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태휘

FC 서울 2017 시즌 스쿼드
1 유현 · 2 황현수 · 3 심우연 · 4 김동우 · 5 오스마르 · 6 주세종 · 7 김치우 · 8 이상호 · 9 데얀 · 10 박주영 · 11 윤일록 · 13 고요한 · 14 조찬호 · 15 김원식 · 16 하대성 · 17 신광훈 · 19 심상민 · 20 정인환 · 21 양한빈 · 22 윤승원 · 23 이석현 · 25 전호준 · 26 김주영 · 27 김정환 · 29 황기욱 · 30 김철호 · 31 손무빈 · 32 김한길 · 33 박민규 · 34 마우링요 · 35 임민혁 · 36 박성민 · 38 김근환 · 40 김원균 · 43 윤종규 · 45 신성재 · 55 곽태휘 · 88 이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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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No.55
곽태휘 (郭泰輝 / Kwak Tae-Hwi)
생년월일1981년 7월 8일
국적대한민국
출생지경상북도 칠곡군
종교천주교
신체 조건188cm, 85kg
포지션센터백
등번호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5번
FC 서울 - 55번
프로입단2005년 FC 서울
소속팀FC 서울 (2005~2007)
전남 드래곤즈 (2007~2009)
교토 상가 FC (2010)
울산 현대 (2011~2012)
알 샤바브 FC (2013)
알 힐랄 FC (2013~2016)
FC 서울 (2016~)
국가대표54경기 5골
201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이동국
FW
데얀
MF
염기훈
MF
윤빛가람
MF
하대성
MF
에닝요
DF
박원재
DF
곽태휘
DF
조성환
DF
최철순
GK
김영광
2012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이동국
FW
데얀
MF
몰리나
MF
하대성
MF
황진성
MF
이근호
DF
아디
DF
정인환
DF
곽태휘
DF
김창수
GK
김용대

1 소개

장애를 극복한 한국의 골 넣는 수비수.

남들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늦게 시작하였으나 결국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대기만성의 표본.

대한민국축구선수, 현재 FC 서울 소속.

2 축구 선수 이전의 삶

대한민국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1981년 7월 8일 태어난 곽태휘는 중학교때까지만 해도 멀리뛰기 선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곽태휘는 왜관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축구에 흥미를 느꼈고 아버지인 곽인호씨에게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곽태휘의 말을 들은 곽인호씨는 처음엔 곽태휘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남들에 비해 너무 늦은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태휘는 축구부가 없는 학교에는 가지 않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순심고등학교 1학년때는 등교를 거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곽씨는 아들의 강한 고집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곽씨는 초등학교 시절 대구에서 열린 축구대회에서 왜관 지역 대표로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축구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농사일을 하고 있던 곽태휘의 할아버지는 곽씨가 축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했고 곽씨는 결국 축구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기에 곽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는 듯한 아들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곽씨는 곽태휘의 전학을 허락했고 부자는 곽씨의 모교인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찾아갔다. 1997년 7월 14일의 일이었다.

당시 대구공고는 중학교 축구부가 없어서 대구와 경북 일원에서 선수를 육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구공고로 찾아온 곽인호 부자에게 곽병유 감독은 '축구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다. 졸업할때까지 경기에 못 나갈 수도 있다'며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두 부자는 테스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달라며 간절하게 부탁했고 곽태휘는 우여곡절 끝에 곽병유 감독에게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테스트에서 곽태휘는 금세 곽병유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록 기본기는 부족했지만 180cm라는 큰 키와 빠른 스피드는 충분히 대성할 재목이었다. 여기에 곽태휘가 항렬로 자신의 손자뻘이라는 것까지 알게되면서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애착을 느꼈다.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합격점을 주었고 곽태휘는 마침내 축구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3 프로 데뷔 이전

