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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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2017 시즌 스쿼드
1 유현 · 2 황현수 · 3 심우연 · 4 김동우 · 5 오스마르 · 6 주세종 · 7 김치우 · 8 이상호 · 9 데얀 · 10 박주영 · 11 윤일록 · 13 고요한 · 14 조찬호 · 15 김원식 · 16 하대성 · 17 신광훈 · 19 심상민 · 20 정인환 · 21 양한빈 · 22 윤승원 · 23 이석현 · 25 전호준 · 26 김주영 · 27 김정환 · 29 황기욱 · 30 김철호 · 31 손무빈 · 32 김한길 · 33 박민규 · 34 마우링요 · 35 임민혁 · 36 박성민 · 38 김근환 · 40 김원균 · 43 윤종규 · 45 신성재 · 55 곽태휘 · 88 이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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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No.13
고요한 (Go Yo-han)
생년월일1988년 3월 10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경상남도 창원시[1]
포지션라이트윙어, 라이트백, 중앙 미드필더
신체조건170cm, 65kg
등번호13번
소속팀FC 서울(2004~)
국가대표8경기

FC 서울의 원클럽맨이자 이름처럼 고요하지 않은 서울의 에이스, 차기 레전드

1 소개

한국의 축구선수. 조광래의 아이들 마지막 세대로 2004년 토월 중학교를 중퇴하고 FC 서울에 입단해 일찌감치 프로 무대에 발을 들였다.
원클럽맨으로 고명진이 떠난 지금 서울 짬밥을 가장 오래 먹은 선수다. 그렇지만 아직 20대

2 FC서울 에서

2.1 2004 ~ 2010년 까지

2006년, 삼성 하우젠 컵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른다. 이후 주전 경쟁에 밀려 2007, 2008시즌 각각 3경기와 2경기에 그치고 만다. 2009년 포지션이 겹쳤던 이청용이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한 후 주전 출장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 2009시즌 16경기에 출장해 고명진과 함께 쌍용을 대체할 고라인으로 기대받았다. 그리고 2010년 7월 17일 전남 드래곤즈 전에서 프로 진출 7년만에 데뷔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해에는 제파로프, 이승렬, 김치우, 하대성 등과의 주전 경쟁과 부상등으로 7경기 출장에 그쳤다.

2.2 주전으로 거듭난 2011년

이윽고 대망의 2011시즌. 고명진과 고요한. 투고는 마침내 때를 만나게 된다. 10시즌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서울의 오른쪽 라인은 최효진의 입대와 최태욱의 부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 이규로가 오른쪽 풀백으로 나섰지만 그간 출장기회가 적었던 탓에 불안한 모습을 여러차례 나타내자 최용수 감독은 급한대로 수비형 미드필더 최현태, 왼쪽 풀백 현영민 심지어 윙어인 김태환을 오른쪽 풀백에 기용했지만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최현태가 부상당하고 이규로가 시즌 중반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2] 그해 9월. 최 감독은 신의 한수를 던지게 된다. 고요한의 풀백 전향이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시선도 있었으나 고요한은 최감독의 신뢰아래 포텐셜을 폭발시킨다. 공격형 미드필더 출신다운 뛰어난 스피드와 왕성한 오버래핑, 생각외로 준수한 수비력으로 무너진 우측면 공격을 어느정도 보완해줬고 리션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2011시즌 기록은 19경기 3골. 서울의 진정한 주전으로 거듭난 한해였다.

2.3 풀백으로 변신! 2012년

2012시즌 부터는 풀타임 수비수로 출전하며 꾸준히 활약중이며 김창수, 오범석 등과 함께 리그 정상급 풀백으로 인정받았다. 리그 성적이나 팀 공헌도로 따지면 이 2명보다도 한 수위. 에스쿠데로 임대 이전까지 서울의 우측면이 상당히 부실했음에도[3] 리그 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하다 우승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공수에서 고군분투한 고요한의 공이 컸다. 이러한 공적은 최강희 감독의 눈에도 들어 국가대표에도 선발되었다.

