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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9년 2월 18일 육군 제28보병사단에서 대대장이 사단장을 M1911 권총으로 살해한, 당시 창군 이래 최악의 불상사이자 1959년 국내 10대 뉴스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세간을 크게 뒤흔든 사건이었다. 한국군 내 프래깅의 대표적 사례.
2 피해자와 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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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서정철 준장은 1921년 경남 통영 출신으로 이승만 정권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서상환이 그의 조부이다.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징병된 적이 있으며 해방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 육군사관학교를 2기로 졸업한 뒤 제3보병사단 부사단장, 육군기갑학교 교장, 육군본부 작전과장 등을 거쳐 미국 참모대학 유학 후 1956년 28사단장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괄괄하여 부하들의 정강이를 군화발로 찬다든가 철모 쓴 머리를 지휘봉으로 내려치는 등 다소 격하게 대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식 이하로 부하들을 학대하는 일은 드물었으며, 머리가 좋고 특히 영어에 능통한 면이 있어 평소 부하들에게 "현대 장교들은 운전, 영어, 타자에 능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사단의 장교들을 테스트 한 적도 있는 이지적인 면모도 갖춘 장군이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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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인 서정철 준장을 살해한 6297부대 1대대 대대장이던 정구헌 중령은 1925년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육사 8기생으로 군문에 들어선뒤 미국 보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장래 유망한 장교였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사생활은 깨끗한 편인 정의감 넘치는 수재형 인간이었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하여 자신의 생각과 배치되거나 부족하다고 보는 의견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깔아뭉개거나 얕보는 일이 잦아서 교우관계가 그리 원만치 않았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이 사건도 어찌보면 정 중령의 지나치게 높은 자부심이 빚어낸 참사였다고 볼 수 있다.
3 사건 개요
당시 미군 1군단(군단장 투르도 중장) 에서 작전 배속된 28사단에 전투정찰대 운영 시범훈련을 실시하라는 명령이 제6군단(군단장 백인엽[2] 중장) 으로 내려왔고, 백 군단장에게 지시를 받은 서정철 준장은 시범훈련 부대로 6297부대 1대대를 지정하여 1959년 2월 19일부터 대대수색 정찰 시범을 실시하기로 하고 강도높은 훈련으로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 준장은 시범 전날인 18일 시범 준비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당일 오후 2시경 1대대에 도착하였는데, 그 때 1대대는 주둔지 뒷산에서 분대 단위로 시범훈련 중이었다.
이를 본 서 준장은 대대장 정구헌 중령에게 화력증강 차원에서 소대 단위로 훈련형태를 바꾸라고 지시했는데, 정 중령은 아래의 이유를 들면서 무엄하게도 사단장의 지시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3]
- 지형정찰을 새로 해야되고
- 날도 어두워지는데 내일까지 바꿔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며
- 화력증강은 위력정찰이지 수색정찰은 아니잖느냐
이에 발끈한 서 준장은 "내가 너한테 정찰훈련 교육 받으러 온 줄 아느냐?" 라면서 지휘봉으로 정 중령의 복부를 서너번 쿡쿡 찔렀는데 평소 사단장의 엄격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데다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사단장의 끊임없는 닦달, 게다가 며칠째 밤낮이 없는 훈련에 지칠대로 지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정 중령은 참지 못하고 사단장 앞에서 허리에 양손을 올리는 불손한 자세로 "이건 너무 심한거 아니냐" 며 대놓고 항의하였다. 대대장의 말대꾸에 격분한 서 준장은 장갑낀 손으로 정 중령의 얼굴을 가격하였고, 그 바람에 안경이 깨진 정 중령은 "각하[4], 고정하십시오" 라면서 서 준장을 만류하려 했다.
