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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물리학상 수상자 | ||||
1920년 | 1921년 | 1922년 | ||
샤를 기욤 |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 닐스 보어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3][4] | |
출생 및 사망 |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 (76세) |
출생지 |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올름 시 |
사망지 |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시 |
국적 | 미국 / 스위스[5] |
직업 | 물리학자 |
학력 | 김나지움 아라우 아르고비안 주립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
가족 | 1번째 부인: 밀레바 마리치 2번째 부인: 엘자 아이슈타인 자녀: 리제를 아이슈타인 자녀: 한스 알베르트 아이슈타인 자녀: 에두아르트 아이슈타인 |
타임지 선정 20세기의 인물 Time Person of the Year Centur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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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목차
1 개요
유대계 독일인으로 유명한[6] 물리학자이며 지금도 '천재 과학자' 하면 회자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제는 의외로 무엇 때문에 유명한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물리학 그거 뭔가요, 먹는 건가요? 상대성 이론만 발표한 사람인 줄 알기도... 너무 유명해서 그런지 온갖 루머가 난무하지만 신빙성이 있는 것은 드물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도 많지만 역시 믿을 만한 책은 얼마 안 된다.[7]
2 생애
2.1 어린 시절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룸에서 출생한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이는데 12~16살에는 미적분을 혼자서 공부했다고 하며,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고 그 논리성에 감탄했다고 한다.[8] 이후 김나지움에 진학했는데 수학, 물리에 심취하여 당시 교육과정을 뛰어넘어 선생님들도 쩔쩔매는 질문을 해 유명한 학생이 된다. 여담으로 이런 아인슈타인의 초월질문에 선생님들이 "너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대꾸했는데, 이게 와전되어 아인슈타인이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는 식으로 떠돌게 된 것이란 얘기도 있다.
당시 독일의 주입식 교육[9]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훗날 학풍이 보다 자유로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튼 1894년 말에는 의사에게 진단서를 받아서 휴학을 하고 가족을 찾아 떠나는데, 이 시기에 쓴 첫번째 논문이 'On the Investigation of the State of the Aether in a Magnetic Field'(자기장에서의 에테르의 상태)이다. 참고로 이때가 한국 기준 고등학교 1학년.(...)
1895년 중순 취리히 공과대학 시험을 쳤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남달리 뛰어난 수학 실력과 물리학 실력을 인정받아서, 학장이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오면 입학시켜주겠다고 해서 배려로 1년 후에 입학하게 된다.
17세 때 스위스 아라우의 아르고비안 주립학교에 다녔다. 당시 교수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교수의 딸이었던 첫사랑인 마리 빈텔러(Marie Winteler)를 만났다.[10] 이후 아인슈타인은 연애편지를 자주 썼는데, 1896년 아인슈타인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마리가 교사가 되고, 이사를 가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둘은 계속 연락을 했지만 아인슈타인이 먼저 연락을 끊고 싶다고 했고, 차인 마리는 그런 아인슈타인을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남아있는 편지들 중에는 찢어진 것도 있다고.(...) 아인슈타인은 1903년에 밀레바와 결혼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마리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신문기사.
1896년 9월 스위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스위스에서는 졸업시험을 1~6 으로 평가하는데 6이 최고점이다. 아인슈타인은 대수학, 기하학, 물리학에서 6 을 받았다. 지리학 등 세 과목에서 4점, 프랑스어에서 3점을 받아서 한국 인터넷에서는 '아인슈타인은 낙제생이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한다.[11][12]
2.2 대학 시절
취리히 연방공대(ETH Zurich)에서 '수학물리교육과'(mathematics and physics section of the teaching diploma course)를 전공했다. 후술되어있지만 졸업할 때 교원 자격을 땄으며, 이 자격증을 광고하며 개인 과외를 구하려 한 적도 있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전기공학자였고, 아인슈타인도 자연스레 전기기술자의 길을 걸으려 했다고 한다.
잘하던 물리학과 수학 중에서, 대학 진학 후에는 물리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수학에는 흥미로운 문제가 너무 많아서 무엇을 풀어야 할 지 모르겠는데, 물리학에는 그러한 문제가 수학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절대 아인슈타인의 수학 실력이 평범했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 상대론에서 쓰는 리만기하학은 당시 수학의 최전방 분야의 하나였고, 논문을 찾아서 봐야했으니 관심있는 수학 전공 학부생이나 그 상의 코스를 밟고 있는 자가 아닌 이상 알기 힘들던 시대였다. 사실 그가 대학에 와서 수학을 등한시하고 물리학에 심취한 배경엔 대학 시절 교수였던 저명 수학자 민코프스키와의 트러블도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지는데,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이 너무 불성실한 학생이라 졸업한 것이 놀랍다고 말하기도 했다. 교수와의 트러블은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교수 추천서를 받아내지 못해 취직에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는데, 사실 그 외에도 시민권이나 여러가지 복합적인 사유가 있다.
하여튼 아인슈타인은 대학 시절에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제외하고는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험이 다가오면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벼락치기한 후, 시험만 겨우 통과하는 식. 이런 일은 그의 경력에도 문제였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친구들 이외에 별로 없게 된다. 그래도 완전히 논건 아닌지 1899년에는 물리학에서 5.5점을 받는 등 평균평점 5.7/6점을 받아서 6명 중 1등을 하기도 했다. 1900년 졸업시험 때는 평균평점 4.91/6을 받아 6명 중 4등을 했다. 그리고 밀레바를 제외한 5명은 졸업을 한다.
2.3 초기 직장생활
아인슈타인은 대학전공과는 무관한 다소 엉뚱한 곳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상술했듯 아인슈타인의 지도교수가 그의 자만심과 불성실한 자세를 싫어하여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 전공인 물리학 쪽으로 마땅한 취직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 물론 이 이유 뿐인건 아니고 유대인이라는데서 온 인종차별과 시민권 문제 등이 겹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보험사에 취직한 뒤, 월급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과외알바를 시작한다. 이 때가 1902년 봄. 아인슈타인은 베른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내었다. (아래 절반)
Privatstunden in☞ Mathematik u(nd) Physik
für studierende und Schüler erteilt gründlichst
Albert Einstein, Inhaber des eidgen(össischen)
polyt(echnikum) Fachlehrerdiploms,
Gerechtigkeitsgasse 32, 1. Stock.
Probestunden gratis.
개인 교습☞ 수학과 물리학
전 학년 학생 대상으로 철저한 지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스위스) 연방 이공학 교사 자격증 소지.