2.4 다시 윙어로. 2013년

그러나 13시즌 들어서는 수비력에서 답보 내지는 퇴화한 모습을 보여주며[4] 긴급수혈된 차두리에게 풀백 자리를 빼았겼다. 대신 본래 포지션인 우측면 미드필더로 다시 바꿨는데 이게 효과를 보며 살아나기 시작했다.

4월 20일 대구전에서 데얀의 패스를 받아 팀의 첫골을 성공시켰다. 이전까지 서울은 리그 7경기 무승이라는 극심한 부진을 겪고있었는데 전반 15분이라는 이른 시간에 득점에 성공하며 경기를 편하게 이끌어가게 만들었다. 골은 결승골이 되었고 서울은 4-0 대승을 거뒀다.

4월 28일 강원전에서 2골 1도움으로 팀의 역전승을 이끄는 등 환상적인 공격력을 선보였다. 이 강원전은 고요한 인생경기라고 불린다. 서울이 7경기 무승에서 탈출하자마자 다시 패배의 수렁으로 빠질 수 있었던 경기였는데 위기에 빠진 팀을 하드캐리했다.
자세한 건 하이라이트 참조.
고요한 인생경기 강원전 하이라이트

8월 15일 대전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3-2승리를 견인했다. 당시 FC서울은 후반 말미에 승부를 결정짓는 극장경기가 많았는데 고요한이 극장경기의 주인공이 된 적이 많았다.

8월 22일 ACL 8강 1차전 알 아흘리 원정경기에서 데얀의 선제골을 도왔다. 팀은 1-1 무승부를 거뒀다.

9월 25일 ACL 4강 1차전 에스테그랄전 에서 전반에 데얀이 넣은 선제골의 시발점이 되는 크로스를 올렸고 후반에 윤일록의 패스를 받아 쐐기골을 넣었다.# 이날 경기에서 그야말로 미친활약을 보여주며 팀 승리의 1등공신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5 다시 중앙미드필더로. 2014년

또 포지션 변경을 했다. 중앙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도 하고 팀은 본격적으로 3백시스템을 가동했기 때문에 고요한 개인적으로 혼란이 컸던 시즌이었다. 시즌 전체적으로 부진하며 고요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리그 32경기 출전 4골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8월31일 제주전에서는 경기 종료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교체투입되었으나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당시 에이스였던 윤일록에게 디스 당했다.
그 유명한 아~ 잘 좀 하라고!

그러나 3월 11일 베이징 궈안 원정에서 동점골을 넣거나 11월 9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 원정에서 헤딩으로 귀중한 결승골을 넣는 등 중요할 때 뭔가 하나 해주기도 했다.

2.6 2015년

전년에 비해 폼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리그 33경기 출전 2골 1도움으로 부진했다.

4월 7일 ACL 조별리그 4라운드 웨스턴 시드니 원정에서 하프타임에 교체출전하여 활발한 활약을 펼쳤고 후반 27분 에벨톤의 패스를 받아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팀은 골라인 오심등의 불운 끝에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4월 18일 K리그 클래식 7라운드 수원 삼성 원정에서 오른쪽 윙어로 선발출장하였으나 오른쪽 풀백인 차두리가 불의의 부상으로 아웃되며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갔다. 그러나 최용수감독의 그 용병술은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끝났고 고요한은 팀의 1-5 패배의 빌미가 되었다. 특히 염기훈이 터뜨린 수원의 두 번째 골 장면에서 정대세에게 몸싸움으로 완전히 농락당한 장면은 차두리의 공백을 뼈저리게 느끼게했고 고요한이 수비적으로 무엇이 불안한 선수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4월 26일 K리그 클래식 8라운드 광주 FC 원정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출장하였고 전반 40분 왼쪽에서 김치우가 올려준 크로스를 이어받아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후 경기에서 꾸준한 기회를 받았으나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깊은 부진에 빠졌다.
그리고 여름 이적시장에서 다카하기 요지로가 영입되어 몰리나-다카하기-오스마르라는 중원 라인이 갖춰졌고 고요한은 벤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10월 18일 K리그 클래식 34라운드 성남 FC 원정에서 0:1로 뒤진 후반 13분 김동우를 대신하여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았고 후반 41분엔 오스마르가 떨궈준 공을 이어받아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팀은 고요한의 동점골에 탄력을 받아 아드리아노가 역전골까지 터뜨리며 2-1 승리를 거두었다.

