며 각종 음악사업을 추진하는데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리스트 이후 도흐나니, 버르토크, 코다이, 리게티등 헝가리의 수많은 대작곡가를 배출한 헝가리 국립 음악학교(Hungarian National School of Music)는 바로 리스트의 주도로 설립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그의 모국인 헝가리에서는 리스트를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추앙하고 있다.
2 유명한 리스트의 피아노곡
밑의 곡들은 리스트의 매우 유명한 피아노 곡들로 주로 리듬스타를 해 봤거나, 클래식 피아노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면 누구나 다 한번씩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 곡명은 라캄파넬라(La Campanella)로 아마 리스트 곡 중 가장 유명한 피아노 곡일 것이다. 파가니니 대연습곡 3번에 속하며, 피아니스트들도 매우 어려워하는 곡이다. 이 곡을 미스없이 연주하기는 매우 어렵다. 위 예브게니 키신도 마지막에 살짝 미스터치를 하지만, 종을 뜻하는 라캄파넬라를 가장 잘 표현하고 소화했다 평가받는다.
▲ 파가니니 대연습곡 6번 주제와 변주이다. 차이콥스키 국제 콩쿨에서의 알렉산더 루비안쳬프(Alxander Lubyanstev) 연주[5], 파가니니 대연습곡 중 가장 어려운 곡으로 평가받으며 피아니스트들도 완벽히 연주하기 쉽지 않은 곡이다. 계단트릴로 악명높은 DIAVOLO의 원곡이 바로 이것.
▲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2번(Hungarian Rhapsody no.2)이며, 헝가리 랩소디 2번이라고도 한다. 톰과 제리와 루니 툰의 피아노 에피소드에서 나온 곡이기도 하며[6], 매우 유명한 곡이다. 연주효과 또한 매우 크지만, 연주하기 매우 어려운 곡이다.
▲ 리스트의 녹턴 3번 사랑의 꿈이며 서정적이고 달달하며 분위기 있고 아름다운 곡이다. 덕분에 안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우 유명하고 인기있는 곡이지만, 녹턴 치고는 연주하기 까다롭다.
▲ 리스트의 축혼 행진곡으로, 멘델스존의 축혼 행진곡을 리스트가 더욱 화려하고 기교있게 편곡한 곡이다. 후에 이 편곡을 호로비츠가 재 편곡을 하게 된다.
▲ 메피스토 왈츠 No 1. 파우스트(괴테의 파우스트는 아님)의 내용을 바탕으로 리스트가 만든 곡. 메피스토 왈츠는 4번까지 있는데 1번이 주로 연주된다. 2,3,4번도 묻히기 아까울 정도로 좋은 곡들이다. 리스트가 의도한대로 메피스토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드는 느낌이다.
▲ 리스트의 '순례의 해' 에 들어있는 곡. 이탈리아의 마지막 곡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이 스크루가 순례를 떠난 해'에 라자르 베르만의 '순례의 해' 음반이 나온다.
3 생애
3.1 초기 - 오스트리아 빈
1811년 10월 21일 헝가리의 라이딩 근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7] 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Adam Liszt)는 요제프 하이든이 전속음악가로 재직하기도 했던 에스테르하지 공작 가문의 집사였으며 집사가 되기 전에는 아마추어 음악가로 하이든을 비롯하여 베토벤, 훔멜, 케루비니 등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리스트는 아버지가 피아노를 비롯한 바이올린, 첼로, 기타 등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으며 7살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8살때는 초보적인 작곡도 했다. 9살때인 1820년에는 헝가리의 귀족들 앞에서 피아노 콘서트를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콘서트 이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헝가리 귀족들의 후원으로 빈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한다. 빈에서 리스트는 당대의 뛰어난 음악교육자였던 카를 체르니[8]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운다. 리스트는 11살때인 1822년에 비인에서 첫 데뷔 콘서트를 열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의 피아노 실력은 점차 빈에서 유명해졌으며 덕분에 베토벤과 슈베르트같은 대작곡가들도 만날 수 있었다.[9] 한편 리스트는 12살의 나이로 당당히 안톤 디아벨리의 변주곡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으며[10] 이 때부터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프랑스 여행 중에 파리음악원에 입학원서를 넣었는데, 당시 파리음악원의 원장이었던 케루비니(Luigi Cherubini)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하였다.[11] 리스트는 다시 빈으로 돌아와 페르난도 파에르(Ferdinando Paer)에게 작곡을 배웠고 이 시기에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오페라인 돈 상슈를 작곡하였다. 이 때만 해도 리스트는 자신의 음악환경에 걸맞게 연주법나 작곡양식이나 빈 고전파양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후대의 '경이롭고 악마적인' 리스트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3.2 파리로 이주
리스트가 16세가 되던 1827년 아버지 아담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간 별 문제 없이 음악가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고 있던 리스트에게 갑자기 어려움이 닥쳐왔다.[12] 이로 인해 연주여행도 중단되었으며 돈벌이를 위해 어머니 안나 리스트와 함께[13] 빈을 떠나 프랑스 파리의 작은 아파트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그는 피아노 과외와 연주 알바, 작곡 등의 음악관련 일을 닥치는 대로 맡아서 했으며 자신에게 배우는 학생들의 집이 여기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그는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했다.
이듬해인 1828년 리스트는 자신의 제자로 피아노를 배우던 당시 프랑스왕 샤를 10세의 상공대신(商工大臣)의 딸 카롤랭 드 생크릭( Caroline de Saint-Cricq)과 생애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잘나가는 정치인이었던 카롤랭의 아버지 피에르에게 리스트같은 빈털털이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으며, 피에르의 반대로 리스트와 카롤랭은 결국 헤어진다.
아직 소년이었던 리스트는 꽤 오랫동안 이 실연의 충격에 시달렸는데, 고통이 너무 커서 마비증세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죽고 싶다는 말이 와전되어 지역 신문에 그의 부고기사가 오보로 실리기도 했다. 작곡과 연주활동도 이 시기에는 거의 중단되었으며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았다. 이 시기 리스트는 고통을 잊기 위해 종교(카톨릭)에 깊이 빠져들었고 한동안 피아니스트를 포기하고 성직자가 되려는 생각도 했었는데 어머니와 지인들의 만류로 결국 성직자의 길은 단념했다.[14]
이처럼 파리시절 초기는 그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지만 나름 발전도 있었는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리스트는 학생들을 가르치러 다니는 동안 남는 짜투리시간에 빅토르 위고, 하인리히 하이네 등 당대 유명작가들의 문학작품을 탐독하면서 교양을 쌓았다. 그가 평생 가까이 했던 술과 담배도 이 시기에 배웠다고 한다. 비행 청소년
음악적으로도 중요한 변화가 찾아왔는데, 그는 파리 정착 직후 크레티엥 위앙(Chrétien Urhan, 1790-1845)이라는 독일 출신의 비올리스트이자 작곡가를 알게 되었으며 20살 무렵에는 베를리오즈와 친분을 맺었다. 리스트는 이들을 통해 낭만주의 음악사조를 본격적으로 접하고 비인의 고전파 양식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는데, 후술할 거장 연주자 한사람이 본격적으로 그의 음악인생을 바꾸어 놓게 된다.
한편으로 그는 출세한 이후에도 계속 바쁘게 살았으며 평생동안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파리시절 초기에 어렵게 살았던 자신의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3 비르투오조 시기
3.3.1 니콜로 파가니니
1832년 파리에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희생자가 속출하자 당대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인 파가니니가 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이 콘서트의 관객 중에는 21살의 리스트도 있었는데, 이 연주회 관람은 그의 음악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 주는 '사건'이 되었다. 그는 파가니니의 엄청나게 화려하고 기교가 충만한 연주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으며 파가니니처럼 청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피아노 테크닉이 아니라 퍼포먼스의 연마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된다. 리스트 특유의 과시적이고 화려한 패시지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리스트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피에르 올프에게 썼던 편지에는 당시 그가 받은 멘붕 충격이 잘 드러나 있다.
2주 동안 내 마음과 손가락은 마치 길 잃은 영혼처럼 움직이고 있다네.호메로스, 성서, 플라톤, 로크, 바이런, 위고, 라마르틴,
샤토브리앙[15], 베토벤, 바흐, 훔멜, 모차르트, 베버가 모두 내 곁에 있다네.
나는 이들을 공부하고, 이들에 대해 명상하며, 분노로 그들을 집어삼킨다네.
뿐만 아니라 나는 하루에 4시간에서 5시간정도를 손가락 연습(3도, 6도, 옥타브, 트레몰로, 연타, 카덴차 등)에 쓰고 있다네.
아! 만약 내가 미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 안에서 예술가를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래, 예술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지.
이처럼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연주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 후 그의 작품은 극악의 난이도로 악명을 휘날리게 된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작품으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단조 중 3악장을 모티브로 한 작은 종에 의한 화려한 대 환상곡(Grand Fantasia de Bravoure sur La Clochette, 1832)을 작곡했는데 이 곡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어렵기로 악명높은 라 캄파넬라의 시초다.
[1]
연주 영상
이 곡은 너무나 어려워서 당시 리스트 외에 그 누구도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이다. 과도한 난이도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리스트가 얼마나 테크닉 연습에 매진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곡이다. 파가니니에 대한 리스트의 관심은 계속 되어서 몇년 후인 1838년 파가니니의 곡을 바탕으로 하여 6곡의 '파가니니 초절기교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6] 슈만은 '리스트 조차 몇몇 패시지는 자세히 연습해야 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어려웠던 이 곡을 1851년 좀더 쉽게 수정한 작품이 오늘날의 그 유명한 6곡의 파가니니 대연습곡이다.[17]
3.3.2 쇼팽과 베를리오즈
한편 이 시기를 전후하여 편곡자로서의 리스트의 재능도 본격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파가니니에게 충격을 받은 이듬해(1833)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하였다. 당시 베를리오즈는 연극배우 해리엇 스미슨(Harriet Smithson)과 어렵게 결혼한 후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으며,[18] 그의 출세작인 환상교향곡은 작곡된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악보가 출판되지 못해서 아직 널리 연주되지 못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1834년 베를린에서 자비로 출판하였고 연주회마다 이 환상교향곡 편곡을 연주하여 이 곡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19]
당시만 해도 유럽에는 관현악단이 그리 많지 않은데다 관람료가 무척 비쌌다. 게다가 당연히 녹음기술 같은 것도 없었으니 귀족이나 대도시의 부유계층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이 관현악이나 오페라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정말 드물었다.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을 편곡한 이후 각종 관현악곡이나 오페라 아리아를 피아노로 편곡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일반 대중들이 큰 규모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며 한편으로 재능있는 신인작곡가 또는 무명작곡가들의 음악을 편곡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피아노솜씨를 뽐내려는 과시욕도 한몫 했지만.
