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츠나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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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역대 쇼군 & 도쿠가와 씨 종가 역대 당주
4대 도쿠가와 이에츠나5대 도쿠가와 츠나요시6대 도쿠가와 이에노부
250px-Tsunyaoshi.jpg
이름도쿠가와 츠나요시
德川綱吉 (とくがわつなよし)
생몰년도1646년 2월 23일 ~ 1709년 2월 19일 (60세)
재임기간1680년 ~ 1709년

개 쇼군(犬將軍).[1]

1 개요

제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측실의 아들로 넷째 아들에 해당하고, 제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배다른 동생. 형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거쳐 쇼군이 되었다.

덕후 개 쇼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암군이란 평을 받고 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개빠는 양반이다. 이 양반은 이걸 전 국가적으로 해댔으니...

최근에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있다.

1.1 집권 초기

어릴 때 부터 총명해서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학문에 힘쓰라고 권해서, 유학(유교)과 불교에 심취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학문 외에도 노(일본), 서화 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직접 그린 서화가 남아있다.

태어날 때부터 쇼군의 후계자 계승 자리와는 연이 멀었지만, 배다른 형이 후사가 없자, 35살의 나이에 뜻하지도 않게 쇼군이 되었다.
집권 초기엔 무단통치에서 문치주의로 전환하면서 권력의 중앙집권화과 재정문제, 기강 확립에 주력하고 이를 위해 유학을 융성하게 하고 덕치를 발달시켰다. 유학을 통한 명분을 강조하여 무사의 윤리 의식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스스로도 유학에 관심이 많아, 자신이 나서서 주역을 강의했을 정도. 이때 하야시 가문이 등용되었다. 유학적 이데올로기의 확립을 위해서 주자학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학교인 유시마성당(湯島聖堂, 탕도성당)을 세워 고위 관료들의 자제가 다닐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에 조사관을 파견해서 부정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평판이 나쁜 다이묘와 대관을 유능하고 성실한 인재로 교체했다. 대관의 교체율은 80%. 카이에키(개역 : 영지를 뺏기는 것) 처분을 당한 다이묘가 40명.
인재선별에는 능력주의 정책으로, 도자마 다이묘도 대우하였으며 막부의 관리로 등용되는 도자마 다이묘가 나온 것도 이 시점부터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던 가신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澤吉保)를 소바요닌(側用人, 측용인)에 임명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때가 1685년.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1687년부터가 문제였다.

1.2 본격 동물 애호가[2] 쇼군

お犬様の天下『生類憐みの令』今夜はヒストリー

1685년, 쇼군이 지나가도 개와 고양이가 다녀도 괜찮다. 앞으로는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법령이 발표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살생을 금지하는 법령이 발표된 것은 1687년.

이런 법령들이 발표된 이유로는, 41세에 이르러서도 후사가 없었기에 이를 고민하다가 어머니 케이쇼인(桂昌院)[3][4]이 총애하던 류코우(隆光)라는 승려의 충고를 듣고, [5] 1687년 "쇼루이아와레미노레이(生類憐令, 생류연령)"라는, 현실성을 무시한 살생금지령을 선포하게 된다.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지 않고 덕을 쌓으면 후사를 얻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케이쇼인이 워낙에 독실한 불교도였기 때문에 불살하여 세운 공이 모친의 극락왕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츠나요시의 생각도 작용하였다.

특히 츠나요시는 개들에게 지나칠 만큼 관대했다. 그가 띠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개를 때리거나 죽이는 건 당연히 금지됐고, 여기에 수명을 다한 개는 주인이 직접 좋은 장지를 골라 묻어주도록 법제화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이 정도면 다행이라능, 쇼군께서 띠셨음 어쩔 뻔했음?"이란 우스갯소리가 유행했을 정도였다고. 용띠였으면 참 좋았을 것을 훗! 수고해라 쥐띠! 심지어 개가 병사(病死) 등으로 우연히 죽어도 주인을 처벌했다고 한다. 덕분에 개를 키우던 사람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개를 버리는 통에 유기견만 늘어났다. 하긴 아돌프 히틀러도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만들었지...

