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tenance script (토론 | 기여) |
(차이 없음)
|
2017년 1월 21일 (토) 22:44 기준 최신판
파일:1djxKCq.png |
강일순의 생전 사진[1] |
목차
생몰년: 고종 8년(1871년) 음력 9월 19일 ~ 융희 3년(1909년) 음력 6월 24일[2]
향년 39세(만 37세)
본명은 강일순(姜一淳), 본관은 진주 강씨[3]. 호는 증산(甑山)이며 자는 사옥(士玉)이다.
증산계통 종교의 신앙대상(혹은 교조). 생전에는 조선의 4대 기인[4] 중 한 명으로 뽑힐 정도로 유명했지만, 같은 집안 어른들은 집안을 돌보지 않아 가정을 망쳤다고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
1 생애
강일순은 1871년(고종 8년), 외갓집이 있는 전라도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5]에서 강문회(姜文會) · 권양덕(權良德)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친가인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6]에서 성장하였다.
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흔히 강일순이 친가인 객망리에서 태어났다고 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초로 강일순의 삶을 기록한 경전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1926)에서는 편찬자 이상호는 강일순이 서산리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상호는 대순전경大巡典經 초판(1929)에서 객망리라고 바꾸었다. 객망리가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라고 쓴 첫 서술이 대순전경 초판이다. 이러한 자료상의 혼란으로 강일순의 삶에 대한 인터넷 글에서는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 서산리 외가/객망리 친가로 내용이 갈린다. 객망리(客望里)라는 이름이 '손님을 바란다/기다린다'라는 뜻인데, 이런 지명을 강일순과 연계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이미 예언된 인물이라고 신성화하고자, 친가에서 태어났다고 한 듯하다. 이렇게 교조의 고향 지명으로 '우리 종교 교조께선 이미 지명으로 예언된 인물'이라고 주장함은 우리나라의 신흥종교단체에서는 꽤 흔한데, 아마 이 주장을 처음 쓴 곳이 강일순 교단, 정확히는 대순전경을 쓴 이상호일일 것이다. 설령 객망리가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 맞다고 해도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신송마을 신송길32에 姜甑山上帝降世地(강증산상제강세지)란 현판을 단 가옥이 있어 증산종교인들이 이곳으로 순례하러 오곤 하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강일순이 태어났다고 지목하는 곳이 십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
(이후 강일순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나이를 언급할 때에는 한국식 나이로 통일함.)
양반인 진주 강씨의 자손이라고 하나, 강일순이 태어날 무렵에 그 집안은 사실상 농민이었다.[7] 그 집안이 가난하여 다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강일순에게 기대를 걸고 글공부를 시켰다.[8] 이후 강일순은 훈장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한학을 익혔다. 머리가 영민했다고 하지만 집안이 어려워 본가와 근처에 있는 외가를 오가며 생활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지방으로 도피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채결되었다. 조선과 서양국가간 첫 조약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84-5년 무렵, 강일순이 열네다섯 살이 되었을 즈음, 글공부를 중단하고 집에서 나와 전라도 일대를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머슴살이를 하거나, 나무를 베거나 하면서 입에 풀칠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삼 년 떠돌아다니다가 그나마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91년, 스물한 살이던 해, 강일순은 정치순(鄭治順)이라는 열여덟 살 난 여인과 결혼했다. 그런데 정씨 부인은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 요새 기준으로도 안 좋은 조건인데,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결혼하기에 큰 결점이었다. 증산계 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 권 부인이 며느릿감을 너무 까탈스럽게 고르느라 이런 저런 후보들을 다 쳐내다보니 남는 여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누구든 청혼만 하면 며느리로 삼으리라 다짐하였는데 정씨 집안에서 청혼하므로 둘을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절름발이 여자와 결혼함은 지나친 감이 있다. 아마도 실제로는 강일순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상당한 악조건을 감수하고 아내를 맞을 수밖에 없었을 공산이 크다. 강일순 부부의 결혼생활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장애 때문에 자격지심이 있었고, 더구나 강일순은 자기 집안을 살뜰히 챙기는 가장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가정생활이 파탄함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강일순은 결혼한 이후 김제에 있는 처남 정남기(鄭南基)의 집[9]에 서당을 차려놓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생활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도저히 아내를 친가로 데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집에 책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도술이나 술법에 관한 책도 많았다고 하며, 그 책을 모두 독파했다고 한다.
1894년, 스물네 살이던 해에 동학 농민 운동이 바로 고향인 고부군에서 일어났다.
강일순은 어린 시절부터 주술이나 종교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나 고부군은 전라도 동학의 중심지였으므로, 당시 조선에서 신흥종교로 이름을 떨친 동학과 틀림없이 모종의 연관을 맺었다. 하지만 강일순이 동학과 어느 정도로 관계를 맺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때 아예 동학의 신도로 입교했다는 말도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강일순이 동학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얼마간 거리를 두었음이 확실하다. 농민군이 가는 곳을 따라다니기는 하였으나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고 형세를 관망할 뿐이었다. 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때 강일순이 동학군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을 말렸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형세를 관망하면서 동학군이 결국 패배할 것임을 예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5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일본인들 손에 죽었다.
동학 농민 운동의 결과를 지켜본 뒤 강일순이 무엇을 했는지 행적이 분명하지 않다. 처남네 집으로 돌아와 다시 훈장 노릇을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동학 농민 운동의 결과를 지켜보면서 결정적으로 동학에 회의하였음은 분명하다. 강일순은 최제우가 가르친 주문으로 도통한 사람이 없다면서 결국 도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애쓴 듯하다.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그런 도술을 부리길 바랐던 것이다.
일부 경전에서는 이 해에 강일순이 어떤 노인으로부터 비서(秘書)를 받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받았다는 책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10]
1896년, 조선은 양력 1월 1일을 기점으로 양력을 도입하고 건양(建陽) 연호를 제정하였다. 고종이 아관파천하였다.
1897년, 스물일곱 살이던 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칭제건원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바꾸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이 해에 강일순은 처남네 집을 떠나 유랑여행을 시작하였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음은 분명하지만 언제 어디를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렇게 유랑하던 시기에 김일부를 만났다고 서술한다.
김일부金一夫(1826-1898)는 충청도 사람으로 본명은 김항(金恒)이며 '일부'는 호이다. 남학(南學) 쪽 전승에 따르면 김일부는 이운규(李雲圭)란 선비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 주역을 깊이 파고들어 정역(正易)이란 것을 만들고 충청도에서 교단을 창설하였다. 수정 전에는 김일부가 남학을 만든 것처럼 기술되어 있었으나, 남학의 창시자는 김광화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남학 교단에서는 이운규 밑에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도 공부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을 따른다면 최제우와 김일부는 동문 관계가 되지만, 남학 계열에서만 주장하는 바이며 역사적인 근거는 찾기 어렵다. 세 사람의 나이와 활동 시대도 10-20년 이상 차이가 나므로, 이 설은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산 신봉단체에서 이 설을 퍼뜨리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증산도의 도전에서는 김일부가 꿈에서 상제를 만났는데, 이튿날 강일순을 만나자 바로 상제의 얼굴이었으므로 크게 경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증산천사공사기 등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강일순을 만나기 전날, 김일부가 꿈을 꾸었는데 두 사람이 같이 하늘에 올라가니 상제가 강증산을 매우 칭찬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강일순이 찾아오므로 기이하게 여기며 요운(曜雲)이라는 도호를 지어주며 높이 보았다고 한다. 김일부는 1898년에 타계했으므로, 그 전년도에 여행을 시작한 강일순과 만났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만났을지 상당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또한 강일순보다 쉰 살이나 많은 70대 노인이었으며, 이미 교단을 세워서 교주로 지내던 김일부과 설령 만났다고 해도 강일순에게 경대하였을지 더욱 의심스럽다. 결정적으로 김일부 계열 교단의 경전에는 강일순을 만났다는 이야기 자체가 없고, 도전보다 먼저 편찬된 경전들(후술된 대순전경 등)의 기록과도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11] |
참고로 증산도 측에서는 자기네 경전이 기존 문헌들보다 가장 잘 정비되었고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지만, 일단 제작 연대부터가 기존 문헌 제작 당시와 달리 현대이기 때문에, 강일순 추종자들이 대부분 사망하여 직접 만나본 사례는 얼마 안된다. 기껏해야 강일순 생존 당시 10대 남짓이던 김호연을 비롯한 몇몇을 만난 정도. 거기다 기존 문헌들 역시 여러 차례 증언을 재수집하여많이 개정증보하였다. [12] 무엇보다도 증산도 도전에선 강일순이 죽으면서 자기가 남긴 글을 다 불태우라 명령했다고 주장하지만, 강일순이 쓴 현무경(다만 판본들마다 내용 차이가 좀 있어 논란이 있다)과 수제자인 김형렬이 증산이 남긴 친필을 모은 중화경이 현존한다.
1900년, 서른 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내인 정씨 부인은 강일순을 붙잡고 이제 가정에 충실하라고 애원했지만 강일순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부인과 집안을 외면하고 도통을 찾아 바깥으로 돌아다녔다. 고향 동네 앞산 시루봉[13]을 오르내리며 주문을 외우고 큰소리를 지르며 다니자, 동네 사람들이 광인으로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았다. 강일순이 산에 있는 동안 정씨 부인이 밥을 해서 집에서 산으로 오며 가며 했다고 한다. 비록 시루봉이 해발 100 미터쯤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뇌성마비를 앓아 다리를 저는 아낙네가 음식을 지고 오르내리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1.1 천지공사
1901년, 서른한 살에 전라북도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大院寺)란 절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수도하여, 음력 7월의 어느날에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도통의 경지를 얻었다고 선포하였다.[14] 이후 강일순은 확실히 자기 자신을 어떤 신적 존재라고 생각할 만한 말을 하였다. 옥황상제라고도, 미륵불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강일순이 구체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세상을 구제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음은 분명하다.
