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

(유검필에서 넘어옴)

庾黔弼
(? ~ 941)

나가서 싸웠다 하면 반드시 이기고 돌아온 후삼국시대먼치킨 명장.그리고 소드 마스터.

본격 왕건와일드카드.

1 개요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호족.

평산 유씨(平山庾氏)[1], 무송 유씨(茂松庾氏)의 시조로서[2] 유검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흔히 유금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한자를 음독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黔이란 한자가 검을 검, 귀신이름 금이란 두가지 음으로 읽히기 때문이며, 오늘날에는 유금필이라는 명칭이 유명하지만 조야기문(朝野記聞)같은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유검필이라 표기되어있다. 명칭이라는 것이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며, 당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유검필, 현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유금필로 읽으면 된다.

2 일생

2.1 초기 활약상

유금필이 태어난 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935년 나주 탈환에 앞서 스스로 자신이 이제 늙었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이때 장수로서 늙은 나이인 50세가 넘었다고 본다면 그는 최소 880년대쯤에 태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918년 고려 건국 당시에는 30대 중후반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평주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아마도 평주 박씨 집안의 무장이었다가 평주 박씨가 궁예에게 항복하자 유금필도 군에 들어가 마군장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강감찬, 척준경,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초기, 중기, 후기를 대표하는 먼치킨 장군으로 왕건에게 굉장한 신임을 받았다. 왕건의 역성혁명때에는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혁명 이후 홍유와 함께 궁예 지지세력들이 남아있던 청주의 반란 진압에 참전했다.

유금필의 맹활약이 본격적으로 기록상에 나타나는 시점은 923년으로, 골암진(오늘날의 강원도[3] 안변군 신좌리)에 북번(아마도 북방의 이민족들)이 자꾸 쳐들어와 위협을 가하자 태조가 유금필을 골암성(鶻巖城)으로 보내 북번을 방비하게 했다.

유금필은 북번의 추장 300여명을 불러 성대한 술파티를 연뒤, 이들이 취하자 "이제 그만좀 깝치시지?"라고 위협하여 단숨에 그들을 복종시켰다. 그리고 북번의 각 촌락들마다 사람을 보내서 너희 추장들이 다 복종했으니 이제 그만 깝치고 니들도 숙이라고하여 무려 1,500여명이 항복했고, 포로로 잡힌 고려인 3,000여명을 귀환시키는데 성공해 태조가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야사에서는 서경 개척 당시에 마상쌍검으로 단독으로 서경성문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연출되었다[4].

그리고 그 이후 그의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되는데...

2.2 고창 전투까지

925년에는 연산진과 임존군(오늘날의 충남 예산)을 공격하여 후백제의 장군 길환과 군사 3천명을 죽이는 공로를 세워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왕건견훤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대치중이었던 조물성 전투 중에도 유금필이 나타나자 한창 우세하던 견훤이 유금필을 두려워해서 왕건과 화친을 맺을 정도였다.[5]

이후,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참패함에 따라 후백제의 기세가 최솟았던 928년, 탕정군(湯井郡)에서 축성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유금필은 왕건이 삼년산성[6]에서 패배하고 후백제 장군 김훤, 애식, 한장의 3천 군마에 쫒기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신속하게 구원. 후백제군을 패퇴시키고 왕건을 구출했다.

고려와 백제의 운명을 가른 930년 고창 전투 때는 왕건을 비롯한 제장들이 모두 전투에 소극적인 가운데[7] "무기가 흉악한 도구이며 전쟁이 위험한 것은 자명한 것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겨우 승리할 판인데 어찌 적을 앞에 두고도 지는 것을 겁내는 겁니까?"라는 폭풍간지스러운 명언을 남기며 홀로 결전을 주장하고 직접 선두에 서서 돌격하였다. 이에 고려군이 힘을 다해 싸워 대승을 거두었으며, 덕분에 유금필은 고려가 후삼국의 패권을 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8] 보통 사람이었으면 그게 유언이었을 텐데 사망 플래그 분쇄기

2.3 귀양 생활

이후 각 전투에서 맹활약했지만 뜬금없이 931년, 참소를 받아 곡도(鵠島)귀양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왜 유금필이 귀양을 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태조의 신임을 받는 유금필을 견제하려는 다른 공신이나 패서호족들의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이다.[9] 하지만 유금필은 곡도에 귀양을 가있는 와중에도 태조와 나라를 걱정하며 상소를 올리는 등 충의를 꺾지 않았다.

