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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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역사를 다루는 항목.

전쟁사는 이렇게 요약된다 카더라 오스트리아 때문이다[1]

1 "도이칠란트"라는 이름의 유래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98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지은 <게르마니아>에 언급된 것으로, 당시 로마인들은 북방의 이민족들을 구별할 수 없어 뭉뚱그려 게르만이라고 칭하였으나, 그 용어가 그대로 굳어 독일의 영문명(Germany)과 민족명이 되었다.

'도이칠란트'라는 이름은 게르만 부족 중 하나인 토이톤(Teuton)에서 왔다. 하지만 바로 독일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토이톤인(Teutonicus)이라는 말은, 라틴어와 대비되는 이북의 이교적인(paganic) 언어를 사용하는 족속이란 의미에 가까웠다. 잉글랜드인들도 독일인(…)이었던 것이다.[2] 11세기 들어서 토이톤이 도이치로 발음이 바뀌어 가면서도 특정한 한 지역이나 민족을 의미하기 보다는 광범위한 지역을 의미하였다.

2 로마제국 시기: 게르마니아

흔히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와 같은 역사 교양 서적을 보면, 지금 독일이라는 나라의 정신적 뿌리가 토이거부르거 숲의 전투에서 승리한 게르만족에 있는 것으로 보기 쉽지만 이는 19세기 독일 통일 이후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태동한 역사관일 뿐이며, 독일인들은 쭉 자신들의 뿌리를 로마 제국에 두었다. 즉 근세까지 독일 지방에서 살고 있는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 더 거슬러 올라가면 트로이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로마인들이 자신들이 트로이 인들의 후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3 프랑크 왕국 시대

최초의 국가 정치 체계로서는 프랑크 왕국(481~843)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후 843년 왕국은 분열되었고(베르됭 조약), 이때 동쪽(즉 현재의 독일 지방) 부분은 프랑크 왕국(현재의 프랑스 지방)으로부터 독립을 자처하여 동프랑크 왕국이 된다.[3]

하지만 독립의 기쁨도 잠시, 어린 루트비히 유아왕(911년 사망)을 이은 외조카인 국왕 콘라트 1세(재위 911~918)의 사망 이후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은 직계 후손이 전무한 상태가 되었다. 물론 국왕도 바보는 아니여서 후계자로 작센 가문의 하인리히를 지목해 두었긴 했지만... 결국 하인리히 작센이 호족들의 승인을 거쳐 하인리히 1세로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임면된다. 그래서 이제 동프랑크 왕국은 이제 왕족의 혈통쪽인 면에서도 서프랑크 왕국과는 완전히 독립되게 되었다.

4 신성 로마 제국 시대

하인리히 1세의 아들 오토 1세가 동프랑크을 계승(936년)하여 신성 로마 제국(아직 정식 명칭은 '(로마) 제국'Imperium이었지만)을 세우게 되었다(962년). 그러나 그는 황제이기 전에 독일왕이었다는게 문제가 된다. 국가의 군주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정체성을 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이른바, 독일 제1제국)이 민족 국가로 변화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된 것이었다. 실제로 제국의 황제는 독일 내부의 강력한 지방 귀족들을 제압하지 않은 채, 그 정체성을 이탈리아에서 찾고[4] 이탈리아를 차지하여 그 정치적 토대를 두려고 하였다. 독일의 민족적 신화가 된 바르바롯사도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4세기 한자동맹 등 상업이 융성하던 독일은 르네상스 시기(15세기~16세기)가 되면서 독일 민족 의식이 탄생하게 된다. 독일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에 대한 탐구로 게르만인상을 독일인상으로 대입시켰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같은 책에서 등장한, 로마인들이 그려낸 게르만인을 독일인과 동일시하였던 것이었다. 그와 함께 마르틴 루터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운동이 발생하였다.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인문주의자들이 그려낸 독일인상은 개신교와 연결이 되었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이탈리아인들(또는 프랑스인)과 대비되었다. 따라서 민족적인 대립 구도가 발생하였고 독일 민족의 초기 형태가 형성되었다.