1902년, 서른두 살에 첫 제자 김형렬金亨烈(1862-1932)을 만나 그 집에서 거처하였다. 김형렬과는 원래 이전부터 아는 사이긴 했지만 이때부터 비로소 완전한 스승-제자 관계가 된 듯한데, 김형렬이 강일순보다 9살이 많았다. 이후 강일순이란 사람이 신통한 도인이라는 소문이 돌아 제자가 될 사람들이 찾아왔다. 강일순은 여러 주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외우게 했으며, 세상의 여러 나쁜 것들, 재앙을 없앤다는 일종의 주술적인 행위들을 하였다. 이런 행위를 강일순은 '천지공사'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온갖 재앙이며 원한들이 떠도는데 원한을 풀어주고 이런 천지공사를 함으로써 개벽의 때가 지나가면 살기 좋은 이상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이 강일순의 믿음이었다.
이듬해인 1903년에 김형렬이 집을 전라도 전주군 동곡마을[15]로 옮기자 역시 동곡으로 따라들어왔다. 이후 강일순은 주로 동곡마을 김형렬 집에서 거처하면서 본가와 다른 곳을 오고갔다.
1904년, 서른네 살에 딸 강순임姜舜任(1904-1959)이 태어났다.[16] 사실 강일순 부부 사이에는 강순임 이전에도 2남 2녀가 있었으나 모두 일고여덟 살에 사망하였으므로, 강순임이 사실상 강일순의 무남독녀였다. 하지만 바로 그 해에, 강일순은 아내와 시부모간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정씨 부인과 13년간의 혼인생활을 끝내고 이혼하였다. 증산 종교의 경전에서는 시부모에게 불손하게 대하므로 부모가 강일순에게 아내를 내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일순은 가정생활에 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았다. 남편이 이러하니 정씨 부인이 제대로 가정에 전념하고 시부모에게 순종하는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긴 무리였을 것이다. 그 뒤 강일순은 부모에게 딸 강순임을 키워달라고 부탁하고 고향집을 나왔다.
정씨 부인을 내친 뒤 강일순이 재혼하려고 하므로 맏제자 김형렬이 자기 셋째 딸 김말순(金末順)을 추천했다. 이때 김말순 나이 열다섯 살. 이후 강일순은 김형렬을 제자이자 또한 장인으로 대우하였으나, 김형렬의 아내가 이런 혼인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버티는 관계로 식을 올리길 차일피일 미루었다. 비록 식을 치르진 못하였으나 이후 강일순은 죽는 날까지 김말순을 아내로 생각하였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절대 재가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김말순은 강일순 사후 재가하나 곧 병에 걸려 죽는데, 김말순을 낮춰 보는 증산 교단에서는 이를 두고 옥황상제인 증산의 말을 무시하고 재가하여 신벌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근데 이렇게 따져보면 정작 강일순 본인은 후천에는 과부와 홀아비가 있어선 안 되고 누구나 나이에 맞는 과부와 홀아비끼리 결혼하리라고 했고[17], 아래에 나오듯 후천에는 일부일처라는 것을 주장했던 강일순 본인부터 처를 셋이나 두는 등 언행이 불일치하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였다. 신통한 힘과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더욱 쉬운 사회상이 되었고, 강일순의 추종자 또한 증가했다.
1907년, 서른일곱 살이던 해,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 상황을 바꿔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이 해에 차경석車京石(1880-1936)을 만나 제자로 거두었다. 본디 강일순은 차경석을 제자로 거둘 의향이 없었으나[18] 차경석이 강일순에게 반하여 끈덕지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따라다녔기에 그 고집에 져서 결국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차경석은 일제시대에 보천교 교주가 되었다. 그 외에 박공우朴公又(1876-1940), 안내성安乃成(1867-1949), 문공신文公信(1878-1954) 등도 이 즈음에 강일순의 제자가 되었다.
역시 같은 해, 강일순이 김말순과 식을 올리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다른 결혼할 만한 여자가 있느냐고 제자들에게 묻자, 차경석은 자기 이종사촌 누나 고판례(高判禮)[19]를 추천하였다. 고판례가 남편을 사별하고 과부로 있었으므로 적당한 짝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음력 11월 3일(양력 12월 8일) 결혼하였다. 이때 고판례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다. 재혼한 이후 강일순은 주로 거처하는 장소를 고판례의 집이 있는 전북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로 옮겼다.
그러나 재혼한 지 두 달도 안 된 음력 12월 26일(양력 1908년 1월 29일), 강일순은 제자 스무 명과 함께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고부 경무청으로 끌려갔다. 제자들 여럿을 모아 의병 거병을 계획한다는 의혹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도 제자들과 모여서 주문을 외우고 주술을 행했음만 확인할 뿐, 혐의를 입증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설날을 유치장에서 보내고 음력 1월 10일(양력 2월 11일)에 제자들이 먼저 석방되었다. 강일순은 음력 2월 4일(양력 3월 6일)에 석방되기까지 38일간 조사받으면서 고문을 받았다. 그 일로 강일순은 건강을 크게 해쳐서 이후로는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였다. 또한 경찰에게 잡혀서도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을 어찌 믿고 따르겠냐면서 제자들 중 상당수가 이탈하였다.[20]
참고로 강일순은 처음에는 다른 제자들과 다같이 한 방에 갇혔다가 같이 갇힌 수제자들 중에 친척이 지역 경찰서에 인맥이 닿은 사람이 있어 강일순과 수제자 몇몇이 좀 더 나은 감방으로 옮겨졌는데, 그랬음에도 이후 약방을 차리고 대외활동이 확 죽어버린 것을 보면 건강이 매우 크게 망가져 버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1년 반 뒤 죽을 때도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다 죽는다. 증산 교단에서는 이 때 강일순이 감옥에 갇힌 걸 임진왜란 이후 사명당이 일본인의 가죽을 삼백 장씩 조공으로 매년 받으려 하자 일본 공주가 자결해 자기 가죽을 바치면서 생긴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고 말했다고 주장하나, 고전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척 보면 알겠지만 이는 임란 후 민간에서 유행한 소설인 임진록의 판본 중 하나의 구절이랑 거의 같다.(...)이쯤 되면 그냥 양판소에 심취한 망상장애 또라이다
그해(1908년) 음력 4월, 역시 동곡마을에 제자 김준상이 살았는데, 그 집 방 하나를 약방으로 꾸며 동곡약방(銅谷藥房)이라 하였다.[21] 약재를 구비하는 등 약방의 형식은 갖추었으나 강일순이 제대로 한의학을 배운 적이 없으므로 한의사라기보다는 주술의(呪術醫)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강일순은 치료시 주술적인 방법을 자주 사용했으며 약물을 사용할 때도 사물탕과 하풍단을 자주 언급하며 처방했는데, 사물탕은 숙지황, 백작약, 천궁, 당귀로 만드는 탕약으로 어린이나 여자의 보약으로 자주 쓰는 아주 간단한 탕약이고[22], 기생충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기도 했는데 이는 지금처럼 효과가 좋은 구충약이 없던 당시 의학적 지식이 부족하던 민간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임시방편적 민간요법이었다.[23] 다른 약재인 하풍단 역시 그렇게 수준높고 복잡한 약이 아니다.[24] 강일순은 동곡약방에 약장을 만들어 갖가지 약재를 쌓아 놓긴 했지만[25]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제대로 된 의원이 아니었다. |
경술국치 직전인 융희 3년(1909), 서른아홉 살이던 해, 이 해 봄에 강일순은 제자들에게 태을주와 운장주를 가르쳐주었다. 이치복李致福(1860-1944) 등이 제자가 되었다.
강일순은 가뜩이나 건강이 상했으면서도 음력 6월 10일(양력 7월 26일 월)부터 밥도 먹지 않고 그저 소주만을 마셨다. 당연히 명을 재촉하는 짓이라 당장 몸에 영향이 왔다. 강일순은 어디에 누워 있어도 몸이 불편했는지 이곳 저곳 장소를 바꾸어가며 누웠는데, 자기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김형렬을 불러 업혀 다녔다고 한다.
소주만 마신 지 꼭 2주일째 되는 음력 6월 24일(양력 8월 9일 월), 동곡약방 혹은 김형렬의 집에서 사망하였다.[26] 향년 만 37세(한국나이 39세), 도통했다고 주장한 지 만 6년 11개월, 고부 경무소에서 풀려난 지 만 1년 5개월만이었다.
사망하기 전, 김형렬을 통해 김말순을 불러 시중 들게 하라고 하였으나 역시 김형렬의 아내가 반대하여 오지 못했다. 강일순은 노하여 자기가 죽더라도 김말순을 개가시키지 말라고 말하였다. 증산도 도전이나 다른 교단의 경전에는 강일순이 사망하기 직전에 꿀물 한 그릇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 김형렬을 불러 몸을 기댄 뒤, 자기가 제자들에게 알려준 태을주를 낭송하다 숨을 거두었다고 묘사한다.
