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부이스André Bouys, 《음악모임》. 캔버스에 유채, 1710년경. 전형적인 바로크 실내악 연주를 보여준다. |
안토니오 비발디의 작품을 포함한 수많은 바로크 거장들의 오페라가 초연되었던 베네치아 성 안젤로 극장. |
1 개요
바로크 음악은 르네상스 음악이 끝난 1600년경~1750년경의 유럽 음악의 사조로 원래 바로크란 17, 18세기의 예술양식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바로크 음악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된 일은 꽤 오래되지는 않았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1600년경부터 1750년경의 음악에 대해서도 이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역사적 배경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절대주의 왕정으로부터 계몽주의로의 이행을 볼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 정신사적으로는 합리주의적·계몽주의적인 사조의 흐름 속에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여러 사회적 상황이 몇 겹으로 겹쳐서 궁정, 도시, 교회 등 세 활동범위를 기초로 하여 바로크 음악을 형성하였다.
장 자크 루소가 음악의 한 형태를 지칭하게 된 바로크 음악 (musique baroque)라는 용어를 완전히 정착하게 한다. 1768년에 쓴 《음악사전 Dictionnaire de musique》에서 바로크 음악을 '화성적으로 혼란스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이 가득하고, 노래는 굳어 있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음정도 잡기 어렵고 움직임은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평하였다. 링크, 네이버캐스트 바로크(baroque)라는 단어는 포르투칼어 barroco에서 왔는데, 찌그러진 진주, 혹은 '괴이한 형태의 진주'를 말한다. 앞뒤 문맥을 고려할 때 실로 루소는 이 바로크라는 말을 매우 극단적인 언어로 사용한 것이 분명해 보이며, 실제로 그가 바로크 음악을 '괴이하고, 지나치고, 부자연스러운' 음악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미학적으로는 '정서론' 즉 '음악의 궁극목적은 음과 음의 리듬, 멜로디, 하모니, 음정 등으로 모든 정서를 자아내는 데 있다'고 하는 독특한 타율적 미학관으로 뒷받침되었다.
바로크 음악은 시대와 국가로 분류해볼수 있는데, 초기 바로크는 1600년~1630년, 중기 바로크는 1630년~1680년, 후기 바로크는 1680년부터 1750년까지로 분류해볼수 있고, 각 국가의 바로크 음악은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정도로 분류해볼수 있겠다.
현대에도 종종 바로크적 작풍을 활용하기도 한다. 클로드 볼링(Claude Bolling)의 《Baroque and Blue》 의 도입 주제라든가,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프랑크푸르트 BGM이라든가...
2 바로크 음악의 새로운 장르
2.1 극음악
초기의 바로크 음악은 이전 세대인 르네상스 음악이 남겨준 양식, 장르 등과 쟁쟁한 시인, 음악가, 작가, 과학자 등이 모인 피렌체의 협회 '카메라타[1]'가 '모노디 형식'을 만들어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모노디 양식은 독창 성부와 통주저음 성부만을 쓰는 양식[2]을 말하는데, 이 양식으로 오페라나 오라토리오, 기타 성악곡의 기본적 양식이 되는 레치타티보가 생겨났다. 이 레치타티보는 음악적으로 아름답다고 볼 수는 없었으나, 극음악에 필요한 빠른 전개와 스토리 설명등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데에 적격이었다.
이 모노디 형식을 바탕으로 음악가 야코포 페리Jacopo Peri의 역사상 첫 번째 오페라인 다프네Dafne[3]가 1598년 피렌체의 카니발에서 상연된다. 뒤이어진 그의 오페라 에우리디체Euridice가 1600년 10월 6일 피렌체에서 초연되었는데, 기악이 쓰이지 않고 성악과 통주저음만이 쓰인 전형적인 초기 오페라였다. 그는 에우리디체에서 오르페오가 슬픔에 빠지는 부분에서 쉼표를 자주 쓰고, 반음계를 쓰는 등 어느 정도 마드리갈적 요소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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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보 페리의 두 번째 오페라 에우리디체 초판, 1600. 페리는 그의 오페라에 최초로 통주저음 기법을 사용했다. |
하지만 초기의 오페라는 바로크 음악이라고 부르기엔 약간 애매했는데, 최초의 바로크 오페라라고 부를만한 곡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L'Orfeo다. 오르페오는 페리의 에우리디체에 비해 엄청나게 ㅎㄷㄷ한 퀄리티를 가지고 있는데 오케스트라 편성만 해도 하프시코드2, 트럼펫4, 트롬본5, 코르네토2, 리코더2, 하프, 비올라 다 감바3, 오르간2, 피콜로 바이올린2, 바이올린2, 비올라2, 첼로, 더블베이스2 , 키타로네3, 팀파니 라는 현대 오페라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대규모 편성을 자랑한다. 또한 몬테베르디는 무엇보다 마드리갈 작곡가로 유명했는데 마드리갈이 필요로 하는 극적인 분위기와 코믹한 요소를 몬테베르디는 오르페오에 차용함으로써 오페라의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4]
몬테베르디의 오페라가 대성공을 거두자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는데[5], 그가 오페라에 차용한 요소들은 세속적인 음악뿐 아니라 오라토리오나 수난곡 같은 요소들에서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몬테베르디는 새로운 양식과 옛 르네상스의 양식을 융합했을 뿐 아니라[6] 극음악에 여러 악기를 반주로 사용해 관현악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에서도 바로크 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높은 평을 받는다.