전학 이후 곽병유 감독에게 겨울 내내 특훈을 받은 곽태휘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게 축구를 시작한데다가 평발이라는 불리한 조건까지 있었지만 곽태휘의 성장 속도는 빨랐다. 특히 높이뛰기 선수 생활을 통해 익힌 점프력과 큰 키는 곽태휘에게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을 시작한지 1년만에 큰 시련이 곽태휘에게 닥쳐왔다.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둔 2월, 곽태휘는 전지훈련에서 충주상고와 연습경기에 출전했다. 빗속에서 그라운드를 누비던 곽태휘는 경기 도중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상대 선수가 찬 공에 왼쪽 눈을 강타당했다. 서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일어나던 도중이라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비에 젖은 공은 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그라운드에 쓰러진 곽태휘는 왼쪽 눈의 망막이 찢어져 버렸고 경기 다음 날에 전안방출혈 증세까지 나타났다. 곽태휘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12시간 동안 망막박리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곽태휘의 왼쪽 눈은 실명을 피하지 못했다. 망막이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회복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술이 끝난 후 곽태휘가 왼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알아볼 수 없는 뿌연 윤곽의 물체들로만 가득 차있을 뿐이었다.

한쪽 눈이 실명된 곽태휘의 소식을 접한 주변 인물들은 곽태휘에게 축구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곽태휘는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축구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치료를 위해 학교를 1년간 쉬고 복학한 곽태휘는 오른쪽 눈에 의지한 채 훈련을 거듭했다. 부족해진 원근감과 균형감각은 한 템포 빨리 움직이고 한발 더 뛰는 성실함으로 메꿔나갔고 3학년때 찾아온 허리디스크 역시 꾸준한 노력으로 이겨냈다. 투혼을 불사른 끝에 곽태휘는 성장을 거듭했고 고등학교 졸업 직전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포항 스틸러스 등 여러 팀들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고민에 빠진 곽태휘는 스승 곽병유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곽태휘의 고민을 들은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중앙대학교를 추천했다. 팀의 명성을 좇기보다는 대학에서 기본기를 쌓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

중앙대에 입학한 곽태휘는 실력을 인정받아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주장 완장까지 차게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런 곽태휘를 눈여겨본 팀은 K리그의 안양 LG (현 FC 서울)였다. 안양 LG는 곽태휘가 중앙대를 졸업한 이후 바로 프로로 데려가겠다면서 입단 제의를 해왔고 곽태휘는 안양의 제안을 수락했다. 꿈에도 그리던 K리그 입성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학교 4학년이던 2004년, 또다시 곽태휘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3년간 상비군으로 활약했던 올림픽 대표팀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아테네 올림픽 본선 출전이 좌절되고 만 것이다. 여기에 어깨 근육 부상까지 겹치면서 곽태휘는 선수 생할을 접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곽태휘는 부상을 털고 복귀하는데 성공했고 2005년에 FC 서울에 정식으로 입단한다.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지 8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프로 데뷔에 성공한 것이다.

4 프로 데뷔 이후

4.1 FC 서울 1기

2005년 FC 서울에 입단한 곽태휘는 리그컵에 주로 출전하며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다. 비록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곽태휘는 3년간 리그와 컵대회를 포함해 58경기를 치르며 조금씩 프로 무대에 적응해 나갔다. 그리고 2006년에는 여자친구 강수연씨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식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2007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곽태휘는 본의 아니게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서울은 아시안컵에서 국가대표로 맹활약한 김진규를 영입하길 원하고 있었고 김진규의 소속팀 전남 드래곤즈는 김진규를 보내는 대신 곽태휘를 트레이드로 영입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는 곽태휘에게 탐탁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던 서울에서 밀려나듯이 나가는 것도, 수도권을 떠나 지방인 전남 남해안으로 가는 것도 모두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4.2 전남 드래곤즈

