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25대 진지왕 김사륜 | ← | 26대 진평왕 김백정 | → | 27대 선덕여왕 김덕만 |
시호 | 진평왕(眞平王) | |
연호 | 건복(建福) | |
성 | 김(金) | |
휘 | 백정(白淨)[1] | |
생몰년도 | 음력 | 565년 ~ 632년 정월(?)[2](68세?) |
재위기간 | 음력 | 579년 ~ 632년 정월 (54년) |
목차
1 개요
신라의 26대 왕. 연호는 건복(建福). 위기에 몰려있던 신라의 상황을 외교를 통해 극복하고, 김유신 등의 뛰어난 신하들과 국가의 기반을 잘 닦아놓은 전설적인 왕이다.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 백제에 침략에 시달리는 등 바람 잘날은 없었으나, 어쨌든 이 힘든 시기를 잘 극복했기에 신라가 삼국시대의 최후 승자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체 스펙이 뛰어나기로도 유명하며, 공주들과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해서 인기있는 왕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실판 모하메드 압둘
다만 재위기간이 워낙 길고, 당대에 김유신, 김춘추 등을 비롯한 전설적인 화랑들과 정치가 등 우리가 알만한 위인들이 무수히 많이 나온 시기라서 그들에 가려져 진평왕 자체에 대한 주목은 잘 받지 못하는 편이다. 하다못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왕이 되는 딸에게도 밀리는 데 뭐(...)
2 치세
2.1 즉위
진흥왕의 장남 김동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왕비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이다.[3] 후비로 승만부인이 있다. 전왕이었던 진지왕이 축출된 후에 왕위에 올랐다.
2.2 내치
진평왕은 즉위하자마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고, 580년 2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김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즉위 2년만에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581년 정월에 관리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 583년 정월에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 584년 2월에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고 3월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또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는 등 각종 국가기관을 설치하고 심지어 연호까지 독자적으로 수립하는 등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정부 부처 설립은 끝이 없어서 586년 정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였고, 591년 2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2.3 위기와 극복
그러나 이 때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슬슬 신라를 갈구기 시작했는데,[4] 초반의 침략은 어떻게 물리쳤으나 600년대에 거세진 고구려의 침략은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어,[5] 결국 희대의 폭군 수양제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 어떤 의미론 자국 살자고 도대체 몇명을 이후로도 백제가 강성해지자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당에게 징징대어, 당 고조 이연이 고구려에게 '너네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봉서를 보내기에 이른다. 6년간 6회에 걸쳐 사신을 보낸 기록도 있다.(…)
화랑 귀산(602년 사망). 찬덕(612년 사망)과 그의 아들 해론(618년 사망)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것이 이 시절 이야기고, 다시 623~628년 사이엔 백제와의 싸움이 격해졌는데 이때 백성들이 삶이 힘들어 자식을 팔았다는 기록이 나왔다. 사실 이쯤 되면 나라 망할 징조로 보이는 기록들도 몇 개 나오는데, 정말 망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 말년인 630년에는 서라벌에 천재지변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지진이 발생해서 궁궐의 땅이 갈라질 정도였고[6], 631년에는 이를 빌미로 이찬 칠숙(柒宿)이 아찬 석품(石品)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칠숙·석품의 난) 왕은 반란을 미리 알아채고 진압하여 칠숙을 처형하였으며, 석품은 백제로 도망쳤다가 처자식 보려고 몰래 들어오다가 잡혀 죽었다.
약소국 신라는 불안했던 진평왕의 시기에 힘을 축적해 비로소 통일신라로 가기 시작했다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진평왕에 대해 많은 전설과 후대 왕들의 존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 망한게 어디냐
3 이야깃거리
특기할 점이 많은 왕이며, 인기가 좋았는지 각종 전설이나 설화에 등장한다.
3.1 초인
기록에 따르면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한다. 어찌나 거구였고 힘이 장사였는지 계단에 올라가려고 발을 내딛자 돌계단 섬돌 두 개가 한 번에 부숴질 정도였다는 전설도 있다. 임금의 위엄을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해 이 부서진 흔적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귀엽다.