강일순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지어진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는 강일순을 따르던 신도들이 직접 전하는 최후를 적었는데, 다 얘기가 다르다며 세 가지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천지공사를 다 마쳤으니 가겠다고 하곤 갑자기 죽으니 사람들이 신선이 되어 떠났다고 했다, 꿀 한동이를 마시더니 쓰러져 죽었다, 소와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다 신벌을 받아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렇게 셋으로 기록하였다. 어느 쪽이든 상당히 비참하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강일순 교단의 문헌에서도 미화하는 구절들을 한 꺼풀 벗겨 객관적으로 보면 결코 편하게 죽었다고 볼 수 없다. 죽기 전 강일순은 황달, 내종(內腫)[27], 호열자(콜레라) 증상을 보였고 죽기 직전 위아래로 피를 쏟는 등 온갖 병증으로 괴로워하며 극도로 고통스럽고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강일순 숭배 단체들은 이 때 강일순이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상의 병을 대속하였다고 주장하나[28] 현실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강일순이 대속했다는 병으로 죽어가는데다 내성균의 등장으로 강일순의 주장과 달리 치료도 쉽지만은 않은 상황(...) 전후사정과 결과를 따지면 고문으로 말미암아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장기에 기능저하/파열이 발생하고 면역력이 떨어져 숨을 거둔 것이므로, 끝내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보아야 한다.
대순전경에 따르면 강일순이 죽기 전날 밤에 제자 박공우朴公又(1876-1940)를 침실로 불러 같이 자다가 한밤중에 공우에게 개벽의 날에 닥칠 질병을 막으려면 필요하다면서 의통인패(醫統印牌)를 주고, 비밀을 지키다가 무진년에 너에게 물어보는 사람에게 전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순전경을 쓴 이상호가 무진년(1928)에 박공우랑 만나 의통인패를 전해받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 때문에 많은 증산교단들이 저마다 의통인패를 이야기하지만, 강일순이 박공우에게만 한밤중에 주었다면 다른 증인이 있을 수 없으므로 박공우, 혹은 이상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적어도 박공우가 강일순에게 은밀히 의통인패를 받았다고 주장했음은 사실로 보인다.
2 사후
제자들은 강일순이 사망한 뒤 뿔뿔이 흩어졌다. 둘째 부인 고판례는 강일순의 영혼과 다시 한번 영혼 결혼식을 치르고 강일순이 가르친 주문을 외우는 등 종교적인 행보를 보였다. 강일순이 죽은 지 2년째 되는 1911년 (음)9월 19일[29], 고판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아 치성을 올리는데 갑자기 쓰러지더니만 몇 시간 뒤에 일어나 강일순의 음성으로 말하며 강일순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일시적으로 고판례를 중심으로 뭉치긴 했으나[30] 차경석이 사실상 교단의 전권을 쥐고 전횡을 부려 일순을 직접 시봉했던 제자들은 모조리 흩어져 자기들만의 교단을 차리고 고판례도 차경석과 결별한다.
그 뒤 증산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여러 종파로 나뉘었다. 일제강점기에 크게 흥성했던 보천교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외에 증산의 무남독녀 강순임 여사가 세운 증산법종교, 증산의 첫 번째 제자인 김형렬이 세운 미륵불교 등이 있다. 증산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종교를 통틀어 증산종교, 혹은 증산계 종교, 증산교(동명의 종교도 존재하니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라고 부른다.
강일순의 무덤은 증산종교들간에 싸움박질을 벌이는 원인이 되었으나[31] 최종적으로는 1949년에 전북 김제시에 있는 증산법종교 교단 본부 안에 안장되었다.
강일순의 외동딸이자 증산법종교의 창시자인 강순임은 아버지 유해를 모셔와 석관에 안치하면서, 친어머니 정씨 부인의 유해도 석관에 안치하여 아버지 옆에 모시고, 그 위에 영대(靈臺)라는 한옥식 묘각을 세웠다. 영대는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3 부인들
강일순은 부인이 3명이었다. 생애란에서도 연대순으로 쓰여 있지만 모아서 정리하면 이러하다.
1891년에 혼인한 정치순鄭治順(1874-1928)은 강일순이 수행할 때 시종을 들었으나, 이후 이른바 대도통 이후 1904년에 시부모와의 불화를 이유로 이혼당하였다.슬하에 딸 강순임(舜任)이 있었는데 훗날 순임은 자기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개창하였다.[32] 정치순은 강일순이 죽은 뒤 가난에 시달리다가 딸과 헤어져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태극도를 창시한 조철제에게 도움받아 겨우 모녀가 상봉하였다. 그러나 모녀가 증산계 종교단체의 정통성 다툼에 이용만 당할 뿐이라 속앓이를 하다가 병을 얻어, 1928년에 향년 55세(만 54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강순임은 어머니의 박복한 삶을 무척 원통하게 여겼다.
1904년, 강일순이 수석제자였던 김형렬에게 처음으로 수부(首婦)를 세우기로 종용하자 셋째 딸 김말순金末順(1890-1911)을 추천하였고, 김형렬은 이후 장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말순의 나이가 15세인데 강일순은 34살이므로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나이가 너무 차이나는데다가, 나이 차이를 감수하고 혼인시키기에는 강일순의 집안은 아무 별 볼일 없는 가난한 농부네에 불과했다. 강일순을 신앙하는 김형렬이야 좋다고 생각했지만 형렬의 아내는 당연히 이런 결혼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크게 반대하였으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였다. 비록 끝내 식을 올리진 못하였으나 강일순은 김말순을 아내로 여겼고, 자기가 죽은 뒤에도 재가하지 말하고 말하였다. 김말순은 강일순 사후 얼마 안 되어 재가하였으나 급병이 나서 1911년에 향년 22세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강일순을 따르는 종교단체에서도 김말순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33]
1907년, 강일순이 다시 수부(首婦)를 세우기를 명하였으므로, 제자인 차경석은 자기 이종누이 고판례高判禮(1880-1935)가 남편을 사별한 지 5개월째라 추천하였다. 고판례는 강일순과 부부가 된 뒤 이른바 고 수부가 되었다. 수부란 '으뜸가는 부인네'라는 뜻이다.
증산도에서는 고판례가 수부가 됨이 매우 중요한 종교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후에 고판례와 이창호의 증산교와 차경석의 보천교가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차경석이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잃은 뒤 보천교 신파의 신앙에서는 강일순은 사슬에 묶여있고 차경석이 상제가 된다. 이상호는 1928년 보천교에서 분열해 나와 동화교를 차릴 때 고판례를 받들었으나 이상호 또한 교단 운영에서 고판례를 배제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다시 동화교를 나와 선도교(仙道敎)를 만들고 1933년부터 전라북도 오성산에서 은거하다 1935년에 향년 56세(만 55세)로 사망한다.
정작 강일순 본인은 후천은 정음정양 시대, 여성 해원 시대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권리가 신장된다고 예언하였고 천지공사 행위를 할 때 여성을 참여시키거나, 후천 음양 도수를 정하는 행위를 하면서 하늘도 하나고 땅도 하나라며 아내를 하나만 두길 원한 제자 문공신을 칭찬했으니, 전형적인 언행불일치라 할 수 있다.[34]
4 제자
강일순을 따르던 제자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제자를 꼽는다면 김형렬, 백남신, 신경원, 김경학, 차경석, 박공우, 김병선, 안내성, 문공신, 신경수, 이치복 이렇게 11명이다. 그외에도 제자들이 있었지만 크게 강일순의 관심을 받거나 이렇다 할 도수(증산 계열에서는 사명을 이렇게 표현한다.)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정작 도수를 받았다며 한 행적들을 보자면 차경석을 제외하면 각자 교단을 차리고 도수란 이름으로 강일순 못지 않은 기행[35]을 벌이며 강일순의 도래를 기다리다 죽었다.
강일순의 제자인 차경석은 일제시대에 보천교(普天敎) 교주가 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순수하게 역사적인 의미로는 강일순보다 차경석이 더 중요한데, 일제시대의 사회상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보천교의 자체 주장에 따르면 당시 보천교도는 최대 6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그 영향력 때문에 일제로부터도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보천교도들은 조선에 널리 퍼졌던 예언서들이 교주 차경석을 가리킨다는 요지로 한문 좀 읽는다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보천교 신앙촌으로 옮겨오도록 포교했는데, 개중에는 탄갈자(殫竭者)라고 하여 전재산을 보천교에 바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36]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차경석을 가리키던 '차 천자'라는 말은 보천교와 차경석의 위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뿐만이 아니라 천도교 등 민족종교 계열, 그리고 조선의 지식인들도 보천교를 경계하여 비난하곤 했다. 특히 전재산을 바친 탄갈자들, 그리고 차경석이 진행하는 '천자 등극'의 모습이 특히 비난거리였다. 차경석은 만주에서 소나무를 수입하여 보천교 본부 안에 십일전(十一殿)이라는 건물을 세웠는데 경복궁 근정전에 가까운, 여러 가지로 건방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차경석은 아무리 수행해도 강일순이 말했던 것 같은 도통을 얻지 못하였다. 차경석은 점점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잃다가, 급기야 강일순을 기만적인 도인으로 판단하여 거부하고 새로운 교리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이에 따라 보천교인들은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은 구파와 차경석의 변화를 따르는 신파로 나뉘어 큰 내란을 겪었다. 이렇게 일제의 압박, 내분 등 악재로 점차 교세가 약해지던 중 1936년에 차경석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일제는 차경석이 사망하여 보천교가 중심을 잃자마자 곧바로 보천교의 건물 등을 압수하고 유사종교해체령을 내려 당시의 잡다한 증산계 종교를 같이 해산시켰다. 이때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무극도[37]도 해산됐다. 그리고 보천교 건물이던 십일전을 불교계에서 인수, 해체하여 서울로 옮겨 조계사 대웅전 건물로 삼았다.