이 시기 리스트는 자신의 음악인생에 중요한 또 한명의 음악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폴란드 출신의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당시 파리 사교계 입문에 적극적인 도움을 줬다고 하며, 이후 쇼팽과 리스트는 1849년 쇼팽이 사망할 때까지 서로 경쟁심과 경외감이 섞여 있는 미묘한 관계를 쌓아왔는데[20] 기본적으로 는 서로 돕고 서로 영향을 받는 사이였다. 쇼팽은 그의 첫번째 피아노 연습곡집(op. 10)을 리스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사실 쇼팽과 베를리오즈 두 사람은 파가니니 못지 않게 리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곡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파가니니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런지 이런 부분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파가니니가 리스트에게 천둥번개처럼 순식간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면 이 두 사람은 리스트가 평생동안 유지했던 작곡양식과 음악철학의 기초를 제공해 준 작곡가였다. 리스트의 음악에 나타나는 각종 관현악 기법, 대담한 화음, 화려하고 웅장한 음악양식, 종종 드러나는 악마적 경향은 주로 베를리오즈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으로 쇼팽으로부터는 시적인 리리시즘(lyricism)과 서정적인 표현을 배웠다.
3.3.3 마리 다구 백작부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초상화 |
1830년대의 프랑스 파리의 음악계는 리스트와 쇼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피아노 거장들의 경연장이 되었다. 리스트와 비슷한 연배의 샤를 발랑탱 알캉(Charles Valentin Alkan, 1813-1888)이나 지기스문트 탈베르크(Sigismond Thalberg, 1812-1871), 알렉산더 드레이쇼크(Alexander Dreyschock, 1818-1869) 등의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속속 파리에서 데뷔하였고 큰 각광을 받았다.[21][22]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본격 이름을 알린 리스트는 1833년부터 프랑스의 사교계에 진출하였으며, 여기서 6살 연상의 마리 다구 백작 부인(Comtess Marie d'Agoult, 1805-1876)을 만나게 된다.[23] 나이 많은 남자와 정략결혼을 한 탓에 부부관계에 흥미가 없었던 그녀는 집안일보다는 사교활동에 전념하고 있었고, 그녀가 주도하는 사교클럽에 피아노계의 떠오르는 샛별 리스트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24] 리스트는 귀족에 대한 로망을 제대로 선사해주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지만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마리 다구부인은 처음에는 리스트를 쌀쌀맞게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스트의 계속된 구애에 일단 마음을 열자 겉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다고,
1835년, 리스트는 당시 갓 설립된 스위스의 제네바 콘세르바토리(Geneva Conservatory)에 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에 마리 다구는 같은 해 8월에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25] 주변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외면한 채 제네바로 가서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12월에는 이미 이혼 전부터 뱃속에서 키우고 있던(...) 리스트의 첫째 딸 블랑댕을 출산한다. 블랑댕 이후 4년간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1녀가 더 태어났다.
- 장녀 블랑댕(Blandine, 1835–1862) - 후에 프랑스 총리가 되는 에밀 올리비에르(Émile Ollivier)와 결혼했으나 26살에 사망
- 차녀 코지마(Cosima, 1837–1930) - 93살까지 장수했으며 후술하다시피 아빠 못지 않은 연애편력을 자랑하게 된다.
- 아들 다니엘(Daniel, 1839–1859) - 아빠에 버금가는 재능을 인정받고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으나 결핵으로 20살에 사망
마리 다구는 리스트에게 뮤즈(Muse) 역할을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리스트의 창작력(과 편곡력)의 포텐이 다구 백작부인을 만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26]
허나, 4년의 동거기간 동안 두 사람은 점차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다구 부인은 사교계의 꽃으로 불릴만큼 활발하고 자부심 강한 성격으로 남에게 주목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여성이었다. 안좋게 말하면 공주병 기질이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성격에 걸맞게 씀씀이도 상당히 헤프고 사치스러웠다. 그녀는 리스트가 연주여행 등으로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집중해 주기를 바랬으며 한편으로는 아이가 셋이나 생겼으니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 되기를 바랬다.[27]
하지만 리스트는 그럴 생각이 없었으며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었다. 한때 부친을 잃고 어렵게 살았던 리스트는 이제 막 자신의 전성기가 시작된 상황인데 애인의 요구때문에 이런 황금기를 자기 손으로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리스트는 물려받은 재산과 부동산으로 놀고먹거나 가문의 후광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귀족출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장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이룩한 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계속 일하고 노력해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애인의 대책없는 낭비벽도 감당해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는 마리 다구의 반대를 뿌리치고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니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바쁜 생활을 즐겼으며 이 과정에서 자주 다른 여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한편으로 마리 다구 입장에서는 그의 오지랖이 너무 넓은 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리스트가 자신과 딱히 상관이 없는 본(Bonn)에 베토벤 기념비를 건립하는 사업엔 후원자로 자처하고 나서자 그가 쓸데 없는데 돈과 노력을 들인다고 불평했다.나 쓸 돈도 부족하단 말야!
이렇게 밖으로 도는 리스트의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마리 다구는 결국 막내 다니엘을 낳은 직후 리스트와 별거를 선언하고 파리로 돌아가 버린다. 이후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더 이상 회복되지 못했으며 자식 양육문제 등으로 5년 정도 관계를 질질 끌다가 결국 1844년에 완전히 갈라선다. 리스트는 다구와 헤어지자 본격적으로 자신의 대인배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평생 바쁜 그리고 음탕한 생활을 유지했다.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헤어진 이후 리스트는 평생동안 수십명의 애인을 사귀었는데, 마리 다구 수준으로 깊은 관계까지 간 경우는 후술할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밖에 없다.
3.3.4 아이돌(?) 거장 리스트
당대의 아이돌스타 리스트를 풍자한 그림(1842) |
사생활과 별도로 리스트는 연주자/작곡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는데, 마리 다구와의 결별로 인해 눈치를 볼 대상이 사라지게 지자 오히려 그의 음악이력과 여자관계은 더욱 화려해진다. 그는 전 유럽을 순회하며 피아노 연주회를 열면서 빠순이들을 양산했으며 종종 지휘자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간 자신의 돈을 낭비하던 사람이 떠난 덕분인지 본격적으로 자선 연주와 각종 음악사업의 후원에도 힘을 쏟았다. 사족이지만 리사이틀, 즉 독주회의 개념을 창설한 것도 리스트가 최초이다. 그 전까지는 항상 연주회에서 찬조 연주자가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피아노 연주회라는 타이틀로 연주회가 열리더라도 바이올린, 성악 등의 다른 음악이 찬조로 연주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리스트는 1839년경부터 최초로 찬조 출연자 없이 피아노곡으로만 채워진 연주회를 열었다.[28]
또한 리스트는 피아노 뚜껑을 적절한 각도로 열어 놓아 반사된 소리가 청중들을 향하도록 했는데, 이와 같은 연주장 세팅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그는 순회 연주자로 생활하는 동안 이런 연주회를 무려 1000번 넘게 열었는데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그의 공연장은 항상 관람석이 부족했으며 때로는 수천명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되기도했다.[29]
1842년쯤에는 이미 리스트 광풍(Lisztomania)으로 명명된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어 있었으며 음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도 그의 이름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유럽 각지에서 리스트에게 연주회를 열어달라는 요청이 쏟아졌으며 심지어 유럽음악의 변방에 속한 포르투갈이나 터키 지역(당시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영역)에서도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부지런한 리스트는 조건이 맞는 한 이런 요청을 거의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아마 리스트는 역사상 최초로 광적인 팬덤을 창시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연주회의 공연효과를 높이기 위해 초절기교 외에도 이제까지 다른 연주자들이 실행한 바 없는 각종 음악 외적인 퍼포먼스와 기행을 선보였으며[30] 이로 인해 당시의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에선 현재의 아이돌 팬덤마냥 리스트를 추종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가 연주회를 시작하면 젊은 귀족부인들은 체통을 잊고 무대 위로 올라가 그가 피우던 시가꽁초[31] 나 연주하다 끊어먹은 줄, 혹은 연주 도중에 그가 연주 도중 삘받을 때 벗어던지고 하던 장갑 따위의 잡동사니들을 차지할려고 미친듯이 싸우곤 했다고 한다. 그걸 주워서 평생동안 지니고 다닌 부인도 있다고 하니 과연 남편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의문. 때로는 가짜로 실신하거나 무대 위로 보석들을 던져서 의도적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이러한 과도한 퍼포먼스는 리스트 당대나 지금이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순회연주를 묘기로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하는 순회서커스단에 빗대어 비아냥대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는 이제까지 유럽의 어떠한 음악가도 누려보지 못한 전무후무한 경지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으며, 당연히 이로 인해 많은 돈과 더불어 많은 여성들과의 하룻밤까지 챙겼다(...)
사생팬도 양산한 모양인지 당시 문헌(신문)에 의하면 1842년 베를린 연주회가 끝나고 그가 떠날 당시, 그의 뒤에 수백대에 달하는 개인마차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여섯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마차에 서른 대가 넘는 마차의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고 하는데 기사를 쓴 기자의 비유에 의하면 "그는 왕과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니라 바로 왕이었다"라고 평했을 정도.
