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
남우주연상 | ||||
제 26회 (1954년) | → | 제 27회 (1955년) | → | 제 28회 (1956년) |
윌리엄 홀덴 (제17 포로수용소) | → | 말론 브란도 (워터프런트) | → | 어니스트 보그나인 (마티) |
제 44회 (1972년) | → | 제 45회 (1973년) | → | 제 46회 (1974년) |
진 해크먼 (프렌치 커넥션) | → | 말론 브란도 (대부) | → | 잭 레몬 (세이브 더 타이거) |
이름 | Marlon Brando 말론 브란도 |
본명 | Marlon Brando Jr |
생년월일 | 1924년 4월 3일 |
사망 | 2004년 7월 1일 |
출생 |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
신장 | 175cm |
데뷔년도 | 1944년 |
데뷔작 | The Men / Kenneth "Ken" Wilcheck/"Bud" |
Marlon Brando. Jr
말론 브란도 주니어
(1924년 4월 3일~2004년 7월 1일) 향년 80세
1 개요
메소드 연기 연기론의 정전(正典)을 다시 쓴 영화 역사의 위대한 연기자[1]
영화사에 클래식 할리우드 시대의 끝과 현대 할리우드 시대의 시작을 알린 大인물[2]
the Godfather of Method
작품성, 흥행성 모두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스스로 감독한 영화 《애꾸눈 잭》(1961)의 실패 이후 몰락하기 시작, 60년대엔 과거의 영광을 잃고 쇠락하는 듯했으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1972)에서 마피아 가문의 보스 비토 콜레오네 역을 맡으면서 재기하여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
스탠리 코왈스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51) | 테리 말로이, 워터프론트 (1954) |
돈 비토 콜레오네, 대부 (1972) | 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72) | 월터 커츠 대령, 지옥의 묵시록 (1979) |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 이후 가정사에 의한 스트레스에 의한 폭식으로 인해 체중관리에 실패하여 나중에는 무려150kg 의 뚱보가 된, 어떻게 보면 불쌍한 노년을 보낸 사나이.
2 생애
미국의 영화 배우.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출생. 청소년기에는 문제아 취급을 받았으며 보다못한 아버지의 강권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내 중퇴하고 뉴욕에 상경하여 뉴욕 배우 학교에서 연기 수업을 쌓았다. 1944년에 《엄마를 기억해》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한다. 1947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서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으면서 굉장한 평가가 이어지며 일약 브로드웨이의 간판스타로 자리 잡은 그에게 할리우드는 스카우트에 온갖 공을 들였지만 말론은 장기적인 계약에 따르는 제한들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6년 후에는 그도 뜻을 굽히고 신체가 마비된 군인들의 이야기인 《맨》(1950)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했다. 그 후 19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동명의 영화판(엘리아 카잔 감독)에서도 주연을 맡으면서 생애 첫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1954년에는 엘리아 카잔 감독의 《워터 프론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정상급 배우로 성장했다. 이후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아가씨와 건달들》(1955), 《젊은 사자들》(1958), 《바운티호의 반란》(1962)등으로 연기력과 흥행력을 과시했다.
이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문제작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3)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 카리스마적인 연기력을 보여줬으며 《슈퍼맨》(1978)에도 슈퍼맨의 부친 조-엘 역으로 출연[3]하기도 했다.