3.2 긴 재위기간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인데 창업자인 박혁거세를 제외하고는 [7]《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가장 재위기간이 긴 임금이다. 무려 54년을 재위했다. 69세에 사망했으니 비교적 장수한 셈은 아니라고 하나, 당시 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장수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대로 국제 정세나 내부 천재지변이나 나라 안팍으로 혼란이 가득했던 시기를 감안하면 천수를 누린 것 자체가 대단할 정도. [8][9]
한편 원광법사가 당나라에 유학간 때(589), 그리고 돌아와 귀산과 추항이라는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친 것, 수나라에 원군파병을 요청한 걸사표를 지은 것(608), 김유신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진평왕 말년(629) 모두 이 시기에 해당된다. 아무래도 재위기간이 길다보니 알게 모르게 진평왕과 관련된 역사가 많다.
3.3 유니크 아이템
그가 메고 다녔던 허리띠 천사옥대는 신라 왕가의 보물로 보존되었는지,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장육존상과 더불어 하늘이 내려준 '성제옥대(聖帝玉帶)'라 하여 신라삼보(3대 보물)로 칭해졌다고 한다. 일종의 3대 요소 클리셰다. 《삼국유사》에는 이 허리띠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으며[10], 《삼국사기》에는 훗날 신라 말엽에 고려 태조 왕건이 이 허리띠에 대해 신라 사신에게 물어보고 결국 경순왕이 고려에 바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라삼보의 다른 하나인 황룡사 구층목탑이 몽골의 침입 때 잿더미가 된 것에 반해 야사에 의하면 이 혁대는 조선시대까지도 보존되어 있었다고.
3.4 딸부잣집
선덕여왕, 천명공주의 아버지. 서동 설화의 일반적인 해석까지 고려한다면 선화공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논란이 좀 있지만 서동 설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백제 무왕의 장인이며, 의자왕의 외할아버지기도 하다. 태종 무열왕의 외할아버지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
3.5 골품제
신라를 막장으로 몰아놓은 골품제의 창시자, 혹은 등장배경이라는 학설이 존재한다. 정확하게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가 도대체 뭐냐에 대한 학설중 하나로, 진평왕 직계만을 성골로 만들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전륜성왕에서 시작된 이름자 놀이, 여왕의 즉위이유, 김춘추가 왜 진골이냐 등 성골과 진골에 대한 여러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기는 한데... 이러면 성골은 2대만에 끝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후새드
3.6 일화들
진평왕 자신에 대한 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편으로, 그와 관련된 일화로는 장녀[11]인 덕만(선덕여왕)에게 왕의 소질이 있다고 판단하자 그녀를 후계자로 밀었다는 것과 재위 초기엔 노는 걸 무척 좋아했지만 죽어서까지 충언을 한 충신 김후직 덕분에 올바른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후직은 죽어서 왕의 사냥길에 묻힌 뒤, 왕이 사냥하러 그의 무덤 앞을 지나갈 때 무덤 속에서 사냥을 관두라는 진언을 올렸다고(...). 뉴타입?
3.6.1 비형랑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비형랑(鼻荊郞)[12]이란 인물과 얽힌 일도 있다. 어느 날 진평왕이 비형랑을 불러 궁에서 살게 하고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이 놈이 밤마다 궁을 빠져 나가 밖에서 놀다 오는 것이 아닌가? 진평왕은 병사들을 시켜 스토킹하게 하였다. 병사들이 비형랑을 따라가보니 비형랑은 귀신과 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강에 다리를 놓게 하니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완성되었다고 한다.귀밀레~귀밀레~
어느날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귀신 중에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냐고 물었는데, 그러자 비형랑은 길달(吉達)을 추천하였다. 마침 각간의 직위에 있던 임종에게 자식이 없어서 왕은 길달로 하여금 임종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귀신을 자식으로(...) 그러다가 어느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이를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이 비형랑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는 믿거나 말거나인 이야기도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진평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一年 친동생을 갈문왕으로 봉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다
三年春一月 위화부를 설치하다
五年春一月 선부서를 설치하다
六年春二月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다
六年春三月 조부와 승부를 설치하다
七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七年秋七月 지명이 진에 들어가다
八年春一月 예부에 영 2인을 두다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十一年春三月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가다
十一年秋七月 홍수가 나서 진휼하다
十三年春二月 영객부에 영 2인을 두다
十三年秋七月 남산성을 쌓다
十五年秋七月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다
十六年 수 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十八年春三月 담육이 수에 들어가다
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十八年冬十月 영흥사에 불이 나다
十九年 삼랑사가 완성되다
二十二年 원광법사가 돌아오다
二十四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四年秋八月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秋九月 지명이 돌아오다
二十五年秋八月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다
二十六年秋七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六年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담육이 돌아오다