그 외에도 왕족들을 제멋대로 능욕하기도 하고[32] 심한 경우엔 국가간의 전쟁도 불사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일화만 봤을 때 자기과시적인 성향이 거의 민폐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마 나름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리스트가 없었더라면 현대에 있어서 아이돌 연예인같은 직업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 사실 그 당시까지 음악가라는 직업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 사람들[33]이 아니면 하인이나 종과 다를게 없이 멸시받고 천하게 대접받는 직업이었다. 그나마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이 등장한 이후 이런 분위기가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19세기가 된지 한참 후까지도 음악가를 천시하는 경향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그런데 리스트는 그들에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도가 아니라 충분히 그들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과 비젼을 제시한 인물었던 것이다.[34] 리스트로부터 비롯된 병적인 팬덤은 파데레프스키(Paderewski)가 등장하기 전까지는(최소한 기록상으로는)그에 비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4 필생의 여인
4.1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이처럼 20대 초반부터 십수년 정도 계속된 리스트의 순회연주자 생활은 그의 앞에 두 번째 여인이 나타나면서 일종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1847년 2월, 리스트는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키에프(Kiev, 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이다)에서 일종의 자선공연을 가졌는데 이 연주회에서 이후 리스트 필생의 여인이 된 카롤리네 추 자인-비트겐슈타인(Carolyne zu Sayn-Wittgenstein, 1819-1887) 공작부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35] 그녀는 이 자선공연에 거액의 돈을 기부하여 리스트의 관심을 끌었고 리스트는 수소문 끝에 그녀를 만난 후 한 눈에 반하게 된다.
1847년 경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역시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마찬가지로 정략결혼을 한 탓에 남편에게 별 애정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명의로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에 많은 영지를 상속받은 탓에 경제적으로도 남편으로부터 독립한 상태였고 딸 하나만 낳은 후 줄곧 남편과 별거중이었다. 돈걱정은 없었지만 외롭게 살고 있던 그녀의 동네에 온 유럽을 들끓게 한 마력의 남자 리스트가 찾아왔으니, 그녀 입장에서 리스트를 만나는 것은 정말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던 것이다.[36] 그녀는 도도하고 자기 중심적이었던 마리 다구와 달리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여성이었으며 특히 집안 내력답게 독실한 카톨릭신자였는데, 특히 그녀의 독실한 신앙심은 만만찮게 종교에 심취해 있던 리스트와 정말 잘 맞았다.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와졌고 리스트는 마리 다구와 헤어진 이후 오랫만에 진정한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공작부인은 리스트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중요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간 연주자로서 명성도 충분히 얻었고 나이도 들었으니 이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작곡과 후학양성에 전념하는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어딘가 정착해서 살자는 것이었다. 물론 정착은 '자신과 함께'.[37] 리스트는 고민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1847년 8월 우크라이나 연주를 마지막으로 순회연주자 생활을 마감한다.[38]
4.2 바이마르의 황금기
순회연주자로서의 삶을 마감한 리스트는 당시 바이마르의 영주로 있던 러시아의 여대공 마리아 파블로브나(Maria Pavlovna of Russia)가 초빙하는 형식으로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악장직을 제안받는다.[39] 리스트는 이를 승낙하였으며 이에 신혼부부(?)는 1848년 바이마르에서 꿈에도 그리던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리스트는 바이마르에서 작곡가이자 교육자(공식적으로는 궁정음악가)로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했는데 1861년까지 계속된 이 바이마르의 생활은 과거 순회연주자의 삶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의 연주녹음이나 공연실황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현재까지도 리스트가 계속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에 그가 작곡 또는 편곡한 수많은 작품들과 그가 길러낸 뛰어난 제자들 덕분이었다. 바이마르에 머무는 동안 리스트는 초절기교 연습곡, b단조 소나타,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 등 오늘날까지 널리 연주되는 작품들을 써내기도 하였고, 단악장의 표제 관현악곡인 교향시 장르를 개척하여 새로운 음악양식으로서 가치와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당대에 유행하던 오페라의 선율을 기초로 화려한 파라프레이즈 작품을 썼으며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멘델스존의 축혼 행진곡, 슈베르트의 다수의 가곡,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명작들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후학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의 지도하에 한스 폰 뷜로나 카를 타우지히같은 당대의 명연주자들이 등장하였다.[40] 그는 각지에서 몰려든 신인 연주자들과 작곡가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일일이 응해 주었으며 일년에 수백번의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서 연주를 지도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당시 수배명령을 받고 장기간 도피중이었던 바그너의 음악활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으며 글과 강의를 통해 자주 그의 음악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는 바그너의 몇몇 작품을 연주하고 피아노로 편곡하기도 했는데, 특히 오페라 로엔그린은 리스트의 지휘로 1850년 바이마르에서 초연되기도 했다.[41]
한평생 바쁘게 산 그였지만 아마 바이마르에서의 삶은 그중에서도 가장 바빴을 것이다. 그의 언급에 의하면 1년에 2천통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고 마스터 클래스에서 수백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리스트의 명망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거의 전 유럽에서 편지가 날라왔는데 대부분은 그의 평가와 손질을 부탁하고 보낸 음악작품이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일일이 평가해 주었다. 작곡가가 직접 악보를 들고 찾아온 것까지 치면 정말 셀 수 없을 정도의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매년 그의 본거지인 바이마르는 시민보다 많은 수의 피아니스트나 작곡가, 심지어 바이올리니스트까지 모여 북적였다. 게다가 소개장만 가져오면 누구이건 묻지 않고 곧장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테크닉이나 음악에 대한 이해가 모자란 사람들은 공개적으론 받지 않았다.[42] 그의 지도는 어디까지나 마스터 클래스였지 기초실력을 길러주는 피아노교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하게도 신동으로 평가되는 사람은 가급적 제자로 받지 않으려고 했다.
한편 가정생활도 과거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동거하던 시절과 달리 별 문제가 없었다, 비록 아이를 얻지는 못했지만 리스트와 공작부인간의 관계는 바이마르 시절 내내 원만했는데,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기본적으로 리스트의 바쁜 생활을 이해하고 간섭하지 않았으며[43], 종종 그가 다른 여자들과 놀다가 들켜도 못본 척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다만 공작부인은 주변에 눈치보이고 법적으로도 불안한 동거생활 계속하기보다는 리스트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기를 원했는데, 문제는 자신의 법률상 남편이 아직 살아 있었으며 이혼을 허락하지도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리스트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자신의 법적인 남편과 이혼을 해야 했다. 공작부인은 바이마르에서 지내던 시절 내내 이 이혼문제에 매진했다.
4.3 슬픈 시절
바이마르에서 얻은 리스트의 행복은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던 아들 다니엘이 20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급사하면서 끝나버렸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이은 불행이 찾아왔다.
독실한 카톨릭신자였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공식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자신의 결혼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집안의 강압으로 인해 성사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속적으로 교황청에 탄원과 로비를 했다. 꽤나 복잡한 과정이 있었지만 리스트와 만난지 13년만인 1860년 드디어 그녀의 소원이 수리되어 바티칸으로부터 이혼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었다. 결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은 리스트와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50세 생일(1861년 10월 22일)에 맞춰 로마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결혼일이 다가오자 공작부인은 바티칸으로부터 확답을 얻기 위해 먼저 바티칸으로 출발했으며 리스트는 결혼식 전날인 1861년 10월 21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결혼의 꿈에 부풀어 로마에 도착한 리스트에게 '공작부인과 결혼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표면적으로는 공작부인의 이혼 로비가 성공한 듯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남편과 남편을 감싸주고 있던 러시아 황제의 역로비때문에 이미 바티칸에서는 이혼불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 황제는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에 있던 그녀의 영지를 모조리 압류하여 설령 현재 남편이 죽더라도 다시 결혼하기 어렵도록 돈줄을 막아버렸으며, 추가로 본인의 유일한 딸의 혼삿길을 막지 말라는 협박까지 전했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와 결혼할 가능성이 없어지고 재산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리스트와의 동거생활을 정리했으며 이후 로마로 이주하여 평생을 거기서 집필활동을 하면서 살았다. 다만 그녀는 리스트와 헤어진 이후에도 평생동안 그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했다.[44][45]
1862년에는 장녀 블랑댕이 26살로 사망했다. 잇따른 불행을 겪게 된 리스트는 바이마르의 궁정악장을 사임한 후 이곳 저곳에 머무르다가 10대때부터 꿈꾸었던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한다. 1863년 프란치스코 교단 계열의 로사리오 성모 수도원(Madonna del Rosario Monastery)에 들어간 그는 2년 후 그는 4품 교육을 마치고 수습사제가 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품계 상승은 시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79년 알바노 수도원의 명예 참사원(honorary canon)이 되기도 했다.[46]
5 생애 후반기의 리스트
5.1 성직자의 길과 코지마 바그너
정식 사제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튼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리스트는 이후 다수의 종교음악을 작곡한다. 이 때 작곡된 주요 작품으로는 오라토리오 '그리스도', '대관식 미사' 등이 있다. [47] 성악곡 외에도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에서 영감을 얻은 두개의 전설(Deux légendes, 1862-63)과 같은 종교색이 짙은 피아노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바그너와 재혼할 당시의 코지마 |
하지만 종교에 귀의한 후에도 그의 여성편력은 멈추지 않았는데,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이후에도 아델르 라프뤼나레드 백작 부인, 마리 뒤플레시스, 전직 댄서였던 롤라 몬테즈, 마리 플레이엘, 마리아 파블로프나 삭소니 대공부인, 그리고 올가 쟈니냐 코사크 백작 부인까지 정말 쉴새 없이 애인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올가 코사크 백작 부인은 리스트가 무려 59세일때 사귄 연인이었다! [48] 다만 동거나 결혼을 전제로 한 심각한 연애는 더이상 하지 않았다.
그런 리스트의 뒤통수를 오함마로 후려갈기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의 수제자중 한명이었던 피아니스트겸 지휘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한 둘째 딸 코지마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눈이 맞아 아빠 몰래 남편을 버리고 바그너와 결혼한 것이다. 자업자득 피는 못속여 코지마와 뷜로는 1857년에 결혼했고 딸을 하나 낳았는데, 바그너 광팬이었던 코지마는 이미 결혼 초에 바그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1864년 경부터 코지마와 바그너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심상치 않은 수준이 되었으며 이 둘은 정식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자식을 셋이나 낳기도 했다.[49] 뷜로는 코지마와 바그너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세간의 이목과 바그너에 대한 빠심 때문에 이를 묵인하고 있었으며 다만 이혼만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뷜로는 코지마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두 손을 들고 1869년 이혼하였고 코지마와 바그너는 이듬해인 1870년에 정식 결혼하였다.[50]
그런데 정작 코지마의 아빠인 리스트는 코지마와 바그너가 결혼할 때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언론 기사를 통해 딸의 재혼소식을 접한 후에야 이 사태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분노와 배신감에 펄펄 뛰었고 딸과 새 사위(?)에게 절교를 선언해 버린다. 하지만 몇년 후 리스트는 대인배스럽게도 두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한다.[51][52]
5.2 삼중 생활
리스트는 186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거행될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의 왕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관식에 사용될 대관식 미사음악의 작곡을 맡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모국이었던 헝가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1869년 그는 8년만에 바이마르에 다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으며 2년 후에는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국립음악원에도 마스터 클래스를 개설하였다. 이후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죽기 얼마 전까지 정기적으로 로마와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면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선 연주회 등에 참석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이런 활동을 가리켜 vie trifurquée(threefold life, 3중 생활)이라고 불렀다.[53] 소시적에는 거장 순회 연주자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거장 순회 교육자(?)로 탈바꿈한 것.