또한 17세기 초기에는 오페라 양식을 본딴 칸타타가 생겨났다. 시간이 갈수록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칸타타는 점점 인기있는 장르가 되었는데, 칸타타는 오페라의 음악적 매력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오페라처럼 막대한 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음악 또한 우아하고 세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주로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소편성에 높으신 분들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세속 칸타타가 많이 작곡되었으나, 독일에서는 거의 교회에서 연주될 목적으로 많이 작곡되었으며, 타국 칸타타보다는 조금 진지한 분위기를 풍긴다.
2.2 종교음악
바로크 음악은 르네상스 음악이 추구하던 '균형' 대신 감정표현, 대비 등이 중시되면서 오페라가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양식들이 물결을 타 종교음악으로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기악곡과 달리 성악, 특히 종교음악은 중세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의 대선배들이 여러 가지 주촛돌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종교음악은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게 된다.
특히 바로크 초기에는 오라토리오가 확립되었다. 오라토리오는 기도소를 일컫는 말인데, 중세시대 신도들은 오라토리오부터 행렬을 출발해 도시광장에서 복음서와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재현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 오라토리오의 규모가 커져서 객석과 무대가 만들졌다. 1600년에는 음악 감독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가 이 오라토리오(...)에서 상연하기 위해 《영혼과 육체의 극Rappresentatione di Anima e di Corpo》을 작곡했다. 이 작품을 엄밀히 오라토리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라토리오의 원형이 탄생한 것이었다[7]
이 형식을 더욱 발전시켜 오라토리오라고 불릴 만한 곡을 작곡한 사람은 바로 쟈코모 카리시미Giacomo Carissimi였는데, 카리시미는 낭송적인 레치타티보와 장엄한 합창을 추가시킴으로써 오라토리오를 정점으로 이끌었다. 그는 모든 오라토리오를 라틴어로 썼는데, 카리시미의 라틴어 오라토리오는 전 유럽 작곡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카리시미 사후에는 라틴어보다는 이탈리아어 대본이 많아지고, 오페라가 볼 수 없는 기간에 상연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전체가 2부로 되어, 중간에 설교나 휴식을 가졌다.
2.3 기악곡
바로크 시대가 되면 성악곡이 주를 이루던 르네상스 음악과는 달리 기악곡의 위상이 높아졌다. 하여 악기의 수가 크게 늘어났으며, 종교적인 음악에서나 세속적인 음악에서나 악기의 반주가 곁들어짐으로써 기악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악기의 연주법도 바로크 시대에 진보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와 함께 여러 기악 장르가 만들어졌다. 이미 이탈리아는 극음악 이외에도 바로크 기악곡 확립에 대한 선구적인 업적을 이루었는데, 바로 소나타와 협주곡의 확립이다. 이탈리아의 거장들은 각각 두 개의 형식을 확립했는데, 소나타는 교회 소나타와 실내 소나타가 그것이고, 협주곡은 독주 협주곡과 합주 협주곡으로 분류했다.
왼쪽: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BWV 1023. 보통 전주곡 다음 춤곡이 뒤따르는 실내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바흐는 전주곡 다음에 알르망드와 지그를 넣었다. 오른쪽: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첼로 소나타 e단조, RV 40. 느림-빠름-느림-빠름이라는 전형적인 교회 소나타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
또한 유럽 각지의 민속음악과 춤곡을 모아놓은 곡도 크게 유행했는데, 이것을 모음곡이라고 한다. 모음곡의 가장 심플한 형태인 알르망드Allemande-쿠랑트Courante-사라반드Sarabande-지그Gigue는 바로크 중반에 확립되었고, 바로크 후반에 갈수록 모음곡 서두에는 전주곡, 토카타, 환상곡 등이 붙고, 미뉴에트, 부레, 가보트, 파스피에, 폴로네즈 등 여러 춤곡이 추가로 붙는 등 더욱 화려해졌다. 모음곡에서는 다양한 지역의 민속적 선율과 고유 리듬으로 작곡되어 각기 다른 춤곡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하나의 곡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오페라나 오라토리오 등의 시작 부분에는 서곡이 붙었는데, 이것을 신포니아sinfonia또는 서곡[8]Overture이라고 한다[9]. 이탈리아 중기의 본좌 작곡가인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는 서곡을 빠름-느림-빠름의 3부로 구성시켰는데 이것을 이탈리아식 서곡 이라고 하며, 프랑스 오페라의 서두에 연주된 서곡은 반대로 느림-빠름-느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신포니아[10]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인기가 높아져, 아예 신포니아만 여러 개를 작곡해 출판하는 작곡가도 있었다. 이 신포니아는 곧 심포니, 즉 교향곡으로 발전하여 고전파 이후를 이끌어나가는 주축이 되었다.