게레히티크카이츠 가(街) 32번지, 1층.
시범 강의 무료.
제자 : 선생님, 이거 교과서에 안 나오는데요?
아인슈타인 : 이건 3년 후에, 이건 13년 후에 나올거야.
허나 이 아르바이트 문제로 상사와 싸운 뒤 해고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무렵 딸 리제의 탄생,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사건까지 함께 겪게 되며 우울한 시기를 보내던 중 학교친구였던 마르첼 그로스먼의 소개[13]로 특허청에 취직하면서 간신히 위기를 탈출한다. 어찌보면 특허청에 취직해 오히려 시간이 남아 연구할 여력이 생기게 되었으니 아인슈타인 본인이나 인류에겐 전화위복이 된 셈.
2.4 연애와 결혼
다음 사항들을 철저히 준수하시오. * 내 옷과 빨랫거리를 잘 관리하시오. * 세끼 식사를 제시간에 내 방으로 가져오시오. * 내 침실과 서재를 깨끗하게 정돈하고, 특히 내 책상은 나만이 사용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와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하시오. 구체적인 예를 들어, * 집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는 일 * 당신과 함께 외출하거나 여행을 하는 일 나와 당신간의 관계에 있어,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시오: * 나에게서 어떠한 친밀한 관계도 기대하지 말며, 나를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지 마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즉각 침묵하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일체의 항의 없이 즉시 내 침실이나 서재에서 나가시오. * 우리 자녀들의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마시오. - 아인슈타인이 결혼한 후 그의 부인 밀레바에게 제시한 요구서[14] |
2번 결혼했는데 우선 첫번쨰 부인 밀레바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인슈타인의 집안 쪽에서 그녀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밀레바가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많고, 여자이면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세르비아계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밀레바를 '늙은 마녀'(...)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밀레바는 1900년 대학 졸업 시험에서 떨어져 다시 졸업장을 따려고 시험준비를 할 생각이었는데, 1901년 아인슈타인과의 사이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시험 준비가 좌절되었으며, 1903년 둘은 결혼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적으로 너무 연구에만 매달려 부인이나 가정에 소홀했다는 식으로 알려져있는데, 연구도 연구지만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 1차 세계대전 도중 중립국에 도망쳤고, 첫 아내 밀레바와 떨어져 있는 시기 동안 친척 누나이자 당시 미망인이었던 엘자와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15] 그리고 엘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면서 밀레바를 저버리게 된다. 그렇게 1919년 이혼을 한 후 같은 해 엘자와 결혼했고 그녀는 1936년 병으로 사망한다.
문젠 밀레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아 밀레바가 고생을 했다고 한다.[16]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이혼한 이후, 피아노 가정교사를 하며 두 아들을 홀몸으로 키웠는데, 밀레바와 이혼할 당시 아인슈타인이 이후 노벨상을 받게 되면 그 상금을 모두 주기로 하고 이혼했기 때문인지[17] 아인슈타인은 이후 그녀의 경제적 지원요청을 들어준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노벨상 상금이면 많은거 아닌가 여튼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의 둘째 아들 에두하르트는 정신박약아였고, 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목졸라 죽이려 한 직후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일생을 마쳤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바는 사망했다.
그래서인지 아인슈타인이 임종 직전에, 독일에 있는 장남에게 보고 싶다고 와달라고 했는데 그대로 씹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인슈타인의 죽음 당시 첫 아들은 부모의 머리를 물려받아 버클리 주립대학에서 수력학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신문에 짤막한 부고 몇 줄을 낸 것이 전부라고 한다. 밑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듯 아인슈타인도 여생에 큰 미련은 없었던 것 같지만...
2.5 죽음
아인슈타인의 공식적인 사인은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내출혈이다. 이스라엘 건국 7주년 기념행사의 연설을 준비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으로 실려갔을 당시
"I want to go when I want. It is tasteless to prolong life artificially. I have done my share, it is time to go. I will do it elegantly.""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품위없는 일이다. 주어진 일을 마쳤고, 이제 떠날 시간이니 우아하게 떠나고 싶다."
이 말을 하며 수술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연구를 계속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유명인물 치고는 유언이 알려져있지 않은데, 죽을 당시 미국에 있어서 주위에 찾아와 있던 '미국' 지인들이 그가 죽기 직전 내뱉은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유언이 없는 것이 오히려 아인슈타인스러운 것일지도.
아인슈타인의 사후는 상당히 쇼킹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화장하길 원했고 화장되었다. 가족들도 화장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사체 부검을 맡았던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스톨츠 하비 박사는 부검시,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에 미리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인슈타인의 뇌를 빼내어 240조각으로 잘라내어 보관해 두었다. 관련 다큐에서 보면 아인슈타인은 사후 하루도 안되어서 화장되었고, 그 뇌는 하비 박사가 적출해서 포르말린 용액에 보관했다고 한다. 최초 적출 상태 그대로 조각내지 않고 보관했었고, 주기적으로 관리되었다고 한다. 그후 비밀로 붙이다가, 아인슈타인의 손녀를 만나기도 하고, 뇌 연구가들에게 일부분이 제공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흑백으로 전후좌우 사진을 찍은 후 조각내졌다. 현재 이 뇌의 일부분만(슬라이드) 제한적으로 공개되며, 전체적인 조각은 다큐 이후로 비공개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아인슈타인의 인격을 무시한 듯한 그의 행각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에 하비 박사는 과학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며 뻔뻔하게 맞섰다. 웃긴 사실은 아인슈타인의 뇌가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과학자들이 같이 연구하자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이후 아인슈타인의 뇌는 박물관에 보관된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2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생각보다 뇌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머리크기와 지능지수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반론의 산 증거가 되고 말았다.[18][19] 다만 공간 지각 능력을 담당하는 두정엽은 일반인보다 15~30% 가량 컸다고 한다. 그럼 비례하는 거 아닌가?
3 업적
우선 핵폭탄을 만든 사람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나, 핵폭탄은 그가 제작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뤄낸 물리학적 쾌거가 핵폭탄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일 뿐, 실제로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오펜하이머. 오히려 아인슈타인은 후술하듯 이후 반핵 운동에 앞장선다.[20][21]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서너 달 간격으로 발표한 논문이 세 개 있고, 같은 해에 ETH Zurich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참고로 그 세 가지 각 논문의 주제는 광양자 가설, 특수상대성 이론, 브라운 운동인데[22] 이 세 편의 논문은 아이작 뉴턴으로 대표되던 근대의 물리학을 뒤엎으면서 천지개벽을 일으켰고, 그 각 논문은 현대 물리학의 주요 테마인 양자 역학, 상대성 이론, 통계역학의 시초가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는 학교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물리학 연구를 한 것이었다[23]. 즉, 공무원 생활하면서 인류의 물리학사(史)에 이름을 남길 대업적을 남긴 거다. 역대급 변리사 성공신화[24]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시간이 남으면 도서관 가는 게 그렇게 즐거웠다고 한다.