하지만 전남 드래곤즈행은 오히려 곽태휘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로 작용했다. 당시 전남을 지휘하던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든 곽태휘는 전남의 주전자리를 단숨에 꿰차게 되었고 전남의 핵심 수비수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포항과의 2007 FA컵 결승전에서 곽태휘는 자신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만한 활약을 펼친다. 2-2로 경기가 팽팽하게 전개되던 결승 1차전 후반 42분, 곽태휘는 페널티 지역 정면에서 오른발로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이 골로 전남은 1차전에서 극적인 3-2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2차전에서도 전남은 곽태휘의 활약속에 포항에 승리하며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전남 감독을 지내며 그를 눈여겨본 허정무 감독의 부름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되기 시작해 조광래 체제를 거쳐 최강희 체제까지 꾸준히 부름을 받았다. 다만 유리몸이 항상 문제였는데 2008년 한해에만 2번(3월,11월) 수술대에 오르는 등 전남에서는 2시즌 반을 뛰는 동안 한 시즌을 온전히 치른 적이 없었다. 2011년 울산 입단 이전까지는 K리그에서의 족적은 그다지 크지 않다. 서울에서는 유망주 및 백업 수준이었고 전남에서도 2007년 FA컵 결승에서 골을 기록해 우승에 기여한것이 다였다. 전남 드래곤즈가 하위권을 탈피해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2009년에는 한 시즌내내 전열에서 이탈해 있었다.

4.3 교토 상가 FC

2010년에는 일본 J리그교토 상가 FC로 이적했으나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부상으로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4.4 울산 현대

2011년에는 울산 현대로 이적한 후 김호곤 감독의 베스트 일레븐만 주구장창 돌리는 전술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상 없이 한시즌을 소화하면서 리그컵 우승과 K리그 정규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AFC 챔피언스 리그/2012년에서도 울산의 중심으로 맹활약하였고, 특히 결승전에서는 헤딩 선제골까지 기록하며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위 사진이 바로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고 환호하는 장면.

그렇게 울산에게 우승컵을 안겨준 후...

4.5 알 샤바브

2013년 1월 18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샤바브로 1년 6개월간 이적이 확정되었다. 이적료는 약 21억 원.

4.6 알 힐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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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7일 알 힐랄로 이적하였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로 곽태휘는 오는 2015년 6월까지 알 힐랄 소속으로 뛰게 된다.

2014년 10월 1일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알 힐랄이 알 아인을 상대로 1승 1패 골 합계 4:2를 기록하면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1990년대만 해도 아시아의 깡패로 군림하던 알 힐랄이었으나, AFC 챔피언스 리그 체제로 개편한 이후로는 처음 결승이었고, 곽태휘 개인으로선 2012년 울산 이후 2년만에 다시 한번 결승 무대를 밟게 되었다. 다만 팀은 결승에서 서울을 꺾고 올라온 웨스턴 시드니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맹활약으로 인해 AFC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게다가 베스트 11 중 한국인은 곽태휘 한명 뿐이었다.

한편 소속팀인 알 힐랄 FC와의 계약이 2016년 여름에 만료된다. 그래서 이정수조병국처럼 K리그로 복귀할 것 같다는 추측이 계속 나오고 있다. 제발 러시아 월드컵까지만이라도 버텨주세요 ㅠㅠ

4.7 FC 서울 2기

그리고 2016년 7월 7일, 황선홍 감독의 부름으로 친정팀 FC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계약기간은 2018년 말까지로 8일 실시하는 메디컬 결과에 따라 정식 입단이 확정되게 된다.기사 다만 한가지 변수가 있으니 바로 나이. 계약이 만료되는 2018년에 곽태휘는 만 37세다. 관리시스템과 스포츠 의학이 발달한 현대 축구에선 자기관리만 잘하면 못뛸 나이는 아니지만 필드 플레이어에게 상당히 부담 되는 연령인건 분명하다.

일단 선수 본인은 2018년 월드컵 출전이란 동기가 뚜렷한 만큼 이를 위해 자기관리을 해나갈 것 이다. 서울이야 그정도 비용이 아쉬울 구단도 아니고 라커룸 리더 역할도 기대할 수 있는 선수인데다 당장의 수비불안을 해결하는게 급하니 추진한 영입이고. 황선홍 부임 초기에는 최용수 시절의 기조를 이어받아 쓰리백을 쓴 서울이지만 장기적으론 곽태휘를 중심으로한 4백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훈련에만 참가하고 있으며, 명단에는 들지 못 하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김남춘의 폼이 올라갔다.