왼쪽: 드레스덴 궁정에서 활약하던 작곡가 얀 디스마스 첼렌카Jan Dismas Zelenka의 세레나타, 다이아몬드Il Diamante의 신포니아. 빠름-느림-빠름의 이탈리아 서곡 양식을 취하고 있다. 특이하게 마지막 악장이 3박으로, 고전주의 음악의 교향곡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오른쪽: 조지 프레드릭 헨델Georg Frideric Handel의 오페라 아그리피나Agrippina의 신포니아. 느림-빠름-느림의 형식인, 프랑스 서곡이다. |
3 바로크 음악의 특징
3.1 통주저음
바로크 시대에는 반주가 별로 없던 르네상스 음악에 비해 반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는데, 보통 이 반주를 통주저음Basso continuo이라고 한다. 여튼 이 통주저음이 바로크 음악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여서, 혹자는 바로크 음악을 '통주저음의 시대'라고도 한다[11]. 이 통주저음은 반주의 저음부를 맡으면서도 타 성부에 해당하는 화성을 보강해주는 역할을 맡았다[12]. 통주저음은 곡 전체의 울림을 풍부하게 하며, 장단조가 뚜렷히 대비된다. 통주저음 파트에는 연주할 화성을 숫자와 기호로 써놓았는데, 자세한 사항이나 통주저음의 연주법은 통주저음 항목 참조.
3.2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확립
전술했다시피 보다 큰 오케스트라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 것은 몬테베르디였는데, 그의 오페라 《오르페오》에서 현악기들을 오케스트라의 중심에 두는 등[13] 대규모 오케스트라로의 발전에 획을 그었다.
장 바티스트 륄리나 아르칸젤로 코렐리 같은 후배 작곡가들은 몬테베르디가 사용한 현 4부를 오케스트라의 필수요소로 집어넣었고,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 금관악기나 목관악기를 더했다. 바로크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많은 악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바로크 후반에 가서는 현대와 비슷한 대규모 편성을 쉽게 볼 수 있었다.
3.3 셈여림, 템포, 박자, 장/단조의 확립
바로크 시대에는 음악의 속도, 즉 템포tempo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바로크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진 사람의 정서를 구체적으로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한 결과였다. 또한 르네상스 작곡가 지오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의 강약의 소나타Sonata pian e forte에서 처음 쓰인 셈여림이 바로크 시대에는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바로크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박자 개념이 완성되었다.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음체계였던 교회 선법은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장/단조 체계로 바뀌었는데, 이 또한 음악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성악 중심의 음악에서 기악이 중요하게 여겨짐에 따라 단순한 화성 체계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3.4 즉흥 연주
바로크 시대에는 즉흥 연주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이 시대의 산물중 하나인 통주저음은 베이스 부분을 보충하여 연주해야 할 화성은 숫자나 기호로만 기보했기 때문이다. 특히 건반악기의 경우는 악보를 쭉 보고 연주하면서 즉흥적으로 화음을 채워넣어야 했기 때문에 즉흥 연주가 중요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가수나 연주자들에게는 악보에 자기 자신만의 장식을 첨가하여 연주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는데, 이것은 작품에 대하여 창조적인 공헌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음과 연주법이 여럿 개발되었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건반 독주곡에 부점을 넣어주는 노트 이네갈(Notes inégales) 주법이 유행하던 것도 이때의 일. 따라서 바로크 시대에는 실제 악보에 씌여진 것과 다르게 연주되곤 하였다. 그러나 같은 바로크 시대라 할지라도 연주 관습은 시기나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났다.
3.5 정서론
르네상스 시대에는 낱말의 뜻을 음의 움직임으로 묘사하는 기법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종교곡에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반음계로 점점 내려가는 선율로 슬픔을 상징하였고, '부활'은 반대로 상승하는 선율로 표현하였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러한 표현을 더욱 발전시켜 음악을 통해 인간의 관념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원래 예술가 개인의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서'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인간 감정의 여러 양상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정서론'이라고 한다.
이를 더욱 어울리고 생생히 표현하기 위해 음악가들은 리듬, 선율, 화성으로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하였고, 이런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하행선율과 잦은 쉼표, 불협화음을 빈번히 사용했고,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빠른 진행, 장식음, 트릴 등을 많이 사용했다.
4 바로크 음악의 변천
4.1 프랑스의 바로크
바로크 중기의 프랑스는 막강한 예술의 후원자인 루이 13세와 아버지와 같은 예술의 후원자이자 절대 권력을 주장했던 루이 14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전 유럽은 프랑스의 예술, 취향을 고상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섭정과 반란을 경험했던 루이 14세는 강력한 왕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권력 유지를 위한 효과적인 것이 필요했는데 루이 14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예술이다. 그는 자신을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시함으로써 프랑스에 빛을 안겨주는 군주의 상징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는 예술의 최고 후원자이자 감독을 자처했다.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은 무엇보다도 우아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이 돋보였으며, 장중하면서도 화려한 건반음악은 전 유럽에 영향을 주었는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그의 저서에서 프랑스의 건반음악 수준을 꾸밈음과 붙임줄 등이 분명히 기보되어 있고, 왼손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았다[14]며 극찬했다.