이후, 932년에 후백제 수군 장군인 상귀상애가 지휘하는 특별함대가 각각 개경과 대우도를 급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상귀가 고려 해군을 불사르며 크게 승리하여 고려군의 함대는 큰 타격을 입자, 왕건은 장수 만세를 보내 대우도를 약탈하려는 상애를 막게 하였으나 상애의 함대를 막지 못하였다.

바로 이때에 유금필이 곡도에서 함선을 모으고 의병을 일으켜 장차 대우도에서 개경을 넘보려던 상애를 몰아내는 큰 공을 세웠는데, 이 공로 덕분인지 곧 유배생활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10]

2.4 후기 활약상

933년 5월, 백제군 사령관 신검이 다시 신라 국경을 침공해 서라벌이 6년만에 다시 후백제 손에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왕건은 다급히 유금필에게 구원 명령을 내렸고 유금필은 군사들을 모을 시간도 없어 겨우 80기만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달려갔다.

가는길에 신검군과 조우하게 되자 겨우 80기(...)로 신검군을 뚫어버리고 서라벌에 입성. 왠지 이 분이 떠오른다 서라벌을 안정시키고 7일간 환대를 받은 다음 돌아오는길에 다시 신검군과 맞붙어 적장 환궁과 금달을 사로잡는등 말그대로 개발살내버렸다. 왕건이 눈물을 흘리며 좋아한건 당연지사.

이후 운주 전투에서 직접 선봉에 서서 견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적장 상달, 최필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등을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웠다. 나주탈환작전에도 참여하여 역시 으뜸가는 공을 세웠고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이 탈출하자, 함대를 이끌고 견훤을 보호하여 고려에 오게 했다. 후삼국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일리천 전투에서도 자신이 예전에 복속시킨 말갈 기병 9천 5백을 통솔해 공을 세웠고 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비교적 빈약한 편인 후삼국시대 사료로도 이 정도의 엄청난 전과를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유금필만 있으면 전황이 어떻든 이긴다는 것이다. 여진족을 복속하고 그들에게 대추장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정치력 또한 일품이었을 듯.

유금필의 딸은 태조의 9번째 비인 동양원부인이 되었고, 태조는 죽기 전에 따로 유언을 남겨서 유금필의 자손이 죄를 짓더라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고 할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태조가 엄청나게 믿고 의지한 장수였던게 틀림없다.

그덕에 문종때 유금필의 후손인 유공의가 아첨이 심하고 많은 불법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죄를 묻지 않고 숙주방어사에 제수되기도 했고, 유금필의 또다른 자손인 유중경은, 그의 어머니가 이공(李龔)이 형의 딸, 그어니까 조카와 간통하여 낳은 소생이라는 이유로 유중경에게 벼슬을 주는 것을 조정에서 반대했음에도 유금필의 후손이란 이유만으로 벼슬을 받았을 정도니(참조) 그의 후손들은 조상 잘 둔 덕에 잘 살았다(...).

현존 개성 왕씨 90%를 차지하는 동양군파는 고려사에 등장하는 효은태자를 파조(派祖)로 삼고 있는데[11] 효은태자의 생모가 바로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유씨로[12] 개성 왕씨는 모계 쪽으로 유금필의 핏줄을 잇고 있는 셈.

4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강인덕[13]이 배역을 맡아 열연했다. 본래 강비의 아버지인 강장자의 장수였으나, 송악에 궁예의 황궁을 건설하는 일로 인하여 왕건에게 자주 들락거리다가 결국 왕건의 부장이 된다. 이후 상주 전투에서 왕건과 함께 공을 세우자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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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최강자중 한명으로 왕건 휘하에선 독보적. 홍문연을 모티브로 한 환선길과의 칼춤 대결에서 비기는 것으로 그 전투력의 역사가 시작되며, 양길과의 전투에서 왕건의 부장으로 출전해 양길의 아우 명길에게 부상을 입히고 낙마시키며, 삼년산성에서 벌인 애술과의 한판 승부에서 당시 후백제 최강의 무장이라 할 수 있는 애술을 도망치게 하고 부장들을 상대로 무쌍난무를 펼치는 모습은 지금봐도 명장면.직접 영상으로 감상해보자. 분명히 진지한 전투 장면인데 은근히 개그 요소가 많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구나 다음에 보자꾸나""나는 다음이란 말을 싫어하느니라!""아 씨 다음에 보자고!" "안 된다니까!" 그 용맹하고 포악한 애술에게 "저건 괴물이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야! 성문을 닫아라!!!"는 대사를 외치게 만들었다. 그 다음 애술을 구하기 위해 나온 부장들을 이도류로 줄줄이 다 베어버리고 홀로 성문을 돌파한다. 이후 "저자는 유금필이 아닌가!" "유금필입니다!! 유금필이 이쪽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어서 피하시오소서!" "유금필이다! 유금필이다!" 등은 전 백제군 공통의 간판 대사가 되고 말았다. 일단 이 대사만 터지면 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화려한 학살극이 펼쳐진다. 호로관 여포합비 장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백제에서 이 사람에 맞설수 있는 자는 견훤 본인과 수달, 추허조 정도밖에 없을듯.[14]