영화 연기의 역사에서 말론 브란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비중이 대단한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사 불멸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스타를 꿈꾸며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 오디션 장의 문을 두드리는 신인 남자 배우들에게 심사위원들은 반드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대부》에서의 브란도의 즉흥 연기를 시켜본다. 실제로 브란도는 즉흥 연기의 귀재였고 순간적으로 그 상황에 맞는 정확한 감정을 표현해내는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뉴욕스쿨의 드라마 워크숍(크리스천 베일, 톰 히들스턴 모두 이 학교 출신들이다.)에 등록한 말론 브란도는 거기서 스텔라 애들러 여사[4]에게서 연기를 배웠는데 그녀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을 적용하여 연기에 진정성을 불어넣기 위해서 메소드 연기법을 강조했다. 메소드(Method) 연기란 액터즈 스쿨 시절 러시아의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주장했던 연기법[5]
이러한 메소드 연기의 방법론은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 연극계에 수입되었으며 40년대부터 뉴욕 액터즈 스쿨 출신의 배우들이 이러한 연기 스타일을 영화에 이식시키기 시작했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폴 뉴먼 등이 모두 액터즈 스쿨 출신으로 메소드 연기를 익힌 대표적인 배우들이다. 60년대전의 영화를 보면 배우들의 연기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데 그게 다 연극무대식의 연기 기법을 약간 중화해서 따르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라 그런 것이다. 한번은 애들러 여사가 수업 시간 중 제자들에게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닭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연기해보라 했고 모든 학생들은 제각기 푸드덕거리는 온갖 난리 요란법석을 떨며 닭들을 연기하는데 반해 브란도 혼자만 조용히 웅크리며 알을 품는 닭을 연기했었다. 애들러 여사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만 인정하며 푸드덕거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 바보 멍청이들아! 닭들이 전쟁난 걸 어떻게 안단말야!"라고 호통치고 데꿀멍 시킨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렇게 브란도는 메소드 연기법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고 이 연기론을 적극 수용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깐깐한 오디션 심사위원장들이 알길 원하고 평가하는 것은 오디션 참가자들이 얼마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스탠리 코왈스키란 인물이나 《대부》의 비토 콜레오네를 잘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얼마나 말론 브란도에 근접했는가?"는 것이다. 즉 브란도 연기는 영원한 모범 답안이니 그것을 바탕으로 너는 얼마나 즉흥 연기에 능한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론 브란도는 남자 배우들의 영원한 연기력 기준기로써 지금 이 시간에도 치뤄지고 있는 수많은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 오디션 장에 영향을 미치는 대배우다! 말론 브란도는 이런 연기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에 이른바 성격파 배우들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성격파 배우들은 말론 브란도에게 빚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건 브란도 이전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언제나 정의로운 보안관이나 역사상 유명한 전쟁 영웅 아님 장애를 이겨낸 실존 인물 등등의 바른 생활 사나이들에게만 주어졌고 안 그럼 후보에도 못 오르던 시절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톰 행크스 스타일의 배우들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거나 후보에라도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브란도는 술먹고 도박하며 마누라나 패고 처제를 강간하는 쓰레기(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돈 받고 사람 패주는 해결사(워터 프론트), 깡패 두목(대부), 섹스 중독에 빠진 중년 변태남(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전쟁의 광기에 미쳐버린 군인(지옥의 묵시록) 등의 기존 체제에 반항하는 홀딱깨는 비정상 캐릭터로도 얼마든지 스타가 될 수 있음을 그 스스로 증명해냈고 잭 니콜슨 같은 성격파 배우들이 설자리와 무대를 마련해주었다! 잊지말자! 험프리 보가트는 터프가이였지 기존 체제를 완전 갈아엎자는 반동분자는 아녔었다! 보가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몰타의 매》의 샘 스페이드는 말보단 주먹이 먼저인 인물이지만 엄연히 기존 체제 아래 순응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해리의 원조격인 인물이다.
에밀리아노 자파타, 비바 자파타! (1952)
하지만 브란도는 자신에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혁명아 자파타 Viva Zapata!》(1952)처럼 같은 전쟁 영웅이라도 오늘날까지 역사의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역할에만 흥미를 보였고 이런 역할만 찾아다녔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라 일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던 1950년대 미국에서 과감히 일본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파일럿 《사요나라 Sayonara》(1957)을 연기하거나 당시 A급 톱스타들에겐 금기시되었던 나치장교 역<젊은 사자들 The Young Lions>(1958)도 앞장서서 거침 없이 해버리던 것이 말론 브란도였다. 그로 인해 이제 배우들의 캐릭터는 입체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말론 브란도는 위험한 질주(The Wild One 1953년작)에서 1950년대 막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른 청년세대들의 반항기를 표현함으로서 당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영화에서 가죽 점퍼에 모터사이클을 타고 도시를 휘젓는 브란도의 모습은 당시 반항적인 미국 비트세대의 우상이었다.