二十七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三十年 원광이 걸사표를 짓다
三十年春二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三十年夏四月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빼앗다
三十一年春一月 모지악 아래의 땅이 불에 타다
三十三年 수에 군사를 청하다
三十三年冬十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三十五年 가뭄이 들다
三十五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五年秋七月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다
三十六年春二月 일선주를 설치하다
三十六年 진흥왕비가 사망하다
三十七年春二月 큰 잔치를 베풀다
三十七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八年冬十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다
四十年 해론이 백제와 싸우다 죽다
四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四年春一月 왕이 황룡사에 거둥하다
四十四年春二月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다
四十五年春一月 병부에 대감을 두다
四十五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五年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다
四十六年春一月 시위부에 대감을 두다
四十六年春三月 당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四十六年冬十月 백제가 6성을 포위하다
四十七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八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다
四十八年 고허성을 쌓다
四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오다
四十九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九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습격해 함락시키다
四十九年秋八月 서리가 내리다
四十九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年春二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五十年 크게 가물어서 비를 빌었다
五十年 백성들이 굶주리다
五十一年秋八月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五十一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二年 대궁의 땅이 갈라지다[13]
五十三年春二月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가다
五十三年夏五月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다
五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三年 흰 무지개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다
五十四年春一月 왕이 죽다
재위기간이 긴 만큼 기록도 많다.
고구려, 백제와 싸운 기록,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 각종 자연재해와 말년엔 반란까지...삼국사기 4권은 지증왕부터 시작하여, 진평왕으로 끝난다.
5 여러 매체에서의 진평왕
5.1 삼국기
박웅이 연기했다.
5.2 서동요
배우는 최동준. 서동요 설화처럼 주인공 서동(무왕)의 장인어른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셋째 딸인 선화를 끔찍하게 아끼고 왕위 계승 문제에 얽히지 않게 하길 원한다. 그래서 선화공주를 당대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던 김사흠 가문에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다가 선화공주와 서동의 스캔들이 터지고, 귀족들이 선화공주를 죽이라고 아우성치자 선화공주를 살리기 위해 귀족들에게 굽히게 되고 선화의 공주 신분을 박탈하고 비구니로 출가를 명한다. 그러나 선화공주는 백제로 건너가 살게 되고 한동안은 등장이 없다. 이후 서동이 백제에서 왕위를 두고 다투고 선화가 그 일에 개입하자 보호 겸 내정 개입을 위해 신라군을 백제의 내전 와중에 보내 선화를 무사히 신라로 귀환시킨다. 서동은 거사에 성공하여 백제 무왕이 되고 신라에 정식으로 청혼하자 진평왕은 흔쾌히 선화를 백제 왕후로 시집보낸다. 그러나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선화공주를 비롯해 딸려 보낸 신라인에게 첩자 노릇을 지시하였고 뒤에선 전쟁을 준비한다. 선화공주는 이를 거부하지만 결국 전쟁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백제 내에서는 귀족들이 선화공주를 죽여라 폐위시켜라 난리를 치는 상황이 온다. -친아빠 맞아?- 이에 빡친 백제 무왕은 귀족들을 잠재우기 위해 친히 진두지휘하여 신라와 전쟁을 이끌고, 이후로 진평왕은 실제 역사대로 백제에게 탈탈 털린다. 무왕은 왕으로서 신라 영토를 점령하는데는 성공하여 백제를 부강하는데는 성공하나 선화공주는 이 과정에서 마음의 병을 얻게 되고 결국 일찍 죽어버리는 새드엔딩으로 끝난다. 이 드라마를 새드엔딩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
5.3 선덕여왕
진평왕(선덕여왕) 문서로,
5.4 대왕의 꿈
여기서도 귀족들과 대신들간의 분란이나 자신을 옹립하여 섭정을 했었던 할머니 사도태후의 그림자에 머무는 어찌보면 안습한 왕. 하지만 단순히 안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촌인 용춘과 그의 아들 춘추를 생각해 주기도 하며 딸인 덕만에게 "용상에 오래앉아 있다보면 신료들이 누가 참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는지 다 보인다. 허나 정치란 참, 거짓을 가르는게 아니라 그 둘을 화합시키는 것이기에 더욱 어려운것이다. 그게 용상을 오래 지키는 길이기도 하고." 라는 대사로 나름대로 정치적 경륜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슬하에 자식이라곤 딸밖에 없고 그나마 유력한 성골 왕위 계승자인 동생 국반 갈문왕[14]은 맛이 간정신이 온전치 못하여[15] 춘추를 태자로 들일 것인지에 대한 말이 많아 후계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13화에서 놀라운 반전이 벌어졌는데, 병세를 위장한 진평왕이 절묘한 기만책을 사용하여 단숨에 권신들을 굴복시키고 군강신약의 구도를 만든 것이다.낚시왕 진평 이에 깜놀한 상대등 숙흘종이 고개를 내리깔고 "우리는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소이다"라며 움츠러드는 장면은 압권.태평에게 물먹은 견훤 게다가 기우제를 성공적으로 치뤄낸 절호의 타이밍에 위장 전술을 폈기 때문에 자연히 모두가 왕에 대한 외경심을 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연기가 덕만에게 왕위를 승계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점에서도 예상을 뒤집는 반전이었다.