고창 전투 때는 불과 3천의 군사로 신검의 1만 군사를 막아낸다. 이때 다시한번 강대한 무력을 보여주는데 애술과 박술희의 일기토에 난입한 부달, 소달을 한꺼번에 상대해 베어버린다. 신검의 지원을 받지못한 견훤이 고려군의 포위망에 완벽하게 포위되자 박술희에게 신검 저지를 맡기고 공격군에 합류해 공을 세운다.

왕건이 평양으로 시찰을 나갔을 때(171화) 오랑캐들에게 황제만이 받을 수 있는 만세를 받은 일이 발생한다. 왕건은 오랑캐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문제 삼지 않는데, 그동안의 공적이 상당히 대단하여 왕건의 지속적인 총애를 받는 것을 껄끄러워하며 유금필을 시기하던 홍유, 배현경, 왕식렴[15]등은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고, 이에 왕건은 격노하기에 이른다. 이 때, 최응은 "유금필 장군은 죄 없으나, 모든 신하들에게 관심을 주지 못하고 유금필만을 너무 띄운 폐하께서 이번 일의 원인을 만드신 것입니다."라며 조언하였고 덧붙여서 "신하들이 원하는 삭탈관직만으로는 부족하니, 유배형까지 내려야 한다."며 계책을 낸다. 왕건은 이를 수락하여 유금필에게 삭탈관직과 더불어 곡도 유배형을 내린다.

사실 이것은 유금필의 죄를 따져 진짜로 유배시킨 것이 아니라 유금필을 시기하여 모함한 신료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취약 지구인 곡도를 보강하도록 하기 위한 유배를 가장한 파견 조치였다. 최응이 계책을 내면서 노린바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어쨋든, 유배 생활을 하던 도중 신검의 지휘하에 고려의 황도를 기습해 온 후백제군을 정식 수군도 아닌 추장들의 고깃배들을 이용해 대파하는 쾌거를 이룬다. 물론 이건 최승우의 지시를 무시한 신검의 형편없는 지휘 능력[16] 때문이었지만...

