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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코윤루 (백양) |
1 개요
이 곳에는 근현대 역사만을 기재하며 팔라비 왕조(1925~1979)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페르시아를 참고. 또한 고대 왕국에 대해서는 엘람 항목 참조. 팔라비 왕조 이전에는 이란과 페르시아라는 명칭이 혼용되었으나 1935년 팔라비 왕조에 의해 이란으로 고정되었다.
2 근대
1906년 혁명에 성공하여 아시아 국가 최초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으나, 의회는 왕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선거가 조작되거나 했다.
그 후 1908년 이란(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 기념비적인 일이 발생하는데, 이란의 사막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영국에서는 국가의 주도하에 이란의 석유산업을 장악해 나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 중립을 선언했으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당연히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10여년 전 이란의 입헌 혁명의 여파로 불안하던 정국에 더더욱 혼란이 닥쳐오자 레자 칸(رضاخان)을 중심으로 한 군부에서 쿠데타를 벌여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레자 칸을 레자 샤 팔라비(رضاشاه, 팔라비 1세)로 추대해 팔라비 왕조를 세웠다.[1]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 제국'으로 통일[2]하고 국왕(king)으로 변역되던 군주의 칭호인 샤를 황제(emperor)로 격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에 참전은 안 했으나, 팔라비 1세는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독일과 거래하기 시작했고, 소련 등의 물자 수송 요구도 거부하게 된다. 이란이 소련으로 향하는 렌드리스 물자가 통과하는 보급물자 기점이어서 철도가 엄청 깔렸던 데다가,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자 불안해진 영국과 소련이 사전 경고나 선전 포고도 없이 무단 침공, 나라가 두쪽나고 팔라비 1세는 퇴위, 망명하였다. 그 후 팔라비 1세의 아들이자 팔라비 왕조의 최후의 황제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팔라비 2세)가 즉위하면서 이란은 완전히 영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된다.
3 현대
팔라비 1세가 물러나면서, 이란인 최초로 유럽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인물로 이란의 민주화를 주도한 모사데크와 같은 정치범이 사면되었고, 모사데크는 의회에 출마해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 이 시기에 팔라비 1세에게 쫓겨났던 아야톨라 카샤니 같은 종교지도자가 이란으로 돌아오면서 모사데크의 세력과 연합해 황권에 반대하게 된다.
이 즈음 거의 9 대 1의 비율로 이익을 가져가고 있던 영국의 극심한 석유 수탈로 영국에 대한 악감정이 이란에 팽배하면서 파업이 일어나고 반대시위가 발발한다. 이란에서는 석유산업의 이익을 50:50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요구를 내세웠으나 영국에서는 이를 전면 거부하였고, 영국의 사주를 받은 황제와 총리들은 영국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성명만을 발표하여 반대 여론이 팽배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꼭두각시 총리였던 라즈마라가 암살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며, 결국 모사데크가 총리에 오르게 되고, 석유산업을 전면 국유화시킨다. 모사데크는 이 외에도 황가와 귀족들의 땅을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과 황권의 약화와 민주주의 강화를 추구하는 등 개혁정치로 국민들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국유화된 석유산업은 이란에 거의 이득을 가져다 주지 못했는데, 첫번째로 영국의 기술자들이 일시에 빠져나가자 석유산업이 제대로 굴러가기 힘들었고, 두번째로 영국이 강력한 해군을 동원해 다른나라와 해상을 통한 석유 교역을 봉쇄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후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들을 매수해나가며 계속적으로 모사데크에 반대하는 세력을 만들고, 정치불안을 조성했다.
그 즈음, 미국은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공산화에 대한 공포가 팽배해지고 있었는데, 이란의 정치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공산화되면 막대한 석유가 소련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조성되었다. 그렇다고 모사데크를 직접 지원해 정치를 안정시키면, 영국과 적대하게 되어 서방의 동맹관계에 금이 갈 우려가 있기에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영국의 협조 하에 CIA를 통해 쿠데타[3]를 일으켜 황제를 복권하고 모사데크를 끌어내리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모사데크 총리가 체포된 후 팔라비 2세는 다시 돌아왔고 황권은 모사데크 전보다 훨씬 더 강화되었으며, 미국은 친미이자 반소련인 팔라비 왕조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미국의 비호 하에 팔라비 왕조는 서구화와 근대화, 친서방, 친이스라엘 정책을 추구해 이란을 어느 정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73년 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오일 쇼크 때에도 전혀 국력 소모도 없이 그야말로 앉아서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고 다음 해에는 아시안 게임을 개최할 정도로 안정가도를 달리는 듯했다.[4]
하지만 팔라비 2세는 황권 강화를 위한 탈이슬람화 정책과 노골적인 친미주의 성향을 보였고, 비밀경찰 사바크(ساواک, SAVAK)[5]에 의한 철저한 통제를 시도했다. 또 70년대 중반 팔라비 2세가 독일 크루파사의 지분 25%를 소유했을 정도로 황제 개인의 부패 또한 심해졌으며, 오일 쇼크로 얻은 부는 도리어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 이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정치적 재기를 노리던 이슬람 세력이 합세하여 규모는 더욱 커졌다. 급격한 전통 붕괴에 당혹해 한 민심의 이탈도 더해졌다. 또한 팔라비 왕조의 친미주의 성향은 반미 감정을 싹트게 했는데, 나중에 모사데크의 축출에 CIA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밝혀지면서 미국에 대한 이란인의 반감이 뿌리깊게 자리하게 된다.