그리고 26R 전남 드래곤즈전에서 선발 출장하였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모습이었으나 후반 45분 심판의 어이없는 오심으로 시즌 첫경기에서 퇴장당했다. 패널티 박스 안에서 상태 크로스를 저지하다 허벅지에 공을 맞았는데 손에 맞았다며 패널티 킥과 경고를 줘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영상을 보면 손은 고사하고 팔에도 닿지 않은게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다행히 상벌위에서 이 점을 참작해 퇴장으로 인한 출전정지와 제재금을 감면하여 다음 경기에 나설수 있게 되었다.

8월 24일 ACL 8강 1차전 산둥 루넝과의 홈 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산둥의 공격수 그라치아노 펠레를 꽁꽁 묶는 활약을 펼쳤다.

5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1년에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상비군에 발탁되어 국가대표 커리어를 시작했다. 2003년 대구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발탁되기도 했고 올림픽 대표로 제법 여러 경기들을 소화했지만 엔트리에서 최종 탈락하는 바람에 올림픽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고등학교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탓에 다른 선수들에 비해 부족한 경험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왼쪽 눈(사실상 실명...)과 평발, 허리디스크,어깨 근육 등 온몸이 종합병원이다보니 군대는 면제 판정을 받았다. 2008년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본인이 지도했던 소속팀에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월 칠레와의 친선 경기에서 대표팀에 데뷔하였다.

A매치 첫 골을 기록한 투르크메니스탄전동아시안컵 중국전 역전골 장면

2008년 2월 투르크메니스탄과의 월드컵 3차 예선에서 헤딩 선제골을 넣어 대표팀 첫 골을 신고했으며 2008년 동아시안컵 중국전에서 추가시간 역전골을 집어넣으며 3-2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다.[1] 대표팀에서는 세트 피스에서 특유의 득점 본능을 살려 '골 넣는 수비수' 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으나, 자책골을 종종 기록하는 바람에 반대 의미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도 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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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직전 불의의 부상으로 눈물을 삼키다

그런데 잦은 부상탓에 국제대회 경력은 불운했다. 국가대표 데뷔 이후 곧바로 소속팀 전남에서 왼쪽 발목 인대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 가까이를 날렸고, 2008년 10월 UAE와의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복귀하여 헤딩 추가골을 기록하였지만 또다시 오른 무릎 전방 십자인대 부상을 당해 해당 시즌을 마감했었다. 그래도 그의 피지컬과 세트 피스에서의 능력을 높게 산 허정무 감독의 신임 아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대표로 선발되었으나 본선 직전 열린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왼무릎 내측인대 부분파열로 월드컵 출전이 불발되었고[3] 2014년 브라질 월드컵때는 대표로 선발은 되었으나 홍명보 감독의 취임 이후 올림픽 대표 시절부터 적극 중용되던 홍정호-김영권 라인에 밀려[4] 단 1경기도 뛰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때는 나이가 만 37이라 출전이 불확실하다. 이동국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쪽도 정말 불운했던 선수.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고 인터뷰를 가졌으며, 당시 선수들에게 부족한 건 리더쉽이 아니라, 투혼이라고 밝혔다. 또한 홍명보의 아이들 설에 대해 홍명보의 아이들이 아닌 선수들이 대표팀의 분위기에 섞이기 어려웠을 거라고 소신있게 의견을 밝혔다.

슈틸리케호 체제에서도 꾸준히 발탁되고 있으며, 2015 AFC 아시안컵 명단에도 들어갔다. 당초에는 김주영, 김영권, 장현수에 밀려 백업 수비수로 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다. 하지만 김주영이 부상당하고, 장현수의 불안한 수비 및 카드 트러블 관리를 해야해서 조 1위를 경쟁해야 하는 호주와의 경기에 출장이 불가능하자 김영권과 함께 선발로 출전했다.