4.1.1 초기 바로크
프랑스 궁정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여러 가지 예술을 조합한 궁정 발레가 인기를 모았는데, 화려한 의상과 무대 장치를 동원한 최고 유흥거리였던 발레는 무용수 뿐 아니라 각료나 귀족, 심지어는 왕도 출연했다. 이 시기를 다스렸던 루이 13세는 직접 발레를 추는 등 예술을 애호했지만, 자기 아들처럼 권력 강화의 도구로 생각한 것은 아니라서 궁정 발레가 빠르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루이 13세는 최초로 표준화된 오케스트라 '24대의 바이올린Vingt-quatre violons'을 조직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자크 샹피옹 드 샹보니에르Jacques Champion de Chambonnieres가 여러가지 하프시코드 테크닉을 개발했는데, 바로크 프랑스 건반 음악의 현란한 장식음은 아마 류트 음악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샹보니에르는 아름답고도 우아한 선율, 펼침화음 및 꾸밈음의 다양한 사용으로 프랑스 클라브생[15] 악파의 창시자로 인정된다. 그의 작품들은 전 유럽의 건반 음악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내의 후배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샹보니에르, 클라브생 작품집Les pièces de clavecin 중 사라반드. 프랑스 건반음악은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 |
4.1.2 중기 바로크
중기 바로크인 1643년부터 본격적으로 루이 14세가 통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집권 하에 음악이 언제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재능있는 음악가면 누구든지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가장 왕의 총애를 받았던 음악가는 바로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였다. 그는 왕에게 알랑거려 다른 음악가들을 따돌리고 프랑스 음악계에서 독점적인 권력을 쟁취했다는 혹평도 받긴 하지만 그가 재능있는 음악가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에서도 이탈리아 오페라 몇 편이 상연되긴 했지만 큰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에는 이미 궁정 발레같은 자국의 예술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 륄리는 동시대 프랑스 작가인 장 바티스트 몰리에르와 합작하여 코미디 발레Comedie-ballet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 코미디 발레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노래와 춤을 합쳐 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16]
전술했다시피 프랑스 내에서 오페라라는 장르는 별로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는데, 1671년 작가 피에르 페렝Pierre Perrin과 작곡가 로베르 캉베르Robert Cambert가 합작하여 상연한 오페라 <포몬>Pomone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17]. 하지만 페렝이 사기로 졸지에 망해버리고 감옥에 갇혀버리자(...) 영리한 륄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페렝에게 접근해 오페라 독점권을 따버린 것(...). 륄리는 1672년 해산한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다시 열고 1673년부터 궁정 작가였던 필리프 퀴노Philippe Quinault와 합작한 <카드뮈와 에르미온>cadmus et hermione을 시작으로 일년에 한 번씩 오페라를 공연했다.
륄리의 오페라 <아르미드>Armide 중 파사칼리아. 륄리의 오페라는 이런 식으로 중간중간에 기악곡이 삽입되었다. |
륄리가 만든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에 비해 극의 중요성이 훨씬 강조되었고, 발레와 합창을 중요시했고, 기악이 독립된 악곡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는 간결화되는 등 확실히 달랐다. 이런 형식의 바로크 오페라를 '서정 비극'Tragedie lyrique라고 한다.
오늘날 륄리가 욕을 많이 먹기도 하지만(...) 타 국가와 달리 프랑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확립했다는 평을 받는다.뭔가 계속 륄리 얘기만 한다 륄리의 뒤를 이은 마랭 마레, 앙드레 캉프라 등 중기 바로크 작곡가들은 주로 륄리의 양식을 귀감으로 삼아 그의 양식을 모방하는 데 주력했다.
종교음악의 측면에서는 륄리를 비롯한 왕실 예배당의 작곡가들은 궁정의 종교적 행사를 담당했다. 특히 작곡가들은 모테트를 많이 작곡했는데, 편성에 따라 프티 모테트(petit motet)와 그랑 모테트(grand motet)로 나뉘었는데, 프티 모테는 몇 개의 성악 파트와 통주저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편성이지만 그랑 모테트는 다중 합창과 독창자,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끼워져 더욱 웅장한 규모의 모테트였다.
왼쪽: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의 주님께서 당신에게 응답하시고Exaudiat te Dominus, LWV 77. 그랑 모테트. 오른쪽: 앙드레 캉프라André Campra의 피어라 풀이여, 무성하라 백합이여Florete prata, frondete lilia. 프티 모테트. 이 둘을 비교하며 들어보자. |
륄리가 극장과 세속적인 음악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면, 종교적인 음악에서는 미셸리샤르 드 랄랑드(Michel-Richard de Lalande)와 마크 앙트완 샤르팡티에르(Marc-Antoine Charpentier)가 두각을 나타냈다, 드 랄랑드는 70곡이 넘는 그랑 모테트를 남기고 있는데, 우아한 선율, 대담한 화성과 독창과 합창의 대조 등을 사용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샤르팡티에는 계락에 능한(...) 륄리가 오페라 등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분야에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폈기 때문에 종교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특히 그는 전술했던 카리시미에게 젊은 시절 로마에서 배웠기 때문에 프랑스에 처음으로 라틴어 오라토리오를 소개했다. 샤르팡티에의 오라토리오는 이탈리아식 오라토리오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륄리의 프랑스식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절묘하게 결합시켰으며, 극적인 대조와 가사 표현이 뛰어났다.