여기에 기회만 노리던 외부 세력이 얼씨구나하고 끼어들었다. 소련은 반정부 학생 운동을 지원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6]와 프랑스는 이슬람 세력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지원했다. 한편 미국은 카터 행정부의 어리버리한 비현실적 도덕 정치와 인권 외교 정책으로 방관하기만 했다.
1978년, 학생들의 반황제 시위로 출발한 반정부 운동은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학생들은 물론이고 종교 세력과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였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신병을 핑계로 팔라비 2세가 이집트로 도피하면서 팔라비 왕조는 무너지고 이란 혁명이 달성된다. 한 달여의 짧은 임시 내각을 거치며 주도권을 잡은 이슬람 세력이 국민투표를 거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공화정을 수립한다. 이후 79년 11월의 테헤란 미대사관 점령 사건으로 카터 정권을 작살내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퇴위한 팔라비 2세는 이후 이곳저곳 떠돌다가 1980년에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이 혁명은 이후에 이스라엘과 함께 양대 중동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종파는 달라도 '이슬람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가 본격적으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 먼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해 탄압받아 잠잠하던 무슬림 형제단이 세력을 키워 아랍의 봄을 일으켰으나 근본주의의 문제점 때문에 혼란만 가속되었다.
혁명에 위기감을 느낀 이라크가 1980년 9월 22일에 선전포고도 없이 쳐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무려 8년이나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후 90년대에 진보세력쪽인 하타미 대통령 하에서 개방과 경제발전, 어느정도 표현의 자유가 생겼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2005년에 이슬람 보수주의자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이 되었다.
2009년 6월 13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압도적인 표 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국가가 비상상태. 점점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이리저리 시끄럽기 시작하는 가운데, 미국은 미국대로 이란이 민주화돼서 친미정권 세우면 미국에겐 좋지라는 태도인지라 이리저리 개입하려고 하니 안팎으로 시끄러운 상태이다.
단 이란의 민주화=친서방, 이슬람 국가 붕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정권의 세뇌가 아니라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 역사적, 사회적으로 가진 원한인지라[7] 이란인들의 반미, 반서방 감정은 지금도 매우 강하다. 선거 폭동 당시 시위대가 개혁정책을 추구했지만 CIA의 쿠데타로 쫓겨났던 모사데크 전 총리를 영웅으로 내걸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아마디네자드에게 패하여 선거 폭동을 촉발시킨 미르호세인 무사비 역시 어디까지나 이슬람 국가 체제 안에서 개혁적인 정책을 내건 야당 지도자다. 이 시위대가 친서방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을 탄압하는 수구 세력의 주장인 동시에 서방 국가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참고로 이란의 70, 80년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마르잔 사트라피 원작, 뱅상 파로노드(Vincent Paronnaud) 감독의 페르세폴리스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보도록 하자. 물론 마르잔 사트라피가 만든 원작 만화책도 훌륭한 참고문헌이다.
2011년 아랍권을 뒤흔든 민중 혁명 여파로 이란에서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튀니지와 이집트,리비아와 달리 그 규모는 작은 편이다. 미국은 열심히 이 기회에 엎어버려! 응원하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역사적인 측면에서 반서방 감정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다지 희망은 없어졌고, 결국 별다른 영향을 주지못하고 흐지부지되어 미국을 실망시켰다.
2013년 대선에서는 보수파의 후보가 난립한 반면 중도온건파가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켜서 결국 성직자 출신의 중도온건파 로우하니 후보가 과반 득표로 당선되었다. 강경한 보수파가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면서 제제로 인해 경제난이 가중된것이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는 분석. 로우하니 당선자는 아마디네자드 치하의 억압을 풀겠다고 밝혔다. 미국도 은근히 핵무기 문제를 해결할수 있기를 바라는 눈치. 드디어 버락 오바마와의 핫라인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최고지도자 밑으로 3권분립이 되어있는(...) 이란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과연 미국 기대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2014년 시리아,이라크를 강타한 이슬람 국가에 대하여 반감을 보이며 이라크 정부군을 돕고 있다. 이 와중에 미군과 이란군이 협조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상태. 하지만, 이스라엘이 결사반대하기에 이뤄지기 어려워 보인다.
