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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 영역인 대구부 지역에서 시작된 소요사태를 말한다. 현재 국가기관에선 대구 10월 사건 이라 부르며 '항쟁'이나 '폭동'같은 평가부분에는 개입하지 않고 있다. 9월 총파업[1]의 연장선에서 시작되었는데 10월 1일 대구에서의 시위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우발적으로 격화되어 발생했다. 시위는 대구/경북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점차 남한 전국각지로 퍼져나갔고 약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 사건을 높이 사는 사람들은 동학농민운동, 부마민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과 견줄 만한 사건이며 부마와 광주와 함께 민중이 주도한 항쟁이라 평가한다[2]. 그러나 이 사건은 공산당이 어느 정도 개입한 면이 있기 때문에 '좌익들이 사주한 무장폭동' 등으로 인식되어 오랫동안 흑역사化...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에도 금기에 가까울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민주항쟁 전후로 재평가 논의가 활발히 시작되어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0년 3월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 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
목차
1 배경
1.1 대구와 경북의 민심
대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공산주의, 사회주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이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비율을 보면 경상도 출신. 특히 경북 출신이 압도적으로 눈에 띄게 많은데, 이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에 추가 하자면 아이러니 하게도 자유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던 호남지역의 경우 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이른바 일제암흑기시절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씨가 마르게 된다. 이후 이들의 자녀들이 일제시대 광주학생항일운동등을 일으키게 되나. 이때에도 여김 없이 호남지역은 토벌되다 시피하여 사망학생이 나오는 등 여러 피해를 입게된다.
그리해 사상적 배경이 달랐건 대구와 광주지역의 항쟁의 연관성에대해 많은 역사학자들은 부정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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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2일자, 경북 지역신문 영남일보. 당시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주는 기사글이다.
해방정국, 미 군정기 시기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남한 민중들은 굶주렸던 시기였다. 미군정의 쌀 배급정책 실패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쌀값이 열 배 넘게 올랐다고 한다). 당시 미군정 당국의 행정능력은 매우 무능했다는 게 문제였다. 식량정책 배급의 실패에 대해서도 쌀이 없으면 '채소나 과실(과일)을 구해 먹으면 되지 않냐고 변명했을 정도.
이 가운데 특히 경북/대구 지역이 매우 심각했는데, 이 무렵 대구/경북 지역에는 콜레라가 창궐했었다. [3] 대구/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미군정은 대구 출입을 통제했는데 이는 콜레라 같은 전염성이 강한 전염병이 창궐했을때 광복 직후의 한국이나 아프리카 빈국처럼 기반시설이 약한 국가에서 발병한 질병이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매우높다.
이는 기반시설이 탄탄한 선진국이라고 다르지 않은데 미국에서도 1993년, 남서부 지역에서 한타바이러스가 출몰하자 발병 중심지의 출입을 통제하였다.[4] 대구의 콜레라 발병 또한 마찬가지라서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전염병 창궐지역에 대한 기본조치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의약품이나 생필품을 보급하여 전염병을 치료했었어야 했는데 미군정은 이점을 소홀히 했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 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돈이 있다 해도 쌀을 구할 수 없어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죽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 굶주림은 극에 달해 당시 노동자 생활치고 사정이 좋다는 전매청 담배공장 노동자들조차 궐련을 붙이라고 풀을 주면 너무 배가 고파 그 풀을 먹어버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로 활동했던 세력들이 미군정 경찰로 재고용되어서 민중들을 아주 못살게 굴었고[5], 이에 대한 민중들은 불만이 날로 갈수록 쌓여갔다. 이러한 상황속에 대구/경북 지역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었다.
1.2 공산당의 9월 총파업
1946년 9월 30일자 민주중보에 실린 대구 10.1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다룬 기사. 이 기사가 실린지 이틀후 부산 지역신문인 민주중보는 1달반 동안 휴간상태 들어갔다.[6](11월 15일이 돼서야 복간되었다)
이 무렵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공산당에 대한 불법화, 공산당 주요간부들을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고, 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항하겠다면서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해서 더욱 급진적 성향을 보인다. 그리고 공산당은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으니..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었다.
