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푸스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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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us Dei

1 개요

로마 가톨릭교회에 소속된 성직 자치단.

정식 명칭은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Prelature of the Holy Cross and Opus Dei). 오푸스 데이는 라틴어로 '하느님의 사업'을 의미한다. 성직자치단이란 보통 군종교구 같은 개념으로 일반 교구처럼 속지주의가 아니라 속인주의 단체를 말한다. 2012년 현재 전세계 60여개국에 9만명의 회원이 있다.

스페인 출신 몬시뇰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축일 6월 26일)[1]가 1928년 10월 2일 수호천사 기념일에 마드리드에서 영적 체험을 통해 창설하였고 지역 교구장의 인가를 받았다. 그 후 1946년 교황청 직속 재속회가 되었으며, 1982년에 교황 직속 성직 자치단으로 인가되었다. 성직 자치단을 일본에서는 속인구, 중국에서는 개인감독구로 번역했다. 한국어 번역은 오역에 가깝다. 직역을 하면 "고위 성직자 관할 속인구" 라고 할 수 있다. 줄여서는 "성직 속인구"가 제일 나은 번역이다.

오푸스 데이의 영성은 '일과 일상생활에서의 성화(聖化)'이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과 교우관계, 가정생활 같은 일상생활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자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며,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일치를 추구한다.

오푸스 데이는 단장 주교, 총평의회, 남성과 여성 자문위원회, 자체 사제단, 남녀 평신도로 조직되어 있다. 또한 회원들 대다수가 교사, 의사, 변호사, 대학생, 주부, 회사원, 농부, 자영업자, 택시 기사 등등 일반 가톨릭 신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전문직의 비율이 조금 높으며, 접할 기회가 적은 한국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평신도 가톨릭 단체이기 때문에 서원한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20%의 독신회원(뉴머러리, 어소시에이터)과 70% 기혼회원(슈퍼뉴머러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10% 가량을 차지하는 남성 독신회원 중에 서품사제들로 구성된 성 십자가 사제회가 있다. 성 십자가 사제회에는 일반 교구사제도 입회할 수 있다. 또한 정식회원은 아니지만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도움을 주는 협력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대전교구에서 허가를 받아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1년 서울대교구에서 허가를 받아 활동하고 있다. 서울 사무실은 명동 가톨릭 회관 113호이고, 센터는 상도동 숭실대학교 옆에 있다. 현재는 2자리 수 정도의 소수인원만이 회원으로 한국에서 활동 중이고, 협력자 역시 소수이며 대다수는 외국에서 유학등으로 접한 경우가 많다고.

한국 오푸스 데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 인터뷰 기사(2011년 3월)를 참고.

2 비판과 오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가 시성될 때만 해도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이 조직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 의해서 크게 이슈화되었다. 다빈치 코드에서 오푸스 데이는 마치 현대의 십자군처럼 목적을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하며 막강한 자금력으로 콘클라베 등 가톨릭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조직으로 그려진다. 스스로 채찍질을 하거나 이 박힌 금욕 마미단를 입기도 하는 묘사가 절정.이런 묘사를 두고 할리우드 자체가 반가톨릭이어서 그쪽 영화 대다수가 가톨릭을 나쁘게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이런 악의적(?) 묘사에 대해, 좀 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삶을 강조하는 것을 반가톨릭 세력[2]에서 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콜럼버스 기사단이나 예수회처럼 보수적인 오푸스 데이를 깔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오푸스 데이 자체의 조용한 신앙생활과 활동이 비밀결사컬트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사실 오푸스 데이는 조직 자체의 역사도 비교적 짧은 편이고 가톨릭 교회 내의 조직들 가운데서는 그렇게까지 광범위하거나 견고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음모론에 더 어울리는 것은 차라리 예수회 쪽이다(...)[3]