3.1 광양자 가설
1902년 광전효과라는 독특한 현상이 보고된다. 이 효과는 기존의 빛에 대한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빛의 본성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꾸준이 있어왔으며, 파동설과 입자설이 서로 경쟁해왔다. 근대에는 빛이 슬릿을 통과하여 보이는 회절-간섭 무늬 패턴이 빛이 파동이라는 확실한 증거로 나타남으로써, 빛은 파동이라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의 실험데이터를 기존의 빛에대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광양자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광양자 가설은 빛의 에너지가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현재는 광자(Photon)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은 이후 양자 역학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정확히 말하자면,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바탕으로 해, 빛에는 일정한 에너지 단위, 양자화 된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빛에게 입자적 성질을 가지게 한다고 했다.(E= n hf, n= 정수배) 양자화 된 그 무언가를 그는 '광양자'라고 불렀으며 빛은 광양자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학설을 반박함과 동시에, 이 가설에 사용되었던 플랑크 양자가설을 더 굳건하게 하였다. 빛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거의 못박은 셈. 이 이론은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드브로이가 있는데, 그는 빛이 가진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에 자극받아 "혹시 우리가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이 아닐까?"라는 것을 느끼고 나온 것이 물질파다. 또 슈뢰딩거 역시 그의 물질파 개념에 영향을 받아 전자를 파동함수로 기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제안하게 된다. 플랑크의 흑체복사이론과 함께 양자역학 태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한 셈. 흔히 상대성 이론만을 알고 있는 일반 대중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물리학이나 전자공학 등에 조금만 손 대기 시작하면 정말로 중요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양자역학 뿐 아니라 LCD, LED 등 디스플레이 소재 등의 발광소자 등의 기본원리이며, 이미 20세기 초반에 현대 물리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기본 입자중 하나인 광자라는 입자를 규명했다는 것에서 그 중요성은 절대로 상대성 이론에 뒤지지 않는다.
3.2 브라운 운동
브라운 운동이란 1827년 영국의 생물학자 브라운이 발견한 현상으로, 물에 작은 입자를 집어넣었을 때 외부의 특별한 간섭이 없어도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현상이다.
브라운은 꽃가루로 실험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시에 유행하던 학설이던 생기(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운)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아무 입자든지 작기만 하면 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 관찰돼서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이것이 물분자의 열운동에 의해 그 입자의 통계 역학적 임의 보행(Random walk) 운동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물통에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입자를 하나 넣었다고 해보자 (물통은 정지해 있다). 그런데 그 입자는 물 속에서 물분자들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입자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거의 랜덤이라서 랜덤워크운동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통에 들어간 입자가 충분히 크다면 역학적 평형관계를 이루게 되지만, 입자가 너무너무 작으면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 아인슈타인은 이런 가설로부터 미소입자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식을 만들었는데, 이는 추후에 프랑스 물리학자 바티스트 페렝이 실험으로 검증해냈다.[25]
이 업적의 중요한 부분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확산(Diffusion)이나 임의보행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고 이론화 한 것이다. 즉, 무작위과정(stochastic process)이 물리학에서 중요개념으로 데뷔한 사건으로 그 중요성이 같은 해에 발표된 광양자가설이나 특수상대론에 비해 결코 처진다고 할 수 없다.
뿐만아니라 그 이전까지 원자는 자연현상을 편리하게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개념이라 견해가 많았는데, 이는 원자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볼츠만등의 물리학자는 원자론의 개념으로 기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원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진영의 맹비난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원자개념이 없이는 브라운 운동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냈고 이후 원자가 실재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볼츠만은 이미 자살한 뒤
아인슈타인이 만든 확산-임의보행모델은 통계역학에서 중점적으로 연구되었고, 수학에서도 확률미적분학 등으로 발전했다.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는 경제학의 경제예측 및 시계열분야, 주식/채권을 분석하는 금융경제학에서도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정도. (이래서 경제학계에서 순수수학/이론물리학자들을 대거 채용한 적이 있었는데[26] 이들을 통칭 '로켓과학자'라고 불렀다.)
3.3 상대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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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²를 칠판으로 최초로 공개했을때 찍은 유일한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
아인슈타인의 가장 유명한 상대성 이론은 1905년에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과 이후 1916(혹은 1915)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으로 나뉜다. 다만 여담으로 본인은 '상대성'이라는 표현을 극도로 싫어했다고한다. 그의 중심생각은 모든 좌표계에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고 '상대성'이라는 이름이 그것을 잘 표현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하여 철학자들은 '과학조차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인정했다'라며 떠들어댔고 이를 파인만이 엄청나게 깠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 발표 이후 1922년에 1921년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참고로 노벨물리학상은 '광전효과'(광양자 가설)로 받은 것으로, 상대성 이론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은 여러모로 말이 많았고 노벨상감은 확실하니 상을 주긴 줘야겠고...해서 나온 궁여지책으로 이 광전효과는 이전까지의 빛의 입자설을 종합한 거 정도이며 분량도 A4 한 페이지 정도였다고 한다. [27]
유명해진 뒤로는 그가 일했던 스위스 특허국에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그를 찾아오고는 했다. 어느 물리학자를 만난 후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물리학자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라고 하자 "당신은 매일 거울도 안 보십니까."라고 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
세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유명해져 1908년에는 베른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이듬해에는 취리히 대학 교수, 1911년에는 프라하 Karl-Ferdinand 대학 교수, 1914년에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과 베를린 대학 교수직을 맡는 등 출세길에 오른다.
상대성 이론이 대체 뭐하는 녀석이길래 이렇게 난리인지 이해가 안가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적자면 여러분이 쓰시고 있는 GPS장치는 상대성 이론이 없으면 아예 쓸 수 없는 물건이다. [28] GPS가 없다면 자동항법장치도 나올 수 없고 여러분의 스마트폰에 있는 지도 앱이나 운동 앱들은 탄생조차 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드론도 탄생하지 못했을 듯 이미 실생활에 너무 많이 적용되어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 쉽게 말해서 중력과 위치에 관련된 제품은 전부 상대성이론이 쓰인다.