이에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이내 폭동이 일어나버린다.
2 전개
2.1 대구에서의 시작과 변화
10월 1일 저녁, 대구부청앞에서 시위 중이던 대팔연탄 노동자 황말용과 철도노동자 김종태라는 두 노동자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아침, 노동자 2명이 경찰에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군중들은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합세했다. 수만여 군중에 포위된 대구 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대구 지부에서 활동하는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는데, 바로 이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도 자위권을 발동해서 순식간에 17명의 시위대를 사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분노한 군중들은 폭발해버렸고, 폭도로 변했다.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처음에 평화시위로 시작하다가 폭동으로 돌변하자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은 시위의 선봉에 섰으나 고참 당원들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총성과 화염이 뒤덮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시민들은 민중봉기 고유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부잣집과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등을 약탈했지만 각자 갖고 달아난 것이 아닌 길바닥에 쌓아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7][8] 반대로 일반 상점이나 은행 같은 곳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경찰관을 집단 폭행[9]하거나 죽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조선인들을 괴롭혀 온 질 나쁜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에 폭도로 변한 군중들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던 것이었다.[10]
한편, 미군정은 10월 1일 군중이 모일 때부터 탱크와 장갑차를 시내로 진입시켜 무력진압을 준비하고 있었다. 폭동이 일어나자 미군 탱크와 장갑차는 그대로 시민들을 밀어붙여 거리를 봉쇄했다. 또 대구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던 경상도지역 출신 경찰들[11]을 철수시키고 수도권에서 경찰간부인력을 차출하고 경남지역에서 진압 경찰관들을 투입시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해 많은 군중들의 피해는 상당했다. 비조직적으로 터져 일어났던 시위는 이내 가라앉았다.
2.2 확산과 진압
이렇게 대구에서의 폭력 시위는 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장 시위는 경상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 역시 이 사건에 적극 참여했었다.[12] 일일이 헤아릴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중소도시가 폭동에 휩싸이더니 10월 중순에는 경기도와 강원도까지 번져나갔다. 민중들의 원한을 사온 경찰관서와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 청년단 건물들은 불살라지거나 파괴되었다. 친일경찰관이나 한민당 간부, 우익청년단원들은 걸리는 대로 집단 구타를 당했다.
경찰 역시 무자비한 보복을 가했다. 영천에서는 체포한 시위대를 생매장 시켜버리는 사건이 일어났고 '경로당 같은 곳에 모이라'고 해놓고 수류탄을 던져 집단으로 폭사시키는 사건도 벌어졌다. 일제냐? 여기에 서북청년단 등 우익깡패 조직과 경찰은 복수심에 불타 과거 일제강점기에 경찰관들이 한국인에게 그러했듯이 피검자들에게 물고문과 린치를 가했다. 심지어 '독촉'(독립촉성국민회), 서북청년단 등의 단체는 사건 관련자를 체포하는 데 협력한다는 명목으로 '좌익'으로 의심받는 사람들을 직접 체포, 구타하는 등 사사로운 형벌을 감행했다. 과연 서북깡패단
무장 폭동은 11월 중순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주요도시들을 흔들어 놓았다.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사망자가 공무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인 것으로 발표되었고(이는 어디까지나 발표수치지 미신고한 사람이 많으므로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더 크다) 경북 지역에서만 관청 건물 4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타 전소되기도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이 되었다.