보천교가 무너진 뒤[38] 오랫동안 증산계 종교는 그 명맥이 간신히 이어졌다. 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증산도와 대순진리회 때문에 강일순의 이름이 간신히 망각의 늪에서 벗어났다. 이외에는 차경석의 후손이라는 사단법인 후암미래연구소장 차길진이 보천교와 강일순을 자주 언급한다.
5 주문
강일순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거나 보여준 여러 종교적/주술적 행위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태을주와 운장주를 포함한 여러 가지 주문들이다.[39] 증산종교 계통에서는 수련한다느니, 공부한다느니 하는 말이 주문낭송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이다.
강일순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주문들은 무속이나 도교로부터 영향받았음이 눈에 띈다. 도교나 무속에서 사용하는 주문을 조금 바꾸거나, 편집하거나, 덧붙이거나, 혹은 한 구절만 뚝 떼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강일순이 가르쳐준 주문에 있는 도불습합 형식은 무속인들이 사용하는 경문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강일순이 사망하던 해(1909)에 가르쳐 주었다는 운장주는 강일순의 오리지널 주문이다. 도교스러운 용어를 사용하고, 일부 무속경문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기존에 있던 주문들을 변용하지 않고 강일순이 창작하였다.
또한 강일순은 동학의 주문인 시천주 주문을 제자들에게 읽게 하기도 했다. 다만 강일순 추종 교단에선 시천주주를 읽는 순서와 방법이 일반적인 동학 계열하고 좀 다른데, 일반적인 동학 계열에서는 강령주문(지기금지원위대강)과 본주문(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을 구분하고, 강령주문을 읽고 그 다음에 본주문을 읽는다.
이에 반해 강일순 추종 교단들은 구분없이 둘을 합쳐서 시천주주라고 부르며 본주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앞에 오고 강령주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뒤로 온다.(때문에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이렇게 읽는다) 순서와 구분이 정 반대인 셈. 애초에 강일순 본인부터가 교리에 대한 이해도 부분은 둘째 치더라도 대놓고 "내 가르침이 참동학이다" 라고 했을 정도로 동학에 많이 경도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강일순 본인은 당시 조선에서 예방의학 목적으로 널리 퍼졌던 수련도교 쪽의 내단수련[40]에도 관심이 많았다. 강일순이 비밀리에 소장했던 <정심요결(正心要訣)>이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중국 영보파(靈寶派)에 연원이 닿는 내단 수련서였다. (훗날 원불교의 2대 교주가 되는) 정산(鼎山) 송규(宋奎)[41]가 도를 구한다며 1917년에 전라도로 가서 강일순의 유족들과 추종자를 만난 적이 있다. 원불교 자료에 의하면 이 때 강일순의 딸 강순임이 아버지 생전에 "지시가 있었다" 면서 강일순이 은밀히 소장했던 정심요결을 건네주었다고 한다.[42] 송규가 소태산을 만나 귀의한 뒤, 원불교 교단에서는 1927년에 초기 수양교재인 수양연구요론을 펴내면서 정심요결을 약간 편집하여 '정정요론(定靜要論)'이란 이름으로 수록하고, 다른 도교 계통의 서적과 합본하여 출간하였다. 원불교대사전 링크 1954년에 정산 송규는 정정요론을 다시 편집, 문장을 다듬어 수심정경(修心正經)이란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이를 놓고 증산도 측에서 원불교를 강일순 교단의 아류로 폄하하기도 하여 서로간에 마찰이 있다. 아무튼 왜 자신은 내단학에 상당히 심취했으면서 제자들에게는 주문 수행을 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43]
6 신농
강증산의 집안인 진주 강씨는 자기네 집안이 염제 신농씨에 기원이 닿는다고 주장한다. 신농씨가 성을 강(姜)씨로 한즉 이것이 그대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강증산은 신농씨를 특별하게 여기고 자기의 종교적인 주장에도 신농씨에게 특별한 위상을 부여했다. 강일순이 중시한 태을주도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낸 후 반포한다며 제자 안내성에게 술을 사오라 했을 정도.
7 증산계통 종교와 영향
파일:Attachment/kjs denomination.png
원본 크기로 보기
현대 대한민국에서 증산계 종교는 종류는 무척 많으나 대부분 그 교세가 실로 미미하다. 이는 대순진리회와 증산도를 제외한 대다수의 증산계 종교가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그들 중 많은 곳에서는 가족이나 친척 수준의 단위로만 신앙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흥성한 보천교도 지금은 간신히 명맥만 잇는 수준. 가장 교세가 큰 종교는 앞에서 나온 바와 같이 증산도와 대순진리회다. 증산도에서 대순진리회를 무수히 공격했기 때문에 증산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분파된 줄 아는 사람들도 많으나, 실상 두 종교는 강증산이 신앙대상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계보상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다.
1962년에 발각되어 큰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용화교(龍華敎) 또한 증산종교의 일파로 강일순을 미륵으로 믿었다. 용화교는 교주 서백일이 여신도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재산을 가로채 경찰에 수배되기도 하면서 유명해졌으나, 1966년에 교주 서백일이 소윤하(蘇潤夏)라는 당시 20대 청년에게 칼을 맞아 죽은 뒤 교세가 급격하게 쇠락하여 잊혀졌다. [44]
2016년 현재 증산 계열 종교 대부분은 몰락한 상태이다. 상당수 교단이 포교에 소극적이고 신앙인들이 고령인데다가 대부분 가족끼리 믿는 형태라 교세가 미약하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교단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증산법종교 : 증산 강일순과 첫째 부인 정치순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친혈육 강순임 여사가 중심이 되어 1937년에 세워진 종교 단체. 여사 생전에 증산법종교의 신앙대상이자 자기 아버지기도 한 강일순의 유해를 증산법종교 내부로 옮겨왔다.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종교가 한둘이 아니지만, 유일한 자식이 아버지 묘소를 이장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증산법종교는 교세는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증산종교 중에서는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종파이기도 하다.
- 대순진리회 계통[45]: 1969년에 세워졌다. 증산계통 종교에서는 신도수가 가장 많다.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 항목에서 명시된 8개 종교명에 대순진리회가 들어가 있을 정도. 즉, 대순진리회 하나만으로도 통계상 대한민국 8대 종교에 해당함을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1대교주 박한경 도전이 사망한 뒤 현재 수십 개 교단으로 분열된 상태임에도 분열된 교단들 역시 머릿수로는 증산계통 종교에서 상당한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강일순을 신앙하는 다른 교단들은 대순진리회에 대해 기본교리 자체를 왜곡하고 반사회적인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 증산도 신자들의 경우도 대순진리회를 극도로 싫어한다.
- 증산도 : 1984년에 '증산도'라는 교명을 확정하였다. 자체 방송국[46]도 소유할 정도로 크게 활동하였다. 그 많은 증산계통 종교 가운데 가장 이론적인 교리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던 단체로 자기네 경전 '도전'을 외국어로 번역할 정도로 열성적이였다.
- 태을도 : 1995년에 이훈오를 중심으로 창단되었다. 서울에 본부가 있다.
8 옥황상제(?)
200px
증산계 종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첫번째 사진은 고종 어진을 그린 채용신이 그렸고 두번째 사진은 증산도의 것)
말 그대로 옥황상제.
동시에 자신은 세상을 구제하러 온 미륵불이며 자신보다 먼저 활동한 최수운에게 계시를 내린 상제도 자기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논란이 있다. 불교와 동학에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불경과 용담유사/동경대전에 실린 내용이나 사상의 지향점이 전혀 다르다 보니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47] 강일순의 딸인 강순임이 세운 증산법종교에서는 강일순을 증산미륵이라 칭하는 동시에 태상상제라는 존재와 더불어 증산과는 별개로 옥황상제를 놓고 둘을 중심으로 하는 대령전이라는 건물을 지어놓고 별도로 제사를 올리며, 초기문헌인 대순전경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충청도 연산에 이르사 역학자 김재일(김일부)에게 들러시니 이때 재일의 꿈에 하늘로 부터 천사(天使)가 내려와서 강사옥[48]과 함께 옥경에 올라 오라는 상제의 명을 전하거늘 재일이 상제(강일순)와 함께 천사를 따라서 옥경에 올라가 요운전이라고 액자가 써 붙여진 장려한 금궐에 들어가서 (옥황)상제께 뵈이니 (옥황)상제가 상제(강일순)께 대하여 광구천하 하려는 뜻을 칭찬하며 극히 우대하는 지라 재일(김일부)이 크게 이상히 여겨 이 일을 말한 뒤에 요운이란 도호를 상제(강일순)께 드리고 심히 경대하니라.
- 출처: <대순전경해의>, 장재진 저, 장신원, 2009. 51쪽. [49][50]
또한 강일순 본인도 태을주의 효능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읽어보면 자신과 다른 태을천상원군이라는 신격을 주신적 존재로 언급하고 있다.
태을천(太乙天) 상원군(上元君)은 하늘 으뜸가는 임금이니 오만년 동안 동리동리 각 학교에서 외우리라.
- 출처:<증산도 도전>, 2008. 7편 75장
이 외에 대순진리회에서는 강일순은 구천상제, 조철제를 옥황상제, 박한경을 상제 혹은 박성미륵세존 등으로 놓고 있다. 증산도에서도 초대 교주 안세찬(안운산)을 태극제, 2대 교주 안중건(안경전)을 황극제로 놓는 등 복잡한 행보를 보인다.
9 비판
9.1 이론적 궁금증과 허점(?)