5 30년 전쟁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1/3 가량을 지배하고 있었던 왕가는 합스부르크가였다. 합스부르크가는 작은 가문으로 출발하여 운 좋게도 결혼 상속을 매우 잘 받았다. 카를 5세(에스파냐에서는 카를로스 2세) 시기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금기였다. 그는 합스부르크가의 방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보편 제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개신교로 무장한 막강한 독일 제후들의 동맹(슈말칼덴 동맹)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을 맺게 된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시된 내용에 따르면, 군주의 종교가 곧 통치 영역의 종교라는 종교적인 제후의 자유 보장 이외에도, 제국은 결속력 있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독일 영방 간의 동맹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지속적인 분쟁 소지를 안고 있었다.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진통을 겪고 나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재확인된다.

30년 전쟁으로 제국이 무능력화되었을 것 같지만, 부분적으로 기능은 존속하였다. 제국 법정이 존재하여 약소국 간의 분쟁은 해결될 수 있었다. 제위를 거의 세습하다시피한 합스부르크가는 여전히 유럽의 막강한 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독일 영방 제후들은 자의적으로 타국에 권한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6 프로이센의 강성

  • 이 항목부터는 프로이센 항목을 참고하는게 도움이 된다.

이 시점에서 독일사와 오스트리아사의 분기가 시작된다. 프로이센의 성장과 함께 북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 감소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바꾸도록 만들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가장 막강해진 독일 영방 제후국은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본래 발트인의 땅이었으나 수백년에 걸친 동방 정주로 독일인이 많이 살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제후국이면서도 제국 밖에 영토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장이 용이하였고, 통치자가 '왕'의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해 용인받을 수 있었다. 또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대왕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가 적극적으로 군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절대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지역은 경제적으로 크게 발달한 곳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경제적으로 발달한 곳은 오히려 엘베강 서쪽이었고, 프로이센은 결론적으로 경제적인 후진국이었다.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거의 폐지되어 가고 있었는데 엘베강 동부는 재판농노제라 하여 오히려 농노제가 강화되었다. 그 지역의 영주들을 일컫는 명칭이 융커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상공업을 천시하였지만,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영지의 경영에 적극적인 이윤을 추구하였다. 프로이센의 왕은 계몽 절대 군주를 표방하였다. 계몽주의와 절대주의는 사실 모순되는 것이었으나, 국가의 후진성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러한 구호를 내걸었다. 프랑스볼테르와 같은 해외 석학들이 초빙되기도 하였다.

7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에 큰 위기가 닥친다. 혁명 프랑스군의 뛰어난 활약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크게 패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탈탈 털리자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고, 라인 동부의 독일 지역에 라인 동맹이 세워졌다. 프로이센은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패권을 상실하였다. 이는 오히려 독일 민족 의식이 전 계층에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나폴레옹 정권은 독일에 개혁을 수행하면 독일인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보낸 왕들이 다스리는 괴뢰국(대표적으로 베스트팔렌)으로 구성된 라인 동맹은 부패의 온상이었고 개혁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인들은 독일인들에게 압제자로 보였고 타도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프랑스인에 대비되는 독일민족상이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나폴레옹 타도 이후 1815년 빈 체제가 수립되었다. 기존의 전제 왕정은 유지되었다. 제국을 대체하기 위한 정치체로 독일 연방이 생겨났다. 하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같은 강국에 의해 연방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기본적으로 독일 연방은 구체제 하의 속박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으나, 각국에서 혁명의 영향을 받아 개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48년이 되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독일 3월 혁명이 일어난다(1848년 혁명). 최초 한 달 간의 혁명적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발생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양국의 정부는 전복될 위기에 놓여있었다. 혁명의 수뇌부였던 민족자유주의자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회의가 세워져서 혁명의 방향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혁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는 정치적으로 독일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군대도 기존 영방 국가들의 군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또, 혁명에 방향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여 시간만 지체되었다. 경제 상황이 좋아지다보니 노동 대중들의 이탈도 늘어났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도 의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고, 결정적으로 신 독일 제국의 황제로 추대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제위를 거부하여 의회의 무용성이 재확인되었다.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그 영향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자들을 위한 개혁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하였다. 그들의 민족적인 이념은 보수적인 틀 내에서 독일 통일에 이바지하였다.