다만 경찰측의 피해 규모는 당시 지역 주민들의 경찰에 대한 신뢰도나 관할 경찰서장의 임기응변에 따라 크게 줄어드는(동시에 경찰의 보복도 가벼운) 경우가 많았다는 지적이 있다. 고령군에서의 사례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10월 3일 저녁에 고령군민청 본부에 모인 고령군내 민청원 수백 명이 군청을 습격, 접수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당시 고령경찰서장 최이준(崔二俊)은 선수를 치는 대신 서장 자신이 직접 민청 간부와 만나 협상을 시도했다! 이 협상 결과에 불만을 품은 일부 민청원과 군중들이 새벽에 다시 괭이와 낫을 들고 경찰서로 쳐들어온 것을 최이준 서장이 대담하게도[13] 다시 그들과 담판에 나섰다. 그러는 가운데 군중들은 자신들끼리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알력을 벌이다 대구에서 지원경찰이 온다는 소식에 해산, 덕분에 별다른 피해는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왕조 시대 이래로 유교적 전통이 강한 만큼 우익 및 경찰 세력도 좌익 못지 않게 강했던 안동에서는 10월 3일에 농림학교 교사 8명을 비롯, 공산주의 지도자로 지목된 30명(《대구시보》에는 82명)이 안동 및 영주 경찰에 사전 체포되면서 불상사는 예방되었다고 평가되었다. 문경에서는 지역 유지들이 나서서 경찰 편에서 진압을 돕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문경경찰서장이었던 조준영 경감도 문경 군민들한테는 비교적 "청렴하고 참신한 인물"로 평가를 받아온 사람이라 군내 좌익들의 동태를 파악해 예방조치를 강구한 덕분에 피해가 다소 적었고, 10월 4일에 50여 명의 군중이 군내 산양지서를 습격해 파괴하자 용의자 30명을 검거한 것 외에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다고.[14]
3 당시 정치권 반응
이 사건이 터졌을때 당시 정치권내에서도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10월 인민항쟁'으로 부르며 '동학농민운동,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우익세력 위주의 한민당은 '이 사건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이는 한민당의 주도 세력 중에 지주와 친일파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좌익세력에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이영이나 정백 등 반(反) 박헌영 세력 공산주의자들은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김규식하고 여운형등 좌우합작 세력에서는 '미 군정의 정책이 옳지 못한 데 인민항쟁의 주요 원인'이라면서 군정청 사령관에게 격렬하게 규탄했지만, 반대로 '폭력으로 혼란을 일으킨 원흉은 조선공산당'이라면서 역시 조선공산당을 대차게 비난했다. 김규식은 '이러한 행동들은 국제적으로 조선 민족의 위신을 떨어뜨려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며 자제를 촉구했다.
수도경찰청에서 근무했던 최능진[15]은 '이 사건이 조선공산당에 의해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이러한 사태를 제공한 1차적 원인과 원흉은 우리 경찰에게도 1차적 책임이 있다!'며, 조병옥을 겨냥해서 격렬하게 비난[16]하였고, 군정경찰로 재고용된 친일파 출신들을 질타했었다.
4 사태가 터진 본질적인 원인
이 사건을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직접 지휘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이 사건에는 조선공산당이 개입한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의 지령은 9월 총파업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미 군정과의 항쟁을 결의하면서도 아직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수단인 노동계급의 파업만 설정했을 뿐 무력투쟁은 상정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얘기다.[17] 그 총파업을 지휘했던 박헌영은 '10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군정청의 체포령을 피해 영구차 관속에 들어가 비밀리에 북조선으로 월북을 하게 된다. 이것만 봐도 공산당이 10.1 사건을 주도적으로 일으켰다고 한다는건 좀 애매한 감이 있다. 설령, 공산당에서 주도하고 지휘했다하더라도 폭발할 대로 폭발한 민심을 뒷수습할 역할이나 역량이 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공산당의 선동이라기 보다는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이 집약되고 폭발한 것이라는 점이 가장 주목할 점이다.[18]