조니 스트라블러, 와일드 원 (1953)
영화 속 말론 브란도의 패션은 매카시즘 시대의 청춘 비트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반항아 연기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제임스 딘도 원래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모방한 것이며, 그를 동경하며 여러면에서 닮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또 다른 위대한 배우, 폴 뉴먼에게도 동경과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고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상실감을 안겨준 거대한 존재이기도 했다.[6]
영화 속 이미지 만큼이나 실제로도 반골 기질이 다분했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대부'로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을 때, 인디언 협회 대표라는 젊은 네이티브 아메리칸 여성을 대신 내보내 수상 소감 대신 미국 내 원주민 인권 문제를 거론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 ‘미국원주민운동(AIM)' 창립 멤버로 관여했고 원주민운동 지도자들의 보석금과 거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아메리칸 원주민의 인권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고 이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참여했으나 아쉽게 무산되었다. 그가 인권운동에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70년대 중반 이후의 영화 촬영계약은 개런티를 최소화 하는 대신 출연분을 단기간에 집중해서 찍는 방식으로 계약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브란도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불꽃은 대부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커리어의 전성기가 일찍 끝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브란도 개인의 불우했던 신변문제와 우울증이다. 1979년의 지옥의 묵시록이 마지막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체중조절을 실패하고 다소 불성실하게 촬영에 임하는 등 배우로서의 자의식과 집중력이 예전에 비해 확연히 떨어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코폴라는 촬영에 상당한 제약을 받아야만 했으며, 수많은 재촬영과 편집을 거쳐야만 했다.
불과 30살에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모두 수상한 천재 배우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아이러니와 회의를 깨닫고 느껴버렸다. 말론이 인터뷰에서 "나는 배우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낍니다.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겁니다. 마르크스, 간디, 헤밍웨이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배우는 너무도 하잖은 존재입니다."이런 말을 하는 시점에서 그의 배우로서의 경력은 끝났다고 봐야한다. 본디 진정한 천재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법이다(...).
동시대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타와 달리 자신의 양성애 성향에 대해 감추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커밍아웃하지 않았던 다른 동료들까지 본의아니게 끄집어내는 결과가 되기도 하는데, 2006년 출간된 자서전에서 브란도와 관계를 맺었을 거라 주장하는 유명인들만도 폴 뉴먼, 몽고메리 클리프트, 버트 랭커스터, 로런스 올리비에, 제임스 딘, 타이론 파워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전형적인 난봉꾼 헐리우드 스타의 가쉽 같은 이야기 속에 나름 순애보 같은 이야기도 있는데, 바로 평생 친구 겸 애인으로 지낸 배우 겸 코미디언 월리 콕스의 경우. 말론 브란도는 73년 사망한 콕스의 화장하고 남은 재를 평생 보관하며, 가끔 외로울 땐 재를 담은 단지를 앞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 브란도 사망 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콕스의 재와 섞여 같이 데스 밸리에 뿌려졌다.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콕스가 여자였음 결혼해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한 그였으니. 이 부분은 2015년 1월 4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기사,마성의 양성애자 말론 브란도
연기자로서의 성공과는 달리 사생활에서는 여러모로 불운했다. 여러 번의 결혼 실패에다 1990년엔 아들이 살인죄로 구속되고 아들이 살해한 상대는 다름아닌 말론의 딸의 약혼남이었던지라 말론의 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해버리는 등 평생동안 안정된 가정을 꾸리지 못했고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말년에는 우울증으로 인한 폭식으로 몸무게가 무려 150kg을 넘는 뚱보가 되기도 했다. 이런 원인 때문인지 사실 청년기의 인기에 비해서는 말년으로 갈수록 출연작이 드문드문하고 작품의 수준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단역으로 출연한 78년작 슈퍼맨이후나 지옥의 묵시록 이후론 사실상 인상적인 출연작이 없다. 다른 남자배우들이 대부분 50대에 전성기를 맞는다는 걸 생각하면 브란도의 40대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좀 부실한 감이 있다.아들이 재판을 받느라 돈이 급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영화에 나오기도 했지만.