기악곡의 측면에서는 루이 쿠프랭(Louis Couperin)과 장앙리 당글베르(Jean-Henri d'Anglebert), 니콜라 르베그(Nicoloas Lebegue)나 니콜라 드 그리니(Nicolas de grigny)같은 뛰어난 오르가니스트, 쳄발리스트들이 배출되었다. 이 시대에는 '비정량 전주곡'이 수록되었는데, 이 전주곡의 악보는 실제 연주하려는 리듬과는 관계없이 한 가지 음표로만[18] 기보하고 그 음들이 속한 그룹만을 나타낸다. 다시말해 박자나 리듬은 연주자가 재량껏 연주해야 했다. 악보에도 세로줄 그런 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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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프랑스의 여성 작곡가, 자케 드 라 게르Jacquet de la Guerre의 모음곡 d단조 중 전주곡. 악보가 심히 괴랄하다.(...) 오른쪽: 왼쪽의 악보를 연주하는 영상. |
또한 바이올린족에 밀려 빠르게 뒤쳐지던 비올족은 프랑스에서 대단히 인기가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비올의 표현성을 최대로 끌어올린 마랭 마레(Marin Marais)가 있었다. 그의 비올 작품집은 화려하고 우아하기 비길 곳 없는 프랑스 양식의 걸작으로 전해진다.
4.1.3 후기 바로크
라모의 오페라 <플라테>(Platée) 중 한 장면. |
바로크 후기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극음악 작곡가는 쟝 필리프 라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라모가 작곡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1733년에[19] 라모 최초의 오페라 <아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가 초연된 후였다. 2년 뒤에는 <멋쟁이 인도인들>(Les Indes galantes)로 다시 한 번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에도 주옥 같은 오페라들을 쏟아내면서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도 받게 되고 작위도 받는 등 부유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오페라는 륄리의 오페라를 따르고 있지만, 극적인 면을 한 층 더 끌어올렸다. 합창과 춤은 극 중 결정적 역할을 맡고 있으며, 관현악곡의 화성처리의[20] 독창성, 합창과 독창이 함께 연출하는 효과가 매우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륄리빠들은 이 오페라가 불협화음이 너무 많고 시끄럽다며 비판했다. 익명의 한 평론가는 이런 이유 때문에 라모의 아폴리트와 아리시가 '바로크'하다고 비평했는데, 이것이 '바로크'라는 단어가 예술작품의 특성을 지칭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아무리 비판이 쏟아져도 라모의 오페라는 인기가 대단했는데, 이 시대의 모 영국인은 모든 사람들이 라모의 끔찍한 작품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그의 오페라 좌석을 얻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기록했다.
건반음악을 보자면,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은 프랑수아 쿠프랭(Francois Couperin)[21]에 의해 최고봉에 도달했다. 그는 1716년에 <클라브생 연주법>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그의 연주법을 전 유럽에 알린 계기가 되었고, 운지법의 현대적인 체계를 주창하고 꾸밈음의 바른 연주법을 강조한 중요한 논문으로 꼽힌다. 쿠프랭의 음악은 선배 작곡가들보다도 더욱 유연한 선율과 매우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장식음, 표현적인 화성 사용 등은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의 정수로 할 수 있겠다. 쿠프랭은 기존의 모음곡에 더 많은 춤곡을 넣어 오르드르(Ordre[22])라고 명명했다.
클라브생 작품집 1권중 3번째 오르드르의 '어두운 알르망드'(Allemande La Ténébreuse). 화려한 장식음이 계속 연주된다. |
또한 쿠프랭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식 트리오 소나타를 시도한 최초의 작곡가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음악의 밝고 분명함과 프랑스 음악의 섬세함과 우아함을 섞어 두 나라 양식을 융합하고자 했다.
4.2 이탈리아의 바로크
이탈리아야말로 바로크 음악의 시작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전술한 대로 최초의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협주곡, 소나타 등 수많은 장르를 만들고 쏟아낸 국가가 바로 이탈리아다. 이탈리아 음악은 전 유럽의 귀감으로 여겨졌다. 프랑스 음악이 화려하다면, 이탈리아 음악은 무엇보다 바로크 음악의 기본이 되는 기초적인 표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탈리아도 독일 만만치 않게 여러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서로의 음악이 조금씩 다르다.
4.2.1 초기 바로크
사실상 전술한 새로 만들어진 오페라 등 극음악의 창시가 초기 바로크 극음악의 역사나 다름없다. 더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니 이보시오
새로운 바로크 양식으로 된 교회음악에는 모테트나 미사곡 대신 성악과 기압 합주의 다양한 편성을 포괄한 의미로 '콘체르토'라는 이름을 붙였다.[23] 이러한 곡을 '종교 협주곡'이라 불렀는데, 독창에 통주저음만 붙은 것부터 몇 개의 합창단을 포함하는 대규모 협주곡도 있었다. 음악가 로도비코 비아다나(Lodovico Viadana)sms 1602년 <백 개의(...) 교회 협주곡>(Cento concerti ecclesiastici)라는 협주곡 작품집을 출판하였는데 그는 종교음악에 '협주곡'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최초로 채택한 작곡가로 꼽힌다.
