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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0년생으로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複章)을 받았다.
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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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성당 앞에 있는 의거비 |
우리에게는 그 악명 높은 이완용을 대담무쌍하게 칼로 찌른 의사로 유명하다.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907년에 귀국하였다.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로 하였을 때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하지 못했다.
'백범일지'에 명동성당 의거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다. 김구가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을 때 이재명이란 자가 총을 쏘며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났는데 백범과 노백린[1]은 이재명이 단순히 자기 말을 안 듣는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의 총을 빼앗아 기차를 타고 가버렸는데 의거 이후 그것이 이완용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였음을 알고 크게 안타까워 했다 한다. 사실 말하자면 이재명이 자신이 이완용을 죽이겠다 하자 그의 아내는 만류하였고 이재명은 이 계집이 나라가 중한 것을 모른다고 화를 낸 것. 그리고 나서 나중에 이완용이 칼빵을 당하고도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후회했다는 말이 있다.
그 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죽자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을 처단하기로 하였다(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이,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결정).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이재명은 신문을 보고 이 정보를 입수한 뒤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11시 30분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의 허리,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를 막아섰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부상 당한 이완용은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병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게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1호이다. 이게 통탄할 노릇인 것이,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의사가 말하기를 "외과기술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날 죽었다. 외과기술 10년만 늦게 받아들였으면 이재명 의사 성공하는 거였는데
재판정에서 이재명은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라며 고함을 쳤다. 재판장이 다시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2천만이다!"라고 답하자 창밖에서 “옳소!"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한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라고도 했다.
1910년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란 말을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비록 이완용 암살은 실패했지만 그의 칼침은 유효해 결국 이완용을 폐렴으로 괴롭히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죽게 만들었다.
2.1 박원문의 죽음에 대해
이재명은 무고하게 말려들었던 박원문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반 사과나 유감을 표하지 않았다는 박노자 교수의 비판도 있다. 박노자 교수의 글에 의하면, 법정에서 이재명은 박원문을 살해한 데 대해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박원문에 대한 살해 의도가 없었음을 강변했다. 박노자는 이에 대해서 공판 기록을 근거로 이재명이 반성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2]
그러나 박노자의 의견에 대한 대한 반론도 있다. 이재명 의사가 아무 상관도 없는 인력거꾼인 박원문을 죽이려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박원문은 이완용에 대한 암살 시도중 우연히 그자리에 있어서 이완용을 대신해 칼에 맞은 것이었는데, 이 사건과 같이 행위자가 A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방법의 착오로 B를 사망케 한 경우 죄책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형법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현재 대한민국 법원 판례는 B의 대한 살인죄를 인정하나(법정적 부합설), 학계에서는 A에 대한 살인미수와 B에 대한 과실치사의 상상적 경합을 인정해야 한다는 학설 또한 유력하다(구체적 부합설).
그렇다면 이재명의 해당 진술은 박노자 주장대로 뻔뻔하게 책임회피를 하거나 반성을 하지 않는 태도라기 보다는 자신이 박원문을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사실관계에 대한 해명을 하는 부분이라고 볼수 있다. 이는 변명이나 회피가 아니라 정당한 진술이자 변호에 해당하는 사항으로, 자신의 의도에 없었던 것을 없었다고 피고인이 진술 하는 것을 반성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말이 되지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과실치사 죄는 전부다 살인과 동등하게 처벌해야 하고 정말로 죽일 의도가 없었는데 과실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이 고의가 아니였다고 법정에서 변호를 받는 것조차도 반성없는 파렴치범이라고 욕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재명 의사는 자신이 박원문을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즉 재판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박원문이 애꿎게 변을 당한 것은 아무리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해도 가해자로서 당연히 유감을 표해야할 사안이 맞지만 해당 장소가 법정이고 잘못된 죄목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참작되어야 한다. 살해의도가 없었던 행각에 대해 잘못된 죄명으로 기소를 당한 상황에서 그렇지 않았다고 진실을 밝히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수도 없다. 더군다나 당시 일제가 이재명을 사형 선고한 죄목은 이완용에 대한 암살 미수가 아니라 박원문에 대한 살인죄가 더 크게 작용했다. 암살미수와 과실치사 만으로는 사형 판결을 구형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일제가 이 건을 악용하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즉, 이재명이 그 자리에서 유감의 뜻을 밝히거나 반성하고 있다고 해봤자 오히려 재판부에 의해 암묵적인 살해의도 인정으로 꼬투리를 잡혔을 가능성이 높고, 변호사 안병찬과 이재명 역시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3]
즉, 이재명이 유감을 표하지 않았다는 것과 재판 당시 어구 하나만 가지고 이재명이 반성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볼수 있다. 해당 장소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진위를 밝히고 변호하는 자리인 법정이었다는 점, 그리고 기소 죄목 자체가 부당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다만 그동안 이재명의 의거에 대한 후대의 기록에도 박원문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박노자가 비판하고 있는 부분 역시 이재명이 반성도 없는 나쁜 사람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와 대의를 위해서라면 소의 희생은 눈감아버리는 인식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실제로 해당 칼럼에서 쓴 김립 피살 사건에 대한 서술을 보면 이런 지적은 합리적이라고 볼수 있다. [4]
- ↑ 당시 백범과 함께 재령에 있었던 독립운동가. 일본 육사로 유학간 뒤 조선에 돌아와 육군의 요직에 올랐다. 그 뒤 을사조약에 반대하였고 국권이 침탈되고 군대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뒤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독립군 육성에 관여하였다.
- ↑ 그런데 정작 그런 말을 한 박노자는 공산 혁명에서의 폭력성은 긍정한 게 문제.
- ↑ 박노자도 일제가 박원문의 죽음을 이재명의 사형 구형을 위한 도구로 악용했고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 ↑ 다만 해당 칼럼에서 박노자는 윤봉길 의사에게 당한 민간인 일본인들의 피해를 주장하며 이라크 민족주의자들의 반미 테러 행각과 윤봉길의 의거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실제로 홍커우 의거 당시 민간인 사상자는 기록된 바도 없으며 증거도 없고 오히려 해당 장소가 검열이 대단히 심해 민간인들이 함부러 오지도 못할 장소였단 것을 고려하면 대단히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윤봉길의 의거는 오히려 정확하게 일본군 거물들만을 노린 것이였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어 중국 당국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아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킨 "의거"로 평가되고 있기에 많은 공감을 얻기는 힘든 주장이다.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무작정 테러와 동급 취급한다는 점은 비판받을만 하다. 이 부분은 박노자 본인이 평소 좋아하는 박헌영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간 것 같은데 박헌영의 이후 행적을 보면 (...) 박노자의 주장은 더더욱 공감받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