80년 이후로는 거의 매스컴에 얼굴을 비추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다. 다만 인권운동에는 적극적으로 활동을 보였다. 1990년 아들이 잡혀들어간 이후 프레쉬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돈 후앙, 닥터 모로의 DNA등에 나오면서 오랜만에 활발한 필모그래피를 선보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01년에 에드워드 노튼,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찍은 스코어였다.
2004년 폐질환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코어 이후 3년 만에 신작에 나오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서 팬들의 안타까움만 더해갔다.
3 여담
- 40대 후반에 대부에서의 노인역할을 위해 분장과 더불어 입에 보정기까지 물었다.
- 참고로 대부를 찍을 당시에는 나이가 좀 있어서 젊은 시절의 포스가 없지 않겠나 생각하는데 큰 오산이다. #
- 마이클 잭슨과도 매우 절친한 사이여서 말년엔 자신이 죽으면 그가 조장을 시켜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 조니 뎁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1995년 <돈 후안>에서 브란도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에서 감독 찰리 채플린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채플린은 촬영장에서 극중인물의 연기를 자신이 먼저 보여주고 배우에게 그대로 따라하라는 스타일의 감독이었고 브란도는 자신의 메소드 연기에 대한 자존심이 무척 센 배우였기 때문에 충돌이 자주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7]
- 슬립낫의 노래인 Eyeless에 보면 You can't see California without Marlon Brando's eyes라는 가사가 있다. 보컬인 코리 테일러에 의하면 길에서 본 노숙자가 중얼거리던 말이라 한다(...)
- 할리우드 역대 최고 몸값을 자랑하기도 한 배우이다. 슈퍼맨 1에서 10분 정도 출연에 150억원 받았는데 이게 90분짜리 영화로 환산하면 개런티가 1억 불은 가볍게 넘어버린다! 이 기록 역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 잭 니콜슨는 첫 장에 '너무나 젠틀한 말론에게, 잭 니콜슨 (For Marlon, who definitely is too gentle, Jack Nicholson)'이라 적은 제임스 카바노의 <늑대들과 살기엔 너무나 젠틀한 그들(There Are Men Too Gentle To Live Among Wolves)>이란 시집을 말론 브란도에게 선물하기도 했고[8] 브란도 사후에는 그의 저택을 사들여 선배로서의 그를 경의하는 예를 표하기도 했다. 역시 명불허전 Bad Ass!!! Jack!!! 링크
- 2007년 <브랜도>라는 그의 전기 다큐멘터리가 나왔었다. 영어가 되시는 분들은 한번 구해서 보시기 바란다. 알 파치노, 에드워드 노턴, 숀 펜, 존 트라볼타,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조니 뎁, 로버트 듀발, 존 보이트 등등의 ㅎㄷㄷ한 배우와 감독들이 말론 브란도의 존재가 얼마나 영화사에 중요한 존재였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링크
- 브랜도는 폴 뉴먼와 더불어 할리우드에서 남자 배우 스타일을 결정하는 양대 산맥 중 하나이다. "너는 반항아인가? 신사인가?"이 둘을 잘 비교 설명해놓은 좋은 블로그 글이 있어 소개한다.링크
- 그의 이름은 훗날 일본의 어떤 판타지 만화에서 악당의 정석으로 자리잡았다.
- 한때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고전 미남 배우 움짤의 주인공이 말론 브란도이다.
4 필모그래피
- 볼드체로 표시된 배역이 주요 배역.
