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구춘선(具春先) |
아호 | 북은(北隱) |
출생년도 | 1857년 |
사망년월일 | 1944년 3월 20일 |
출생지 |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
활동분야 | 군사, 사회, 교육 |
업적 | 독립운동 |
목차
소개
만주의 조선인들을 끊임 없이 조직하자.
구춘선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886년 하급 군졸로서 온성군 영달진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학식과 인품, 출중한 체력으로 행영(行營)의 도시(都試)에 선발되어 서울의 궁궐을 수비하는 군인이 되었다. 그는 남대문 수문장 등 중앙군의 일원으로 봉직하다가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후인 1895년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1897년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인의 보호에 나서자 선생은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 보호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이범윤이 노령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선생은 용정촌으로 거점을 옮겼다. 1907년 캐나다 선교사 구예선(본명: R.Grierson)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같은 해에는 용정시교회, 1913년에는 하마탕 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3년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김약연, 백옥보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 자치기구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같은 해 3월 13일 길림성 용정에서도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에 대한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두고 있던 조선독립의사회에서 주관한 이 만세운동은 30,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3월 13일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한 가운데 독립운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조선독립의사회는 조선독립기성총회로 개편되었다. 선생은 이 단체에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3·1운동 직후 이익찬, 윤희준, 방달성 등과 함께 용정에서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임시정부 산하의 국민회로 개편하여 본부를 국자가(局子街)에 설치하고 각지에 80여 개소의 지부를 두어 조직을 확대시켰다. 1920년 국민회 안에 군사부를 두고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는 한편, 이 회 소속 독립군을 국내로 파견하여 일본군과 항전하도록 하였다.1920년 6월 국민회 소속 독립군은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뒤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선생은 1926년 하마탕을 거쳐 왕청현 백초구(百草溝)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무장운동에서 종교운동, 교육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27년에는 국민회 동지들과 북간도 대한국민회 재건운동에 착수하였고, 1928년 11월에는 돈화현에 있는 마진에게 대한국민당 조직을 명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교회 희년(禧年)을 맞이하여 문재린 등과 함께 동만주 기독교 세력의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3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구춘선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