2016년부터는 그동안 조용하던 이란 내 쿠르드인들과 수니파들이 시아파의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올랐다.[8] 쿠르드인들과 수니파 무장단체들은 게릴라전으로 이란을 괴롭히고 있어 이란은 이들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
4 절대적 종교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사진 속 인물은 알리 하메네이
이란 정식 국호의 이슬람 공화국은 이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성직자로 구성된 국가지도자운영회의가 종신직인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며 주요 국정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한다. # 전임이자 초대 최고지도자인 호메이니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도 국민이 직접선거로 선출한 대통령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얼굴마담이나 다름없다. 또한 이란의 대의민주주의체제도 웃긴점이 사실상 최고지도자가 대통령, 국회의원 후보들의 자격심사권도 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이들의 눈에 거슬리는 자는 대통령 및 국회의원 후보로도 출마할 수가 없다. 그냥 최고지도자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만 입후보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볼때 이란에서의 대의제 민주주의 눈 가리고 아옹하는 수준이다. 다만 선거에서 개혁파들을 걸러냈음에도 개혁파의 당선률이 높은편이고[9] 일단 2016년 총선에서 국가지도자 운영회의에서 개혁파와 중도파가 다수를 점한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알리 하미네이가 도중에 사망한다면 어느정도의 희망이 생길수 있겠지만 그래봐야 최고지도자 운영위원회 선거를 8년에 한번식 치른다는 점때문에(...) 민심반영이 여러모로 힘든구조인지라 갈길이 멀다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가 국군이 아닌 당군인 것과 비슷하게 국가지도자운영회의가 이란 군사력의 핵심인 이슬람혁명수비대를 거느리고 있기도 한데, 혁명수비대는 석유 등 주요 산업에 진출하여 막대한 이권을 취하고 있으며 정치적 보수파에 힘을 실어 주어 개혁 세력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
여담으로, 하메네이는 민족상으로는 이란 인구 대부분(5400만)을 차지하는 페르시아인이 아닌 아제르바이잔인[10]이다. 상대적으로 페르시아민족에 비해 소수인 민족 출신(하지만 이란 인구 20%가 넘기에 소수민족이라고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다) 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에서도 보다시피, 이란에서는 무슬림라는 가정 하에 민족 차별 문제는 크지 않은 편.
5 호메이니
이란에선 우선 국부급으로 존경을 받지만, 주변 나라들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이스라엘, 터키에선 악의 축.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프랑스의 입장에선 기껏 도와줬더니 먹튀만 한 배은망덕한 놈. 좀 더 좋게 평가해도 비현실적인 꼴통 이슬람 근본주의자 정도로 대우받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호메이니에 대한 내용은 해당 항목에서 참고하길 바란다.
- ↑ 팔라비 왕조의 샤(군주) 레자라는 뜻이다. 그의 아들의 명칭은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팔라비 2세)로, 팔라비 왕조의 군주 모하마드 레자라는 뜻이 된다.
- ↑ 사산 왕조 때부터 국호는 이란이었지만 서방에서는 '페르시아'로 통용되고 있었다.
- ↑ 작전명 아이아스/아작스Operation Ajax 로 불렸다. 별 실적이 없던 CIA가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여 성공으로 이끈 첫번째 비밀 작전이다. 이를 계기로 CIA가 과테말라를 비롯해 다른 나라의 정치에 계속적으로 개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전은 정작 영국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미국의 석유이권 개입으로 이란에서 처음 제시한 50:50에도 못미치는 20%의 이득만을 가져가게 된다.
- ↑ 이런 것 때문인지 이란인들 중에서는 아직도 팔라비 왕조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다 카더라. 틀린 말은 아닌게 파라 팔라비 이란 황후의 경우를 봐도(...).
- ↑ 사바크의 최대 협력자는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모사드였다.
- ↑ 팔라비 2세는 이란이 향후 사우디아라비아를 뛰어넘어 이슬람 세력의 맹주가 될 것임을 공언하고 다녔고 이에 이슬람 탄압까지 겹쳐져, 아랍 세계의 중심 국가이자 이슬람 최대 성지 메카를 품고 있어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이것이 주체교단과 핵심계층 일부만 제때 잘라내면 나머지는 새 지배자를 환영할 만큼 민심이 떠난 북한과의 근본적인 차이다. 심지어 이란 망명자들조차 현 이란 정부가 아무리 막장이라 해도 스스로 붕괴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서방이 붕괴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잘라 말할 정도다.
- ↑ 사실 이란의 신정통치가 워낙에 악랄해서 쿠르드인들과 수니파는 예전부터 불만이 가득했다.
- ↑ 다만 이것도 지역마다 얘기가 다르다. 물론 테헤란같은 대도시에서야 보수파 VS 진보파간의 대결이 성사되지만 농어촌 지역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서 보수파와 개혁파를 왔다갔다하는 의원들이 꽤 된다.(...)
- ↑ 물론 옛 소련이었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출신인 것은 아니다. 아제르바이잔인은 본국(820만)보다 오히려 이란(1700만)에 더 많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