이 공로로 다시 복직하여, 운주 전투에서도 참전하고 이후 실각되어 나주로 탈출하는 견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견훤의 호령만으로 후백제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는걸 보고 감탄하였고, 일리천 전투에서도 자신이 선봉에 설 것을 자청하던 견훤을 왕건이 말리자, 견훤을 지지하여 함께 선봉에 섰다. 여기서 상귀를 베고, 이후 기병들을 몰고 황산벌로 퇴각한 신검의 본대를 포위해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런 그도 초창기에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왕건이 아직 궁예 휘하에 있던 시절 나주를 재탈환하려다 실패하고 회군하는 견훤을 쫒다가 최승우의 매복에 걸려 참패를 당한다. 정확히는 최승우가 혹시나 모를 추격군에 대비하기 위해 일종의 보험으로서 일부 병력을 매복시킨 것인데, 유금필이 거기에 걸린 것.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최필과 일기토를 벌이다 힘이 떨어져 죽을 뻔했는데 맞춰 도착한 신숭겸 덕분에 겨우 목숨만 건진다. 군법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목이 달아날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왕건이 유금필을 문책하는 수준에서 끝났고, 나중에 보고를 받은 궁예도 뭐 그럴수도 있지 반응을 보이는지라 유야무야 넘어갔다. 물론 이 이후로는 그런 실수 없이 불패의 명장으로 거듭난다.
  1. 평산은 평주(平州)라고도 부른다.
  2. 정청주에 따르면 평주 유씨와 무송 유씨는 원래 다른 집안으로 고려 후대에 와서 평주 유씨의 세력이 약해지고 무송 유씨가 평주 유씨를 흡수하면서 평주 유씨의 시조였던 유금필을 자신들의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출처: 정청주 《신라말 고려초 호족 연구》 일조각, 1996년)
  3. 194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은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변경.
  4. 다만, 극중의 배경이 서경이 아닌 삼년산성. 그리고 북방 유목민족이 아니라 후백제군이 상대였다. 이에 대해서는 애술 항목을 참고해도 좋을 듯.
  5. 다만 조물성에서 왕건과 견훤 중에 누가 먼저 화친을 정했는지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6. 충북 보은. 신라가 470년(자비왕 13)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요새로 동으로는 상주, 서북으론 청주, 북으로는 충주, 서남으로는 옥천, 남으로는 영동으로 이어지는 요충지다. 전략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다 보니 방어하는 후백제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
  7. 왕건과 다른 장군들 상당수가 거듭된 패배로 어느정도 질려있었다. 홍유는 아예 후퇴할 길부터 닦아놓자고 말할 정도.
  8. 물론 유금필의 용맹함뿐만 아니라 고창 지방의 호족들이 왕건을 지지해주었던 사실도 크게 한 몫 하였다.
  9. 당시 유금필은 고려의 영웅이었고 고창전투의 영향으로 왕건의 최측근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 정도 인사를 왕건이 무고함을 알면서도 귀양보내게 만들 정도로 막강한 세력은 패서호족뿐이다. 다만 왕건 역시 유금필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그랬을 가능성도 높다. 군사적 능력에 정치력까지 겸비한 무장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군주에게 경계대상 1호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유금필을 경계한 패서호족들과 공신세력이 연계하여 유검필을 참소한 것으로 나오는데, 충분히 일리있는 설정이다.
  10. 귀양간 지 2년 후인 933년에 유금필이 정남대장군에 임명되었다는 걸로 보면 그 사이에 귀양이 풀리게 된 모양이다.
  11. 정확히는 효은태자의 후손으로 조선 초 왕씨 숙청에서 살아남은 왕미(王亹).
  12. 고려 초기 왕자들의 호칭의 경우 생모의 출신지나 태어난 거처의 호칭을 따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려 태조의 제11비인 천안부원부인 임씨 소생의 왕자는 천안부원낭군(천안낭군)으로 불렸다던가 하는 식.
  13. 공화국 시리즈에서 김두한, 용의 눈물에서 이지란등을 맡은 배우이다.
  14. 수달의 용맹은 자세하게 묘사된 바 있고, 추허조의 용맹에 수달이 크게 놀랐던 걸 보면 추허조도 유금필과 맞먹을 수 있는 무장으로 보인다. 수달이나 추허조가 유금필과 직접 일대일로 겨룬 적은 없어서 확실한 우열은 시청자들의 상상의 몫. 견훤은 왕이라는 신분 때문에 직접 나서는 경우가 제한적이고, 수달과 추허조는 일찌감치 전사했기 때문에 극 후반부에서는 유금필을 당해낼 수 있는 백제 장수는 없게 되었다. 최필이 유금필에게 부상을 입힌 적은 있으나 그야말로 난전 중이었던데다, 나중에 고려의 중급 장군인 이치에게 단칼에 발리면서 의미가 없어졌다.
  15. 왕식렴의 경우는 평양총관은 자신인데, 오랑캐들이 자신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고, 되레 유금필만을 띄우는 것에 대한 반감이 컸다.
  16. 신검의 실책이 치명적이었던 것이, 1차로 유금필이 여기 있다고 하자 눈이 뒤집힌 애술이 땡깡을 부리자 한창 자신감에 차 있던 신검은 애술의 한을 풀어주자며 최승우와 종훈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갈 이유가 없는 곡도로 향하였다. 2차로 곡도 부근을 지나는 정탐선들이 정찰을 개판으로 하였다. 설렁설렁 대충 눈대중으로 훝어보고 지나가 섬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3차로 바람과 물살이 지극히 불리한 와중에도 신검은 최승우의 만류를 무시하고 이동을 했다가 화공을 하자 그제서야 '아이고 난 망했다!' 견훤의 말마따나 신검의 전형적인 패망 테크인 '잘 하다가 막판에 다 말아먹는' 결과의 재탕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