그리고 풍부한 경험으로 김영권을 커맨드하며 안정된 수비를 보여주며 무실점에 크게 기여했다. 이 경기에서도 김영권이 실수가 아예 안 나온 것은 아니나 김영권보다 경험이 많은 곽태휘가 옆에서 수비라인을 지휘하고, 제공권과 대인 마크까지 담당하면서 불안하던 김영권의 수비를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돌려놓는데 기여하면서 탄탄한 수비를 해냈다. 8강 우즈베키스탄전, 4강 이라크전에서도 수비진을 이끌며 전경기 무실점 승리에 일조했다.

그리고 결승전 0:1로 뒤진 상황에서 교체 가능한 공격수 자원조차 없는[5]상황이 닥치자 최전방 공격수를 자청했고, 슈틸리케 감독은 이를 받아들이고 도박수를 던진다. 그리고 호주의 장신 수비진과 경합을 벌이다가 마침내 손흥민의 인저리 타임 극적인 동점골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대회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아시안컵 베스트 11에도 선정되며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국가대표 경력에 영광스러운 이력을 한줄 추가하게 되었다.

34세의 나이에 대표팀의 중심이 되다

곽태휘로서는 아시안컵은 그간의 오명과 불운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데에 성공한 본인에게는 만족스러운 대회였을 것이다. 아시안컵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곽태휘만 나오면 축구팬들은 불안해하고 신뢰하지 못했었는데, 곽태휘 또한 몇 차례의 큰 실수나 불안한 수비를 보여주며 불안감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정작 리그에서는 그러한 모습은 거의 없었고 전남, 울산 시절에는 항상 수비진의 리더로 팀의 주장으로 활약하면서 안정적으로 수비를 하여 대표팀에서의 모습을 의아해하는 K리그 팬들도 많았다. 아시안컵 기간 그의 활약상은 그가 항상 불안하고 수비를 못하는 선수가 아니었음을, 팀 전술을 알맞게 맞추고 선수의 적절한 기용과 조합에 따라서 전력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지난 브라질 월드컵 이후 180도 달라진 대표팀과 함께 좋은 예가 되었다.

아시안컵 이후로도 꾸준히 슈틸리케호에 선발되어 주전으로 출전 중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러시아 월드컵을 대비해 젊은 선수들 위주로 꾸리면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줄 20대 후반, 30대 고참선수 일부를 섞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곽태휘와 정성룡. 현 대표팀 수비 라인에서 곽태휘의 존재감은 상당한데 2016년 6월 유럽 원정 2연전에서 그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수비진의 무게감이 매우 달랐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한편 곽태휘는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체력과 기량이 남아있는 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출전도 노리고 있다고 밝혔다.

5.1 통산 국가대표 기록

2016년 6월 16일 기준

연령출전
U - 1700
U - 2000
U - 2300
A 대표545
종합기록545

6 플레이 성향

피지컬이 막강하다. 2010년 3월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 디디에 드록바에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정대세도 한국 팀의 인상 깊은 선수로 190 장신에 힘 좋은 수비수를 언급했을 정도이다. 여기다 점프력도 엄청나다.[6]