11월 7일 K리그 클래식 36라운드 수원 삼성 과의 홈 경기에서 선발출장하여 활발한 모습을 보였고 후반 17분 윤주태의 세 번째 골을 도우며 2015시즌 리그 첫 어시스트를 추가했다.

2.7 최전성기 2016년

킹캇요한으로의 진화
아데박 못지 않은 서울의 실질적인 에이스

차두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시 오른쪽 윙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했다.

3월 16일 ACL 조별리그 3라운드 산둥 루넝 원정에 선발 출장했고 결승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다. 팀은 4:1로 승리했다. 이로써 3년 연속 ACL 조별리그 득점을 기록했다. (2014 vs베이징 궈안원정, 2015 vs웨스턴 시드니원정, 2016 vs산둥 루넝원정)

5월 25일, ACL 16강 2차전 우라와 레즈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여 연장까지 풀타임 활약하였다. 특히 연장 후반 15분을 넘어서 추가시간 1분에 극적인 왼발 중거리포를 터뜨리며 이른바 서울 극장을 연출하면서 팀을 승부차기로 이끌었고, 본인도 승부차기 5번 키커로 나서 성공하면서 승부차기 최종 스코어 7:6으로 승리하는 것에 기여하였다.
정말 오랜만에 극장본능을 발휘한 고요한이었고 특유의 강한 승부욕을 앞세워 이런 장면에서 더욱 빛나는 선수라는 걸 재차 증명하였다.

6월 6일 K리그 클래식 12라운드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홈 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0-1로 뒤지던 후반 2분 동점골과 후반 10분 역전골을 넣으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듯...했지만 팀은 막장 수비를 거듭한 끝에 3-4로 재역전당하며 빛 바랜 활약이 되었다.

6월 12일 K리그 클래식 13라운드 수원 FC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후반 38분 박주영쐐기골을 도왔다. 이 날 경기에서 드리블 돌파를 몇차례 선보이며 그야말로 물이 오른 모습을 보였다.

6월 15일 K리그 클래식 14라운드 광주 FC와의 홈 경기에 모처럼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장하였다. 중앙 미드필더를 봤던 2014, 15 시즌에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팬들의 우려가 있었으나 이는 기우였다. 이 날 경기에서도 활발한 모습을 보이며 상대팀을 괴롭혔고 결국 후반 25분, 데얀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이 경기에서도 공격포인트를 추가하며 3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게 되었다.

광주전 활약으로 K리그 클래식 14라운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시즌 중반까지 서울의 에이스, 오스마르 급 정도의 활약을 해주었으나, 7월 9일 울산전 이후 미지의 부상으로 회복중이다. 서울팬들은 고요한의 빈자리로 인해 우는 상황.

8월 24일 ACL 8강 1차전 산둥 루넝과의 홈 경기에서 교체명단에 들며 부상 복귀를 알렸고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투입되며 그라운드를 밟았다.

부상 복귀 이후로는 초반과 다른 영 좋지 않은 폼으로 일관하며 서울팬들의 걱정을 샀으나 황선홍호가 시즌 후반에 다시 순항하기 시작하면서 폼이 많이 올라온 상태. 9월 21일 수원 FC와의 경기에서 경기 막판 윤주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으며, 울산과의 리그 경기와 전북과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출전해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