애초에 강일순의 해원 사상에도 허점이 있는데, 강일순은 원한의 시작을 요임금의 아들 단주로 잡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는 억울함을 가진 이가 없다는 보장이 있는가? [51] 증산계 교단에서는 이를 놓고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원한의 시작이 단주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정작 파리 죽은 귀신이라도 원망이 붙으면 천지공사가 아니라고 한 자는(증산도 도전 4편 48장 참조) 강일순 본인이다.(...) 근데 단주부터 따진다는 것은(강일순 본인이 직접 단주에 대해 '원한의 역사의 뿌리'라 언급했다) 그 이전의 원한은 무시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이 옥황상제라면서 기존 종교의 성자들을 심판한다고 주장하는 행위를 했는데, 여기서 기존 종교의 창시자(석가모니, 공자 예수, 노자)들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석가모니가 남의 자식을 유인한다느니,[52] 예수한테 왜 조상 제사를 안 지내냐느니 하는 식으로[53] 해당 종교의 교리와 사상에 대해 많이 지식이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동시에 당시 조선인들의 사고방식에 입각한 비판을 하고 있다. 특히 도교에 관련하여 노자를 대입하며, 복중팔십년 운운하며 어머니 뱃속에 팔십 년이 넘게 있었던 불효자라고도 하는데, 노자 본인의 실존 여부도 문제지만 도교 항목에 나오듯이 도교에서 노자를 중시하긴 하지만 노자가 직접 도교를 창시한 건 아니고 도교가 성립되면서 도가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노자를 중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노자가 어머니 뱃속에 팔십 년간 있었다는 건 그냥 후대에 가탁된 전설일 뿐이다. 그리고 강일순은 "유가의 인물들이 흠이 많으나 주회암은 흠잡을 데가 없느니라."라고 했으나 이 역시 철저한 조선 유학자들의 관념. 주자와 성리학 항목에 나오듯이 성리학은 불교 비판을 하면서 역으로 불교에서 차용한 부분이 상당수 존재하며, 주자는 유교경전의 원문을 자의적으로 손상시키는 등 비판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주자와 성리학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철저한 조선 유학자의 사고방식이다.
또한 강일순은 이마두(마테오 리치)를 여러 차례 언급하며 칭찬하는데, 마테오 리치의 공으로 언급된 것들 중 24절 역법을 개정해 때를 밝혔다고 하나 근세 동양의 역법의 개정은 마테오 리치가 한 게 아니라 탕약망(요한 아담 샬 폰벨, 아담 샬)이 한 것이고[54], 또한 이마두가 선교사여서 그런지 동서양의 신명들을 처음으로 자유롭게 왕래하게 했다고 주장하나, 이미 실크로드와 해양,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한 동서 문화 교류는 고대부터 있었던 일이고 기독교는 이미 당나라 때 경교라는 이름으로 전래되었고, 이슬람의 확장 이전에는 인도와 동아시아 외에도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기에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55] 그리고 강일순은 고문을 받을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임란 이후 사명당에 의해 죽은 일본공주를 해원하기 위해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나,(증산도 도전 링크) 전술했듯 그런 공주는 소설에나 나오고 실제로는 당시 일본의 덴노인 고요제이 덴노[56]가 임진왜란을 반대했으나 도요토미가 듣지 않았을 뿐이다.[57]
사실 강일순과 그의 사상/교단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지나치게 주술적 행위에 의존했다는 점이다.[58] 제자들에게 곰방대를 매게 하고 군인들이 행군하는 시늉을 내는 원시적 감응주술 행위를 하거나, 가뜩이나 가난한 제자들의 재산을 죄다 긁어모아 제사를 지내거나 무당을 불러 굿판을 열거나 제자들 앞에서 기이한 현상을 보이는 등 주술적인 행위는 매우 많이 발견되지만 정작 그가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행동을 취한 부분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전술/후술하듯이 언행불일치되는 부분이 많다. 이는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이 교도들끼리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맞절을 하게 한 점이나 집의 여노비 둘을 해방해 하나는 며느리로 다른 하나는 수양딸로 삼고 머슴 출신인 최시형[59]을 신앙심과 능력만 보고 후계자로 들인 점과 이후 천도교의 어린이 용어 사용 등의 사회활동을 보인 점이나,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이 개교 초창기부터 엿공장 운영이나 저축조합 설립, 간척 등으로 실리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교단을 운영하면서 종종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나자 제자들에게 입단속을 시킨 것과는 너무나 크게 대비된다.[60] 본인이 조선조 당시 천대받았던 노비, 광대, 무당 등이 후천에 대우받고 산다고 주장하거나, "일본 사람이 3백 년 동안 돈 모으는 공부와 총 쏘는 공부와 모든 부강지술을 배워 왔나니 너희들은 무엇을 배웠느냐."[61]등의 상당히 혁신적인 발언은 분명 인정할 만하지만, 정작 본인이 노비를 풀어주거나 제자들에게 신학문을 배우게 하거나 하위계층의 인권 보호 운동을 한 적은 없다. 그거 천지공사라는 이름으로 굿을 하면서 다가올 후천선경 세상에는 이러저러하게 된다고만 했을 뿐. 강일순의 제자들 역시 주술적인 신비주의와 강일순의 재림만을 기다렸을 뿐, 딱히 사회적 활동을 보인 게 없고 차경석의 경우에는 오히려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강일순의 사상을 우호적으로 보고 혁신성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많이 비판하는 부분이다.
더욱이 강일순은 패륜행위도 저질렀는데, 해원을 해야 한다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죄인마냥 짚신을 만들어[62] 팔아 먹고살게 하면서 제자들이 빈궁하게 사는 자신의 부친에게 돈이나 곡식을 보내는 걸 막고[63] 어머니가 간신히 마련한 고추밭을 멋대로 팔아 버리면서[64] 자신의 후처인 고판례는 지극히 아끼면서 고판례의 사촌동생이자 제자였던 차경석을 시켜 고판례를 위해 쌀을 팔아 놓으라고 하는 등[65], 부모가 힘들게 강일순을 키웠다는 점을 경전에서 강조함에도 효 따위는 자신의 주술행위를 위해 내다버린 행동을 보여준다. 강일순이 죽기 전 집안 어른들을 만났을 때 집안 말아먹은 놈이라는 소리를 괜히 들은 게 아니다. 족보도 불태워 버렸지 부모도 박대했지... 예수가 제사 안 지냈다고 깔 입장이 아닌거 같은데
정말 자신이 자기 주장대로 상제로서 동서양의 모든 신명들을 다스린다면 중립적이지 못한 시각과 여러 오류와 허점, 모순된 행동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증산 계열 교단들의 통합/교학이 발달하지 않는 한 결론은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산 계통 종교에서는 통합적인 교단이 나올수있는 시스템이 전무하다. 오히려 강일순의 "대행자", "대두목"[66], "난법을 낸 뒤 진법을 낸다"발언 때문에 분파를 유도하고 있고 그런 시스템으로 짜여져 있다. 괜히 강일순 교단이 사이비가 우후죽순[67]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강일순 신봉자들은 이에 대해 진법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교리적으로도 경전 내용으로도, 얼마든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성 교단을 난법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이 진법이요, 강일순이 말한 사명을 받은 대행자/대두목이라 주장하며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기 좋고, 대행자/대두목으로서 무소불휘의 권력을 신도들에게 휘두르기 좋은 구조를 하고 있다. 체계적인 사상 연구나 교학 발달은커녕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 집단이 만들어지기가 너무나도 좋은 형태다. 당장 기독교만 해도 예수의 구원과 심판 구절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이단 및 사이비들이 횡행하는지 생각해 보자. 강일순 교단은 이게 더 심하다! 그리고 밑에 후술하듯. 강일순은 빠져나갈 쥐구멍도 뚫어 놓았다.(...)
9.2 비판에 대한 반론(?)
'이때 최창조가 이르러 상제님께 문안을 올린 후에 한쪽에 가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성난 소리로 이를 갈며 말하기를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 몇 사람이 결사대를 만들어 저 건너 주점에 가서 한 놈을 죽이든지 해야지 그저 있어서는 못살겠다." 하거늘 박공우가 이르기를 "무슨 일로 그러오?" 하니 창조가 말하기를 "이런 분한 일은 내 생전에 처음이라, 차라리 죽지 못살겠다." 하니라.본래 공우는 우직한 사람인지라 창조의 말을 듣고 바짝 다가서며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라. 결사대는 말고라도 내 혼자 하고 혼자 당해야지 공모되면 죄가 크다. 어서 무엇인지 말을 하라." 하니 창조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여러 놈이 나서서 덤비는 통에 나는 혼자라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왔으나 생각할수록 분해 못살겠네." 하고 공우의 귀에 대호 "그놈들이 선생님을 미쳤다 하며..." 하고 말을 하다가 분한 김에 상제님도 들으시게 하려고 "그놈들이 글쎄, '강탈망인지 강삿갓인지 그 강미치광이 따라다니지 말고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술이나 받아 주면 고맙다는 소리나 듣지.' 하고 우리를 모두 '병신 뒷다리 같은 놈들'이라 하며 '참말로 미친놈들이 저놈들이라.' 하니 어디 분해서 살겠소?" 하거늘 공우가 이 이야기를 듣고 코를 한 번 풀더니 나뭇짐에 가서 몽둥이 한 개를 번쩍 들고 "내 그까짓 것들..." 하고 나가니라.이 때 상제님께서 보시고 급히 부르시니 공우가 발을 멈추고 서서 들어오지 아니하는지라 상제님께서 크게 호령하여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너는 금일로써 남이 되려느냐." 하시니 공우가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예?" 하고 들어와 꿇어 엎드리거늘 일으켜 앉히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조금 전에 내가 들었노라. 이놈들아, 강미치광이 오죽이나 좋으냐! 그 사람들 참으로 우리 일꾼 중 상등 일꾼이다. 강미치광이를 누가 따르겠느냐. 참으로 그 소리를 했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공을 갚을까. 옥과 돌을 그 사람들이 가려 주느니라. 사방으로 외대면서 이 말을 못 하면 유감인데 너희들은 그 사람들이 그리 하니 원수로구나.수운가사에 이르기를 '여광여취 저 양반을 따르기만 따를진대 만단설화 한 연후에 수원성취 하련마는 못 만나서 한탄일세.'라 하였나니 내가 미쳤다 하기로 너희가 나를 원 없이 따르게 되지, 만일 세상에서 나를 성인이라 하면 너희들이 처신할까. 모르는 가운데 정성이 깊지, 알고 난 뒤의 정성이야 누군들 못하겠냐. 깊이깊이 생각해 보라." 하시니라. 이에 공우가 백배사죄 드리며 "참으로 공우가 금일에야 사람인가 합니다." 하니 좌우가 모두 기쁘게 웃으며 상제님께 사죄하더라.