그러자 1695년(화폐개혁을 한 해), 호적대장을 만들어 개를 관리했고(개는 물론 고양이, 소, 말까지), 에도성에서 서쪽으로 8킬로 떨어진 곳(현재의 나카노지역)에 약 29만 평(도쿄 돔 20개 넓이)의 유기견 보호시설을 만들었다. 약 10만 마리의 떠돌이 개를 치료하고, 먹여주고(1마리 당 하루 세 끼 흰 쌀밥과 말린 정어리와 된장국) 재워주는 관청도 설치한다. 개를 먹이는 데 연간 금 9만 냥(당시 막부 수입 80만 냥의 11%. 그 대부분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부담했다.)이 들었다. 식량이 풍족한 현대에도 유기견은 다 감당을 못하는 지경이라 보호 기간이 끝나면 안락사시키는데, 사람도 굶어 죽는 시대에 개밥값을 이렇게 썼으니 백성들 원성이 높지 않았을리가 없다. 거기다 개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밤에도 산책을 시켜주는 관리를 따로 두며, 야행시에는 고래기름으로 등불을 밝혔다. 참고로 고래기름으로 등불을 밝힐 수 있으려면 적어도 어용상인[6]급의 재력이 있어야 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흠좀무. 한마디로 개팔자가 상팔자였던 시기.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개나 말, 소는 물론 물고기, , 등을 때리거나 상처 입히면 처벌받도록 법이 점점 강화됐다. 이후 , 조개, 새우 요리를 금하더니 60회의 포고령이 더해지면서, 급기야 어떤 생물이든 다치게 하면 인간이 처벌받는 터무니없는 법으로 발전했다. 자이나교 광신도??? 닭을 키우는 것은 괜찮지만 달걀을 먹는 것은 금지됐다. 자식의 병에 특효약이라는 민간요법에 따라 제비를 잡아 먹인 아비가 처형되고 그 자식도 추방됐다. 개나 고양이 등을 죽였다가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이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츠나요시의 직속무사인 이토 아와지노카미가 모기를 죽인 죄로 유배당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옆에서 이노우에 히코하라라는 하급 무사도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되었다.[7]

여기에서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들에게 짐을 싣는 행위마저도 금지하게 된다. 이유는 "동물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참고로 이건 농담이 아니라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다.

생류연령에는 의외로 또 "아이를 버리지 말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법이 현재에 와서 재조명받는 한 요인이기도 한데, 교고쿠 나츠히코우부메의 여름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면서, 에도 시대에는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죽은 아이는 공양도 해 주지 않았고(즉 인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지금로써는 당연한 상식이 된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 희박했던,[8] "아이를 버리지 말라"는 법령이 악법이라며 악평 듣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고 설명하고 있다.[9]

여하간 비록 돈이나 쌀로 세금을 거두고, 16세기 말부터 오사카의 세곡창고가 수로로 운영되기 편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소와 말이 주요한 유통 및 노동력으로 쓰는 시대에 누가 봐도 좋은 꼴은 나기 어려운 상황. 덕택에 유통업뿐만 아니라 생산력의 급격한 감소, 어줍잖은 화폐개혁의 시발 등 일타삼득의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 밖에도 닭이나 생선등, 살아있는 거의 대부분의 식용 동물들의 판매조차 금지시켰다. 법 집행 초기에는 목록에 토끼날짐승이 빠져있었기에 토끼를 새라고 우기며[10] 먹었다고 한다.

이 괴악한 법률에 대해 최근에는 재평가론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츠나요시가 이 령을 만든 이유는 전국시대의 야만적인 분위기를 일소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으며, 지금보다는 중앙 통제력이 약했던 시대이니만큼 생류연령이 민간에서도 엄격하게 집행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역사가들이 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부풀려서 기술했다는 설이다. 다만 이 설 자체가 생류연령의 비현실적 측면을 부정하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뻘짓은 뻘짓.