또한 교회 내에서 수도회, 특히 예수회 쪽 일부 사제들이 오푸스 데이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내는 경우가 있다. 위키백과 영문판에는 오푸스 데이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소문을 1940년대에서부터 예수회에서 퍼뜨리고, 오푸스 데이의 설립자의 저서를 불태우는 등, 반달 행위를 하여, 오푸스 데이 설립자인 호세 마리아 신부가 진지하게 당시 예수회 총장이던 페드로 아루페 신부를 만난 적이 있을 정도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오푸스 데이도 전적으로 문제가 없는 조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성화되어야 하는 부족한 신앙인들이 있기에 여느 가톨릭 단체처럼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직주의를 반대하고 능동적인 평신도 영성을 강조하다보니, 아직 평신도보다 성직자의 힘이 우세한 한국에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톨릭 내에서도 오푸스 데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존재한다. 오푸스 데이가 지나치게 바티칸,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특혜를 받고 있다는 점으로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에 대한 시성 과정에도 비판이 있었고[4] 불과 50여년 밖에 되지 않은 조직이 자치권을 인정받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푸스 데이에서는 정작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대인배...인가?

그 여러 비판과 옹호에 대해서는 다빈치 코드 개봉 직후 있었던 이 인터뷰 기사 참조. # 특히 신학적인 차원에서 고행등에 대한 비판과 옹호도 있으니 참고할만 하다. 다만 이 인터뷰는 2006년에 이루어졌는데, 당시까지는 서울대교구가 오푸스 데이 공식활동을 인가하지 않았다. (오푸스 데이의 진출은 교구와 성직자치단의 상호 협력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상하관계가 아니고, 협력 관계라는 점에서 일반 수도회하고는 엄연히 다르다.) 서울대교구의 인정은 오푸스 데이에 부정적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은퇴하고 호의적인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교구장이 되면서 생긴 변화다.

여성을 차별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 여성이 지켜야할 규정이 좀더 강하긴 하지만 애초에 별도의 조직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라는 옹호도 있다. 신입 회원 모집에 공격적이며, 개인생활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한 비판과 옹호는 이 기사 참조#1,#2.

이와는 전혀 별개에 훨씬 더 쟁점이 되는 문제로 바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와의 과거사 문제로 늘 잡음이 많이 나온다. 심지어 국내 가톨릭 사이트에도 에스크리바를 비롯한 오푸스 데이 쪽 사제 상당수가 아예 프랑코의 독재를 지지했다는 내용이 대놓고 언급되어 있다고 하나 현재 오푸스 데이 사제들 중 평신도 회원 당시에 소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까지 간 인사까지 있다. # 심지어 에스크리바는 히틀러까지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의혹이 있다고 반 오푸스데이 쪽에서는 주장을 하나 에스크리바는 유대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고 그런 신자들과의 대화를 녹화한 비디오 영상이 많이 남아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2명있는데 2명 다 유대인이다. 한 명은 예수님이고, 다른 한 명은 성모 마리아다." 다만 이 또한 일단 당시 스페인 사회가 공식적인 기관이라면 무조건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프랑코 후빨을 해야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 해야 된다.[5][6] 그리고 초기에야 프랑코가 교회의 권위를 등에 업고 신나게 샤바샤바했고, 교회 또한 프랑코의 유혈낭자한 손을 통해 스페인에서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지배권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이 양반의 독재 말년에는 되려 가톨릭계 출신의 반정부 인사도 많이 배출 되었고,[7] 프랑코가 팔팔할 때도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 중에 적지 않은 수가 오푸스 데이 출신 인사들이었다. 이는 당시 가톨릭 교회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세속 세계와의 관계 자체를 개선하려고 했던 교회 자체의 노선 변화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으며, 프랑코는 사석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교의 탈을 쓴 빨갱이 놀음'이란 식으로 음해 하는 등 굉장히 불쾌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놓고 정권에 반대하는 공화파 잔당들과 지하로 숨어든 좌파 세력이야 그냥 잡아 쳐죽이면 되니 상관 없었지만, 가톨릭 교회를 자극 하는건 자신의 정치적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셈이니 오히려 가톨릭계의 반정부 움직임에 되려 더 골치 아파했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셨어야죠 일단 적어도 확인 된 바로는 오푸스 데이 소속에는 프랑코 정권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나 반대파나 골고루 섞여 있었다. 설립자 신부가 회원들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같은 단체 내에서도 친프랑코와 반프랑코 세력들이 있었다. 신앙은 신앙이고 정치는 정치다.