이러한 사례는 미군정기 조선뿐만 아니다. 세계사에 무수히 일어난 대부분의 민중폭동들은 자신들이 승리하여 정권을 탈취한다는 보장 같은것 없이도, 오직 생존권을 위해 혹은 비인간적인 현실에 저항해 생명을 걸고 일어난 것들이었다. 이 사건이 진짜로 터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강점기의 지배층을 제대로 가려내지 않은 미 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게 된 민중들의 분노에 있었던것에 1차적인 원인이다.[19]
5 기타
북쪽에서는 "극도의 정치적 무권리와 민족적 불행,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하는 미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파쑈통치에 여기저기에서 반기를 들고나선 남조선인민들의 항쟁"으로 보고 있는데, 북쪽도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 일어난 걸 보면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민중들의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는 외세라는 건 매한가지다.[20]
- 사실 이남의 미군정이나 이북의 소군정 둘 다 민간인에 대한 피해를 어느 정도 줬었다. 일부에서는 소련군의 한반도 입성 당시 소련군인들이 북한 주민들에게서 시계, 금반지 같은 귀금속을 강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소련군 눈에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둘 다 똑같은 패전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소련군 군정 책임자로 파견한 스티코프는 한국의 사정에 나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으나, 초기 한반도에 입성한 소련군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별로 아는 바도 없었고, 실제로 1940년대쯤 되면 독립운동도 지하 비밀결사 형식(대표적으로 경성콤그룹,조선건국동맹,학병 거부자 운동 등 형태로)으로 이루어졌다(결국, 뒤늦게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군인들에 대해서 즉결 처형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뒤늦은 조치일 뿐이었다. 게다가 소련은 주둔 초기 식량을 아예 공출에 의존했고 일부는 소련에 보내기까지 했으며 북한의 산업시설을 통째로 뜯어가기까지 한터라 민생에 끼친 폐해가 미군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다. 소련군같은 약탈은 없었지만 하지를 위시한 미군정 역시 남한을 깔아보긴 마찬가지였다. 전후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크게 경계하고 있던 미군정은 남한 각 지역에 생겼던 지방 인민위원회는 당연히 무시해 버렸고 부일 세력 등용을 자제하라는 국무부의 권고도 거부했다. 또 현지 문화나 사정에 신경을 쓰지 않아 사건을 크게 키우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미국놈을 믿지말고 소련놈에 속지말라."는 구호[21].가 나돌기도 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표방한 제1공화국기에 철저히 금기의 대상이 되었었다.[22]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야 이 사건에 대해서 진보 세력 위주로 '10월 폭동'이 아닌 '10월 항쟁'으로 재조명하는 시각 또한 생겨났다.[23]
80년대 외국계 수정주의 학자들은 이 사건을 추수봉기라고 지칭한다.
90년대 월간조선에서는 새터민의 증언을 통해서 10.1 사건때 경찰에 의해서 사살된 시체는 사실은 의대에서 훔쳐온 해부용이었다는 증언을 실었다. 그 당사자는 만주에 북한 망명정부를 세운다고 했는데. 요새는 소식이 어떤지..
이인화의 박정희 영웅화를 빙자한 양판소 표절 무협지 소설 〈인간의 길〉에서는 좌익의 잔학행위를 강조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주인공 허정훈이 군사혁명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가진것으로 그리고 있다. 뭐, 당시 군중들이 경찰들을 잔인하게 죽인 거야 맞지만 당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이 사건에 휘말려 죽었고 그 이후 박정희가 한 동안 남로당에 가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건 뭐(...)
황순원의 단편 〈아버지〉의 초판에서 남도 청년(사투리를 봐서는 경상도 청년)이 건국을 위해 참가하려는 운동이 바로 이 사건을 지칭한 것이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개정판부터는 그냥 저냥 건국운동으로 바꾸었다. 이 소설에 따르면 황순원도 10.1 사건을 3.1 운동을 잇는 민중 운동으로 파악했다(이런 활동때문에 황순원도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랐다).