お犬様騒動 隠された真実 徳川綱吉 (2011年)

이 법령은 135차례나 발표되었다. 그 이유는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24년간 실제 처벌된 건수는 69건이었다. 생각만큼 망나니 칼춤 추는 미친 악법은 아니었다.
개에 관해서는 1685년, '쇼군이 길에 지나갈 때 개와 고양이가 다녀도 괜찮다. 앞으로는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령이 발표된다. 7년 후인 1692년에는 '강아지는 말이나 사람에게 밟히지 않도록 개집에 넣어둘 것', 1694년에는 개를 버리지 말 것, 그리고 '버려진 개는 주운 사람이 길러라' 라는 정도의 상냥한 령이었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아서 점점 법령으로 처벌 사항을 넣게 되었다.
이것도 알고보면, 그 이전부터 에도에는 야견 때문에 사람들이 습격당하는 등 문제가 되고 있었고 개에 대한 학대가 심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법령들의 내용을 보면, 단순히 개나 동물을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버려지는 아이들과 버려지는 병자들을 보호하는 법령이 있었고, 또 위생상태가 형편없어 병들어 죽는 경우가 많았던 감옥 생활을 하는 죄인들에게도 한 달에 5번은 목욕을 시키라고 명하는 등 죄수들에게도 신경을 썼다. 근본적으로는 생명 존중의 사상을 사람들에게 퍼트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1682년, '충효에 힘써, 부부 형제 친척이 사이좋게 지내고, 하인들도 소중히 여겨라.' 라는 령을 내리는데 이것이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츠나요시의 생각이었다.

여담으로, 2012년 현재 세계적 동물보호 단체 WWF 재팬(WWF의 일본지부격)의 회장은 도쿠가와 가문의 18대 당주 도쿠가와 츠네나리다.

1.3 실정의 연속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승려의 말에 좌지우지되었던 만큼, 사찰 수리에도 적극적이어서 재정의 파탄은 예견된 일이었다. 여기에 천황가를 우대하는 차원에서 역대 덴노의 무덤중 66개를 재건하는 사업까지 벌였으니 상인들에게 손을 벌리는 크기가 더욱 커져 막부의 경제적인 부담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업을 너무 많이 벌여서 1695년 화폐주조령을 내리게 된다. 이 율령에 의해서 1706년, 1710년에 걸쳐 2번 겐로쿠금은(元綠金銀)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당초 막부의 경제가 어려운 상태여서 금과 은의 순도는 낮아져 악화가 주조되었고, 일시적으로나마 재정이 회복되는 듯이 보였지만 물가의 상승만 일어났다. 덕택에 실물경제를 쥐고 있었던 금은좌(金銀坐)[11]와 나카마(仲間, 막부시대 상인동맹조합)들만 큰 이익을 보게 되어 막부의 경제는 사실상 상인들이 지배하게 된다. 오죽하면 봉행(奉行, 막번의 무사들이 다이묘나 쇼군으로부터 받는 급료)도 상인들이 주게 된다.

현대사회에 대입해서 본다면, 공무원들의 급여가 민간기업을 통해 지급될 정도로 정부가 민간기업에게 잠식당한 꼴인 셈.

여러모로 상인들이 득세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인물. 덕택에 이후의 일본의 문화소비자는 무사계급에서 상인계급으로 전환된다. 전국시대의 무사들이 즐기던 능(能)과 농민들이 즐기던 전악(田樂)이 당시 일본의 문화를 대표하다가 상인의 이야기를 주된 스토리라인으로 잡는 가부키가 등장하게 된 것도 츠나요시때부터다. 이러한 실정이 죠닌(町人)문화의 밑거름이 된 것은 좋게 봐야 할지 나쁘게 봐야할지.(…)

1709년 사망했다. 향년 63세. 유언은 "100년 뒤에도 이 법이 존속되게 하라"였지만, 그가 죽은 후 생류연령은 열흘 만에 당장 폐지되었다.[12] 위패가 매우 작은데, 쇼군의 위패가 키에 비례한다는 관례에 따르면 그의 키는 130cm로 추정 된다고 한다.(…) 도라에몽? 여러모로 안습. 게다가 안타깝게도 이 모든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결국 직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결과 츠나요시의 이복형제의 아들이었던 츠나토요(이에노부)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사인은 천연두로 알려졌으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정실(미다이도코로)인 노부코가 츠나요시를 어떤 방으로 오게 한뒤에 무리심중, 즉 강제 동반자살의 형태로 죽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노부코는 츠나요시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사망 기간이 밀접한지라 이런 의혹이 제기된걸로 보인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으며 정실인 노부코와 사이가 안좋았던게 이런 소문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더 커보이지만.