공신이 출옥한 뒤에 하루는 고부 주막 주인이 공신의 집에 와서 느닷없이 공신 앞으로 달아 둔 밥값을 내놓으라며 살림살이를 차압해 가거늘 상제님께서 출옥하시면 압수당한 돈과 무명을 찾아 외상을 갚아 주실 줄 믿었던 공신은 큰 돈을 내고도 다시 수저 하나 남김없이 살림살이를 차압당하매 크게 불평을 품고 있더니 얼마 후 상제님께서 집에 찾아오시매 지난 일을 낱낱이 헤어 아뢰며 불쾌한 어조로 폭담을 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고개를 숙인 채 듣고 계시다가 공신에게 “이제 말 다했느냐?” 하시니 공신이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다 했지요.”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네 말을 들으니 그렇겠도다. 내가 순창 농바우에서 사흘 동안 머물며 너를 처음 만난 뒤로 네가 여러 가지 큰 공사에 참관하여 너에게 이윤(伊尹) 도수를 붙인 바 있고 고부 도수를 보려 하나 가히 감당해 낼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眞主)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어 남의 돈은 따 보지 못하고 제 돈만 잃어 바닥이 난 뒤에 개평을 뜯어 새벽녘에 회복하는 수가 있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네가 고부에서도 밥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만일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으면 내가 주마. 그러나 그리하면 그 도수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야 하느니라.” 하시니 공신이 ‘어차피 돈은 쓴 것인데 도수까지 남한테 뺏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여 여쭈기를 “일이 그와 같을진대 그만두시옵소서.” 하니라.
해당 구절들은 강일순 신봉 단체에서 실제로 신도들 교육이라 쓰고 세뇌라고 읽는다 용으로 자주 써먹고, 신도들 역시 비판/공격을 받을 때 자주 되뇌이는 구절들이다.완벽한 개독의 하위호환 괜히 근현대 한국 신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강일순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게 아니다. 강일순의 사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신도거나 강일순 숭배집단 소유 연구소 소속이 아니면 최수운이나 박중빈에 비해서 강일순을 낮게 취급하는 경우가 대다수.
참고로 여기서 언급된 강일순의 제자 문공신은 나중에 이렇게 된다.
공신이 독배고개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키니 이 때 모인 사람들은 채청송, 양인산, 정판진, 김찬숙, 신의균 등이더라. 하루는 공신이 “자네들 선초(仙草) 맛 봤는가?” 하니 제자들이 “얘기로도 못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공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러면 선초 한 대씩 하세.”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방으로 쑥 들어오니 그는 도꾼을 가장한 밀정 유화숙이라. 화숙의 밀고로 공신과 제자들이 ‘민심을 어지럽힌다.’ 하여 전주형무소에 갇혔다가 3년 후 해방을 맞아 석방되니라. 형무소에 있는 동안 공신과 제자들 모두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하고 몇몇은 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기도 하거늘 이는 독조사가 새벽녘에 개평을 얻어 판을 모두 걷고 후천 상생 세상을 열게 하는 파방(破放) 도수라. 이후에 공신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독조사 도수를 내가 받았노라.” 하니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더니 이 무슨 군대 부조리 되물림도 아니고 실패한 신사도 운동주의자의 말로를 보는 거 같다
이후 문공신은 강일순의 약방을 모방해 도술약국이라는 약방을 열고 활동하다 죽는다. 비단 문공신뿐만 아니라, 강일순을 신봉하던 사람들 중 그 말로가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수제자였던 김형렬조차 미륵불교 교단을 차리고 수련으로 신안이 열렸다고 주장하며 여러 예언을 했다가 다 빗나가면서 신도들이 와해되었고, 차경석은 전술했듯 보천교라는 거대 교단을 만들었다가 형편없이 무너져 버렀다.[68] 안내성의 경우 3년동안 종교 수련에만 빠져 늙은 어머니가 날품을 팔고 우물터에 버려진 음식 찌꺼기들을 주워모아 끼니를 해결하는 등 살림이 완전히 파탄이 나 버렸고 오랫동안 비정상적인 삶을 살다보니 엉덩이가 짓무르다 못해 패이고, 이목구비 변형과 더불어 여자처럼 가슴이 튀어나오는 기형의 신체가 되버렸다. 증산 신봉단체에선 이를 놓고 안내성을 보고 '내 도의 어머니가 되라'고 했던 강일순의 뜻에 따라 수행해 그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후 인과관계를 보면 오랜 가난과 기아로 인한 호르몬 이상으로 여성형 유방이 생겨버린 것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실제로 극심한 기아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이 온 남자들은 여성형 유방 증세와 더불어 젖이 나오기도 나오는데, 증산도 도전 주석에 따르면 안내성이 여자처럼 젖이 나왔다는 증언이 나온다. 호르몬 이상으로 인한 증상과 전체적인 전후 관계가 일치한다.
후발주자인 증산교의 창시가 이상호나 이상호의 증산교에서 갈라져 나온 안세찬, 태극도를 세운 조철제, 조철제 사후 태극도에서 갈라져 나온 박한경 등도 서로 자신들이 도통을 내려줄 대두목이라고 주장했으나 지금은 모두 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갔고, 그 후계자들은 증산도처럼 환빠가 되거나 대순진리회처럼 수없이 많은 분파로 갈라져 버렸다. 창시자부터 후계자들까지 제대로 된 교학 발전도 사상 발전도 없이 종말론적 신비주의에 의존하는 종교집단의 전형적인 말로를 반복하고 있다.
10 어록
증산도 도전(道典)의 내용을 근거로 삼는다. 그외에 대순전경, 천지개벽경 등의 경전들과 교차검증을 하였다.
나는 옥황상제니라
이제 이 상극의 운을 끝맺으려 하매 큰 화액이 함께 일어나서 인간세상이 멸망하게 되었느니라. 상극의 원한이 폭발하면 우주가 무너져 내리느니라. 이에 천지신명이 이를 근심하고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고자 하였으되 아무 방책이 없으므로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호소하여 오매 내가 이를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느니라.
이제 온 천하가 대개벽기를 맞이하였느니라. 내가 혼란키 짝이 없는 말대(末代)의 천지를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否劫)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건져 각기 안정을 누리게 하리니 이것이 곧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이제 천하의 마魔를 해원시켜 난신(亂神)들로 하여금 각기 그 소원을 이루게 하여 앞으로 오는 후천 오만년에는 다시 망령된 짓을 못 하게 하리라
원래 인간에서 하고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서 큰 병을 이루나니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일을 풀어놓아 각기 자유행동에 맡기어 먼저 난법(亂法)을 지은 뒤에 진법(眞法)을 내이리니 오직 모든 일에 마음을 바르게 하라
어질 인仁자는 너희들(한국인)에게 붙혀 주노니 오직 어질 인자를 잘 지키라
지금은 혈통줄이 바로잡히는 때니 환부역조 換父易祖 하는자와 환골換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천자天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꿈만 꾸는 자도 죽으리라.
나는 예언자가 아니로다. 나의 일은 세상 운수를 미리 말함이 아니요, 오직 천지공사天地公事의 도수로 정하여 내가 처음 짓는 일이니라
앞으로 시두가 없다가 때가되면 대발할 참이니 만일 시두가 대발하거든 병겁이 날줄 알아라[69]
망하는 세간살이는 애체(愛滯)없이 버리고 새 배포(配布)를 꾸미라 만일 아껴서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몸까지 따라 망하느니라
좋은 복을 내려주어도 이기어 받지 못하면 그 복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느니라
일의 왕성함이 천지에 있는 것이지, 꼭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는 고로 천지가 사람을 낳고 쓰는 것이니라. 천지가 사람을 쓰려고 할 때에 불참한다면 어찌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70]
거짓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니라
나의 일은 실제의 말을 해야지 거짓말로 하였다가는 여지없이 부서지리라
상말에 ‘무척 잘산다’. 이르나니 ‘척(隻)이 없어야 잘산다.는 말이니라. 남에게 원억(冤抑)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느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의 신명(神明)이 먼저 알고 척이되어 갚느니라. 앞세상에는 서로의 마음속을 드나들어 그 속내를 알게 되나니, 남을 속이지 말고 척이 있으면 풀어 버리라. 부하고 귀하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든 척에 걸려 모두 콩나물 뽑히듯 하리라.