1916년에 그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발생하는 파동, 즉 중력파의 존재를 제시하였다. 당시 과학기술로는 이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딱 100년 뒤에 중력파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이는 21세기 물리학 분야 최고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밝혀지겠지만, 우주에 대한 신비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3.4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세상을 이루는 입자들 중 보즈 입자들의 분포에 관한 함수식이다. 물리학자 보즈는 광자의 분포에 대해서 통계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아인슈타인이 보손 전체로 일반화시켰다. 통계역학 참조.
맥스웰-볼츠만 통계는 고전적인 '근사식'이 되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는 페르미-디랙 통계와 함께 현대 통계역학의 기본 개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3.5 아인슈타인 고체 모델
고체의 열용량은 상온 근처에서는 크게 변하지 않지만, 극저온에서는 온도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변한다. 아인슈타인은 고체 원자들이 Phonon(간단히 말하면 용수철과 같다.)으로 연결된 조화진동자(Harmonic Oscillator)로 되어 있다는 간단한 착상으로 통계역학적인 방법으로 고체의 열용량에 대한 일반식을 유도해냈다. 이 식은 간단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실제 고체의 열용량 거동과 거의 일치한다. 후에 Debye에 의해 양자역학적으로 수정되면서 고체의 열용량을 매우 정교하게 계산해낼 수 있게 된다.[29]
3.6 EPR 역설
Einstein과 Podolsky, Rosen 이렇게 세사람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 붙여진 양자역학의 역설이다. 다만 실제로 포돌스키와 로젠이 각각 사고실험을 하고 논문을 쓴 것과 달리 아인슈타인은 이름값으로 숟가락만 얹었다고 전해진다.
양자얽힘에 관한 역설을 말하고 있는데 다들 한번씩 비문학 지문에서 읽어봤음직한 내용일 것이다. 얽혀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의 상호작용이 즉시 전달되는가 아니면 상대론에 따라 빛보다 느리게 전달되는가를 말하고 있다. 국소성의 원리에 대한 문제로,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태양이 사라져도 곧바로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양자적인 규모에서도 어떤 현상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한다.
양자역학을 싫어했던 아인슈타인이 보어를 까기 위해서 만든 역설이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소수의 물리학자들은 양자계의 상태에 대한 서술이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을 인정하지 못했다. 양자적인 규모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확률적이며, 심지어는 관측이 거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코펜하겐 해석은 라플라스의 악마로 대표되던 고전적인 세계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도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이야기.
상대론의 확실함을 알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를 통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확률적인 코펜하겐 해석 대신에 국소성의 원리에 맞는 숨은 변수 이론을 주장했다.
다만 존 벨(John Bell)이 벨의 부등식을 발견했는데, 이는 어떤 형태로던 국소적 숨은 변수가 존재한다면 그 이론이 반드시 만족해야 할 부등식이다. 만약 이 부등식이 참이라면 양자역학은 완전히 틀린 이론이 된다. 실험 결과 벨의 부등식은 거짓으로 밝혀졌고, 물리학자들은 국소적 숨은 변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들 중 한 사례.
3.7 통일장 이론
아인슈타인에게는 꿈으로 남은 이론. 말년에 이 이론으로 씨름했는데, 동료들에게도 무시당하고 결국 완성을 시키지 못 한 채 작고하게 된다.[30]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유산은 남아 자연계의 기본힘을 모두 통일하여 설명하는 통일장 이론의 꿈은 후대 물리학자들인 와인버그와 살람의 표준모형과 같은 명맥을 만들기에 이른다. 혹자는 아인슈타인이 조금만 더 살았다면 통일장 이론을 완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를 종종 하기도 한다.
다만 많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남긴 통일장 이론에 대한 수식들만큼은 혹평에 가까운 수준으로 평가절하했다.(...) 오죽하면 어떤누구?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을 만나러 왔다가 통일장 이론에 관련해 아인슈타인이 써놓은 수식들을 보고 "아인슈타인 면전에다 이게 쓰레기라고 할 수도 없고...그렇다고 이걸 봤는데 또 양심적으로 쓰레기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라며 고민하다가 그냥 도망나오기도 했다고.(...) 다른 물리학자들은 통일장 이론 때문에 아인슈타인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때문에 다른 물리학자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아, 말년에 아인슈타인이 고립된 원인이기도 했다.
3.8 우주 상수
1917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파생된 중력방정식을 우주 전체에 적용시켜 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문제가 생겼다. 우주에 균일하게 퍼져 있는 은하들의 중력이 우주 공간 전체를 휘게 만들었다. 여기에 따르면 우주는 끝이 없지만 크기는 유한한 '닫힌 우주'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닫힌 우주는 자체적으로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체 중력으로 은하들이 한 점으로 뭉쳐 빅 크런치[31]가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중력방정식에 우주상수라는 추가항을 포함시켰다.[32]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에드윈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은하들이 한 지점에 멈춰 있다고 생각되어 왔던 우주의 패러다임이 한꺼번에 뒤집히자 아인슈타인도 더 이상 우주 상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앞서 말했던 우주 붕괴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 아인슈타인은 곧장 우주상수를 폐기하면서 팽창우주론의 손을 들어줬다. 만든 사람에게도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는 우주 상수를 방정식에 집어넣은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한 말인지 확실하진 않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죽은 뒤 한참 후인 현대에 들어와 우주상수는 엉뚱하게도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우주의 팽창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것. 우주상수는 이제 우주를 유지시키던 힘에서 더 빨리 팽창시키는 힘, 즉 암흑 에너지로 변모하여 현대 우주론에 돌아왔다. 물론 암흑 에너지가 무엇인지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상수의 형태를 취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가장 간단한 형태이기 때문에 사용되고 있다.
3.9 반핵운동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것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맨해튼 계획을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에 후회하며.
세계 최초로 핵무기 반대운동을 시작한 인물들 중 하나.
아인슈타인은 1939년 8월에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던 핵무기 연구에 위험성을 느꼈다. 여기엔 여러가지 요인이 겹치는데,
- 엔리코 페르미와 실라드 등이 아인슈타인에게 독일의 핵무기 연구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그를 설득했다.
- 또한 나치 독일에서는 체코 등지에 우라늄의 판매를 중단시켰다.
- 과학계에서는 독일의 과학자(나치 소속 과학자라는 의미가 절대 아님)인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을 쪼개는 데 성공했다.