그러나 승만이 권력에 대한 본격적인 야심을 드러내는 19회부터 진평왕에게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미약을 먹여서 선덕여왕에서의 진평왕처럼 무력한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이후 난이 진압되고 막바지엔 험난한 정치판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탓인지 딸 덕만마저 경계하는 노이로제를 보이기도 했으며, 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가시방석 같은 위치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며 눈을 감는다.
이후 선덕여왕으로 즉위한 딸 덕만은 "자신이 그 위치에 오르고 나서야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알겠다"며 아버지 진평왕의 부담감과 고독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 ↑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의 이름을 그대로 지은 것이다.
- ↑ 632년 정월에 죽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631년 칠숙의 난 직후에 죽었다는 《신당서》의 기록 역시 첨가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53년 재위하고 향년 68세에 죽은 셈이 된다.
- ↑ 본명이라기보다는 아버지 대부터 작정하고 지은 것. (법륜 역시 의미가 전륜성왕이다.) 백정이란 이름 자체도 실제 인도의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의 이름을 따 온 것이며
절대 우리가 아는 백정의 의미가 아니다!, 동생에겐 김백반, 김국반이라는 석가모니 삼촌의 이름을, 덕만 등에게도 석가모니의 누이의 이름을 붙여주었지만부처님의 노여움을 사서정작 석가모니가 될 왕자가 태어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무려 54년이나 그랬던 것. - ↑ 동시기 고구려는 중흥군주 평원왕과 희대의 전쟁영웅 영양왕으로 이어지는 중흥기였고 백제 역시 근성의 복수귀 위덕왕과 중흥군주 무왕으로 이어지는 중흥기였다.
- ↑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제외한 북쪽의 땅 상당 부분을 수복 하였고 백제는 과거 가야지역을 대부분 복속하고 한성 일대 즉 한강유역 바로 코 밑 까지 점령한 상황이었다. 당시 신라의 상황은 멸망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위기상황 이었다.
- ↑ 이 정도면 최소한 건물 몇 채는 붕괴되었다는 얘기도 된다.
- ↑ 그런데 박혁거세의 재위기간은 60년에 맞추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설이 많다.
- ↑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같은 시기 중국에선 수(581 건국), 당(618 건국)이 들어섰고, 고구려는 최후의 중흥기 왕으로 알려진 평원왕(559 즉위), 영양왕(590 즉위), 영류왕(618 즉위), 백제 역시 위덕왕(554~598), 혜왕, 법왕, 무왕(600)이 들어서는 최대의 난세였다. 이쯤 되면 무난한게 멀쩡한거란 말이 나온다.
- ↑ 내물 이사금으로 등장하는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이 57(345~402)년으로 재위가 좀더 길고, 《삼국사기》에는 47(355~402) 년이다. 그 다음은 흘해 이사금의 47(310~356)년.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38년(308~345)이다. 흘해 이사금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석우로의 아들인데, 석우로가 죽은 후 100년이나 더 살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뢰가 떨어져서 재위년이나 계보 중 하나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는 설이 있긴 하다.
- ↑ 옥대의 옥이 하나하나가 다 용이어서 그 중 하나를 떼어 물에 던지자 용이 승천했다 한다
- ↑ 사실 덕만이 장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녀(桃花女)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 ↑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인데 땅이 갈라질 정도가 되려면 진도 6.5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 ↑ 진덕여왕의 아버지이다.
- ↑ 물론 이 극의 설정이며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