연도 | 제목 | 역할 | IMDb 평점 | 박스 오피스 | |
1950 | 더 맨(The Men) | 켄 | 7.2 | - | |
1951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 스탠리 코왈스키 | 8.0 | $8000,000 | |
1952 | 혁명아 자파타(Viva! Zapata) | 에밀리아노 자파타 | 7.5 | $1,900,000 | |
1953 | 쥴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 마크 앤소니 | 7.4 | $3,920,000 | |
1953 | 위험한 질주(The Wild One) | 조니 스트래블러 | 6.9 | - | |
1954 | 워터 프론트(On The Waterfront) | 테리 말로이[9] | 8.2[10] | $9,600,000 | |
1954 | 데지레(Désirée)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6.4 | $4,500,000 | |
1955 | 아가씨와 건달들(Guys and Dolls) | 스카이 매스터슨 | 7.3 | $20,000,000 | |
1956 | 티하우스 오브 어거스트 문(The Teahouse of Agust Moon) | 사키니 | 6.9 | $8,925,000 | |
1957 | 사요나라(Sayonara) | 로이드 글루버 | 7.3 | $22,000,115 | |
1958 | 젊은 사자들(The Young Lions) | 크리스천 | 7.3 | $4,480,000 | |
1959 | 퍼기브 파인드(The Fugitive Find) | 발렌타인 자비에르 | 7.2 | $2,100,000 | |
1961 | 애꾸눈 잭(One-Eyed Jacks) | 리오 지코 | 7.2 | $6,000,000 | |
1962 | 바운티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 | 크리스천 일등 항해사 | 7.2 | $13,680,000 | |
1963 | 어글리 아메리칸(The Ugly American) | 해리슨 카터 맥 화이트 | 6.8 | $3,500,000 | |
1964 | 베드타임 스토리(Bedtime Story) | 프레디 벤슨 | 6.8 | $3,000,000 | |
1965 | 모리투리-유보트(Morituri) | 로버트 크래인 | 7.0 | $3,000,000 | |
1966 | 체이스(The Chase) | 칼더 보안관 | 7.3 | $2,300,000 | |
1967 | 황금 눈에 비친 모습(Reflections in a Golden Eye) | 웰던 펜더튼 | 7.0 | $1,500,000 | |
1967 | 홍콩에서 온 백작(A Countess from Hong Kong)[11] | 오그덴 미어스 | 6.1 | $1,100,000 | |
1968 | 캔디(Candy) | 그린디 | 5.4 | $16,408,286 | |
1968 | 나이트 오브 더 팔로잉 데이(The Night of the Following Day) | 운전사 | 6.2 | $1,500,000 | |
1969 | 번!(Burn!) | 윌리엄 워커 | 7.5[12] | - | |
1972 | 나이트코머스(Nightcomers) | 피터 퀸트 | 6.1 | - | |
1972 | 대부(The Godfather) | 비토 콜레오네[13] | 9.2[14] | $245,100,000 | |
1972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 폴 | 7.2[15] | $96,300,000 | |
1976 | 미주리 브레이크(The Missouri Break)[16] | 리 클레이튼 | 6.6 | $14,000,000 | |
1978 | 슈퍼맨 1(Superman The Movie) | 조-엘 | 7.3[17] | $300,200,000[18] | |
1979 |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 월터 커츠 대령 | 8.5[19] | $150,000,000 | |
1980 | 포뮬라(The Formula) | 아담 스테이펠 | 5.6 | $8,894,289 | |
1989 | 백색의 계절(A Dry White Season) | 이안 맥켄지 | 7.0 | $3,766,879 | |
1990 | 프레쉬맨(The Fresh men) | 카민 사바티니 | 6.5 | ||
1992 | 크리스토퍼 콜롬버스(Christopher Columbus: The Discovery) | 토마스 디 토르 | 4.4 | $8,251,071 | |
1994 | 돈 후안 데마르코(Don Juan DeMarco) | 닥터 잭 믹클러 | 6.8[20] | $68,792,531 | |
1996 | 닥터 모로의 DNA(The Island of Dr. Moreau) | 닥터 모로 | 4.4 | $49,627,779 | |
1997 | 더 브레이브(The Brave)[21] | 맥카시 | 6.4 | - | |
1998 | 프리 머니(Free Money) | 워른 스벤 소렌슨 | 5.0 | - | |
2001 | 스코어(The Score)[22] | 맥스 | 6.8[23] | $113,579,918 |
필모에 7점대의 수작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 말년에 이상한 영화들에 많이 나와서 조금 빛바랜 감이 있지만... [24] 또한 배역들이 상당히 다채로운데, 갱단 두목은 물론이고 현실주의자 폭력 남편에, 유명 슈퍼 히어로의 아버지, 광기에 휩쓸린 군인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상징적이고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상당히 많이 연기했을 정도.