이처럼 노년의 리스트는 힘든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후학양성에 많은 힘을 썼는데, 그의 레슨 기록에 따르면 리스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기계적으로 손가락만 움직이는 연주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으며, 그들에게 음악성을 많이 강조하였다.
5.3 말년의 리스트
말년의 리스트 |
하지만 천하의 리스트도 노령에 이와 같은 강행군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겼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생기기 쉬웠다. 결국 70세가 되던 1881년, 그는 바이마르의 숙소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고 계단에서 쓰러졌다. 당시 그의 다리는 심하게 부어 있었는데, 다행히 의식은 회복했지만 다리의 움직임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54] 그간 건강했던 리스트는 이 때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약해졌으며 이후 천식, 불면증, 백내장, 심부전등 각종 노인성 질환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중생활은 당분간 계속되었다.
1886년 7월, 리스트는 리스트는 딸의 주관으로 열린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관람한 후 감기증상을 호소하는데[55][56]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리스트는 회복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은 8월 3일에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바이로이트 시립 묘지에 안장되었다.[57]
한편 리스트와 헤어진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를 잊지 못했던 필생의 여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심한 충격에 빠졌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평생 멈추지 않았던 글쓰기도 중단했으며 리스트가 사망한지 8개월만인 1887년 3월에 사망한다.[58]
6 음악 성향
6.1 작곡 성향
리스트는 평생에 걸쳐 1개의 오페라(미완성의 오페라도 몇곡 있다.), 수십개의 합창곡과 교향시, 수십곡의 성악곡[59]과 몇곡의 실내악곡, 천곡에 다다르는 피아노곡등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 중 리스트가 가장 중점적으로 작곡한것은 역시 피아노곡이다. 리스트는 스스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매우 기교적이고 화려한 곡을 즐겨 작곡했다. 또한 그의 수 많은 피아노 곡중 상당수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한 것인데, 그 당시 비싼 연주회장에 자주 가기 어려운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관현악곡을 피아노로 편곡하여 일반인들도 즐길수 있도록 하였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곡을 편곡하거나 연주해서 알리기도 했다. [60] 베토벤 교향곡 9곡을 모두 피아노로 편곡해 남긴 것은 특히 유명한데, 매우 높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한마디로 작곡/편곡 측면에서 관현악에 맞먹는 화려하고 다이나믹한 피아니즘을 추구한 작곡가로 볼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급격한 도약, 급속한 패시지, 긴 아르페지오와 장식음, 분산화음에 의한 선율처리, 평행 트릴 등 이후의 피아노곡에 널리 쓰이게 된 각종 기법의 운지법을 연구하여 연주와 작곡에 도입하였다.[61]
피아노 분야의 경이적인 활약에 가려져서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리스트는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관현악 장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 교향시는 시, 소설, 영웅의 일대기, 회화등 다른 예술분야에서 얻은 인상이나 작곡자가 스스로 착상한 시적 영감을 음악으로 구현하는 관현악 장르로, 엄격한 형식을 갖고 순음악적인 경향이 강한 교향곡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표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62] 이 교향시는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생상스, 시벨리우스 등 많은 관현악 대가들의 중요한 음악장르로 자리잡았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기교적인 요소가 줄어든 대신 실험적인 화성, 반음계적 진행과 모호한 조성을 활용하여 낭만주의 이후의 음악을 예견하고 있으며[63] 순례의 연보 3편에 있는 에스테장의 분수(Les jeux d'eaux à la Villa d'Este)처럼 인상주의를 예견하는 작품도 남겼다.[64]
한편 리스트는 헝가리 태생이긴 하지만 그의 음악에 헝가리적인 특성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태어난 라이딩 지역은 헝가리 영역이긴 했어도 당시에는 독일어권에 속해 있었으며 음악공부를 위해 성장기의 태반을 빈에서 보냈기 때문에 리스트는 평상시에는 헝가리어가 아니라 독일어를 사용했다. 게다가 본격적인 출세는 프랑스에서 하였고 순회연주자 생활을 접은 후에도 바이마르나 로마 등에서 여생을 보냈다.[65] 그렇긴 해도 그는 나름 헝가리 집시음악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9곡의 헝가리 광시곡이다. 다만 헝가리 음악을 표방한 그의 작품들은 어디까지나 선율만 차용한 것이고 작곡 기법 자체는 전형적인 독일의 후기낭만파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리듬, 화성, 선법 등 헝가리 민속음악의 본질적인 요소를 분석하여 본격 도입한 후배 작곡가 벨러 버르토크나 졸탄 코다이 등과는 대조를 이룬다.
6.2 연주 성향
리스트의 악마적인 기교를 묘사한 풍자화 |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금에 와서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66] [67] 따라서그의 연주 성향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의 평들을 일일이 찾아다 대략적으로 추측해 보는 것뿐이다. 그러나 의외로 자료가 많아서 대체적인 그의 연주인상은 쉽게 조합할 수 있는데, 리스트의 명성과 그가 사람들에게 남긴 전례없는 아우라 덕분이다. 당시의 평들을 찾아보면 대체로 기교가 넘쳐흐르며, 역동적이고 감정에 충실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또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대피아니스트 답게 웬만한 곡은 모두 초견으로 연주할 정도였다는데, 당대 음악가들 사이에 반 농담삼아 화자되고 했던 얘기가 리스트의 연주는 초견이 가장 명연이었다고, 이유는 처음 악보를 볼 때만 그나마 악보에 쓰여있는대로 충실하게 훌륭한 연주를 하고 연주를 거듭할 때마다 과도한 장식음이나 기교를 과시하는 패시지를 자꾸 삽입했기 때문에(...)
그의 연주는 그의 별칭인 '베토벤의 아들이자 루빈스타인의 아버지'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본질적으로 베토벤이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절에 보여준 피아노 효과와 연결된다. 즉,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나 청각장애가 생기는 바람에 연주 생활을 끝내야 했던 베토벤을 리스트가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스트는 과거의 피아노 주법, 즉 얌전하고 정확하며 우아한고 간결한 화음을 짚는 종래의 기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관현악 소리에 맞먹는 우렁차고 화려한 연주 효과를 추구했다. 그 결과, 그의 연주는 화려하고, 감정적이며, 전례 없는 빠른 속도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리스트는 낭만주의 안의 고전주의를 지향한 브람스나 클라라 슈만과는 노선을 같이하지 않았다.
리스트의 연주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놀라움을 넘어 전설적이라고 불리기에도 충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당시 그에 비견되던 기교가인 드레이쇼크가 토마섹의 발언[68]에 영향을 받아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씩 연습해서 쇼팽의 혁명연습곡의 왼손을[69] 원템포 그대로 모두 옥타브로 연주하여 인기를 얻자 리스트는 그의 활동지였던 비엔나에 방문하여 쇼팽 연습곡 중 가장 빠른 연습곡의 템포로[70] 쇼팽 연습곡 전곡 25곡의 오른손 부분을 모두 옥타브로 연주했다고 한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하임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을 연주할 때 리스트가 검지와 중지로 불이 붙은 담배를 잡은 채로 반주했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리스트 생전에 그의 전기를 작성한 리나 라만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리나가 리스트에게 루트비히 뵈너가 두 손가락에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간으로 바흐의 푸가를 연주했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그는 피아노에 앉아 양손을 각각 세 손가락만 사용한 채로, 바흐의 어려운 푸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리나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한편 쇼팽은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작곡가였던 페르디난트 힐러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지금 내 펜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리스트가 지금 나의 연습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가 나의 머릿속의 생각을 날려버리고 있네.
그의 연주를 빼앗아오고 싶을 정도라네.