뚜껑이 열린 서 준장은 "너 이 자식, 잔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내려가!" 라며 정 중령에게 소리를 질렀고, 옆에 있던 연대장 송광보 대령이 서 준장을 말리며 대대장실로 데리고 내려왔는데, 이 때가 오후 6시 경이었다. 내려오던 도중 정 중령은 사단장이 권총을 장전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고, '혹시 사단장이 나를 쏴버리려는건 아닌가?' 라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
대대장실에 들어온 서 준장은 노기를 풀지 못하고 뒤따라 들어온 정 중령을 향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뒷문으로 나가라!"고 고함을 쳤다. 뒷걸음질로 대대장실 뒷문으로 나온 정 중령은 자신의 45구경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고, 권총 장전소리를 듣지못한 서 준장이 뒷문으로 따라 성큼성큼 걸어나오자 정 중령은 '드디어 나를 쏘려는구나' 라고 오인하여 3m 앞에 있던 서 준장을 향해 세 발을 발사하였다. 총탄에 맞고 쓰러진 서 준장에게 정 중령은 나머지 네 발을 모두 명중시켰고 서 준장은 그 자리에서 비명도 못지르고 즉사하였다. 이 때 서 준장의 나이는 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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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에 보도된 사건 상황도
3.1 사건의 이면에는...
당시 한국군은 만성적인 하사관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6.25 전쟁 직후 하사관에 대한 처우도 불량했고, 거기다 위로는 장교들에게 밟히고 밑으로는 사병들에게 치받히는 샌드위치 신세인 하사관 장기복무를 아무도 지망하려 들지 않던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강제로 하사관에 지원하게 된 병사가 총기를 들고 중대장실이나 대대장실에 쳐들어가 "하사관 지망을 취소하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 라며 깽판을 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쯤 되니 각 부대별로 부대장은 물론 예하 장교들에게까지 어떻게든 하사관 자원들을 확보하라는 지상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이에 대부분의 부대 간부들은 온갖 회유와 협박, 심지어 가정방문(...)까지 서슴지 않으며 하사관 지원을 받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이거 뭐 다단계도 아니고.. 6군단 산하의 28사단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대장이던 정구헌 중령은 "내가 옷을 벗고 말지,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사관을 시켜?!" 라면서 상부의 하사관 자원 확보 명령을 거부했고, 당연히 정 중령의 1대대 하사관 지원율은 사단 최하위였다. 이 때문에 사단장 서정철 준장이 6군단장에게 적지않게 힐난을 당했고, 모든 면에서 1등을 달리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던 서 준장으로선 정 중령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는 없었다. 이러한 갈등도 사건 발생에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범인인 정 중령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하사관 차출을 강요했다는 사실이 문제화될 것을 꺼려했던 백인엽 6군단장이 아예 사단장 살해 사건 자체를 혈기 넘치는 대대장의 또라이짓으로 축소시켜 버렸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덧붙이자면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군인으로서는 정직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 정 중령은 하사관 차출명령 거부 말고도 부사단장의 쌀 상납 요구를 거절한 경력이 있는 꼿꼿한 군인이고, 서 준장 또한 사단장으로 재직하며 사병들에 대해 정량 급식을 이행하지 않은 장교들은 엄벌에 처했던 당시로선 보기 드문 강직한 장군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 군대 현실을 보면 그저 안타까운 사고로 보인다. 올곧은 사람들만 죽어나가고, 남은 자리엔...
4 사건의 결과
정 중령은 범행 직후 곧바로 특무대에 자수하여 체포되었고, 사건 현장에 있던 송광보 연대장도 살인방조 혐의로 구속되었다. 군사법정에 회부된 정 중령은 "서 준장이 나를 쏘려고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애당초 서 준장의 총에는 실탄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결국 정 중령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한편, 같이 구속된 연대장 송광보 대령은 징역 4개월에 급료 전액 몰수를 선고받고 파면당했다.
정구헌 중령은 1959년 5월 20일 오후 2시경 대구 육군정보학교 야외 교정의 산골짜기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34세. 정 중령은 이날 사형수라고 하기엔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형집행을 받아들였고, 집행직전 만난 이전 부대 상관인 2군사령부 법무부장 최문기 대령 에게는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또한 입회차 형장에 몰려든 신문기자들에게도 "다들 고생이 많다" 라고 담담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군종 목사 양석봉 중령의 기도와 설교를 들은 후 아래와 같이 유언을 남기고 총살당했다.