천하에 무서운 죄는 저도 모르는 놈이 남을 모아 수하에 넣은 죄같이 큰 죄가 없느니라. 공자(孔子)가 알고 하였으나 원망자가 있고, 석가(釋迦)가 알고 하였으나 원억의 고를 다 풀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제가 모르는 놈이 출세간에 사람을 모은 자는 낮에 난 톳재비 같으니라. 수운가사(水雲歌詞)에 기둥없이 지은 집이 어이하야 장구하리. 성군취당 극성중에 허송세월 다보낸다 하였느니라 (동곡비서)[71]
천고(千古) 이래로 수한도병(水旱刀病)의 겁재가 서로 번갈아서 그칠새없이 세상을 진탕하였으나 아직도 큰 병겁은 없었느니라. 당래에는 병겁이 들어오는데 천하를 진탕을 만들참이나 뉘라서 활방을 얻어 멸망하는 인종을 살리리요. 기사묘법(奇事妙法)을 알라고 하지말고 의통(醫統)을 알아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봄으로부터 이땅에 모든 재앙을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은 그대로 두고 너희들에게 의통을 붙여주리라. 순진한 마음으로 의통을 알아두라. 몸돌이킬 여가가 없고, 홍수에 밀리듯 하리라 (동곡비서)
예수믿는 사람은 예수가 재림한다고 기다리고, 불교믿는 사람은 미륵이 출세한다고 기다리고, 동학신도는 최수운(崔水雲)이 재림한다고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 내가 출세할 때에는 천지가 진동하고 뇌성이 대작하리라. 잘못 닦은 자는 죽지는 아니하나 앉을 자리가 없어서 참석하지 못할 것이요, 갈 때에는 따라오지 못하고 엎어지리라. (동곡비서)
성인의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옛날 자사(子思)는 성인이라. 위후(魏候)에게 말하되 '약차불이면 국무유의(若此不已 國無遺矣)'라 하였으나, 위후가 그의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위나라가 참멸하였나니, 나의 말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니 너는 나의 말을 믿어라. 나의 말을 믿는 자가 한사람만 있어도 나의 일은 되리라 (동곡비서)
나는 천지일월(天地日月)이니라 (동곡비서)
11 관련 교전
- 동곡비서: 증산의 가장 맏제자인 김형렬이 지었다.
- 대순전경(大順典經): 대순전경은 증산교 교주 이상호가 강일순을 직접 겪었던 증산계 8개 종단 원로들의 증언을 수집하여 만든, 강일순에 대한 사실상의 1차 사료이다. 도전[72]이든 전경[73]이든 모두 대순전경을 기본사료로 삼았다. 그러나 증언을 하지 않은 원로들이 많았고(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등), 유교적 관점에서 강일순을 바라보고 표현을 윤색하거나 누락시킨 증언이 많아 강일순을 전적으로 파악하기엔 매우 부족한 자료이다. 또 판본을 찍어내면서 증산교 교주(이상호, 이청음)의 우상화나 신격화를 시도했다는 지적이 있어서 오히려 초판본이 가장 정확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름때문에 햇갈릴 수 있겠는데 대순진리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 천지개벽경: 이중성씨가 지은 책과 정영규씨가 지은 책이 따로 있다.
- 중화경
- 현무경
- ↑ 이 사진은 강일순의 딸이 세운 교단인 증산법종교가 보유한 사진이다. 강일순의 마지막 제자 차경석에게 이복동생 차윤경(車輪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차윤경은 주판례(朱判禮)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주판례를 통해 이 사진이 증산법종교로 전달되었다. 참조링크.
- ↑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1871년 11월 1일~1909년 8월 9일.
- ↑ 정확히 말하면 진주 강씨 박사공파(博士公派)에서 갈라진 통계공파(通溪公派)이며, 시조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1세로 하여 헤아리면 43세이다. 강일순의 14대조 강이온(姜利溫)이 연산군 시절 도승지였는데 입바른 소리를 하다 1505년에 목이 베이자, 손자 강세의(姜世義 1492-1547)가 고부로 낙향하여 살았다. 그 후 3백 년 넘게 고부 인근에 후손들이 모여 살았다. 강일순은 13대조 강부(강세의의 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종손이기도 했다.
- ↑ 충청도 김일부, 전라도 강증산, 경상도 박만수, 지리산 문도사
- ↑ 현재의 주소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팔선리 서산마을. 강일순의 본가에서 북쪽으로 4.5 km쯤 떨어져 있다. 강일순의 외갓집 건물은 이미 허물어져 지금은 자취를 찾기 힘들다.
- ↑ 현 주소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 신송마을에서 서쪽으로 1 km 떨어진 곳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
- ↑ 사실 조선시대의 법적인 기준으로 4대 이상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그 자손은 양반의 자격을 잃는다. 하지만 법적으로 양반의 자격을 잃었다 해도 자신들은 양반이며 천민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 ↑ 증산도 도전 등을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아버지가 옆마을에서 무리하여 훈장을 초빙하여 글공부를 시키는데, 훈장이 천자문을 펴고 하늘천 따지를 가르치자 거기까지만 읽더니 더 이상 따라 익히려 하질 않았다. 그래서 왜 공부하려 하지 않느냐 했더니 "하늘 천을 배워 하늘의 이치를 알고, 따지를 배워 땅의 이치를 배웠다면 더 배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천 따지, 두 글자만 배우고 혼자서 한학을 익힘은 말이 안 되므로 이 일화는 후대의 증산종교단체들에서 교조 강일순을 미화, 과장한 것일 것이다. 증산천사공사기 등 초기기록에서는 강일순이 매우 영특하여 한학을 쉽게 배웠다고는 해도, 하늘천 따지만을 배우고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는 설명하지 않는다.
- ↑ 현 주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
- ↑ 어떤 사람들, 특히 원불교 쪽 사람들은 이때 강일순이 받았다는 책이 아래에서 설명할, 강순임이 송규에게 건네주었다는 정심요결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정말로 이때 책을 받긴 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 ↑ 사실 이런 식의 왜곡/변형 주장은 종교사적으로 흔하다. 전술한 남학의 왜곡도 한 예.
- ↑ 주류 학계에서 인정하는 문헌인 대순전경의 경우 12판까지 나왔으나 도전은 2008년경에 개정판이 나왔을 뿐이다.
- ↑ 시루산이라고도 부르며, 이 지명을 한자로 번역하면 증산甑山이 된다. 강일순은 호를 동네 앞산에서 딴 것이다. 강일순의 부모 강문회 부부의 합장묘도 시루봉에 있다.
- ↑ 대원사에서 수도한 기간이 서로 말이 다르다. 어디에서는 21일, 어디에서는 49일이라고 서술하므로, 기간에 대해선 명시하지 않고 다만 대원사에서 수도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도통을 얻은 날도 어디서는 음력 7월 5일, 어디서는 음력 7월 7일이라고 주장한다. 강일순은 이 때 얻은 경지로는 부족했는지, 추후 비슷한 집중수련을 한 번 더한다.
- ↑ 현재의 주소로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銅谷)이란 말이 '구릿골'이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 증산 종교 쪽 글에서는 구릿골이라느니 구릿골 약방이라느니 하고 표현하기도 한다.
- ↑ 증산도 쪽 자료는 강일순이 지어준 초명은 이순(二順)이었고, '순임'이라는 이름은 결혼한 뒤 남편이 지어준 이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순임 여사가 개창한 증산법종교 교단에서는 이순과 순임이 모두 강일순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순임이 본명이었다고 주장한다.
- ↑ 증산도 도전 5편 195장 참조. 나이가 맞는 과부와 홀아비가 크게 잔치를 벌이고 재혼해야 한다는 박공우를 칭찬한다.
- ↑ 이 사람이 특히 X맨이었다. 강일순 본인도 차경석을 제자로 받으면서 "네가 나를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는구나" 라고 한탄하거나, 제자들과 다같이 멱을 감다가 갑자기 차경석의 다리를 붙잡고 "이무기 잡았다!" 라고 외쳤다가 차경석이 "제 다리인데요?" 하자 모르는 척 "어, 그랬냐?"하며 놓아주거나 갑자기 분노하여 차경석을 향해 역적 놈이라고 외치고 차경석에게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꿈만 꾸는 자도 죽으리라" 등의 미래를 내다본 발언을 많이 하였다.
- ↑ 1880년 5월 4일 - 1935년 11월 1일. 향년 56세(만 55세), 날짜 표기는 양력
- ↑ 이전까지 강일순은 일대에서 기인으로 유명했고 공무원들을 상대로도 상당히 뻣뻣하게 대했으므로, 신도들의 배신감은 더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강일순이 공무원들을 상대로 보인 행동 중에는 군수를 찾아가 거적에 싼 썩은 개머리를 선물이랍시고 들이민 적도 있을 정도다.
- ↑ 이 건물 뒤에 대나무 밭이 있는데 강일순이 손수 심은 대나무도 있다고 한다. 강일순 사망 이후로 건물주가 바뀌면서 관리하지 않았던 것을 대순진리회 측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다듬으면서 처음에는 초가집으로 고쳤다가 2005년을 거치며 기와집으로 개수했다. 원형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
- ↑ 일부 한의원이나 한약방에서는 복용자에 따라서는 약이 아니라 차처럼 마시라고 할 정도. 실제로 건강차로도 파는 걸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부작용도 진짜 체질이 안 맞는 사람이 약간의 소화불량이나 설사가 나오는 정도로 심하지 않고, 다양한 약재를 가감할 수 있어 변형도 많은 약이다. 유명한 십전대보탕도 사물탕에 사군자탕 처방과 몇몇 약재를 추가한 것.
- ↑ 강일순이 정말로 의학에 어느 정도 된 지식이 있다면 당시 의학서적에 나온 대로 해인초를 달여 먹이거나 생강, 비자, 석류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일순은 기생충으로 인한 복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게 해 기생충을 잠시 기절시켜 놓거나 배를 손으로 만져 지압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니 제대로 나을 리가...