이렇듯 그 당시 음악가들에게도 리스트의 연주 실력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7 후대의 평가와 영향
리스트가 활약하던 시기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계속 진행되었던 시기이며 악기 자체의 발전과 더불어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이 대거 등장했던 시기였다. 리스트 이외에도 프레데리크 쇼팽, 지기스문트 탈베르크(Sigismund Thalberg), 카를 타우지히(Carl Tausig),[71] 샤를 발랑탱 알캉 등이 모두 리스트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거장 피아니스트들이었다.[72]또한 이들은 리스트처럼 작곡가이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피아노 음악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명성 측면에서는 리스트가 단연 압도적인데, 화려한 쇼맨쉽과 이를 받쳐 주는 미남형 외모,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이지적이면서도 나쁜 남자스타일, 거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업계 최상위의 실력까지, 인기에 필요한 모든 요소와 실력을 다 갖춘 먼치킨은 당대에 리스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을 찾아온 후배 음악인을 배척하지 않고 대부분 받아주는 대인배기질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음악팬들 뿐만 아니라 전업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명성은 압도적이었다.[73]
그러나 무엇보다도 리스트의 이름이 후대까지 남게 된 것은 역시 악보로 남아 있는 그의 음악 덕분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의 전수에 매우 인색했던 파가니니와 달리 리스트는 자신이 창안하고 터득한 기교, 운지법, 작곡법 등을 거리낌없이 공개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는 많은 창작곡과 편곡에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남김없이 구현하였으며 각지에서 몰려든 후배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각종 음악적 기법들을 숨김없이 전수해 주었다. 특히 바이마르시절부터 남긴 그의 작품들은 음악적으로도 상당히 원숙하고 깊은 경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연주자나 음반사들이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하고 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일지라도 음악성이 없는 피아노 기술자에 불과했다면 그의 이름과 작품들은 그대로 잊혀졌거나 체르니 교본처럼 연습용 교재 정도로만 활용되었을 것이다.[74] 결국 이와 같은 음악성과 연주 가치 덕분에 그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거장들 가운데에 리스트와 쇼팽의 이름만 오늘날까지 남게 된 것이다.[75]
그가 직접 길러낸 기라성 같은 피아니스트들[76] 외에도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후배 피아니스트들이 엄청나게 많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극단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는 그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당시부터도 비판이 있었으며 리스트 사후에는 이런 비판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그의 음악이 깊이가 없고 피상적이라고 저평가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또한 리스트류의 지나친 기교주의에 반발하는 음악사조도 등장했는데, 예를 들면 후배인 벨라 바르톡을 비롯한 다수의 현대 음악가들은 피아노 음악에서 과장된 기교를 배제하고 좀더 직선적이면서도 타악기 소리와 같은 원초적인 음향을 구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안티 리스트적인 경향이 존재했다고 해서 그가 음악사에서 많은 성취와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분명 리스트의 음악에는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 공존하지만 현재의 음악인들은 리스트를 여러 측면에서 서양음악계에 많은 발자취를 남기고 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리스트는 음악 역사상 최초로 팬덤현상을 일으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음악공연은 전무후무한 열광적인 분위기와 팬덤현상을 양산했는데, 이런 팬덤현상은 현재의 아이돌주의(idolism)와도 맥이 닿아 있다. 즉, 그가 만들어낸 공연문화는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고 그를 우상화하는 현재의 대중문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리스트가 전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자 당시의 연주자들 상당수가 그의 스타일을 모방했는데, [77] 무분별한 악보 편집, 무질서한 템포 변화,[78] 맹목적인 기교의 추구, 그리고 음악보다 퍼포먼스의 역할을 중시하는 경향 등만 무분별하게 답습하는 바람에 피아노연주 분야가 굉장히 혼란해진 때도 있었다.[79]
연주뿐만 아니라 작곡 분야에서도 리스트는 당대와 후대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술한 대인배기질 덕분에 음악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거나 출세하는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작곡가가 한둘이 아니다. 오늘날까지 유명한 사람만 꼽아보아도 쇼팽, 바그너를 비롯해서 베를리오즈, 생상스, 에드바르트 그리그, 샤를 발랑탱 알캉, 알렉산드르 보로딘 등 셀 수 없이 많다. 당대의 작곡가들 뿐만 아니라 후대 작곡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를 비롯 드뷔시, 라벨과 같은 인상주의 작곡가나 부조니 및 다수의 20세기 이후 작곡가들이 리스트가 사용했던 작곡/연주기법들을 많이 활용하였다. 또한 그가 창시한 교향시와 헝가리 집시 음악에서 발굴한 광시곡은 후기 낭만주의 및 국민악파 작곡가들의 중요한 음악장르로 자리잡았다.
전술했다시피 그의 후기음악은 바그너의 후기오페라처럼 조성이 모호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몇몇 곡은 낭만주의 이후 현대 음악 사조들의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에스테장의 분수나 무조의 바가텔, 회색 구름(Nuages Gris) 같은 곡에서 이런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8 여담
-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자신은 리스트 제자가 아닌데도 리스트에게 배운 수제자라고 거짓 광고를 했는데, 그 마을에 리스트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 것을 염려한 그녀는 리스트에게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었고 이제 나에게 배웠으니 연주회를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대인배면서 왜 몇몇 음악가들에게는 열정페이를... - 대단히 큰 손, 약 12도(도~라)에 달하는 손을 지녔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리스트의 손은 의외로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증언된다. 특히 그의 제자였던 라흐문드는 리스트가 직접 그에게 '청중들은 내가 대단히 큰 손을 가진 줄 알지만, 네가 보다시피 나는 그저 10도(도~미)를 겨우 벌려서 조용히 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라 증언했다고 한다. 허나 대단히 넓은 폭의 아르페지오, 비상식적일 정도의 도약, 복잡한 코드들은 화려한 악절을 위한 재물인지 그의 음악들은 유독 손이 작을 수록 고통받는다. [80] 때문에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더불어 오늘날 피아노 전공자들의 양대 애증(...)
특히 연습곡을 치다보면 애증을 넘어선 무언가가 절로 생각난다.본격 인성파괴곡이런 탓에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은 난이도 면에서 끝판왕...까진 아니더라도 못해도 최소 페이크 최종보스 급은 간다 카더라.[81] 다만 거의 연주불가 수준의 20대에 작곡된 곡들을 보면 난이도는 확실히 끝판왕급으로 인정된다. 게다가 이 곡들은 대부분 기교과시가 목적인 곡들이라 난이도에 비해 음악성이나 완성도는 많이 부족하다. 이런 탓에 이 시기에 작곡된 곡들은 현재의 유명 피아니스트들도 연주하기 꺼려하는 경우가 많으며, 연주 기회가 적다 보니 당연히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 상술했듯이 리스트는 당시 피아노를 귀신같이 너무나 잘친다는 이유로 피아노의 귀신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고, 피아노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넘사벽급 인물로 여겨져 피아노의 왕이라 지금까지 불린다.
피음인 사이에서 호로비츠vs리스트 떡밥만큼 불타오를 소재도 없을 거다(...)
9 연주와 레코딩
대표적인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 레슬리 하워드, 호르헤 볼레, 조르주 치프라 등이 있다.[82] 다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음악 중에 피아노음악의 비율이 독보적으로 높은 관계로 리스트의 곡만 연주하는 연주자는 많지 않다.
리스트 피아노 작품 전집이라는 제목으로 여러개의 타이틀이 나와있지만 진짜 리스트의 피아노 전곡을 수록한 전집은 하이퍼리언 레코딩스(Hyperion Recordings)의 레슬리 하워드(Leslie Howard) 전집 뿐이고 나머지는 다 그냥 여러장 있으니까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실제로 하워드의 전집은 CD 장수만 99장에 재생시간만 5일[83]을 넘긴다![84] 이 공로로 하워드는 영국 리스트 협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국제 리스트 콩쿨(네덜란드)에서 심사위원직을 맡고 있다.
한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시프리앙 카차리스(Cyprien Katsaris)가 연주한 리스트 편곡 -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은 전설적인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10 작품 목록
리스트의 작품에는 초기 몇개의 작품을 제외하곤 통상적인 Opus Number가 붙어있지 않으므로 R. 샤르닌 뮐러(R. Charnin Mueller)와 M. 에크하르트(M. Eckhardt)가 정리한 LW. 와 험프리 설(Humphrey Searle)이 1966년에 리스트의 음악이라는 책을 낼때 정리한 설 번호(Searle Number)가 사용된다. 이 정리 방식은 후에 샤론 윙클호퍼(Sharon Winklhofer)에 의해 덧붙여졌으며 레슬리 하워드가 리스트 전집 녹음작업 때 새로 발견된 곡을 더 추가하였다. 본 페이지에서는 더 논리적인 설 번호를 사용하여 정리하였다.
10.1 오페라
- S1 돈 상슈 (돈 상슈, 또는 사랑의 성)
10.2 종교 합창곡
- S2 성 엘리자베스의 전설 - Otto Roquette의 대본에 의함,1857-62
- S3 크리스투스 - 성경과 가톨릭 예배에 의한 오라토리오,1855-67
- S66 슬레브 레지나 송가
10.3 세속 합창곡
- S80 4개의 기질
10.4 관현악곡
10.4.1 교향시
- S95 교향시 1번 산위에서 들은 것 (산악 교향곡) (세개의 판본) (1848–49, 1850, 1854)
- S96 교향시 2번 타소, 비탄과 승리 (세개의 판본) (1849, 1850–51, 1854)
- S97 교향시 3번 전주곡 (1848)
- S98 교향시 4번 오르페우스 (1853–54)
- S99 교향시 5번 프로메테우스 (두개의 판본) (1850, 1855)
- S100 교향시 6번 마제파 (두개의 판본) (1851, b.1854)
- S101 축제의 함성 (1863년 출판본에 개정 추가) (1853)
- S102 교향시 8번 장례의 시가 (두개의 판본) (1849–50, 1854)
- S103 교향시 9번 헝가리아 (1854)
- S104 교향시 10번 햄릿 (1858)
- S105 교향시 11번 훈족의 전투 (1856–57)
- S106 교향시 12번 이상 (1857)
- S107 교향시 13번 요람에서 무덤까지 (1881–82)
10.4.2 다른 오케스트라 작품들
- S108 파우스트 교향곡 (1854, 1861)
- S109 단테 교향곡 (1855–56)
- S110 레나우의 파우스트에 의한 두개의 에피소드 (두곡) (1859–61)
- S111 메피스토 왈츠 2번 (1881)
- S112 세개의 장송송가 (세곡) (1860–66)
- S113 폴란드 노예 (1863)
10.5 피아노 협주곡
- S120 베를리오즈의 렐리오 주제에 의한 대 환상 교향곡,1834
- S121 저주-현악 합주와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1833
- S122 베토벤의 아테네의 폐허에 의한 환상곡),1848-52
- S123 헝가리 민속 춤곡에 의한 환상곡,1852 - 헝가리안 랩소디 14번의 편곡
- S124 피아노 협주곡 1번 E플랫 장조,1830년대 스케치,1849,1853,1856 완성
- S125 피아노 협주곡 2번 A장조,1839,1849-61 개정
- S126ii Totentanz[85] (죽음의 춤),1849(i),1853,1859(ii)
10.6 실내악곡
- S 135: 현악4중주와 하프를 위한 '바그너의 무덤 앞에서(Am Grabe Richard Wagners)'
10.7 피아노 독주곡
녹턴(사랑의 꿈 포함)
10.7.1 연습곡
- S136 Etude en 48 exercices dans tous les tons majeurs et mineurs (모든 장단조를 위한 48개의 연습곡),1826 - 아래 개정의 원판
- S137 초절기교 연습곡, 1838 - S136의 개정판, 12곡만 쓰여짐.
- S139 초절기교 연습곡,1851 - S137-8의 개정, S100 참고
- S140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1838[86]
- 1. g minor 사단조
- 2. Eb major 내림 마장조.