1.4 평가와 그 외

화폐 개혁에 실패하고, 재위 내내 후지산 분화나 대화재 같은 재해와 사고가 빈번했다. 추신구라(忠臣藏, 충신장) 사건 또한 일어나는 등 여러가지로 욕을 먹게 된 인물이었다. 최근에는 종종 재평가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기존 이미지와 실정들이 있어서.(…) 쇼군 말고 동물협회 회장님이었으면 딱인데 후손이 이뤘구나

그런데 역설적으로 츠나요시의 집권기가 그 유명한 겐로쿠 시대, 즉 일본 역사상 최대의 호황시대였다.머라고? 쇼군이 저 뻘짓을 한 것도 다 재정이 빵빵하고, 막부에 어느 정도 힘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 다만, 나카마들이 봉행까지 주게 된 이후 무사가 예전보다 많이 얕잡아 보이게 되었으며 사무라이들이 투잡(...)을 뛰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등, 신분제 붕괴의 전조가 이 시대에 나타난 것 역시 사실이다. 근대적 의미로는 현대사회의 밑거름이 형성되었던 시기이지만, 당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쇼군의 실정이 사회 불안 요소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

전해지는 일화들을 보면 츠나요시는 두려움이 많은 성격이었던 듯 하다. 한 번은 천장에서 물체가 떨어진 사건을 들은 츠나요시가 자신의 머리 위에도 뭔가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에도성 기둥이란 기둥을 줄로 동여매는 일을 시켰는데 이 줄의 두께가 약 30cm였다고 (....) 흠좀무 혹자는 두려움의 뿌리를 뽑아야 안정하는 성격이라 평했다.

32살이 되어서도 천둥을 무서워하여 천둥을 멈추게 하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한다. 츠나요시의 총애를 받아 이례적인 출세를 한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는 천둥이 칠 때면 심야던 이른 아침이던 츠나요시의 침소로 달려가 그를 달래주었다고 전해진다. 집으로 돌아가서 쉴 때도 천둥이 치면 잽싸게 성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고(...) 흡사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은 방법이라 놀라운데, 가신인 야나기사와가 12살 연하라는 점은 더더욱 놀랍다 (...)

벌레도 무서워해서, 벌레가 나타나자 가신들에게 얼른 잡으라고 했는데 처리를 못하고 쩔쩔매자 기분이 상해서 신경질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나름 뜻을 담아 선포한 살생금지령 때문에 오히려 동물 학대가 더 심해지는 일이 일어나자, 츠나요시는 몹시 힘들어 했다 한다. 어떻게 하면 동물학대를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솔개나 까마귀같은 해조를 수백 마리 잡아다가 방생하는 뻘짓을 하기도 했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를 시전하신 에 비하면야 생불이지만.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와 다른 측실을 끌어들여 3P를 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그런데 플레이(...)를 할 때는 야나기사와만이 안는 역을 했다고 전해진다. 즉 쇼군인 츠나요시가 였다.ANG? 또한 쇼군이 되기 전부터 자신을 섬겼던 충신 마키노 나리사다의 부인인 아구리와 딸인 야스코를 NTR했다는 설이 잘 알려져있다. 일종의 야사이지만 사극 오오쿠요시나가 후미의 만화판 오오쿠에서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드라마판 오오쿠에서는 어렸을때 자신을 다정하게 잘 돌봐줬던 시녀 출신인 아구리를 어렸을 적부터 좋아해서 연회 핑계를 대고 그녀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강제로 검열삭제를 해놓고선 이미 시집 가서 남편이 있던 그녀의 딸마저 자신의 첩으로 데리고 오는 막장 행보를 보여준다. 덕분에 아구리는 자살하는데 저래놓고서는 딸인 야스코에게 내가 니네 엄마 아빠한테 돈도 주고 비단도 주고 영토도 주고 정말 잘 해줬는데 왜 죽어버렸냐며 징징거린다. NTR이 돈으로 보상이 되냐