전술한 몬테베르디는 종교음악에서도 새로운 양식을 바탕으로 곡을 썼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양식과 옛 양식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몬테베르디의 <성모 마리아를 위한 저녁 기도>(Vespro della Beata Vergine)는 화려한 악기편성과 새로운 양식으로 유명하지만, 르네상스 양식의 무반주 다성 미사곡들도 작곡했다.[24]
왼쪽: 몬테베르디의 성모 마리아를 위한 저녁 기도, SV 206 중 예루살렘을 찬양하라Lauda Jerusalem. 연주는 존 엘리엇 가디너. 오른쪽: 같은 곡집에 실린 미사곡, SV 205 중 키리에. 연주는 필립 헤레베헤. 이 둘을 한번 비교해서 들어보자. |
오라토리오도 이 시기에 탄생한 장르나,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넘어가자(...).
바로크 초기의 소나타는 단순히 '연주되는 곡'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초기의 소나타는 짧은 악장이 여러 개가 있고, 성부의 수가 네 개 이상이였다. 초기 이탈리아의 소나타 작곡가 중 가장 중요히 다루어지는 작곡가는 살라모네 로시(Salamone Rossi)와 비아조 마리니(Biagio Marini)이다. 로시는 거의 유럽 최초로 트리오 소나타를 작곡했고, 마리니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기 때문에 바이올린의 혁신적인 주법에 맞춘 화려하고 기교적인 작품을 작곡했다.
이 시대 건반악기 작품의 작곡가로는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가 유명한데, 그 이후 100여년간 이탈리아에서는 그와 견줄만한 건반악기 작곡가나 연주가가 없었다. 프레스코발디의 건반악기 곡은 바흐는 물론 당대와 후대의 모든 건반악기 작곡가들, 특히 남부 독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연주자 개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상상력과 연주자의 자유로운 표현이 기교적이고 실험적인 연주를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얀 피테르존 스벨링크는 프레스코발디와는 별개로 뛰어난 즉흥 연주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요한 아담 라인켄 등에 의해 북부 독일에 많이 퍼져 있었다. 스벨링크는 유럽의 여러 스타일을 융합하여 독자적인 음악을 많이 만들었다.
4.2.2 중기 바로크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오페라 <티그라네>(Tigrane) 중 아리아 '영광의 획득'(All' acquisto di gloria). 다 카포 형식이다. |
17세기에 탄생한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는데, 바로크 시기 동안 오페라는 궁정과 귀족의 오락물로 성장하였다. 오페라를 처음 만든 피렌체 궁정에서부터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가 오페라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위의 도시들의 여러 군데에 오페라 극장이 차례로 생긴다는 것은 어느 사람들이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그 유명한 카스트라토내가 고자라니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또한 중기 바로크 극음악을 논할려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이다. 스카를라티는 오페라를 형식적으로 확립시켰는데, 그의 업적은 스카를라티는 다 카포라는 형식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오페라에 차용했고, 또한 전술한 빠름-느림-빠름의 이탈리아식 서곡을 확립시켰다는 점 그리고 여러 가지 형식의 레치타티보를 새로히 개발해내었다는 점에 있다. 스카를라티는 또 칸타타라는 장르를 정점에 올려놓았는데, 칸타타가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교대되는 패턴으로 정형화되는 데 어느 작곡가보다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러한 형식은 오페라, 오라토리오, 수난곡등 바로크 시대의 주요 성악곡에 계속 사용되었다[25].
주세페 토렐리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8의 9번. |
이 시기에는 협주곡이 본격적으로 작곡되고 소나타가 더욱 발전되었다. 교회 소나타와 실내 소나타에 대한 구분은 바로크 중반부터 점점 명확해지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소나타 작곡가로는 지오반니 레그렌치, 지오반니 비탈리, 아르칸젤로 코렐리 등이다. 이들의 트리오 소나타와 독주 소나타는 이탈리아 실내악의 정점이자 가장 위대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협주곡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바로크 시대의 기악 협주곡[26]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독주 협주곡, 합주 협주곡, 오케스트라 협주곡이 그것이다. 하지만 음악가들이 이 세 가지 형식을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op.6[27]>을 보면 기악 협주곡의 기원을 알 수 있는데, 보면 솔로 파트에는 두 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이, 오케스트라 파트에는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통주저음이 들어가 있는데, 당연히 솔로 파트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솔로 파트가 트리오 소나타와 똑같은 편성이므로, 이 곡들은 트리오 소나타에서 출발했으며 오케스트라는 여기에 풍부한 음향을 더하기 위해 추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가 되어서야 협주곡에 오케스트라 편성은 필수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바로크 협주곡의 발전을 가장 앞장서 이끌었던 사람은 바로 주세페 토렐리다. 코렐리처럼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는 최초로 독주 협주곡들을 작곡하였으며, 독주악기의 기교를 과시하는 독주 부분을 넣은 협주곡의 표준 양식인 리토르넬로 형식을 만들었다. 항목 참조.
4.2.3 후기 바로크
바로크 시대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오페라는 18세기에도 여전히 인기를 유지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에서 오페라가 비현실적이고 너무 거창하게 변질되었다는 반발로 오페라 세리아라 부르는 새로운 오페라가 탄생했다. 이 오페라 세리아는 바로크 말기까지 가장 영향력있는 오페라였다. 오페라 세리아는 항상 줄거리를 고대 역사에서 가져왔는데 신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합창은 거의 없었고 프랑스 서정비극과는 달리 춤도 없었다.