5 말론 브란도에 대한 말말말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줬다! by 잭 니콜슨
그는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룬 것을 불과 30살에 모두 이루어 버렸다. by 폴 뉴먼
나와 같은 세대에 속한 배우가 말론 브란도를 모방해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by 제임스 칸
그는 스티븐 호킹 만큼 중요한...아니...더 위대한 사람이다. by 조니 뎁
딘은 그처럼 되고 싶어했다. by 데니스 호퍼
연기에 관해서는 말론 브란도는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다름 없었다. by 마틴 신
말론 브란도 보다 스탠리 코왈스키를 더 잘 연기할 배우는 없다! by 테네시 윌리엄스[25]
모두가 말론 브란도처럼 말하고 걸었다. 누구나 그가 되고 싶어했다. by 로버트 듀발
- ↑ 말론 브란도가 메소드 연기를 활용하기 전까지 영화계의 연기스타일은 연극식 특유의 과장되고 한정된 연기톤이었다. 허나 말론 브란도가 나타난 이후로 폴 뉴먼, 제임스 딘 등등 그의 연기스타일을 모방한 수많은 메소드 배우들이 나타났고 그로인해 할리우드 뿐 아니라 전세계의 영화 연기스타일이 연극식 연기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 ↑ 말론 브란도의 등장으로 이전과 이후(1950년대를 기준)를 보면 시대와 배우진이 매우 다른것을 알 수 있다. 말론 브란도의 등장을 두고 연극식 연기와 스튜디오 촬영으로 대표되는 클래식 할리우드의 끝과 메소드 연기를 기반으로 한 현대식 배우들의 등장, 그리고 리얼리즘이 가미된 현대 할리우드의 시작이라고 한다.
- ↑ 10분 정도 출연하는데 40억원이 넘는 출연료를 받았고,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자 옵션까지 붙어 총 150억원 정도를 받았다. 자세한 건 항목을 참고할 것.
- ↑ 스텔라 애들러 1901.02.10–1992.12.21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스타 제조기
- ↑ 고전 연극에서는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과장되고 격한 감정의 표현을 추구했으나 스타니스랍스키가 주창한 메소드 연기는 과잉 액션을 자제하고 등장인물의 심리적인 디테일을 추구함으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실제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 ↑ 신인시절 영화사측이 뉴먼을 "제 2의 말론 브란도"라는 컨셉으로 홍보하자 뉴먼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 ↑ 브란도는 자서전에서 채플린을 '자기중심적인 독재자이자 구두쇠'라고 표현했다.
출처는 2012년 2월에 출판된 수능특강 10강 4번채플린도 자서전에서 브란도와 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토로하면서 같이 공연한 소피아 로렌과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 ↑ 말론은 이 시집을 러셀 크로에게 선물한다.
- ↑ 첫번째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작
- ↑ 메타 스코어 88점
- ↑ 찰리 채플린 감독의 영화. 그냥저냥인 평가와는 달리 흥행은 제작비의 반도 못 건져내고 쫄딱 망했다. 찰리의 구식 연기 지도를 말론은 맘에 들어하지 않아 충돌이 잦았다고...
- ↑ 메타 스코어 75점
- ↑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작
- ↑ 메타 스코어 100점. 대부의 위엄...
- ↑ 메타 스코어 77점
- ↑ 잭 니콜슨과 공동 주연
- ↑ 메타 스코어 86점
- ↑ 말론 브란도 최고의 흥행작.
- ↑ 메타 스코어 90점
- ↑ 메타 스코어 63점
- ↑ 영화 배우 조니 뎁이 감독한 영화.
- ↑ 말론 브란도 생전 마지막 출연작이다.
- ↑ 메타 스코어 71점
- ↑ 《지옥의 묵시록》이후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돈 문제가 급해서 돈 때문에 죄다 졸작 내지 망작 급 영화에 많이 출연하게 되었고(아니면 끽해야 평작인 작품들에) 이는 팬들이 그의 필모에 조금 아쉽게 느끼는 부분이다. 그나마 유작인《스코어》가 꽤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지도.
-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원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