당시엔 '우라늄을 쪼갤 수 없다'는 반응이 대세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큰 원자핵에 작은 방사능을 쏘니까 못 쪼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이 쪼개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 쪼개지는 과정에서 원자량의 일부가 에너지로 변환되는데, 그가 고안한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 에너지가 다이너마이트 수백~천 톤의 폭발량 급으로 전환된다. 원자폭탄 이야기에 아인슈타인이 거론되는 이야기가 이 때문.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당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보유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할 것을 권유하는 실라르드의 서한에 서명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 헌데 얼마 못 가 독일에서 핵무기 연구를 어이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거나 무산되는 등 삽질이 이어지자 아인슈타인은 "이럴거면 그냥 관둬도 되겠습니다"라는 식의 편지를 다시 보냈다. 그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그는 당시 서한에 서명한 것을 평생 후회하며 핵무기 폐지를 위해 남은 일생을 바쳤다. 특히 1955년 영국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과 대대적인 핵군축과 평화를 촉구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이 계기가 되어 전세계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군축과 세계평화를 논의하는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33][34]
참고로 아인슈타인이 반전운동을 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고 버트런드 러셀은 "아인슈타인이 이해하지 못할 얘기할 때는 그를 현명하다고 하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지혜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한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비슷한 말로 빈민을 도우면 성인이라 칭송받지만, 그 사람이 왜 빈민이 되는가에 대한 사회구조를 말하면 빨갱이로 몰린다는 소리가 있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투하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핵개발에 후회하고 반대했다는 점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동정하거나 편드는 와패니즈가 되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는데, 아인슈타인 박사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다.[35] 원래 아인슈타인은 독일, 일본의 전쟁 범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핵개발 서한에 찬성한 것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핵개발을 반대하게 된 것은 정말로 개쌍놈들인 일본 지도층들은 안 죽고 무고한 민간인들만 잔인하게 죽은 것[36] 때문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부 저서에서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핵개발 과학자들이 일빠가 되었다는 등의 잘못된 정보가 실려있기도 하다지만 머 실제로 일본문화 같은 것에 심취했다고 한들 군국주의를 옹호한 것도 아닌데 딱히 문제될 건 없다. 오히려 아인슈타인의 언행을 보면 알 수 있듯 전체주의를 혐오하면 혐오했지 옹호할 이유가 없다.
참고로 당시 일본의 어느 반핵운동가가 말년의 아인슈타인에게 핵개발의 책임을 따지는 편지를 보내 고뇌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 나중에 NHK 다큐멘터리 팀이 아인슈타인 등신대 인형(...)[37]과 함께 늙어버린 그 운동가를 찾아갔더니 인형을 보자마자 "내가 그 때 너무 심한 짓을 한 것 같다"며 엉엉 울었다고.(...)
냉전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인 1949년 Liberal Judaism의 알프레드 배너(Alfred Werner) 기자가 제3차 세계대전에 사용될 무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I know not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저는 세계3차대전 때 뭘로 싸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계4차대전 때 나뭇가지와 돌맹이로 싸울 것이란건 알 것 같군요.[38]
출처 Liberal Judaism 16호 기사 중
4 트리비아
물리학자치곤 수학이 꽤나 약해 주변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야했다거나, 그가 초기에 내놓은 이론에 나오는 공식 계산은 전부 아내인 밀레바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술했듯 그녀와 아인슈타인은 같은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이 때문인지 광양자 이론은 둘이 공동연구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스위스 베른 소재 아인슈타인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는 아인슈타인이 그녀의 공적을 훔친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는 사실이 소개되어 있으나, 초기 논문의 아인슈타인-마리치는 공동저자를 표시한게 아니라 스위스의 관습적인 서명방식(아내의 성을 뒤에 붙임)을 사용한 것이다는 등 반론도 많다. 여튼 이후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은 후 그 상금을 이혼한 밀레바에게 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물리학자치고는 수학의 최신 분야를 못했다는거지, 이미 중학교 때 미적분학 교재 풀던 사람이었다.(...) 이 부분은 2015년 5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거기다 '수학 및 물리학의 교사 과정'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학사학위를 받았으니 수학교육과 전공자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39] 대학교 시절엔 미적분학은 물론 대수학, 편미분방정식 등 10여개의 수학 과목을 수강하기도 하였다.
상대론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그는 중력으로 휘어진 공간을 표현하지 못해 친구 수학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는 소위 말하는 비(非)유클리드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 중반 베른하르트 리만이 제창하고 난 후 19세기 말에나 가야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졌고, 중력을 기술하는 데 필수적인 미분기하학과 텐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1900년 전후로,[40] 당시만 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일반상대론을 설명하기 위해 쓴 논문에는 기하학에 익숙하지 않은 물리학자들을 위해 미분기하학을 설명하는데 전체의 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엔 정립이 되는데 당시 수학으론 잘 표현하지 못한게 아니였을까란 소리도 있다
참고로 상대성 이론도 수학은 부인 밀레바의 도움을 받은거 아니냐는 설이 있는데, 이건 가능성이 낮다. 광양자 이론 이후 아인슈타인은 그녀보다는 다른 동료들에게서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을 내놓을 즈음엔 밀레바는 그의 연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실, 밀레바는 졸업 시험의 수학 과목을 통과하지 못해서 졸업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일화에 대해서는 Abraham Pais가 쓴 Einstein Lived Here(Oxford University Press, 1994)를 참고하기 바란다. 국내에도 번역서가 출판되었으나 역자가 비전공자인 관계로 과학 용어가 오역된 것이 많으니 주의할 것.
상술했듯 그의 대학시절 수학 교수였던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수업을 자주 빼먹던 아인슈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게으른 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진심으로 싫어했던 건 아닌지 특수상대론에도 기여를 했고 일반상대론의 수학 파트는 민코프스키가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 수학공밀레의 한 축에 스승도 포함시킨 아인슈타인
양말의 효용성 낮음에 대해 불평하였는데,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발톱을 깎지 않아서 양말에 구멍이 자주 나서로 추측된다.
사랑의 방정식을 만든 적이 있다.
'뇌에 전화번호를 넣을 바에야 다른 지식을 넣는게 낫다'며 자신의 전화번호도 적어두고 평생 기억하지 않는 일화도 있다. 전화번호 가르쳐 달라고 할 때마다 일일이 수첩을 뒤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노년엔 자기 집 주소를 잊어버려서 비서격인 사람에게 주소 가르쳐달라고 전화를 했다는 말도 있다.