아리아는 매우 길었고 중요했는데, 이렇기 때문에 모든 관심이 가수에게 집중되었다. 하여 가수들은 즉흥적으로 표현을 넣을 수 있도록 훈련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왕, 장군 같은 남자 배역이 테너나 베이스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소프라노나 알토 카스트라토가 불렀다. 오페라에서 남자 배역이 고음을 내며 부르는 아리아를 상상해 보라(...).
한 번 들어보자. 곡은 안토니오 칼다라의 오라토리오 '세데치아' 중 예레미야[28]의 아리아. 1732년 초연 당시 예레미아 역을 맡았던 가수는 유명 카스트라토 가에타노 오르시니. 참고로 이 오라토리오의 초연에서 주인공 치드키야[29] 역을 맡았던 가수는 다름아닌 파리넬리였다. |
협주곡에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 구성을 도입한 사람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로 흔히 오해를 받는 토마조 알비노니였다. 바로크 협주곡은 안토니오 비발디에 의해 정점에 달했는데, 비발디는 세 개의 악장에 더욱 개성을 부여하고, 솔로 기교의 극대화, 음량 등을 뚜렷히 대조시킴으로써 협주곡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특히나 자기 자신이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비발디는 협주곡에 매우 화려한 솔로를 집어넣었는데, 연주자의 기교를 과시할 수 있는 후대의 협주곡의 시초라 할 수 있다.
4.3 독일의 바로크
4.4 영국의 바로크
섬나라였던 영국의 음악은 다른 대륙의 음악 양식과 달랐다. 또한 바로크 초반에는 이미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유행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같은 극음악이 발을 붙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가장 빨리 건반악기 음악에 눈뜬 국가이기도 하다. 후에 가면 영국은 타 대륙 국가의 진보적인 음악양식과 자국만의 양식을 결합하여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음악 양식을 만들어냈다.
4.4.1 초기 바로크
초기 바로크 시대는 절대왕정으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시대에는 궁정의 대대적인 후원으로 많은 작곡가가 배출되고 악보출판업이 활발해졌다.
극음악 쪽은 상술한 대로 영국에는 연극의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이런 노래를 부르며 하는 극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카스트라토와 화려한 기교에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영국 궁정에서는 가면극(masque)이라는 장르를 즐겼는데, 가면극은 프랑스의 궁정 발레처럼 화려한 무대 장치와 의상 속에서 춤, 독창, 합창, 기악 등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오락물이었다. 물론 이름대로 배우들[30]은 가면을 쓰고 춤을 췄다.
4.4.2 중기 바로크
5 바로크 시대의 악기
악기의 측면에서는 아직 현악기의 현이 거트현이라 하여 새끼양의 내장(…)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음색도 작고 수명도 짧았다. 또한 활의 형태 역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고전파에 이르러서야 비오티에 의해 비로소 현대적인 형태로 정립되게 된다. 당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악기들은 오르간,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류트, 만돌린 등이 있었고, 비올라 다 모레, 비올라 다 감바, 오보에 다 모레 같은 악기들도 존재했다.
6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
비발디, 헨델 등의 거의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귀족이나 교회의 후원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직까지는 음악가가 표를 팔아서 장사한다는 개념이 거의 없을 뿐더러, 음악 자체가 자본이 있는 계층의 향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 중산층 졸부의 후원을 받는 음악인들도 서서히 태동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아직 두드러진 모습을 보인다고 하기는 어렵던 시절.
북독일 및 프랑스에서는 우아한 궁정 음악의 느낌이 풍겼고, 이탈리아에서는 정열과 낭만으로 가득찬 음악세계가 나타났다. 건반악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독주악기군의 기교 면에서 꾸밈음이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이것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전매특허인 전꾸밈음(아치아카투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현악기의 경우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끈적한 비브라토 주법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소 거친 음색으로 그어대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악기의 측면에서는 아직 현악기의 현이 거트현이라 하여 새끼양의 내장(…)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음색도 작고 수명도 짧았다. 또한 활의 형태 역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고전파에 이르러서야 비오티에 의해 비로소 현대적인 형태로 정립되게 된다. 당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악기들은 오르간,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류트, 만돌린 등이 있었고, 비올라 다 모레, 비올라 다 감바, 오보에 다 모레 같은 악기들도 존재했다.
작곡기법상 찬송가와 같이 단순한 멜로디로 한 사람의 가수를 위한 모노디 양식과 더불어 여러 파트를 모아다 한 번에 진행하는 폴리포니 양식이 발달했다. 푸가, 카논 및 인벤션 같은 다성부 기악음악이 꽃을 피웠던 시기다. 또한 장단조 체계, 그러니까 기능화성(IV-I로 끝나는 구성)이 확립되기 시작하기도 했다. 또한 일명 "메아리 기법" 이라 하여 동일한 패시지를 가지고 강약을 대조하여 나누어 반복하는 형태도 나타났다. 이러한 양식은 후에 잉베이 맘스틴을 효시로 하는 바로크 메탈 등 많은 장르에 영향을 미친다.
메아리 기법의 실례 : 스벨링크 에코 환상곡 , 북스테후데 내 영혼아 주를 송축하라(Nun lob mein Seel' den Herren)(BuxWV212) |
이 시기의 지휘자들은 오늘날의 짧은 지휘봉이 아니라 기다란 장봉을 들고 지휘했는데, 이걸 박자에 맞게 바닥을 찍으면서(…) 전체 주자들을 지휘하는 방식이었다. 쟝 바티스트 륄리 항목에 있는 동영상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딱 보면 알겠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지휘봉이 마룻바닥이 아니라 자기 발등을 찍는다. 실제로 륄리의 사인이 바로 이거였다. 음악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만 지휘봉으로 자기 발을 찍었고, 하필이면 륄리 본인이 무용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치료조차 해 보지 못하고 사망했던 것.