- 3. La Campanella 라 캄파넬라
- 4. E major 마장조
- 5. La Chasse 사냥
- 6. Theme and Variations 주제와 변주곡
- S141 파가니니에 의한 대 연습곡,1851 - S140의 개정판
- S142 살롱 소곡, 교칙본 완성 연습곡,1840, S97참고
- S143 쉬운 길, 교칙본 완성 연습곡,1852 - S142의 개정판
- S144 3개의 연주회용 연습곡,1848
- 1. Il lamento 슬픔
- 2. La leggierezza 가벼움
- 3. Un sospiro 탄식
- S145 2개의 연주회용 연습곡,1862-3
- 1. Waldesrauschen 숲의 속삭임
- 2. Gnomenreigen 난쟁이춤
- S146 Technical Studies (테크닉 연습곡),1868-80 - 12권
10.7.2 오리지널 작품
- S147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변주곡,1822
- S148 8개의 변주곡,1824
- S149 로시니 주제에 의한 7개의 화려한 변주곡,1824
- S150 로시니와 스폰티니 주제에 의한 화려한 즉흥곡,1824
- S151 화려한 알레그로,1824
- S152 Rondo Fantastique El Contrabandista,1836
- S153 스케르초 G단조,1827
- S154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1834 - 단일곡
- S155 유령,1834
- 1. Senza lentezza quasi Allegretto 느리지 않게 약간 빠르듯이
- 2. Vivamente 활기차게
- 3. Molte agitato ed appassionato 매우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슈베르트의왈츠에 의함) - S427/4참고
- S156 여행자의 앨범,1835-6 - S157, 160(리용)을 참고[87]
- I. Impressions et poesies 인상과 시
- 1. Lyon 리용
- 2a. Le Lac de Wallenstadt 발렌슈타트의 호수
- 2b. Au bord d'une source 샘가에서
- 3. Les cloches de G.... G.... 의 종
- 4. Vallee d'Obermann 오베르만의 골짜기
- 5. La Chapelle de Guillaume Tell 윌리엄텔의 성당
- 6. Psaume 찬송가
- II. Fleurs melodiques des Alpes 알프스의 선율적 꽃
- 7a. Allegro 빠르게
- 7b. Lento 느리게
- 7c. Allegro pastorale 빠르고 목가적으로
- 8a. Andante con sentimento 느리고 감정적으로.
- 8b. Andante molto espressivo 느리고 매우 표현하여
- 8c. Allegro moderato 조금 빠르게
- 9a. Allegretto 조금 빠르게
- 9b. Allegretto 조금 빠르게
- 9c. Andantino con molto sentimento 느리고 매우 감정적으로.
- III. Paraphrases 패러프레이즈
- 10. Improvisata sur le Ranz de Vaches de Ferd 랑 드 바슈에 의한 즉흥 - Huber(후버)의 주제에 의함
- 11. Un soir dans les montagnes 산의 저녁
- 12. Rondeau sur le Ranz de Chevres de Ferd 랑 드 셰브르에 의한 론도 - Huber(후버)의 주제에 의함
- I. Impressions et poesies 인상과 시
- S157 두개의 스위스 멜로디에 의한 낭만적 환상곡, 1835 - S156-7b 참고
- S158 세개의 페트라르카의 소네토, 1번째 판본,1839(?), S270의 편곡 - S161의 4-6 참고
- S159 베네치아와 나폴리, 초기판본,1840 - S96과 162 참고
- 1. Lento 매우 느리게
- 2. Allegro 빠르게
- 3. Andante placido 느리고 차분하게
- 4. Tarantelles napolitaines 나폴리탄 타란텔라
- S160 순례의 해 - 제 1년 <스위스>,1836(7),1848-54 나머지 곡들,S156의 개정
- 1. Chapelle de Guillaume Tell 윌리엄텔의 성당
- 2. Au Lac de Wallenstadt 발렌슈타트의 호수
- 3. Pastorale 파스토랄
- 4. Au bord d'une source 샘가에서
- 5. Orage 폭풍
- 6. Vallee d'Obermann 오베르만의 골짜기
- 7. Eglogue 목가
- 8. Le mal du pays 향수
- 9. Les cloches de Geneve 제네바의 종
- S161 순례의 해 - 제 2년 <이탈리아>,1-2번 1838-9,3번 1849,4-6번 1846년이후 S158의 개정,7번 1837년 스케치 1849년 개정
- 1. Sposalizio 혼례
- 2. Il Penseroso 명상에 잠긴 사람
- 3. Canzonetta del Salvator Rosa 살바로테 로자의 칸초네타
- 4. Sonetto 47 del Petrarca 페트라르카의 소네토 47번
- 5. Sonetto 104 del Petrarca 페트라르카의 소네토 104번
- 6. Sonetto 123 del Petrarca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23번
- 7. Apres une lecture du Dante, Fantasia qausi Sonata 단테를 읽고, 소나타 풍의 환상곡
- S162 베네치아와 나폴리 - 순례의 해 2년의 보유,1859, S159/3,4의 개정
- 1. Gondoliera 곤돌라의 뱃노래
- 2. Canzone 칸초네
- 3. Tarantella 타란텔라
- S163 순례의 해 3년,1-4번 1877,5번 1872,6번 1857, 7번 1877
- 1. Angelus! Priere aux anges gardiens 안젤루스! 수호천사에의 기도
- 2. Aux cypres de la Villa d'Este, Threnodie I 에스테 장의 삼목 장송가 I
- 3. Aux cypres de la Villa d'Este, Threnodie II 에스테 장의 삼목 장송가 II
- 4. Les jeux d'eaux a la Villa d'Este 에스테 장의 분수
- 5. Sunt lacrymae rerum, en mode hongrois 애처롭도다, 헝가리 풍의 비가
- 6. Marche funebre 장송 행진곡
- 7. Sursum corda 마음을 정결하게
- S163a 두개의 스케치,1828
- S170 발라드 1번 D플랫 장조
- S178 피아노 소나타 B단조
- S199 Nuages gris 회색 구름
- S244 헝가리 광시곡
- S254 스페인 광시곡
- 메피스토 왈츠[88]
10.8 성악곡
10.8.1 음송곡[89]
- S346 Lenore 레오노레 (Bürger 뷔거), 1858
- S347 Vor hundert Jahren 100년 전 (F. Halm 할름) (분실?), 1859
- S348 Der traurige Mönch 슬픈 수도승 (Lenau 레나우), 1860
- S349 Des toten Dichters Liebe 죽은 시인의 사랑 (Jókai 요카이), 1874
- S350 Der blinde Sänger 맹인 가수 (Alexei Tolstoy 알렉세이 톨스토이), 1875
10.9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곡
- S366 Wanderer Fantasy(Op.15)(슈베르트 - 방랑자 환상곡)
- S367a Konzertstück(Op.79)(베버 - 소 협주곡)
10.10 피아노 편곡
파가니니
- S420 Grande Fantaisie de bravoure sur la Clochette (종에 의한 화려한 대 환상곡) 1831-2, S140의 3번 참고
리스트
- S541 Liebestraumer, 3 Notturnos, (사랑의 꿈, 3개의 야상곡) S307, S308, S298의 편곡. 1850.
- 1. Hohe Liebe (고귀한 사랑) - Ludwig Uhland의 시를 바탕으로
- 2. Seliger Tod (행복한 죽음) [90] - Ludwig Uhland의 시를 바탕으로
- 3. O lieb, so lang du lieben kannst!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 - Ferdinand Freiligrath의 시를 바탕으로
- 3곡의 야상곡을 타이틀로 출판되었으며 이 중 3번째 곡인 녹턴(야상곡) 3번 Ab장조 작품의 경우 1847년 작곡된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라는 곡으로 부제인 Liebesträume, <사랑의 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곡과 다른 두 곡의 가곡인 "고귀한 사랑"과 "가장 행복한 죽음"을 함께 편곡해 출간한 것. 당연하지만 이 출판물의 이름인 Liebestraume를 아예 부제로 가지고 있는 3번 Ab장조 작품이 제일 유명하며 이 곡만이 현재는 이 이름으로 불리고 연주되고 있다. 리스트의 곡 중 헝가리 광시곡과 함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로, 노다메 칸타빌레나 마법사의 밤 등 에서도 사용되기도 했다. 저 유명한 에로게인 토토노에서도 쓰였다.
슈베르트
슈만
- S566 Widmung (헌정)
- Frühlingsnacht (봄밤)
* 그 외 피아노 편곡 패러프레이즈
- Reminiscence des Puritains
- Reminiscence des Norma - 노르마의 회상
- Reminiscence des Don Juan - 돈주앙의 회상 (모차르트)
- Tannhauser Overture - 탄호이저 서곡 (바그너)
- Reminiscence des Huguenots
- Reminiscence des Simon Boccanegra
- Reminiscence des Robert le Diablo
- Reminiscence des Lucrezia Borgia(S.400) - 두 버전이 있다 한다. 자세한 정보 추가바람
- Rigoletto Paraphrase (베르디)
- Waltz from Faust (구노)
10.11 피아노 연탄 편곡
- S577a Field Nocturnes Nos. 1-9, 14, 18 and Nocturne Pastorale in E 필드 - 야상곡 1-9, 14, 18, 마장조의 목가적 야상곡
-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레데리크 쇼팽,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등과 함께 피아노 계에선 본좌 취급을 받고, 기교면에선 그 쇼팽도 양반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거의 따라갈 자가 없다.
라흐마니노프는.... - ↑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독일어식 이름이다. 성이 앞에 오는 헝가리어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Liszt Ferenc)'이다. 비슷한 경우로 프란츠 레하르로 알려진 레하르 페렌츠(Lehár Ferenc)가 있다. 허나 후술하겠지만 리스트의 출생지와 유년기 성장지는 헝가리의 라이딩 지역으로, 독일어권에 속한 지역이라 프란츠 리스트로 불리는게 맞긴 하다. 폴란드 출신이지만 부계가 프랑스인인 작곡가 쇼팽이 폴란드어 발음인 '호핀'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쇼팽이라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
- ↑ 다만 현재는 동시대의 다른 피아니스트와 그들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
- ↑ 당시 대중들에게 비춰진 모습만으로 판단했을 때 리스트가 천재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지닌 아이돌 이미지에 가까웠다면 바그너는 바그네리안이라는 수식어가 있을 정도로 음악가나 음악 오덕들에게 더 많이 주목받는 조용필형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리스트도 음악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바그너는 근본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였기 때문에 리스트보다 훨씬 더 많은 음악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며 바그너 음악에 대한 호불호는 단순히 듣기 좋다 나쁘다의 측면을 넘어 좀더 전문적인 음악적 차원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 ↑ 여담이지만, 이 대회에서 그는 1위 수상자가 없는 가운데 3위에 입선했다- 2등은 미로슬라프 꿀띠쉐프. 참고로 이 대회에서 출신 음대에 따른 편파판정 논란이 일었다.