아들이라고는 측실 오덴노카타(お伝の方)로 부터 낳은 도쿠마츠(徳松)가 있었는데[13] 일찍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이에노부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쓰구(재임 1713~1716)도 얼마 못가 죽으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기고, 방계인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5 조선과의 관계

그의 치세는 조선숙종(1674~1720) 재위기와 일치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강길(源綱吉: 미나모토노 츠나요시)'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숙종실록에서 그가 쇼군직을 승계받은 이듬해(1681년 - 숙종 8년) 조선에 통신사를 다시 요청하는 기록이 나온다.[14] 재미있는 점은 츠나요시가 개 덕후였던 것처럼 숙종 또한 상당한 고양이 덕후였다는 것[15].

또한 독도 문제로 안용복이 일본에 가서 일본인들의 불법 조업을 항의하고 사과를 받고 돌아온 것도 바로 츠나요시가 쇼군으로 있을 때였다.

일부 기록에는 이 때 안용복이 일본의 관백(간파쿠)을 만나고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에도까지 가서 쇼군인 츠나요시를 직접 만나고 돌아온 셈인데 정황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안용복이 만났던 인물은 백기주(伯耆州;호키 국 - 돗토리 현)의 영주였고, 그게 어디야 안용복은 일본어도 능숙하지 못한 편이었던 데다가[16] 일본을 잘 몰라서 백기주를 에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다만 안용복의 담판 이후 쓰시마 측에서 '앞으로 찝적대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서가 조선 조정에 도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유학 덕후라 그런지,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쓴 쇼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조선통신사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라는 요지의 글이 있다면 그건 츠나요시 때의 이야기. 그러나 이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데 드는 돈은 오롯이 다이묘들의 몫이라서 쓰시마 번부터 에도에 이르는 길의 다이묘들이 제일 많이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츠나요시 사후에는 상기하였듯이 검약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카스테라[17]같은 비싼 음식이나 접대가 사라져서 비난하는 통신사마저 생겼을 정도(...)[18]

1.6 기타 서브컬쳐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의 주인공 사와다 츠나요시의 이름은 이 쇼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난강이 도쿠가와 츠나요시 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다.

바우와우#s-2에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꿈에서 등장한다.

파워퍼프걸Z에서도 등장하는데 35화의 B파트[19]에서 의 검은 가루로 영혼상태로 부활해서 메이어 시장님에게 빙의해서 몬스터 보호명령(モンスター 憐れみの令)[20]을 내려서 도쿄 시티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파워퍼프걸Z도 몬스터를 저지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고 연구소마져 공격 당할 위기에 쳐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핫도그를 먹여 시장님의 몸에서 분리한다. 물리적 공격이 안 통했지만[21] 버블 캐쳐에 붙잡히고 스윙 소닉에 날아가서 자신의 무덤으로 다시 들어간다. 여담으로 한국판에선 도그마 개오르개라는 심히 괴한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게임 오보로 무라마사의 배경이 이 쇼군때다. 당연히 최종보스로 등장하며 한번 털리면 이누가미로 변한다...