- ↑ 소화불량과 체증에 주로 쓰는 환약인데,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 시골 장에 내다 파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간단한 약이다. 만병통치약마냥 각종 통증에 임시방편으로 막 먹기도 한다.
- ↑ 이 약장도 강일순의 성물이라고 강일순 교단 사이에서 여러 차례 오고갔던 경력이 있다.
- ↑ 강일순의 정확한 사망장소에 대하여 자료들간 설명이 서로 다르다. 어떤 자료에서는 위치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며, 어떤 자료는 동곡약방, 어떤 자료는 김형렬의 집이라고 한다. 둘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 ↑ 늑막강 안에 고름이 괴는 병. 농흉膿胸. 어린이나 노인 등 면역력이 약하거나 약해진 사람이 잘 걸린다.
- ↑ 신적 존재가 지상에서 인간들이 겪는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이를 대속한다는 주장은 매우 그리스도교스러우므로, 증산계 종교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기는 시각도 있다.
- ↑ 양력 11월 9일. 증산교단은 특히 음력을 중요시한다.
- ↑ 몇몇 강일순 숭배 교단의 경전에는 죽어서 상여가 나가면서도 강일순이 몇 차례 이적을 보여 제자들이 마음을 다잡았다고 하는데, 정작 그렇게 주장하는 교단들의 경전에도 고판례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제자들이 허둥대면서 고판례에게 강일순의 사망을 알리려 하지 않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다(...)
- ↑ 강일순 사후 당시 관습에 따라 초빈을 했는데, 그의 시신을 성유물이라고 본 강일순계 교단의 창시자들이 각자가 다 강일순의 유가족들을 끼고 서로 차지하려고 난투극을 벌였다.
- ↑ 강순임의 초명은 이순(二順)이다. 증산도 쪽 자료에서는 순임이라는 이름을 남편이 지어주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증산법종교 측에서는 초명이 이순이었음은 인정하지만, 순임이란 이름도 강일순이 지어준 본명이라고 하여 말이 다르다.
- ↑ 아주 없지는 않다. 최근 2004년에 출범한 "태을선도"라는 단체에서는 도통맥의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다.
- ↑ 증산도 도전에 내용을 보자면, 강일순 본인도 나중에 아차 싶었는지(...) 후천에는 부녀자들 세상이 되려 한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판대까지야 여자에게 주겠느냐. 판대야 남자가 쥐지'라고 슬쩍 말을 바꾼다.
- ↑ 거지처럼 산다던가, 공공장소에서 고성방가를 한다던가
- ↑ 탄갈(殫竭)이란 말이 힘을 몽땅 쏟았다는 뜻이다.
- ↑ 광복 이후 태극도라는 이름으로 재등장
- ↑ 지금도 보천교 자체는 남이있다. 그러나 교세는 그 시절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축된 상황.
- ↑ 그외에도 칠성경, 진액주, 진법주, 개벽주, 서전서문 등의 주문들이 있다. 각 종단마다 읽는방법, 쓰는방법, 뜻풀이, 주문의 내용이 다른건 기본이다.
- ↑ 예를 들면 단전호흡이나 기공체조
- ↑ 생몰년도 1900~1962. 본명은 송도군(宋道君)으로 경상북도 성주군 사람이다. 1918년에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을 만나 귀의하면서 법명으로 규(奎), 법호인 정산(鼎山)을 받았다. 따라서 강순임과 만났을 때엔 당연히 속명인 '송도군'이란 이름이었다. 송규는 1943년에 소태산이 사망하자 원불교 2대 교주(종법사)가 되어 원불교인들을 이끌었다.
- ↑ 원불교 자료를 보면 이때 강순임이 송규를 대하는 태도는 좋아하는 오빠를 대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서로 만났을 당시 송규 나이 18세, 강순임 나이 14세인 관계로 실제로 강순임이 송규를 '오빠'라고 불렀다고 한다.
- ↑ 강일순의 제자인 이치복과 김형국이 정심요결과 내용상 같은 책이라는 '영보국정정론'을 (훗날 증산계 종교인 삼덕교의 창교주가 되는) 허욱에게 전해주고 수련시킨 적도 있다 하니, 구한말에 이른바 도인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보국정정론' 계열의 서적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서, 강일순의 제자들 중에서도 강일순과 별개로 이런 서적을 구하여 참고하려 수련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 ↑ 소윤하는 이후 쇠말뚝을 뽑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 ↑ 나무위키에서는 대순진리회에서 갈라져나온 대진성주회나 용화대미륵선도회 같은 대순진리회 분파들도 함께 대순진리회로 묶어서 설명한다.
- ↑ 상생방송
- ↑ 강일순은 세상의 부조리와 문제들이 기존 역사에서 수없이 쌓인 원한 때문이라 보고 천지공사라는 이름으로 무속적 행위를 하면서 이를 해원(한풀이)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교나 동학에서는 이런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 ↑ 강일순을 말함. 이하 강일순을 뜻하는 부분에는 강일순 표기
- ↑ 대순전경 12판을 기준으로 해설을 단 책이다. 본 위키에 올라온 부분은 원문 부분.
- ↑ 타 사이트에 올라온 대순전경 초판 원문하고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링크 사이트는 증산도와의 마찰과 과도한 비속어 사용 등으로 워닝이 걸려 우회필요.
- ↑ 이 부분에 있어서는 간접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손빈병법 상권 첫 부분, 견위왕편에 보면, 요임금도 따르지 않는 일곱 부족을 전쟁을 통해 천하를 안정시켰다고 나온다. 이는 단주 이전에도 원한이 있을 수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손빈병법 // 손빈 저/이병호 옮김, 1998, 59pg // 손빈 저 / 중국고전연구회 역, 1994, 33pg) 고대 전쟁의 양상을 안다면, 그 당시에 요임금이 전쟁을 벌리면서 원한을 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서적에 대해 위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손빈병법은 한서 예문지에만 있어서 위서논란이 있다가 1972년 한나라대 고분발굴에서 일부 죽간이 출토되어 해석되고 번역된 책이다. 중국어 원문도 있으니 중국어 원문을 읽을 수 있으면 참고하면 좋다.
- ↑ 인도에서 출가문화는 아주 보편적이었고, 석가모니 본인이 출가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지도 않았다. 재가자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은 불경 곳곳에 보인다. 남의 자식을 유인해 간다는 비판은 조선조 유학자들이 불교를 공격할 때 쓰던 상투적 표현 중 하나다.
- ↑ 기독교의 구원은 조상 제사와 하등 상관이 없다. 이 역시 조선인들의 사고방식에 입각한 비판.
- ↑ 아담 샬이 정비하여 탄생한 게 바로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서 공식 역법으로 각계각층에서 널리 쓰인 시헌력이다. 마테오 리치가 전한 것은 서양식 수학 계산법/기하학/측량술과 서양식 시계와 천문기구 제작법, 서양금(그리비코드), 삼릉경(프리즘)이다.
- ↑ 유물로만 따지면 스웨덴에서 바이킹들이 부적으로 사용하던 불상이 발굴된 적도 있다. 해당 불상은 스웨덴 우표에도 도안으로 등장한다.
- ↑ 학문을 좋아했으며,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설 때 반대하다 퇴위된다.
- ↑ 사명당의 글을 모은 사명당대사집이 현존하고 번역본도 존재하는데, 만일 이런 내용이 있었다면 진즉에 언급되었을 것이다. 일본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고 여러 인사들을 만난(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 내 도요토미에 대한 비판 여론까지 기록하고 있는) 강항의 간양록에도 그런 공주의 존재는 없다.
- ↑ 강일순의 사상은 한국종교의 창시자중에서도 가장 무속적 도교적 색체가 짙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에게 유교의 틀을 벗지 못하였다고 비판할 정도 참고로 최제우는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가 합일된것이라. 그러나 도인즉 같으나 이치는 다르니라" 라고 미리 밝힌바 있다.
- ↑ 최시형 본인도 신분 차별 반대를 주장하였고, 교단 내에서 교도들이 적서차별을 벌이면 이를 고치도록 했다.
- ↑ 이 때문에 원불교 경전에서 박중빈과 그 후계자들의 행적에서 여러 기이한 현상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이는 본문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동학 역시 마찬가지로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을 갖는 것을 경계하고 행실을 바르게 하며 마음을 바로 닦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강일순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기이한 현상과 주술적 행위를 매우 맹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 ↑ 증산도 도전 5편 4장
- ↑ 조선시대 죄인들의 일과 중 하나가 바로 관아에서 쓸 짚신을 만드는 것이었다.
- ↑ 도전 9편 121장
- ↑ 증산도 도전 5편 80장
- ↑ 도전 6편 47장
- ↑ 초기 기록인 증산천지공사기 등에서도 나오며, 대부분의 강일순계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나오기에 특정 교단에서만 창작했다고 보긴 힘들다.
- ↑ 대나무 이야기가 나와서 쓰는데 천지공사中에 '대나무 11마디' 공사가 있다.
관심 있으면 찾아보도록 - ↑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는 한데 세력이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미약하다.
- ↑ 다른 버전에는 "앞으로 시두가 대발하면 내 세상이 온줄 알아라"도 있다. 아무튼 천연두의 등장이 큰 종교적 변화가 될것이라는 뜻같다.
- ↑ 事之當旺 在於天地 必不在人 然而 無人 無天地故 天地生人用人 不參於 天地用人之時 何可曰 人生乎 사지당왕 재어천지 필불재인 연이 무인 무천지고 천지생인용인 불참어 천지용인지시 하가왈 인생호
- ↑ 수석제자였던 김형렬 지음
- ↑ 증산도 교전
- ↑ 대순진리회 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