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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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日本史
선대고대중세근대현대
~ A.D 538538~11851185~18681868~19451945~
조몬 시대야요이 시대고훈 시대아스카 시대나라 시대헤이안 시대가마쿠라 시대겐무 신정남북조시대무로마치 시대전국시대에도 시대일본 제국GHQ일본국
메이지다이쇼쇼와쇼와쇼와헤이세이
에미시에조,에조 공화국,홋카이도
구석기 시대
패총시대
구스쿠 시대,삼산시대,류큐 왕국오키나와 현미국오키나와 현
도쿠가와 막부
徳川幕府
국기[1]가몬[2]
1603~1868
위치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열도[3][4]
수도에도[5]
정치체제일본식 봉건체제
국가원수쇼군
주요 쇼군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
언어일본어
민족일본인
종교신토, 선불교
주요사건1603년 막부성립
1853년 쿠로후네 사건
1867년 대정봉환
1868년 왕정복고의 대호령
보신전쟁/멸망
통화료(両)[6]
성립 이전전국시대 or
도요토미 가문 독재체제
도쿠가와 가문 세력
멸망 이후일본 제국, 에조 공화국

1 개요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지금의 도쿄)를 본거지로 창설한 에도 막부(江戶幕府, 강호막부)가 집권하던 시대.

2 역사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 때까지 약 265년 간 일본을 통치하였다. 앞서 존재했던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와는 달리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안정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일본 역사 전체 기준으로 볼 때 비교적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는 데도 그런 대로 성공하였다.[7]

하여튼 덕분에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에는 상당한 국부를 축적하고 국력도 신장해[8] 소위 '겐로쿠 시대'를 맞았으나, 18세기 중후반 이후 개혁의 실패, 자연재해의 빈발 등이 거듭되면서 문제점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막번(幕藩) 체제는 무능한데다 경직되어 임시 방편만 남발할 뿐 제대로 된 대처를 못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지방의 강력한 번들이 개혁을 주장하고 지방민의 반란이 거듭되면서 붕괴에 직면하였다.

결국 1853/54년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격동의 동란기에 빠져 사쿠라다문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일어나고 번들은 대놓고 막부의 말을 안듣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사실상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토막(討幕)파(사쓰마나 조슈 같은) 번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1867년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소멸, 이듬해 무진전쟁(보신(戊辰)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완전히 사라졌다. 에도 막부가 소멸한 1868년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明治) 시대의 시작이라 하여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도다.

3 통치체제

에도 막부는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참근교대) 등 독특한 다이묘(大名) 통제 정책으로 성공적인 지방 통치를 수행하였고, 엄격한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유지하여 조선에서 유입된 유교적 질서 체제를 사상 처음으로 구현한 무사 정권이기도 했다. 또한 일본 전체의 1/4 과 주요 도시, 화폐 발행 등을 막부가 통제했고, 5~6만명의 군사를 거느리면서 중앙정부의 권력이 매우 강했던 시기이기도 했다.[9] 산킨코타이에 의해 촉발 되어 전국 단위로 발달한 상업 또한 뒷날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발판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관동지방과 동북지방의 개발이 본격화했다

4 경제

이 시기는 전국시대의 자유로운 교역보다는 쇠퇴했지만[10], 도자기우키요에 등을 수출하고 , 을 대대적으로 발굴하면서 국부를 쌓은 시기이기도 하다. 덕분에 금, 은 화폐 사용이 일반화되었으며, 한편으로 전국시대 난립했던 관소[11]들이 철폐되고 해상 교통이 대통합하는 등 상업 발달이 두드러진 시기. 다만 후기에는 근처 은 먹는 하마 중국이 일본 금, 은, 동을 죄다 흡수해버려서 고생하기는 했다.[12]

5 대외관계

에도 막부가 존속한 기간은 대체로 외국과 교류하지 않은 쇄국주의를 고집하던 시대와 일치하지만 조선과 국교를 맺었고, 류큐 왕국은 1609년 사츠마 번에 의해 침략당한 후 종종 에도에 사절단을 보내 조빙하는 등 교류하였다. 국교는 없었지만 네덜란드, , 조선 등과 교역하였다. 특히 조선에서는 총 12회에 걸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해 조-일 간의 우호통상관계와 쇼군의 권위 과시, 선진 문화의 수용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인지 조일관계는 에도시대가 끝난 후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6 기타

  • 이 시기부터 일본의 정치, 사회의 중심지는 기존의 교토, 오사카긴키 지역에서 현대의 도쿄간토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 이전 막부와는 달리 오오쿠라는 쇼군만을 위한 여성들을 모은 공간을 만들어 운영했다.
  • 디시위키 에도 시대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나 본 문서보다 내용이 충실하므로 읽어보는 것도 좋다.