8 도이치 제국의 성립

혁명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정국을 장악하였다. 그는 독일 문제가 철과 피를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프로이센은 군국주의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군사, 외교적인 활동을 추구한 결과, 보오전쟁보불전쟁에서 승리하여 독일의 패권을 완전히 쥐어잡아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 제국'을 표방할 수 있었다.

9 양차대전

그러나 통일한지 100년도 지나기 전에 무려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은 본토에 군대를 하나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빌헬름 2세가 퇴위하는 국내 혁명과 함께 끝났기 때문에(물론 미국의 참전만으로도 충분히 밀리고 있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파탄나자 파시즘이 급부상한다. 곧 아돌프 히틀러총통이 되는 나치가 정권을 잡고 제3제국을 선포하고는 얼마 안되어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만, 결국 이는 참혹한 패배로 끝나고 알자스-로렌동프로이센을 비롯한 유럽 본국 영토들과 나미비아, 탄자니아, 카메룬, 토고등의 해외 식민지들을 대거 잃은 뒤 동독, 서독으로 분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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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일은 전쟁에서 패망한 직후 4등분되었다. 각각 미국, 영국, 프랑스[5], 소련이 독일의 영토를 나눠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미국, 영국, 프랑스는 각자 자신들이 점령한 독일의 영토를 합쳐 새로운 독일 정부를 수립시키는 쪽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소련만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독일의 영토는 모조리 합쳐져서 서독이 되었고 소련이 점령했던 독일의 영토만 동독이 되었다. 이에 따라 베를린도 2등분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소련이 점령한 곳만 동독이 되었다. 이후 동독 정부는 동독 사람들이 동독 안에 있는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으로 가지 못하게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10 전후 분단과 독일 통일

서독은 천조국의 압도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서 키워져 자본주의 국가들중에서 3위의 경제대국이 된다.(세계적으로 본다면 4위) 동독 또한 발터 울브리히트, 에리히 호네커 등 지도자들 덕에 경제개발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에는 소련 다음가는 2위의 경제력을 가지게 된다.[6] 하지만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의 결과는 동유럽 공산주의의 와해로 이어졌고,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다.[7]


베를린 장벽 붕괴의 여파로 동독주민들의 자유선거에 따라 1990년 독일 통일을 이루면서 이후 독일은 하나 된 국가로서, EU의 주도국가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1 관련항목

  1. 첫번째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함께 30년 전쟁에서 싸우는 독일 영방국가들, 두번째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을 계기로 1차대전에 참전한 독일 제국, 마지막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2. 애초에 앵글로색슨도 따져보면 앵글로가 독일의 앙겔른(Angeln) 지역에서 온 거고, 색슨(Saxon)이 독일의 작센(Sachsen, 영어로 Saxony)에서 온 거다.
  3. 중프랑크 왕국은 870년 동서 사이의 영토(지금의 알자스로렌(로트링겐), 네덜란드 등)를 상실하고 북이탈리아의 왕국이 된다.
  4. 오토는 951년 롬바르디아의 왕(중프랑크도 계속 이 이름을 사용함)을 자처했고, 955년부터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으며 이후에도 남진하여 동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5. 이 당시 프랑스는 아주 강경해서 점령지에서의 독일인들의 반발을 탄압하는 등 완전히 프랑스화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었을 정도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독일 재건이 필요한 미국의 압박을 받았고, 프랑스 또한 계속되는 독일인들의 반발 등으로 대강경책만 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을 보아 미국의 뜻을 수용한다.
  6. 다른 분야에서도 동독은 무척 발달한 상황이라서, 1988년 서울올림픽 등에서도 동독은 2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독과의 경제력은 5배 이상이었다. 물론 동독 인구가 서독의 1/4 밖에 안됐던 이유도 있다
  7. 당시 동독인들이 계속 빠져나고 있었고, 동독 정부는 여권 발급 규정을 완화하기로 했다. 이때 이탈리아 기자가 대변인에게 언제부터 이 규정이 시행되냐고 물었는데, 대변인은 답변을 준비 못해서 "즉시 될 겁니다"라고 대답했고, 독일어가 딸리는(…) 기자는 "여행자유화가 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오보 기사를 썼고, 이 소식은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서독까지 전해져 베를린 장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게 된다(…). 한국의 신탁통치 오보사건 뺨치는 영향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