여동생인 마야가 말하기를 마야가 태어났을 때 함께 놀 수 있는 동생이 태어났다는 말을 두 살 때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동생을 처음 보았을 때 바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팽이로 동생의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 마야 曰 "천재 오빠를 둔 동생의 두개골은 단단해야 해요."
한 번은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고 인기가 높아지게 되자 큰 강당 같은 곳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한 달 동안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는 아인슈타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분장을 하게 한 다음 "어차피 저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말이 뭔 뜻인지 모를거니까 나보다 말재주 좋은 네가 강의해라"고 했고 운전기사가 강의를 대신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강의를 진행하다가 물리학 전공자가 질문을 걸어오면 "이건 내 운전기사도 풀 수 있는 문제다."면서 운전기사 복장을 하고 있던 진짜 아인슈타인을 불러내 문제를 풀게 했다고(...) 다른 판본에서는 운전기사가 강연회에 함께 참석하다 보니 강의 내용을 잘 외우고 있어서 가능했다는 설도 있다. 물리학자 운전수 3년이면 상대성 이론을 읊는다
예술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모차르트의 곡을 선호했다고 한다. 평소의 취미 활동도 바이올린 연주와 요트를 타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곡들을 쾨헬 번호로 정리한 사람이 그의 6촌 지간인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이다.
한날은 외출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서 코트 안에 감추고 모자가 비에 젖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웃사람이 그것을 보고 비오는데 왜 모자를 벗어서 머리까지 젖게 만드냐고 하자 "머리를 감는게 모자를 세탁하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다"라고 답했다고. 왜 수긍이 되지 탈모는?
자기 집의 식탁보로 머플러를 짰다면서 이웃집에 전화를 걸어서 자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천재는 곧 괴짜라는 편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래도 실제로는 이웃 초등학생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면서 소일거리를 하는 자상한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본격 아인슈타인에게 과외받는 초등학생 하지만, 정작 그 초등학생은 아인슈타인을 저명한 물리학자가 아닌 그냥 친절한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였다.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위인들 중에 "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였어?" 하는 반응이 나오는 두 사람이 헬렌 켈러와 아인슈타인이다. 1949년 미국의 사회주의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창간호에 유명한 글 "왜 사회주의인가?"를 기고한 적이 있다. 영어 전문, 번역문. 또 민족주의를 강하게 혐오했다. 아마도, 나치 독일 시대를 보냈던 그는 전체주의적인 사상에 극도의 거부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둑을 둘 줄 알았다고 한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일할 때 어떤 일본인에게서 배웠다고 하는데, 일본기원에서 아인슈타인의 초단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4.1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
양자역학의 한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면서도 결정론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확률로 이해하는 양자역학에 대한 깊은 반감이 있었다. 때문에 1935년엔 이른바 EPR 역설을 꺼내서 양자역학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털렸다.
단,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반기를 든 것은 양자역학이 결정론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론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관측자에 의존하기 때문에 객관적 물리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실재론을 부정했다고 생각했다.먼소리야 객관적 실재라는 개념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양자역학에 숨은 변수(hidden variable)가 있어야 직관적이고 완전한 이론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도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정확하겐 이 내용은 아인슈타인이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처음 등장한다.
양자역학은 정말로 인상적이다. 하지만 나의 내면의 목소리는 내게 이것이 아직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론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만 옛 존재(Old One)의 비밀을 밝혀주지는 않는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신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Quantum mechanics is certainly imposing. But an inner voice tells me that it is not yet the real thing. The theory says a lot, but does not really bring us any closer to the secret of the Old One. I, at any rate, am convinced that He does not throw dice.
이후 자신이 쓴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많이 언급하고 다녔고, 때문에 이 표현이 유명해진다. 덕분인지 주사위 항목이 이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이에 대해 그의 동료 닐스 보어는
"신이 주사위 가지고 뭘 하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Stop telling God what to do with his dice.
라고 말했다.[41]
뒷날 스티븐 호킹은 저기에 덧붙여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블랙홀을 생각해 보면 신이 주사위를 던질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가 가끔 우리를 혼동시키기 위해 주사위를 안 보이는 곳으로 던지는지도 모른다.So Einstein was wrong when he said "God does not play dice". Consideration of black holes suggests, not only that God does play dice, but that He sometimes confuses us by throwing them where they can't be seen."
라고 말했다.[42]
5 어록
※ 출처 : 위키쿼니트
신은 난해하지만, 심술궂진 않다. (Raffiniert ist der Herrgott, aber boshaft ist er nicht.)
-1921년 4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내 상대성 이론이 성공적으로 증명된다면, 독일은 내가 독일인이라고, 프랑스는 내가 전세계의 시민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내 이론이 틀렸다고 증명된다면, 프랑스는 내가 독일인이라고, 독일은 내가 유대인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1922년 4월 6일, 소르본 대학에 보낸 편지에서. 참고로 아인슈타인은 독일군으로부터 도망쳐서 미국으로 망명한 상황임을 기억하자.
Viereck: "당신은 자신을 독일인과 유대인 중 어느쪽으로 보십니까?(Do you look upon yourself as a German or as a Jew?)"Einstein: "그것은 어느쪽이건 정답입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사람'으로서 보고 있으니까요. 확실한 것은 민족주의는 소아병과도 같으며, 인류의 홍역이라는 것입니다.(It is quite possible, to be both. I look upon myself as a man. Nationalism is an infantile disease. It is the measles of mankind.)"
-Saturday Evening Post of October 1929 by George Sylvester Viereck.
삶은 자전거타기와 같단다.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하거든.
-1930년 2월 5일, 아들 에두아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항상 평범한 지성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이 평범한 지성은 상투적인 편견에 맹목적으로 굴복하길 거부하고 대신 씩씩하고 정직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사람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못 됩니다.
-1940년 3월 19일, 뉴욕 시티 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인 모리스 라파엘 코헨에게 버트런드 러셀의 강사직 임명을 변호하며.
종교 없는 과학은 불완전하며, 과학 없는 종교은 맹목적이다.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43]
독일군이 원자폭탄 제작에 실패했다는 걸 알았다면, 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겁니다.
-1947년(?) 3월 10일,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자무기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하지만 너무 늦었다.
누구든지 자신이 진실과 지식의 심판자라고 가장하기 위해 기도하는 자는 신들의 웃음소리에 파멸했다.
-1953년에 출판된 "레오 벡 평전(Essay to Leo Baeck)"에서.