이 뛰어난 피지컬을 바탕으로 대인 마크와 제공권 장악에 강점을 보이는 파이터형 수비수. 울산 철퇴 축구의 한 축으로 세트피스 가담시 무서운 존재감을 발휘하며, 3선에서 느닷없이 달려와서 내리 꽂는 헤딩슛이 일품. 2011년 울산에서는 9골을 기록해 같은 팀의 공격수인 김신욱보다도 많은 골을 넣어 팀내 최다득점자였을 정도.[7] 킥력도 나쁘진 않아서 중거리 슛이나 프리킥도 제법 많이 차는 편이다. 2008년 2월 동아시아컵 중국전에서 역전골을 넣었는데 뜬금없이 전방으로 오버래핑하여 슈팅을 때려 골을 넣는 장면은 공격수 못지 않은 공격가담을 보이기도 했다. 롱패스를 이용한 빌드업도 본디 커맨더형 수비수가 아니라는걸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팬들은 곽테리 또는 곽테라치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만 스피드가 느린 탓에[8] 공격수와의 1:1 상황이나 스피드 경합 상황이 오면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보인다. 넘어지고, 손으로 잡아채다 경고나 프리킥 및 pk 헌납 등... 아시아 레벨에서 울산처럼 철퇴를 휘두르며 웅크리고 있는 팀에선 괜찮지만 국가대표에선 아무래도 어려운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수비진을 내리고 버티는 전술이 아니라면 발이 빠른 파트너를 붙여주어 상호보완 하는게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쪽 눈이 안보이기 때문에 파트너 센터백과 골키퍼가 무조건 커버링 잘 해줘야 한다.

다른 국가대표 센터백 중 이정수와의 호흡이 최악인 것으로 유명했다. 본래 허정무호 시절에는 둘의 조합은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이정수의 중동 진출 이후 급격한 노쇠화의 영향인지 최강희호 시기 열린 2013년 2월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 전반전 내내 단 2번 패스하는 최악의 호흡을 선보이며 팀의 4-0 완패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 경기 이후 최강희 감독은 이정수를 대표팀에서 배제하고 곽태휘 중심으로 수비진을 꾸렸다.

플레이 스타일과는 별개로, 국가대표팀 내에서는 거의 최고참급 선수이기에 다른 후배 선수들의 컨트롤 타워 및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해주고 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에게는 믿음직스러운 고참이고, 후배 선수들에게는 존경받는 선배이니 플레이 스타일을 떠나서 팀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도 해주는 중.

7 기타

위에서 설명한대로 시각장애, 심지어 축구선수에게 최악인 평발에다 허리디스크까지 있던 상황에서 국가대표급 축구선수까지 대성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후배 축구선수들에게도 귀감이 될 인물이다.

안정환을 잇는 간만의 꽃미남 축구 스타지만, 이미 2006년 11월에 결혼한 품절남인데다가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 인터뷰를 들으면 상당히 깬다. 결혼도 구미시에서 했다.

우수한 피지컬, 괜찮은 킥, 웬만한 공격수를 능가하는 결정력 덕분에 공격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인터뷰에 따르면 고등학교 시절에 축구를 시작했던 탓에 공격수고 수비수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본인도 다시 태어나서 축구를 하게 된다면 공격수를 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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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아들바보팔불출로 알려져 있다. 경기장에 아들을 데려와 안고서 팬들에게 싸인을 해 줄 정도로 아들을 상당히 아끼는 듯.

의외로 야구선수 이호준과 친하다고 한다. 독일에서 재활할 때 만나서 쭉 친해졌다고 한다.

부상이 상당히 잦은 편이다. 축구선수를 시작한 이후 그의 부상 커리어 중 대표적인 것들만 종합해보자면...

  • 1999년(고등학교 3학년) → 왼쪽 눈 실명
  • 2000년 (1년 휴학 후 복학한 고등학교 3학년) → 허리디스크. 이후 허리디스크는 곽태휘의 고질병이 되었다.
  • 2004년 (대학교 4학년) → 어깨부상. 이 부상으로 곽태휘는 선수생활 은퇴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 2008년 → 왼쪽 발목 인대 파열(3월), 오른 무릎 전방 십자인대 손상(11월)
  • 2010년 → 왼무릎 내측인대 부분파열. 이 부상으로 곽태휘는 남아공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 2014년 → 왼쪽 발등 부상. 이것 때문에 곽태휘는 거의 4개월을 부상 치료로 날려먹었고 이로 인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월드컵에서도 홍정호김영권에 밀려 1분도 출전하지 못했다. 사실상 시즌아웃을 당한뒤 겨우 복귀한 선수들을 월드컵에 데려간 것을 고려하면 월드컵 당시 홍명보호의 선수 관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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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으로 고생을 많이해서인지 그의 미니홈피에는 이러한 문구가 걸려있다. 여려 역경을 딛고 베테랑 선수로 부상했던 그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상당히 가슴이 찡한 내용이기도 하다.