그러나 위에 나온 말이 변명일 수가 있는 것이, 김수환 추기경과 오스카 로메로 주교,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국의 독재정권에 맞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약자들을 지켜준 것과 달리[8] 이들은 적극적으로 독재정권에 맞서지도 못했고 반프랑코 성향의 사제들이 있었다고 해도 결국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프랑코를 지지를 했다. 차라리 스페인 내전 당시라면 당시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고 사제들을 학살했던 공화파에 대한 반감으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프랑코 독재 정권 당시에 독재 정권으로 고통 받는 국민들을 제대로 지켜주기는 커녕 위로조차도 해주지 않고 침묵하는 수준을 넘어서 심지어 공화파 포로와 정치범들의 아기나 미혼모와 신앙이 부족한 국민의 아기를 납치해서 빼돌려 입양 보낸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것다고 적혀있었는데, 이건 오푸스데이와 전혀 상관없는 일부 교구 인사들이나 수도회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프랑코의 독재가 끝난 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에스크리바를 시성하고[9] 오푸스 데이를 인정한 것에 대해서 비판의 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는 피할 수는 없다면 정치적 잣대에 자유로울 수 있는 종교단체는 없을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자기네 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렇게 프랑코에게 적극적인 협력관계였다면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아돌포 수아레즈 전 총리 같은 경우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아돌포 수아레즈는 오푸스데이 기혼회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스페인의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프랑코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이다.
  1. 200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로써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에게 전구를 청할 수 있게 되었다.
  2. 일단 가톨릭을 까고 보자는 답이 없는 개신교, 극단적인 무신론자들, 프리메이슨 등이 있다.
  3. 그러나 예수회 측은 오푸스데이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라고 한다. "신부들의 엘리트 집단"으로서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일종의 경쟁대상 격이기도 하다나. 근데 오푸스 데이 회원 중에 사제의 비율은 2% 남짓이다. 비교대상이 되기에 부적절.
  4. 비판하는 측에서는 호세 마리아의 인간적 결점을 증언하려던 사람들의 증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 인간적 결점이란 화를 잘 내고 아랫사람들을 막 대한다 정도. 약간 불같은 성격이었다는 것이지만, 시성과정에서 성격이지 결점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그렇게 치면 수많은 성인들도 성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격 가지고 트집을 잡는 시성과정은 없었다. 하지만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하단 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했다는 결점이 지적되었으나, 실제로는 프랑코에게 직언(진정한 가족이 없는 사람은 바로 당신!)을 서슴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정치에 대해서 일체의 견해를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시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5. 민감한 역사적, 정치적인 문제를 쓸대 없이 축구판으로 끌고 가는 FC 바르셀로나의 일부 몰지각한 서포터들은 들으면 기겁할 내용이지만, 심지어 그 바르샤도 프랑코에게 명예 구단주 자리 및 감사패를 증정한 적이 있다. 그것도 두번이나.
  6. 거기에 더해 다른 집단이라면 모르지만 교회의 경우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학살, 방화, 범죄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정부였던 공화국 쪽에서 약 4,000명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이 살해된 것으로 스페인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에 밝혔을 정도니...적어도 가톨릭 교회에 한해서는 프랑코를 미는 게 당연
  7. 결국 이 때 쯤 되면 스페인 가톨릭 주요 성직자들까지도 프랑코의 독재에 불만을 드러냈다. # 반공정책을 펴고 가톨릭을 수호했다고 하지만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 프랑코의 강압적이고 비상식적인 독재 통치에 스페인 가톨릭 교회 주류조차도 결국 엄청난 염증과 답답함을 느꼈다는 얘기. 이는 곧 얼마나 프랑코 독재가 막장이었는지 입증한 셈이다.
  8. 나치우스타샤의 만행에 침묵이나 심지어 협조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교황 비오 12세도 적어도 일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유대인 여러명을 구해줬다.
  9. 원래 성인 절차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 심사를 한다. 한 예로 같은 가톨릭의 성인인 잔 다르크의 경우 1431년 순교 후 1920년에, 무려 500년 가까이 걸려서 시성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불과 사후 27년만에 시성이 되었다고 말하나, 다른 요한 바오로 2세마더 테레사 같은 경우는 이 보다 더 빨리 시복시성이 빨리되었다. 기적에 의한 병자 치료 사례들이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