7 역대 에도 막부 쇼군(將軍) & 도쿠가와 씨 종가 역대 당주

대수이름쇼군 재임기간비고
1대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603 ~ 1605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로 막부 개창
1605년~1616년 오고쇼(大御所) 역임.
태정대신
2대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1605 ~ 1623오사카 전투겐나 엔부, 무가제법도 제정
1623년~1632년 오고쇼 역임.
태정대신
3대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1623 ~ 1651산킨고타이, 시마바라의 난
막번 체제의 완성
4대도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1651 ~ 1680일본판 성종
5대도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1680 ~ 1709개 쇼군(…)
겐로쿠 시대, 추신구라 사건
6대도쿠가와 이에노부(徳川家宣)1709 ~ 1712학자쇼군, 금은 개혁[13]
7대도쿠가와 이에츠구(徳川家継)1713[14] ~ 1716소년 쇼군, 거인증, 쇼토쿠의 치
8대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1716 ~ 1745최초의 방계 계승[15].
쌀 쇼군, 쿄호 개혁.
1745년~1751년 오고쇼 역임.
9대도쿠가와 이에시게(徳川家重)1745 ~ 1760
10대도쿠가와 이에하루(徳川家治)1760 ~ 1786
11대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1786 ~ 1837역대 최장 재임 쇼군
막부 최대 판도[16], 칸세이 개혁
1837년~1841년 오고쇼 역임
태정대신, 물개 쇼군
12대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1837 ~ 1853텐포 개혁, 쿠로후네 사건
13대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1853 ~ 1858
14대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1858 ~ 1866각기병 쇼군, 청년 쇼군
15대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1866 ~ 1867대정봉환, 무진전쟁메이지 유신

전대 막부의 쇼군들과는 달리 살해당한 쇼군이 한 명도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일찍 사망한 쇼군은 있지만 전부 자연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막부의 지배력이 전대 막부에 비해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

또한 일본 역사의 막부 정권에서 유일하게 조정 최고위 관직인 태정대신 직위를 받은 쇼군이 존재하는 막부이며, 특히 제109대 덴노인 메이쇼 덴노는 2대 쇼군 히데타다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8 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

은혼은 에도 막부말, 정확히는 14대 쇼군인 이에모치가 집권하던 시대(를 모티브로 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말이 에도시대이지, 양이전쟁 이후로 은혼의 세계관은 사실상 현대 도쿄를 기반으로 약간의 SF와 에도시대 스킨을 씌운 것이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1. 막부 말기에 제정된 국기라 그닥 많이 쓰이진 않았다.
  2. 기존에는 '세 잎 접시꽃'으로 알려저 있었으나 접시꽃이 아니라 족도리풀이라는 설도 있다.#
  3. 다만 홋카이도 남쪽 일부는 센고쿠 시대에 자리잡은 마츠마에 번이 통치했다. 코에이 신장의 야망 시리즈의 가키자키 가문이며, 삼국지 시리즈의 공손씨나 맹획남만처럼 변방 세력으로써 컬트적인 인기가 있다.
  4. 18세기때 지금의 러시아의 사할린 남부지역과 쿠릴 열도 4도(구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를 차지한적이 있다. 그나마 그것도 에도 바쿠후가 망한 뒤로 조약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에게 넘어가게 된다.
  5. 오늘날의 도쿄
  6. 금화인 쿄슈킨(甲州金) 등으로 유통되었다. 단위는 1료(両)=4부(分)=16슈(朱)=64이토메(糸目). 막부 말기 사회 혼란시기 이전까지는 1료≒쌀 한 섬이었다. 이외에도 은화나 동전도 널리 쓰였다.
  7. 단, 권력 구조에 있어서는 중기 이후로는 쇼군들의 능력치가 떨어지다 보니 그 휘하의 로쥬(老衆)에게 실권이 쏠리고 쇼군은 다소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나게 된다. 사실상 반(半)민관(民官) 시대이라는 것.
  8. 에도시대가 막을 내린 메이지 유신 초의 일본 인구가 3,200만에 달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초는 중앙집권이 다시 확립되어 질서와 안정을 되찾았기에 인구 증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전에는 인구가 2,600만~2,700만을 계속 유지했다.
  9. 물론 이것도 말기에는 혼란과 중앙 정부의 무능으로 기회를 잡은 번들이 다시 제멋대로 나서면서 중앙정부는 전국시대처럼 다시 통치력을 상실한다.
  10. 물론 다이묘들의 독자적인 교역을 막았기 때문이다.
  11. 통행세를 비싸게 뜯어내다보니 상업발전의 걸림돌이었다.
  12. 명은 일조편법, 청은 지정은제로 은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은을 수입해다 썼는데 상당수가 일본산 은이다. 대항해시대2에도 일본의 특산물 중 하나가 은으로 매우 싸다.
  13. 순금/은 순도를 이에야스 시대로 끌어올렸지만... 바로 하쿠세키의 불황을 초래
  14. 이에노부 사후 쇼군직을 승계받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15. 이에야스의 10남 요리노부의 자손이다.
  16. 1799년부터 몇 년간 북방 탐험으로 사할린 남부와 쿠릴 4도를 얻게되는 시점이 이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