2013년 1월, 대한민국에서 이 사건에 대한 의미있는 재판부의 결정이 나왔다. 대한민국 재판부는 '대구 10월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경찰이 정당한 이유와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 생명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만큼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재판부는 또 피고의 시효소멸 주장에 대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피고가 오히려 조직·집단적으로 희생자들의 생명을 박탈하고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다가 뒤늦게 유족들이 미리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좋게 해석하든 나쁘게 해석하든 커다란 사건임인 것은 맞지만 인지도도 낮고 언급도 잘 되지 않는 편이다.
2013년에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조선공산당의 지시로 파업을 벌이던 중에 대구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시위자 한명이 경찰의 유탄에 사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다. 시위 군중들은 대구 경찰서를 점거하여 무기를 약탈한 후 수십명의 경찰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폭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수백명의 사망자와 수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겉으로는 대구 10.1 사건이라 말하고 있으나 사실상의 서술은 이 사건은 폭동이다라는데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것만 읽으면 학생들은 항쟁이 왜 일어났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는지 제대로 알 확률은 별로 없다. 당연히 항쟁 피해자 유족들은 이 교과서에 반발했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함께 이 교과서를 채택한 대구 포산고등학교를 찾아가 항의한 끝에 포산고측은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철회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 ↑ 9월 총파업은 1946년 9월 23일, 부산부에서 8천여 명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주요 산업의 노동자 약 25만 명이 파업에 합세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 총파업에는 조선공산당이 '신전술'차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 ↑ 그러나 이러한 평가 자체도 박헌영의 평가와 유사한 탓에 조심스러운 편이다. 박헌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무엇보다도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는데 상당한 역할(나중에 부메랑이 되지만)을 했었기 때문에 어그로 끌기가 정말 쉽기 때문.
- ↑ 제주 역시 심각했는데, 이는 4.3 사건의 발생원인이 되었다
- ↑ 현재 한국도 다르지 않다. 사람을 매개로 하는 바이러스는 아니지만 전염성 하나는 끝내주는 구제역이 발병하면 그 지역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가장 처음으로 하는 일이다.
- ↑ 어느 정도였냐면, 미군정이 쌀배급 정책에 실패를 해서 사람들이 굶어죽을 지경임에도 경찰은 애꿏은 농민들 상대로 쌀을
거의 강제로 강탈공출해 거둬갔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 출신 경찰들은 공출 거둬가는것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 쌀을 '공출'이라는 명분하에 그냥 강탈해갔을 정도였다. 당시 친일경찰이었다가 군정 경찰로 재고용된 비율만 봐도 85% 가량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당시 사람들이 경찰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 ↑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대구 10월 사건은 단순히 대구지역에만 국한된게 아닌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되어버린 엄청난 유혈사태였다.
- ↑ 다만 이는 미덕이라고 포장되었을 뿐 다른 이의 물건을 약탈해 나눈 것뿐이라고 사람에 따라 비판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 ↑ 단순히 미덕이라고 보기에는 약탈 당한 입장에서는 너무나 참혹했다. 참고로, 한국전쟁(6.25) 당시 북한군이 진주했을때 조금이라도 땅이 있던 집안들이 이런식으로 풍비박산 났다.
- ↑ 당시 분노한 군중들은 경찰들을 휘뚜루마뚜루 살해할 정도로 매우 살벌했다고 한다. 이들은 경찰의 얼굴과 몸뚱이를 칼과 도끼로 난자하였으며 손을 등 뒤로 묶어 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날카로운 돌을 던졌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경찰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이다가 폭발한 군중들은 죽창, 낫, 곤봉으로 무장하여 경찰을 살해하였으며, 심지어 '확인 타살'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까지 생기는데 있어 더욱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앞장 선 깡패와 양아치 등 부랑자들의 무분별한 폭력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 ↑ 앞서 언급했듯이, 군정경찰은 애꿏은 농민들 상대로 '공출'을 명목으로 사실상 강탈에 가까운 병크스러운 짓을 너무 많이 저질러왔었다.