3 국가대표

2005~2007년까지 꾸준히 청소년 대표에 선발되었고 2009년 10월 14일 세네갈전에서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다. 조광래호에서는 발탁 소식이 없다가 2014년 월드컵 예선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오른쪽 수비수로 최강희호에 발탁되어 풀타임을 소화했다. 하지만 최악의 폼을 보이며 2-2로 무승부를 끝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숙한 오버래핑, 트래핑, 패스를 보이는 등 최악의 컨디션 난조로 우즈벡 선수들에게 집중적으로 공략당하는 굴욕을 겪어 한동안은 비난을 받았다. 13시즌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꾸고 나서는 홍명보호의 동아시아컵 차출 이후 국대에 차출되지 못하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수비력보단 공격전개능력이 돋보이는 선수로 민첩한 움직임을 살린 돌파와 활발한 오버래핑이 돋보인다. 어릴 시절부터 프로에서 다듬어져 기본기도 탄탄한 편이다. 단신이라 공중볼과 경합에서 약점을 보이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더 많이 뛰는데 주력하는 편. 중앙으로 기용될 때의 모습은 많이 실망스럽다. 2009시즌 AFC 챔피언스리그 움살랄전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는데 서울의 중원은 붕괴, 팀은 8강에서 탈락하고 만다.

5 기타

고명진과는 88년생 동갑이지만 빠른 년생인 고명진을 형이라고 부른다. 생일도 2개월밖에 차이 안 나면서..

윤일록과의 관계가 재미있는데 터널캠에서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팬들에겐 소소한 웃음거리.

2015년 12월 5일 무용강사 겸 쇼핑몰 대표인 오수연씨와 결혼하였다. #

2015년 여름에 해외 진출을 타진했고 중동에서 이적제의도 들어왔으나 차두리 은퇴 이후를 걱정한 구단의 만류에 의리로 남았다고 한다.##
근데 2015년 여름의 고요한은 중동에서 이적제의가 들어오는게 신기했던 시기[5]

6 같이 보기

FC 서울 2017 시즌 스쿼드
등번호이름포지션국적생년월일비고
1유현GK30px1984년 8월 1일
2황현수DF30px1995년 7월 22일
3심우연DF30px1985년 04월 03일
4김동우DF30px1988년 2월 5일
5오스마르MF30px1988년 6월 5일
6주세종MF30px1990년 10월 30일
7김치우DF30px1983년 11월 11일
8이상호MF30px1987년 5월 9일
9데얀FW30px1981년 7월 27일
10박주영FW30px1985년 7월 10일부주장
11윤일록FW30px1992년 3월 7일
13고요한MF30px1988년 3월 10일
14조찬호MF30px1986년 4월 10일
15김원식MF30px1991년 11월 5일
16하대성MF30px1985년 3월 2일
17신광훈DF30px1987년 3월 18일
19심상민DF30px1993년 5월 21일
20정인환DF30px1986년 12월 15일
21양한빈GK30px1991년 8월 30일
22윤승원MF30px1995년 2월 11일
23이석현MF30px1990년 6월 13일
25전호준DF30px1994년 2월 3일
26김주영MF30px1997년 5월 5일
27김정환FW30px1997년 1월 4일
29황기욱MF30px1996년 6월 10일
30김철호GK30px1995년 10월 25일
31손무빈GK30px1998년 5월 23일
32김한길MF30px1995년 6월 21일
33박민규DF30px1995년 8월 10일
34마우링요FW30px1989년 12월 10일
35임민혁MF30px1997년 3월 5일
36박성민FW30px1998년 12월 2일
38김근환DF30px1986년 8월 12일
40김원균DF30px1992년 5월 1일
43윤종규MF30px1998년 3월 20일
45신성재MF30px1997년 1월 27일
55곽태휘DF30px1981년 7월 8일width=30&align=center
88이규로DF30px1988년 8월 20일
  1. 마산시.
  2. 이규로는 결국 시즌 종료후 인천으로 트레이드되었고 그곳에서도 부상으로 한동안 고생했으나 중반이후 반전에 성공, 주전 수비수로 도약했다.
  3. 데얀이 중앙에서 상대 수비진을 흔들어 끌어내 공간을 만들면 왼쪽의 몰리나가 중앙으로 침투하고 오른쪽에서 최태욱이나 김태환이 빠른 스피드로 수비진 배후로 돌아들어가는 플레이를 요구했으나 저마다 부상과 부진으로 제몫을 못해줬다.
  4. 고요한만의 책임은 아니고 김진규&김주영의 극심한 부진, 아디의 노쇠화, 새로 들고나온 4-4-2의 부실한 압박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5. 아마 해외 진출을 타진하면서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