- ↑ 먼저는 벅스 버니가 이 곡을 연주하는 에피소드가 원조인데 같은 곡에다가 거의 유사한 소재로 톰과 제리 에피소드가 나왔고 표절 시비가 붙은 애니메이션계의 유명한 사건이다. 지금은 루니 툰과 톰과 제리 모두 같은 워너브라더스 아래로 들어왔지만.
- ↑ 라이딩이라는 이름은 독일식 이름으로 헝가리어로는 도보르얀(Doborján)이다. 현재는 여러 일들을 거치면서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
- ↑ 피아노를 쳤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한번쯤은 쳐봤을 체르니 교본을 쓴 그 사람이다.
- ↑ 리스트의 말년의 증언에 의하면 12살때 빈에서 두 번째로 개최한 연주회가 끝난 후 그의 연주에 감탄한 베토벤이 '야이 터키 꼬마(리스트를 터키 출신으로 잘못 앎)야, 너 참 대단하구나'(...)라면서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고 한다. 다만 이 일화는 베토벤이 당시 귀머거리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논란거리가 있으며, 리스트의 상상력이 많이 가미되었을 거라는 여론도 있는 편.
- ↑ 자세한 것은 디아벨리 변주곡 항목 참조.
- ↑ 오늘날 음악가 케루비니에 대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천재소년 리스트의 파리음악원 입학을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케루비니 본인도 이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음악원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이었다는 점이다.
- ↑ 아담 리스트는 죽기 직전 급성 장티푸스 증세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간 건강했던 그가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은 병을 견뎌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들의 연주여행에 무리하게 따라다니다가 건강을 해쳤다는 주장도 있고 엉터리 치료로 증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 ↑ 리스트는 외아들이었다. 그에게 형제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으나 확실치 않다. 설령 형제가 있었더라도 유년기를 넘겨 생존한 사람은 본인이 유일하다.
- ↑ 다만 그는 이 때의 종교적 경험을 평생 잊지 않았으며 생애 후반부에는 결국 카톨릭 사제의 길로 들어선다. 한편으로 그가 출세한 후 귀족여성들에게 집착하고 그들과 화려한 여성편력을 펼쳤던 것도 이 첫사랑의 충격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 ↑ 프랑스의 낭만파 작가. 풀내임은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이 사람으로부터 프랑수 낭만파가 시작된다. 흑역사지만 말년에 샤를 10세와 극우 왕당파당에 속했다.
- ↑ 라 캄파넬라는 이 연습곡집의 3번에 해당된다.
- ↑ 기본적인 작품 구도는 1838년 버전과 동일하며 지나치게 어렵거나 불필요하게 장식적인 패시지를 다듬었다. 그래서 난이도는 낮아졌지만 작품성은 일련의 파가니니 트랙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 결국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나버리는데 자세한 것은 베를리오즈 항목 참조. 한편 리스트는 이 두 사람의 결혼식의 입회인 중 한명이었다.
- ↑ 이 환상교향곡의 원래 악보는 편곡판이 출판된지 11년 후인 1845년에야 간신히 출판된다.
- ↑ 전술된 각주에도 나오지만 쇼팽은 리스트의 인기와 외모, 큰 음량을 구사할 수 있는 체력을 부러워 했던 반면 리스트는 쇼팽의 시적 감수성과 서정적인 표현력을 부러워 했다.
- ↑ 리스트는 이들 대부분과 친분을 유지했고 서로 도와주는 관계였으나 유독 탈베르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평생 앙숙으로 지냈다. 리스트는 왠만하면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비난하지 않는 대인배였지만 탈베르크의 피아노 연주에 대해서만큼은 지속적으로 날선 비판을 퍼부었다. 객관적으로 그의 비판을 살펴보면 악감정에 의한 부분도 있고 상당히 타당한 지적도 있다. 탈베르크는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분명 당대 상위권 이었지만 작곡가나 편곡자로서는 높게 평가하기 힘들다는게 중론이다.
- ↑ 여담이지만 이들 중 알캉은 리스트 스스로도 자기가 겪은 피아니스트 중 가장 테크닉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인정했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다만 피아니스트로 오래 활약하진 않았다. 자세한 것은 알캉 항목 참조.
- ↑ 그녀의 본명은 마리 카트린느 소피(Marie Catherine Sophie, 1805-1876)였고 22살에 15년 연상의 다구백작과 결혼을 하면서 다구 백작부인으로 불렸다. 그녀와 다구 백작과의 사이에 두 딸을 낳았는데 첫째 딸은 6살에 죽었다. 한편 다구 백작부인은 나름 문학에 재능이 있어서 다니엘 스턴(Daniel Stern)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이나 여행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 ↑ 리스트의 친구였던 쇼팽도 이 클럽에 함께 참여했다. 쇼팽은 전술했다시피 자신의 첫 번째 연습곡집을 리스트에게 헌정했는데, 그의 두 번째 연습곡집(op. 25)은 이 다구 백작부인에게 헌정했다.
- ↑ 공식적으로는 이혼했지만 실제로는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 ↑ 리스트의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1권 '스위스' 편은 마리 다구와 지내던 스위스 시절에 작곡되었다.
- ↑ 애인과 살기 위해 자기 남편과 자식을 거침없이 버린 것만 봐도 그녀의 기질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무지막지한 결단을 내리고 리스트 곁으로 왔기 때문에 더더욱 리스트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 이 때는 독주회를 리사이틀(프랑스어 동사 reciter(암송하다)에서 유래) 대신 솔리로퀴(soliloquies(독백)라고 이름지어졌던 것 같다. 당시 리스트가 자신의 독주회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지루한 음악의 독백(나의 창작품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소)을 나는 로마인들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고안하였으며, 이제 그것을 파리로 가지고 갈 생각이오. 그러면 나의 오만이 끝이 없다고들 하겠지!
잘 아네상상해 보시오. 한 음악회 프로그램에 여러가지 다른 것들을 섞어 넣을 수 없는 것이 상식인데도, 전쟁터같이 여러 사람이 같이 연주하는 이런 음악회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나 자신만이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라고 뽐내어 말할 것이오. 당신이 궁금하게 생각할 것 같아 나의 음악의 독백(솔리로퀴(soliloquies)의 프로그램을 복사하여 보내오. 1.윌리엄 텔(William Tell) 서곡, 연주자 - 리스트 2. 이 퓨리타니(I Puritani)의 주제에 의한 환상곡(Fantasy), 작곡,연주자 - 리스트 3.연습곡과 소품들, 작곡,연주자 - 리스트 4. 주어진 주제에 의한 즉흥연주 - 리스트 - ↑ 특히 귀부인들이 지위와 인맥을 동원해서 공연장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 ↑ 좋게 말하면 쇼맨이고 안좋게 말하면 19세기형 점잖은 편의 철구(??) 수준일 정도였다고, 치는 도중에 일부러 기절하는 척(사실 과로로 쓰러진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다...)하거나 위에서 나온 것처럼 치다가 장갑을 벗어던지는 퍼포먼스도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뷜로가 이걸 우려먹지만 - ↑ 불을 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 ↑ 프로이센 황제가 준 다이아몬드를 면전에서 무대 밖으로 집어던진 일화는 유명하다(...)
- ↑ 대표적인 예로 멘델스존 같이 부유한 은행가 집안 출신 음악가
- ↑ 낭만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던 음악가는 베토벤, 모셸레스, 리스트 이 세 사람 외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 중에 리스트는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했기에
하지만 그가 호빗에 오크였다면 어땠을까실질적으로 나머지 두 사람보다 공헌한 바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이때면 리스트는 서른 한 살인데 서른 한 살이면 그때 나이론 상당한 중년에 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도의 인기라니(...)40살 사진봐도 중년처럼 안보인다. 방부제외모 - ↑ 그녀의 본명은 카롤리나 엘츠비타 이바노프스카(Karolina Elżbieta Iwanowska)로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인 보로니치(Voronivtsi) 태생이며, 본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원래 그녀의 집안은 폴란드의 귀족가문이었다. 그녀는 17살에 러시아의 비트겐슈타인 공작가문의 니콜라우스 비트겐슈타인(Nikolaus zu Sayn-Wittgenstein, 1812-1864)과 결혼하면서부터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으로 불렸다. 이 비트겐슈타인 부부 사이에는 딸 하나만 있었다.
- ↑ 사실 이렇게 리스트에게 흑심(?)을 품은 여자는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식의 만남은 일회성 만남이나 엔조이 수준에 머무르는게 상례였는데, 아마 공작부인에게는 리스트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특별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 ↑ 공작부인의 은퇴 제안은 여러 가지 취지로 나온 것이겠지만 사실 자신과 리스트가 함께 살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 ↑ 물론 리스트의 연주활동 자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는 각종 자선연주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피아노 연주자 및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다만 명성과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순회연주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 ↑ 당시 바이마르 궁정에서 리스트에게 부여한 직함이 Kapellmeister Extraordinaire였는데, 이것이 임시직을 의미하는 것인지 리스트의 명성을 배려해서 특별히 Extraordinaire라는 칭호를 부기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 특히 한스 폰 뷜로는 이후에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하기도 하는데 후술하다시피 코지마는 뷜로를 매정하게 차버리고 바그너와 재혼하여 물의를 일으킨다.
- ↑ 정작 바그너 본인은 수배령 때문에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바그너 및 로엔그린 항목을 참조.
- ↑ 그런데 애초에 소개장을 받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소개받는 입장인 만큼 귀족의 자제나 부유층이 아닌 이상 수준 미달인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 ↑ 다만 보수적인 카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바그너의 음악을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상당히 싫어했다.
- ↑ 한편으로 공작부인과 리스트가 헤어진 이유가 단순한 결혼불발 때문이 아니라 공작부인의 신앙심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리스트는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이고 친카톨릭적인 그녀의 신앙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며 결혼 불발된 참에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편지나 주변사람들의 증언에서 그가 공작부인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정황이 확인되며, 그녀와 헤어진 이후 봇물 터지듯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이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리스트가 공작부인의 남편과의 이혼노력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결혼이 불발되자 크게 낙담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이중인격자? - ↑ 후술하다시피 공작부인은 리스트가 사망하자 '따라 죽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8개월만에 68세로 사망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맺어지지는 못했지만 평생 리스트를 잊지 못했던 것.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처럼 필생의 여인이라는 표현은 딱 어울린다. 그리고, 이둘 결혼을 막게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폭탄에 맞아 몸이 절반 날아간 상태로 끔살당한다.