신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있어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며 성경은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리석은 것.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인다 해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1954년 1월 3일, 철학자 에릭 구트킨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하는 가장 미련한 짓이 아니라, 마치 중력처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44]
-1979년에 출판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인간의 측면(Albert Einstein: The Human Side)"에서.
(전략) 하지만 삶의 일상생활에서 예정되어 있던 순서가 방해받았을 때,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잊어버리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초라한 널빤지에 올라탄 조난자들처럼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보다 쉬워지고 더 이상 실망할 게 없다.
-1979년에 출판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인간의 측면(Albert Einstein: The Human Side)"에서.
나는 세계 3차대전에 무슨 무기가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4차대전에서 나뭇가지와 돌로 싸울 것이라는건 알 것 같다.
-1949년 알프레드 웨이너와의 인터뷰에서.[45]
나는 기술이 우리 인간의 소통을 넘어설 그 날이 두렵다. ... 세상은 바보들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I fear the day that technology will surpass our human interaction."..."The world will have a generation of idiots."
평화는 힘에 의해 유지될수 없다. 오직 이해로써 성취될수 있다.
"Peace cannot be kept by force. It can only be achieved by understanding."
세상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악한 자들을 다만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The world will not be destroyed by those who do evil, but by those who watch them without doing anything."
난 상대성 이론은 이해하겠어도 세금은 이해 안 된다.
꿀벌이 떼로 죽는 벌집붕괴증후군(Colony Collapse Disorder)이 번지자 흔히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도 멸종한다 (또는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을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설이 인터넷 등에 떠돌지만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어떤 어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전설 검증 싸이트인 Snope 에서도 거짓으로 판정.
6 문화
- ↑ 전해지는 바로는 아인슈타인이 이 사진은 반드시 유명해질 거라면서 일부러 저런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뭔가 괴짜 같은 과학자의 인상을 잘 표현한 사진이랄까. 후일 NHK스페셜 '아인슈타인의 세계' 제작팀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원래는 자동차 뒷좌석에 남자 세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아인슈타인 부분만 트리밍한 것이라고 한다. 모 행사를 마친 후 찌푸린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 아인슈타인을 보고 신문기자가 "아인슈타인 박사님, 포즈라도 취해 주십시오!" 하니까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이라고.
- ↑ 이 사진에 대해 학교대사전은 "천재들은 왜 일찍 죽을까? 안 죽고 오래 살면 노인 때 이런 사진이 남기 때문이리라"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예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 ↑ '아인'과 '슈타인'으로 나눠 해석하면 '돌 하나'라는 뜻이지만, 독일어 ein은 영어의 하나(one) 또는 부정관사(a/an) 중의적 의미가 있다. stein은 stone이라는 뜻. 따라서 einstein은 one stone(돌 하나)라기보다는, a stone 즉 '돌'이라는 뜻. 근데 독어는 애매하지만 영어로 따져보면 부정관사 'a'는 단수에 붙기 때문에 돌 하나란 뜻도 맞는다.
- ↑ 성씨항목에서도 보이듯 유럽 성씨중에는 조상의 직업이 많다. 즉 적절히 의역하면 그냥 석공.
프리메이슨? - ↑ 사망 당시에는 스위스와 미국의 국적을 동시에 가진 이중국적자였다.
- ↑ 허나 아인슈타인 본인은 후술된 어록에 나온 말처럼 이런 구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인슈타인은 민족주의를 혐오한 탈민족주의 혹은 반민족주의자였다.
- ↑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으면 Abraham Pais가 쓴 Subtle is the Lord를 참고.
- ↑ 사람들이 흔히 아인슈타인도 어렸을 때는 공부를 못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토마스 에디슨이고 아인슈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끼가 있었다.
- ↑ 현재 독일은 과거의 이런 주입식 교육이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여 전쟁이 끝난 후 대대적인 교육 개편을 진행한다.
- ↑ 아인슈타인의 여동생 마야는 그 교수의 아들 폴 빈텔러와 결혼했다.
- ↑ 아인슈타인이 다닌 스위스 학교인 아르가우 칸톤이 이전 학기는 등급제로 수학, 물리학을 등급제로 표기하여 1로 적었으나 다음 학기부터 점수제로 표기하여 6을 적어 생긴 오해이다. 당시 독일이 등급제였기 때문에 그의 성적을 본 이들이 그가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낙제점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오해 때문에 주로 부모나 선생님이 '아인슈타인 알지? 위대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도 수학과 물리를 엄청 못했는데 죽어라 노력해서 위대해진거야. 그러니까 너도 죽어라 노력하면 안될게 없어!!' 등의 논리를 내세우곤 한다.
하지만 낙제한게 아니라고 반박할 시 꿀밤을 맞을지도 모르니 그냥 끄덕끄덕하자. - ↑ 낙제한 것은 대입 시험시의 수학과 물리학 외의 지리, 프랑스어 등의 과목에서와 대학시절 장 페르네의 '기초물리학실험' 수업에 자주 출석을 하지 않아 화난 교수가 1점을 부여하여 그 수업에 낙제한 것이 다이다.
- ↑ 아버지가 정부 고관이었다.
- ↑ 결혼 초기는 아니고, 관계가 나빠진 후에 보낸 메모라고 한다.
- ↑ 엘자는 1876년생이므로 친척 누나이다. 아인슈타인 아버지 사촌의 딸이자, 아인슈타인 어머니 언니의 딸이다. 따라서 이종사촌 누나 겸 6촌 누나가 된다.
- ↑ 밀레바는 위인들의 그늘에 묻혀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잃은 대표적 케이스로 꼽히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의 첫 노벨상 수상 논문인 광양자이론은 밀레바와 공동으로 연구한 논문이었다"라는 주장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반론도 있다. (영문판 위키페디아, "Mileva Maric"항목 참조).
- ↑ 출처.
- ↑ 뇌 크기와 지능이 아주 비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와 호모 사피엔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은 한 그렇게까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 ↑ 일반인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한국에서도 국립서울과학관에서 열린 인체의 신비전을 통해 일부가 전시된 바 있다.
- ↑ 허나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선 오펜하이머 등과 함께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핵폭탄 제작자로 대문짝, 아니 건물 2층 높이만한 사진으로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일본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큐슈 지방에 여행 및 수학여행을 오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이나 원폭으로 인한 피해를 전시해놓고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양 서술해놨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팩트전달이 아닐 수 없다.
- ↑ 다만 아인슈타인이 핵을 개발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당장에 핵무기는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무기이기 때문.
- ↑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에 대한 논문도 이 때 발표한다. 뭐 일반인들은 E=mc2 = 상대성 이론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도 꽤 있지만...
