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백용성. 본명은 백상규.
법명은 용성, 법호는 진성이다. 참고로 호는 전통적으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부모님이나 스승이 아닌 사람이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짓는 것인데, 동아시아 불교에서도 쓰이고 있다.
1864년,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출가했다. 현재 조계종의 약 60%가 이 스님의 계열이다.[1] 옛날에 유명했던 성철스님이나 현재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법륜스님 등도 모두 이 분의 후손이다.
2 3.1운동
경술국치 이후 나라의 녹을 먹었던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나라를 되찾자고 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리는데 그러다 임철호 한 분만이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고 후에 자기 아들을 출가시키는데 그 사람이 불심도문 스님이다.
이후 관리들로는 안 되겠다 싶어 종교계로 눈을 돌리는데 불교는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세가 약했고 그래서 당시 동학의 후신이자 최대 종교조직이었던 천도교의 수장 손병희를 찾아간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고 또 그 지도자 중 전봉준, 김개남과는 달리 살아 있었기 때문에 찾아간 것. 그러나 아무래도 전과가 있고 자기 휘하의 수많은 신도들이 있어 주저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용성의 은사 스님인 혜월스님이 예전에 남원의 덕밀암에 있으면서 동학교주 최제우를 숨겨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보답으로 참여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불교의 33천에서 따온 의미로 33명을 대표로 하기로 하고 불교 11명, 기독교 11명, 천도교 11명을 하기로 한다.
이때 실질적인 행동은 한용운 스님을 시켜서 하고 스님은 계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설득하러 다녔다.
그런데 기독교측에서 당시 서로 다른 파로 나뉘져 있었는데 같이 못 하겠다고 하여 설득하고 당시엔 아주 작은 조직이었던 기독교에 배려를 해주며 불교의 인원을 줄이고 불교2인(용성,용운), 기독교20인(두 파가 10명씩), 천도교 11명씩하여 33인을 결성하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2]
원래 계획은 선언문 낭독 후 해산이었으나...그렇게 될 경우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미흡할 것으로 판단, 여종업원을 시켜 겉옷과 신발을 숨기고 제자 동헌 스님을 시켜 종로 경찰서에 신고를 한다.
이렇게 봤을 때 3.1운동의 핵심인물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3 3.1운동 이후
신불교운동을 주창하며 서울에 대각사란 절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선농일치 등을 주장하며 국내와 만주 등에서 과수원, 농장 등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였다.
아들뻘 제자인 동헌스님은 불교정화운동당시 수장 역할을 하며 왕성히 활동하였고 증손주뻘인 법륜스님은 정토회 등의 단체를 만들어 활발히 사회참여 중이다.
4 제자, 법맥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여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지만, 교계 내에서 승려로서의 위상도 상당하다. 조선왕조 500년 간의 강력한 불교 탄압으로 맥이 끊기 다시피한 한국 불교의 불을 다시 지펴내어, 근현대 한국 불교의 뿌리를 이루게 된 승려 중 한 사람. 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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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8대 총림 중 하나인 해인총림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으며,성철도 용성의 법맥을 잇고 있다.(용성-동산-성철),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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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 법손은 법륜(용성-동헌완규-도문-법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