추신구라 사건이 소재인 에로게 ChuSingura 46+1에서는 로리TS되어 등장, 무능한 개빠 쇼군인건 같은데 강아지들을 이용해서 자위행위를 한다.(…)
  1. 혹은 개 공방(犬公方). 구보(公方)는 쇼군의 별칭이므로 앞의 별명이나 이거나 같다고 볼 수 있겠다.
  2. 메이지 시대에는 동물을 비정상적으로 사랑하는 정신병 환자(Zoophilomanie)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3. 1627년, 교토의 서민출신으로 야채가게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오타마(お玉). 절세의 미녀여서 13살 때 오오쿠에 스카웃, 오만노카타(お万の方)의 측근시녀로 일했다. 곧 이에미츠의 측실이 되고 20살 때 츠나요시를 낳는다. 25살때 이에미츠 사후 에도 성을 나와 출가. 54살 때 쇼군의 어머니가 된다. 79살에 영면.
  4. 젊었을 적 오만노카타의 측근시녀였던 것을 바탕으로 창작물에서는 케이쇼인 역시 오만의 신변을 들기 위해 같이 오오쿠로 따라 들어온 비구니라는 설정이 붙기도 한다.
  5.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류코우가 에도에 있지 않은 때였던 탓에 현재 이 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있지만, 그 전부터 에도 성에 출입한 기록이 있어서 틀린 설이다. 『密教大辞典』(法蔵館)・『真言宗年表』(国書刊行会)によると貞享3年(1686年)10月3日に江戸城黒書院で安鎮法を修しており、生類憐れみの令以前より江戸城に出入りしていたため誤りである。
  6. 막부와 거래를 튼 거대호상.
  7. 쓰시마의 경우 5대 번주 요시카타(義方)의 군부교(郡奉行)이자 유학자였던 스야마 돈오(陶山鈍翁)가 1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라는 대대적인 멧돼지사슴 사냥을 벌여서 호에이(宝永) 6년(1709년)에 쓰시마에서는 멧돼지가 사라졌다. 이게 츠나요시의 살생금지령이 한창 퍼져 있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게 놀라운데, 쓰시마 항목에서도 소개하고 있듯 산지가 대부분으로 농지가 부족한 쓰시마는 고바(木庭)라고 불리는 화전이 대부분의 경작지 비중을 차지했고, 이 화전 개발 과정에서 멧돼지 피해가 많았기 때문.쓰시마 사람들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 쓰시마로써는 문자 그대로 배쨀 각오 하고 덤빈 거다. 다만 이지카오이쓰메를 주도한 스야마 돈오는 막부의 처벌을 면했고, 쓰시마 주민들은 그를 성인(聖人)이라 칭송하였다고.
  8. 이 점은 사실 산업혁명 시절의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9. 이에 대한 작중 자세한 설명은 자칫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생략.
  10. 토끼를 뜻하는 일본어 '우사기'는 파자하게 되면 우(若+鳥:가마우지)+사기(鷺:백로)가 되는데 그것이 유래
  11. 막부의 명령아래 화폐주조에 관한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던 상인들의 통칭. 금화를 주조하는 상인이 금좌, 은화를 주조하는 상인이 은좌였다. 서양의 역사에 빗대어보면 Goldsmith, Silversmith에 해당하는 금은공예상공회와 비교 가능하다.
  12. 사문화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관리들이 봐도 모른척한것. 바로 문서상으로 지워버리면 막부의 권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나.
  13. 이 도쿠마츠의 탄생 축하행사가 11월 15일에 이루어지면서 시치고산의 유래가 되었다고들 한다.
  14. 실록에 의하면 일본에서 1666년(현종 7년)부터 이 때까지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15. 고양이 한마리를 금손이라고 이름 짓고 직접 먹이를 주며 키웠다. 심지어 금손의 어미 고양이의 장례식까지 치뤄줬을 정도
  16. 어려서부터 왜관에서 자라서 일본말을 잘하긴 했다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던 모양이다.
  17. 일본인들이 기록한 조선인들이 좋아하던 음식 목록에 당당히 들어가있다!
  18. 1717년 조선통신사였던 신유한은 그의 저서 해유록에서 병농공상의 야만족 집단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이전의 통신사들이 츠나요시의 숭유정책에 감탄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 한국판에선 처음엔 방영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방영했다.
  20. 위에서 언급한 쇼루이아와레미노레이의 몬스터 Ver이다.
  21. 연구소에서 영혼 분리 장치를 이용해 분리하려고 했지만 분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