- ↑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맡은 업무는 전자기현상을 이용한 기기에 대한 것으로, 주로 전자기학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사고 실험을 했다고 한다.
- ↑ 변리사가 하는 일이 바로 특허출원할 설계도 검토하면서 이게 특허 출원이 가능한 건지 아닌지 판정하고 특허출원이 된다면 도와주는 일이다. 다만, 특허청소속 공무원(한국으로 치면 국가직공무원에 합격하면 특허청에 들어간다)과 변리사는 엄연히 다르다. 아인슈타인이 맡은 업무는 당연히 전자에 가깝다. 예전에는 특허청공무원은 일정기간 이상 일하면 변리사 자격증이 주어졌다.
- ↑ 참고로 이 현상은 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 ↑ 그래서 대학원을 경제학으로 가기 위해 노리고 수학과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편이다.
- ↑ 1919년 이혼소송 당시 만일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을 자녀 양육비로 첫 번째 부인 밀레바 아인슈타인에게 주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상금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미리 수상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극동 여행을 떠나 있어서 수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 ↑ GPS의 원리상, GPS에 탑재된 원자시계는 지상의 수신기에 있는 시계와 동기화되어야 하는데, 위성과 지상의 중력 차이와 위성과 지상의 속도 차이로 인해 두 시간은 지속적으로 어긋나게 되어 있다.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이를 보정하지 않으면 GPS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오차가 생긴다.
- ↑ 통계물리나 열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게 얼마나 간단한 착상과 쉬운 계산으로 되어있으면서 실제와 거의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지 알고 있을것이다.
- ↑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고등연구소에서 매주 화요일날 하는 무도회에 나가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 ↑ 물론 이 당시는 빅뱅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한참 전이라 이런 용어는 없었다.
- ↑ 말하자면 은하들 사이에 존재하는 만유인력에 반발하는 만유척력을 고의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 ↑ 1회 회의는 1957년 7월 캐나다 퍼그워시에 10개국 22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방사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였고, 매년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계속되고 있다. 과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핵과 각종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안전책을 요구하고 있다. 따로 사무국은 없으며 개인참가형식이고 199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 2004년 한국에서도 개최되었다. 당시 60개국에서 모인 저명한 과학자 200여명이 참가했지만 언론의 무관심으로 그냥 묻혔다. 심지어 북에서도 사람이 왔는데...명색이 노벨상까지 수상한 단체의 행사인데, 노벨상이라면 환장하는(...) 대형 언론들이 지나가는 식으로 짦게 보도하고 넘어갔다.
- ↑ 이런 식으로 오해받는 사람 중 대표적인 과학자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다. 항목 참조.
- ↑ 일본 제국을 이끌고 한국 등을 식민지로 만든 건 일본 지도층들이었다. 물론 일반 일본 시민들이 한국인들을 차별했다는 등의 이유 때문에 일반 일본인들까지 죽어도 싸다는 의견도 있지만, 한국도 극우주의자부터 진보주의자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듯 일본인들도 마찬가진데 싸잡아 죽어라는 소릴 하는 사람은 딴 이유 필요없고 걍 유대인이니 죽으라고 한 나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 ↑ 이 인형은 다큐멘터리 시리즈 내내 등장한다.
- ↑ 3차세계대전에서 문명은 다 망할 테니 4차대전은 석기 시대로 돌아가 저런 걸로 싸우게 된다는 의미.(...)
- ↑ 시험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가령, 부인 밀레바의 경우 끝내 졸업시험에서 떨어져 학위를 받지 못했다.
- ↑ 지금은 미분기하학은 수학과 3학년에서 배운다
- ↑ 보어와 아인슈타인 모두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차원에서의 신을 지칭하는 건 아니고 과학법칙을 주관하는 선에서 설계자로서의 신이라고 보면 적절하다. 즉, "과학법칙이 이렇게 생겨먹었고 실험적으로도 증명했으니, 우리 우주가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정도로 이해하면 쉽다. 과학자들이 신이라는 단어를 쓸 수 밖에 없을 정도(물론,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로 양자역학의 탄생은 당시 과학자들의 결정론적 세계관의 충격을 주었다.
- ↑ 호킹은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았으나, 다른 생명체와는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과 과학 법칙의 특수성(빛의 속도나 중력상수와 같은 고유값을 지닌 과학상수와 과학법칙이 보여주는 형태의 특별함은 과학이란 수단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 신이 모 종교의 유일신을 콕 꼬집어 말하는건 아니다. - ↑ 이전의 주석에는 종교라는 단어가 아닌 신앙심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오역을 했으나, 아인슈타인은 분명히 종교(religion)라는 단어를 썼다. 과학연구를 위한 열망이나 열정이라는 단어를 단지 비유적인 표현을 위해 신앙심으로 쓴 것 아니겠느냐는 주관적 추측과 해석은 자제하길 바란다.
그리고 신앙심은 영어로 faith나 belif인데 이 양반이 바보가 아닌 이상(...)천잰데?아인슈타인의 종교적 관점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있어왔는데, 대체로 특정 종교의 신이나 인격적인 형태의 신을 믿지는 않지만, 범신론이나 다신론 혹은 영적인 비종교인(religious non-believer)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신에 대한 관점에 대해 최소한의 여지를 남긴 셈. 무신론자는 "절대" 아니다. 아인슈타인 본인도 우리 우주에서 보여주는 과학법칙의 특수성(중력 상수, 빛의 속도와 같은 절대 변하지 않는 과학상수들의 고유한 값이나 과학법칙 그 자체의 형태 등)을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한 다는 사실에 불편해했고, 양자역학의 출현과 우주 공간의 팽창 등 아인슈타인이 말 그대로 "신봉"했던 뉴턴식 기계론적, 정적 우주관이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시기를 몸소 체험하며 과학법칙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여러 성찰 끝에 신의 존재에 대해 애증 혹은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는 관점을 취했다.그치만 성경 정말 싫어했던 건 덤(...)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 자신들의 성경을 틀렸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게 틀렸다 생각해서 싫어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러셀조차도 자신이 신조로 삼은 구절이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라고 밝혔으니 - ↑ 다른 표현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중력을 비난할 수 없다."가 있다.
낭만과학자 - ↑ 3차세계대전에서 문명은 다 망할테니 4차대전은 석기시대로 돌아가 저런 걸로 싸우게 된다는 의미.(...) 유명한 어록인만큼 변형이 많다.
의미는 비슷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