- ↑ 카톨릭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받는 정식 사제가 되려면 수문품, 강경품, 독서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 등 7품계를 모두 받아야 한다. 하지만 리스트는 4품계인 시종품까지만 받고 더 이상의 품위는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정식 성직자가 아니라 수도승 신분이었는데, 그나마도 수도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던데다가 술담배도 다 하고 애인까지 두었으니 제대로 된 수도승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성직자가 혹시 性職者? - ↑ 미사와 같은 카톨릭 전례음악을 제외한 그의 종교음악은 주로 독일어 가사로 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이태리어나 라틴어로 된 작품도 있다.
- ↑ 공식적(?)으로 알려진 그의 연인은 이 정도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은 여자를 사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심지어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70줄에도 연인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 ↑ 사실 코지마가 낳은 세 명의 자식 중 딸인 이졸데와 에바는 아빠가 바그너인지 뷜로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아들인 지크프리트만 아빠가 바그너인 것이 확실하다. 공식적으로 이졸데와 에바는 뷜로의 자식으로 되어 있다.
- ↑ 보통은 당장 의절하고도 남을 이런 사건을 두고 오히려 그는 코지마에게 수차례나 '용서한다'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주변인들이 전하곤 했던 평소 뷜로의 그 불같고 괴팍한 성격을 고려하면 저 당시 뷜로가 얼마나 인내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처럼 뷜로는 코지마와 이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뼛속까지 바그너빠였는데 아내를 도둑맞은 이후 결국 바그너에게 등을 돌리고 브람스편에 서게 된다.
- ↑ 1883년에 바그너가 죽자 '자, 이제 내가 죽을 차례다.' 라고 하면서 통곡했을 정도.
- ↑ 그러나 리스트의 이런 반대 때문에 코지마는 앙심을 품었는지 그 이후로 바그너가 죽었을 때까지도 리스트를 의도적으로 백안시한듯 하다. 그의 사후 거의 직전까지 그가 편지를 보냈을 때 항상 코지마의 딸인 다니엘라가 대신 대필을 한 기록을 보면...
근데 리스트의 생애를 고려한다면 위에서 쓴것처럼 이것도 어떻게 봤을 때 자업자득 아닌가 싶다 - ↑ 이미 60줄의 나이에 들어선 상황에서도 이런 3중 생활을 계획하고 실천한 것을 보면 리스트는 정말 대단한 열정과 체력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리스트의 이런 강행군은 유럽 각지에 그의 가르침과 지도에 목말라 했던 후배 음악가들이 매우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 이때 다리에 생긴 장애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 전문가들은 쓰러졌을 당시의 증상을 울혈성 심부전으로 진단하고 있다.
- ↑ 상술한 각주에 서술되어있듯 바그너와의 화해 이후로도 코지마와는 그녀의 냉대로 인해 제대로 된 화해를 이루지 못한 탓에, 리스트는 주치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을 보기 위해 무리를 했다고
- ↑ 원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주관은 바그너가 맡았는데 그가 1883년 사망한 후 아내 코지마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 ↑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폐렴이었다. 한편으로 리스트가 얻은 감기는 목숨을 잃을만큼 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엉터리 치료를 받는 바람에 오히려 증세가 악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 ↑ 한편으로 그녀가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 ↑ 성악곡 중에는 종교음악의 비중이 높다.
- ↑ 한편으로 무명작곡가의 악보 제목에 작곡가가 리스트의 제자이거나 악보를 리스트가 감수했다는 내용을 붙여 출판하여 그 작곡가가 주목받기 쉽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 ↑ 사실 도입했다기보다 남발했다고 표현하는게 맞다.
- ↑ 교향시는 대체로 단악장이지만 주제에 따라 여러 악장을 갖기도 한다. 대표적인 다악장 교향시가 바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 ↑ 대표적인 작품이 무조의 바가텔(Bagatelle without tonality).
- ↑ 후에 모리스 라벨이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물의 유희(Jeux d'eau)를 작곡하게 된다.
- ↑ 다만 헝가리에 자신도 설립 후원자로 참여했던 부다페스트 국립 음악원이 설립된 이후 리스트는 주기적으로 이곳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다.
- ↑ 리스트가 1886년까지 살았는데, 축음기가 실용화된 것이 1887년이다(하지만 몇 해 더 살았다고 해도 병 때문에 제대로 연주할 수 있었을지 의문). 따라서 간발의 차이로 리스트는 녹음을 남길수 없었다. 다행히 카미유 생상스나 페르치오 부조니 같은 작곡가들은 축음기가 발명될 때까지 살아남아(...) 녹음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상용 초기단계라 여러가지 여건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자동 피아노 혹은 초기 녹음정치인 구식 실린더를 더 많이 사용해서 이 당시 녹음본 중 양질이라 할 수준의 녹음은 그닥...
- ↑ 그러나 녹음본이 있다는 카더라도 나오고 있다. 리스트를 연구하던 한 음악박사의 말에 따르면 시험삼아 했던 녹음본이 있는데 그게 소실되었다고. 그로 인해 리스트가 남긴 실린더가 아직 남아있다는 소문도 나오고 있다.
갖고싶다 - ↑ 쇼팽의 혁명연습곡으로 칼럼을 기고했는데 최근 곡들을 놀라운 속도로 진보시킨 기교적 업적 등을 가리키며 '조만간 이 곡의 왼손 파트를 모두 옥타브로 연주하는 사람이 나와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 ↑ 빠른 아르페지오와 스케일로 구성되어 있다
- ↑ Op.25 no.2번인데, 상대적으로 난이도는 쉬워도 4분음표 기준 환산으로 약 200템포에 달하는 괴물같은 속도다(...)
- ↑ 이 쪽은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 ↑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요하네스 브람스도 젊은 시절에는 처음 만났던 슈만이 극찬할 정도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다만 작곡활동을 더 열심히 해서 연습을 많이 안한 탓인지 연주회를 열었다 하면 많이 까였다고 한다.
- ↑ 그러나 문헌을 살펴보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슈타인을 거절한 일화라든가 자신의 문하 작곡생에게 하루 10시간이 넘는 근무를 시킨 흑역사도 있다. 추정하는 바로는 자신의 음악 성향과 안 맞는 사람은 받지 않거나 재능이 모자라다고 판단한 사람에은 하대하거나 공밀레 열정페이로 부려먹은 듯 하다.
- ↑ 그에 대해 작성된 기록들을 보면 리스트는 피아노 테크닉 외에도 청음이나 독보 등 기본 재능 면에서도 먼치킨을 하염없이 초월해 버렸으며, 바그너가 '내가 작곡하면서 느낀 걸 리스트는 지휘하면서 느낀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지휘에도 재능 있었다. 바이마르에 바이올리니스트도 왔던 것으로 봐서는 바이올린에 대한 재능도 다소나마 있었던 것 같다. 평론가 헤럴드 쇤베르그는 그의 저서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리스트의 재능은 무서울 정도였기 때문에 중세였다면 마술을 부린다고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 ↑ 다행히 최근에는 이 잊혀진 피아노 거장들의 음악을 발굴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알캉의 작품들은 음악성을 재평가받고 피아노 음악 발전에 공헌한 점이 인정되어 점점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 ↑ 위 각주에서 상술했듯 대표적인 인물이 한스 폰 뷜로나 카를 타우지히, 그리고 '여자 리스트'로 각광받은 소피 멘터(Sophie Menter, 1846-1918) 등이 있다. 이외에도 그에게 사사받은 적이 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페루치오 부조니, 이사크 알베니스 등이 있다.
- ↑ 폴란드의 총리까지 지냈던 파데레프스키(Paderewski)가 이런 부류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테크닉이나 리듬 준수 면에서 사후까지 좋지 못한 평가를 지속적으로 받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톤이 굉장히 대중적이었으며 남다른 쇼맨십 등의 요인으로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 ↑ 루바토나 아첼레란도,리타르단도 등의 과도한 사용
- ↑ 물론 이런 것들은 적절히 사용하면 나쁜 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뭐든지 과도하게 남발하는 것이 문제이지 이런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 ↑ 사실 9~10도 정도의 손으로도 웬만한 화음들은 무리없이 꽉꽉 누를 수 있으며, 넓은 아르페지오는 손의 유연성을 기르고 손가락으로만 할려고 하지 말고 손목, 팔꿈치 등도 활용하면 할 수 있다
- ↑ 시대를 거듭하며 리스트 곡에 비견될 만한 음악은 상당히 많아졌고,
라흐마니노프라던가 고도프스키라던가...또한 의외로 쇼팽 연습곡 같은 곡도 난이도 면에서 재평가를 해보면 매우 어려운 곡들이 상당히 많다. 물론 낭만파 이후 피아노연습곡의 시초이자, 낭만파 피아노 음악들의 거의 모든 테크닉 근간이 담겨있다시피 한 곡이니 안 어렵겠냐만은... - ↑ 치프라와 볼레 두 연주자는 각각 반대방향으로 끝판왕 스타일의 연주를 보여주기 때문에 청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치프라는 리스트의 철학에 딱 어울리는 극한의 기교를 추구하는 연주를 하며 그래서 깊이가 없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어디까지나 오해이다). 볼레는 정 반대로 기교가 최대한 느껴지지 않는(?), 쉽게 들리는 연주를 추구한다.
- ↑ 7,320분 26초에 달한다!
- ↑ 정확히는 CD 98장에 보너스 디스크 1장. 보너스 디스크에는 리스트가 작곡에 도움을 주었으리라 보이는 리스트 제자의 피아노 협주곡이 수록되어있다. 하워드의 연주에 대해서는 대체로 학구적이고 훌륭한 연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곡에 따라 연주력의 기복이 좀 있는 편이다.
- ↑ 초판버전인 S126i와 구분된다.
-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연습곡과는 다르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그의 전신,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은 그의 재개정판이다
- ↑ 순례의 해의 초기 판본이다.
- ↑ 총 네 곡이 있으며 그 중 1번이 가장 유명하면서도 많이 연주되고 4번은 미완성 작품이다.
- ↑ 피아노 반주를 곁들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쉽다.
판소리?독일어라 이해가 안 된다는 게 문제 - ↑ 보통 첫줄의 가사인 Gestorben war ich (나는 죽었었다)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