8 같이 보기

FC 서울 2017 시즌 스쿼드
등번호이름포지션국적생년월일비고
1유현GK30px1984년 8월 1일
2황현수DF30px1995년 7월 22일
3심우연DF30px1985년 04월 03일
4김동우DF30px1988년 2월 5일
5오스마르MF30px1988년 6월 5일
6주세종MF30px1990년 10월 30일
7김치우DF30px1983년 11월 11일
8이상호MF30px1987년 5월 9일
9데얀FW30px1981년 7월 27일
10박주영FW30px1985년 7월 10일부주장
11윤일록FW30px1992년 3월 7일
13고요한MF30px1988년 3월 10일
14조찬호MF30px1986년 4월 10일
15김원식MF30px1991년 11월 5일
16하대성MF30px1985년 3월 2일
17신광훈DF30px1987년 3월 18일
19심상민DF30px1993년 5월 21일
20정인환DF30px1986년 12월 15일
21양한빈GK30px1991년 8월 30일
22윤승원MF30px1995년 2월 11일
23이석현MF30px1990년 6월 13일
25전호준DF30px1994년 2월 3일
26김주영MF30px1997년 5월 5일
27김정환FW30px1997년 1월 4일
29황기욱MF30px1996년 6월 10일
30김철호GK30px1995년 10월 25일
31손무빈GK30px1998년 5월 23일
32김한길MF30px1995년 6월 21일
33박민규DF30px1995년 8월 10일
34마우링요FW30px1989년 12월 10일
35임민혁MF30px1997년 3월 5일
36박성민FW30px1998년 12월 2일
38김근환DF30px1986년 8월 12일
40김원균DF30px1992년 5월 1일
43윤종규MF30px1998년 3월 20일
45신성재MF30px1997년 1월 27일
55곽태휘DF30px1981년 7월 8일width=30&align=center
88이규로DF30px1988년 8월 20일
  1. 당시 골장면에서 곽태휘는 전방으로 침투하여 골을 기록했는데 이때 득점 직전 패스를 받는 위치가 사실 오프사이드였는데 주심은 그냥 넘어갔다. 약간 행운이 섞인 골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실 자책골 관련 문제는 시력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3. 강민수가 대신 들어갔다.
  4. 다만 곽태휘도 월드컵 바로 직전의 가나전에서 가나 공격수들에게 안드로메다 관광을 떠나 대패에 일조했기 때문에 할말은 없다. 그러나 후술되겠지만 이 당시 부상으로 인해 폼이 떨어진것을 감안해야 한다.
  5. 유일한 최전방 공격수 이정협은 완전히 방전되어 뛸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나갔고, 조영철은 중앙 공격수로 쓰기엔 함량 미달임이 드러났다.
  6. 축구를 시작하기 전에 높이뛰기 선수였다고 한다. 다만 얼굴이 꽃미남 스타일이라서 겉보기에는 다소 약해 보인다.
  7. 세트피스 시 키커한테 사람을 보지 말고 공간을 보고 차라고 하고 공이 오는 것에 집중한다고 하는데 강력한 피지컬 덕택에 공이 본인 쪽으로 오면 그 공을 제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헤딩이 정말 날카롭기도 하고.
  8. 100m는 그렇게 느리지 않은 편이다. 손흥민도 2013년 이제까지 붙어본 선수 중 누가 가장 어려웠냐는 인터뷰에서 유럽에서는 FC 바르셀로나의 아드리아누고, 곽태휘는 수비, 헤딩, 빠르기를 겸비한 아시아 최고의 중앙 수비수라고 언급했다. 다만 순간 가속도나 민첩성에서 느리다. 곽태휘를 칭찬했던 손흥민의 경우는 넓은 공간에서 달리는 걸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