이 시기에 유명한 음악가는 단연 헨델과 바흐이다. 작곡가들 중 텔레만의 경우 역사상 가장 많은 기악곡을 작곡한 인물로 기네스북에 올랐는가 하면,[31] 비발디와 타르티니, 로카텔리 등은 지극히 기교에 치중한 작곡가들로 유명했다. 심지어 타르티니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악마의 트릴" 을 작곡했다는 의심을 샀을 정도였다. 반면 상술한 텔레만의 경우 악기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고난이도 기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로코코 시대에 들어서면서는 알베르티에 의해 저 유명한 알베르티 베이스가 정립되었고,[32] 다성적 음악에서 점차 선율과 주제가 중심이 되는 소나타 형식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또한 피아노의 등장과 함께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가 몰락했으며, 플루트가 떠오르고 리코더가 저물었고, 바로크 시대에 "신포니아" 라고 통하던 장르는 곧 심포니, 즉 교향곡으로 발전하여 고전파 이후를 이끌어나가는 주축이 되었다.
사운드 호라이즌과는 상관없다
- ↑ 여기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리스 문학, 특히 비극을 높이 평가하며 애호하였기 때문에 초기 오페라는 오르페오 같은 비극적인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많다.
- ↑ 보통 르네상스 음악은 반주가 없고 합창만으로 이루어진 다성음악이 많았다.
- ↑ 아쉽게도 상당부분이 망실되었다. 에우리디체가 첫 오페라가 아니라 다프네가 첫 번째 오페라이다.
- ↑ 예를 들면 두 인물의 불화가 생길 때 반주로 불협화음을 넣어준다던지.
- ↑ 그가 생전에 베네치아에만 열여섯 개의 오페라 극장이 세워졌다고 한다... 흠좀무.
- ↑ 몬테베르디는 1605년에 르네상스 다성음악은 음악이 가사를 지배하는 1 관습이며, 바로크 시대의 새로운 음악은 가사가 음악을 지배하는 2 관습이라고 못 박았다. 이로써 바로크 시대에는 내내 새로운 양식과 옛 양식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 ↑ 내용이 오페라보다는 조금 진지하지만 초기 오페라의 형식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오페라로 분류하기도 한다.
- ↑ 바로크 시대에는 '신포니아'라 불리는 장르 말고도 모음곡의 형식을 띠는 서곡이라는 장르도 있다.
- ↑ 또는 가끔씩 Introduzione라는 말도 보이는데 이는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나 오라토리아에서 많이 보인다.
- ↑ 바로크 시대에는 이 곡을 서곡이 아닌 신포니아라고 불렀다.
- ↑ 정확히는 음악학자 휴고 리만Hugo Riemann이 한 말.
- ↑ 단 이는 하프시코드나 오르간, 류트 등에만 해당한다.
- ↑ 이 오페라가 오케스트라에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사용했다.
- ↑ 프랑스 건반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아들 바흐의 생각이다.
- ↑ 프랑스어로 하프시코드.
- ↑ 하지만 얼마 가지 않은 1670년 륄리와 몰리에르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다.
- ↑ 이 작품은 페렝이 루이 14세의 허락을 받아 1669년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창설한 후 무대에 올린 최초의 작품이다. 원래는 페렝이 륄리보다 먼저 오페라 제작 독점권을 받아냈는데.....
- ↑ 온음표가 가장 많이 쓰인다.
- ↑ 그 당시 라모의 나이는 50세였다.(...)
- ↑ 라모는 근대 화성학의 창시자로 인정된다.
- ↑ 전술한 루이 쿠프랭은 프랑수아 쿠프랭의 큰아버지가 된다.
- ↑ 뜻이 매우 많아 정확히 번역하기 까다로운데, 보통 정리, 순서라는 뜻이다.
- ↑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협주곡의 어원.
- ↑ 이 저녁 기도곡과 몬테베르디의 미사곡 중 하나, 두 곡 모두 몬테베르디가 1610년 출판한 모음집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6성 미사와 저녁 기도>(Sanctissimae Virgini Missa senis vocibus ac Vesperae)에 들어있다.
- ↑ 물론 서곡이라던가 합창같은 걸 끼워넣는 것은 작곡가 마음이다.
- ↑ 전술한 종교 협주곡과 비교하기 위하여 기악 협주곡이라 한다.
- ↑ 이 협주곡집은 코렐리 사후에 출판되었으므로, '합주 협주곡'이라는 명칭을 코렐리가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코렐리는 독주 협주곡을 작곡하지는 않았다.
- ↑ 당연히 예레미야는 남자다!
- ↑ 예루살렘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역시 남자(...).
- ↑ 대부분 귀족들이었다.
- ↑ 못해도 줄잡아 4,000여곡(!) 이상 발견되었고 지금도 끝없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 ↑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누구나 알 법한 왼손 반주법, "도솔미솔 도라파라 시솔레솔" 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