-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 일흔 살의 노모와 처자식을 남기고 먼저 가는 것이 미안할 뿐이다.
- 앞으로 자신의 개인 목적을 위해 부하들을 구타하거나 혹사시키는 병영 내의 악습이 없어지길 빈다.
- 나는 지금까지 양심적으로 신념에 따라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깨끗이 죽는다고 생각한다.
5 뒷이야기
이 사건으로 28사단의 분위기는 바닥까지 떨어지며 흉흉해졌고, 이를 우려한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백선엽 대장은 33사단장으로 있던 이세호[5] 준장을 불러 "내 전용 헬리콥터를 줄테니 지금 28사단으로 가서 사단장으로 부임하라" 고 다짜고짜 지시를 내렸다. 상황을 잘 모르던 이 준장은 "사단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고 부임하겠다" 고 했지만 백 총장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니 당장 28사단으로 가라. 뒷일은 내가 수습한다" 고 재차 명령했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 준장은 백 총장 전용 헬리콥터로 경기도 연천군 전곡의 비행장에 내려 바로 부대로 가는 대신 근처 여관에 짐을 풀고 하룻밤 동안 마음을 가다듬으며 싸늘해진 28사단의 분위기를 어찌 수습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단장으로 부임한 이 준장은 예하부대에 "3일의 여유를 줄테니 각 부대별로 열병 및 분열식을 준비할 것" 이란 지시를 내렸다. 평소 호랑이 장군으로 소문난 이 준장이 부대를 시찰한다는 소식에 얼어있던 장교와 사병들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고 모든 부대가 3일 밤낮으로 열병, 분열훈련을 하는 동안 각 부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원상복귀될 수 있었다. 이후 이 준장은 보급품 절약 운동, 장비 애호 운동 등 계속적인 부대 내 캠페인을 벌였고 덕분에 28사단은 다시 안정과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역시 군대는 뺑뺑 굴려야 돌아간다 응?
하지만, 그 이후로도 28사단은...
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과 김동민 일병의 총기난사 사건 그리고 최근(2014년)의 윤일병 폭행사망 사건 그리고 휴가나온 사병들이 동반자살하는 등.. 더욱 악명만 높아지고 있다. 과연, 별들의 무덤.- ↑ 실례로 장군이 된 이등병으로 유명한 최갑석 장군(현지임관, 1983년 소장 전역)이 6군단 포병 대대장(소령) 시절 28사단에 배속된 일이 있는데, 사단장인 서 준장이 대대를 방문해서 최갑석 소령에게 운전할줄 아느냐고 묻자 최 소령은 관측장교(소위) 시절부터 운전을 해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서 준장은 최 소령이 운전하는 지프에 타고 포병 훈련장을 돌게 했는데 운행 내내 서 준장은 보조석에서 코까지 골며 단잠을 잤다고(...). 나중에 사단 참모회의 때 서 준장은 "최갑석 대대장은 운전을 잘 한다. 타고 가는 내내 편하게 잘 수 있을 정도였다" 라고 최 소령을 대놓고 칭찬하기도 했다.
- ↑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백선엽 대장의 동생이다.
- ↑ 아래 이유를 들때 정 중령은 서 준장에게 "사단장 각하께서 뭘 모르시고 말씀을 하신다" 라며 사단장을 무시하는듯한 언행을 보였고 이는 서 준장의 심기를 건드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 ↑ 당시에는 대통령 뿐 아니라 장군들도 각하라고 불렸다. 제독의 경우는 각하라고 불리지 않았는데, 손원일 제독이 창군 초부터 "각하라는 호칭은 대통령께만 쓰는 것"이라며 해군 내에서 제독들을 부를 때 쓰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 ↑ 후일 2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초대 3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