- ↑ 친일 전력경찰들이 미군의 발포명령을 거부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 친일경력경찰들의 폭거가 대구사건의 큰 이유였음에 비추어 봐 이러한 주장은 거짓이고 또한 그 당시 실제 경찰들은 발포를 하기도 했었다. 해당기사 라인을 보면 시위대의 주장속에는 "왜놈순사들이 어찌우리를!!"이라는 구호까지 외쳤을 정도
- ↑ 당시 박상희는 남노동당 간부였고, 지역 유지였다. 박상희는 이 사건에서 구미시지역에서 활동했다. 박상희는 경찰 지부를 습격하다가 경찰 총에 맞아 죽는다.
- ↑ 당시 고령경찰서에는 10월 1일의 대구에서의 소요 진압에 경관 15명이 투입되고 그 밖에 피신한 경관 몇몇을 제외하면 남은 경찰은 8명뿐이었다. 미곡수집령에 대한 저항이 매우 심했던 왜관에서 주민들이 당시 경찰서장 장석한을 얼굴을 난도질하고 머리부터 밑으로 갈라 죽였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대담하다는 말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 ↑ 출처: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 ↑ 최능진은 군정경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 참고로 최능진은 군정경찰 고위직에 있을 당시 장택상, 조병옥 다음가는 권력 3인자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뒷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을 상대로 여러번 디스를 걸어, 결국 눈에 찍혀 한국전쟁 때 처형당했지만.. 그리고, 최필립의 부친이다. 거기에 안창호 계열이다. 후에 이 항쟁에서 숨진 박상희를 형이자, 큰아버지. 장인으로 둔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들을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이지만 말이다..
- ↑ 이때 조병옥이 최능진에게 '그들은 pro-jap(친일파)이 아닌 pro-job(전직)'이라고 맞대응했다.이 장면은 훗날 드라마 반민특위에서 비중있게 재현되었다
- ↑ 공산당이 무력투쟁, 폭동을 일으키고 선동하기 시작한것은 1948년 남한내 단독정부 수립이 거의 확실시 되었을 무렵에 시작되었다.
-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군중집회가 그러하듯이 노동자가 경찰에 살해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좌익 지도부의 의도적 지시와는 무관한 집단행동의 자체의 논리에 따라 움직였음은 틀림없는 부분이다. 당시 파업 노동자와 학생들은 경찰에 대한 분노로 크게 집결되었다.
- ↑ 당시 미군정 보고서 기록이나 영국 총영사의 보고서에서도 일제 경찰에 봉사했다가 미군정청의 사주를 받은 부류에 대한 한국인 일반의 분노가 대단했다고 내용이 적혀있다. 오죽했으면, 경상도 출신의 한 지식인은 웨드마이어 특사에게 친일 경찰을 제거해주면 한국인은 모두 공산주의를 반대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쓸 정도였다.-출처 : 방선주 <한반도에 있어서의 미,소 군정의 비교>, 강인철 외 <미군정기 한국의 사회 변동과 사회사1, 한림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p49
- ↑ 당시에는 막 광복직후라 독립된 한민족의 국가라는 꿈에 부풀어 올랐고, 국민들은 신탁통치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 ↑ 전문은 '미국놈을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라. 일본 다시 일어난다. 조선 사람 조심해라' 라는 노스트라다무스 저리 가라는 기가막힌 예언
- ↑ 10월 사태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정권의 사면 약속을 믿고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때, 가장 크게 피해당한 지역이 경상도 지역으로 그 피해가 매우 심각했을 정도였다.
- ↑ 안타까운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경상도, 특히 대구지역은 보수화하여 이 사건 자체를 흑역사 취급, 언급자체를 꺼려한다. 게다가 이 사건은 당시 북한의 사주로 일어난 한국의 계급 항쟁이였는데다가 후에 남노동에 가입하는 박정희의 형인 남노동당 간부 박상희가 주동자중 한 명이였기 때문에 박정희의 이름에 흠(...)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대구지역 학생들은 이런 사건이 있었는 지 조차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