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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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강기동구춘선권동진권병덕김경천
김동삼김병조김붕준김상옥김성수
김완규김익상김지섭김하락나석주
나용환나인협남상덕남자현노백린
린썬문창범문태수민긍호민종식
박동환박열박승환박용만박은식
박준승백용성신규식신돌석신석구
신채호신홍식쑨커쑹자오런안재홍
양기탁양전백양한묵E. 배설언더우드
여운형여지이연기우오세창오화영
유동열유여대유인석윤기섭위빈
이갑성이동녕이동휘이명룡이범석
이범윤이봉창이상설이상재이승희
이위종이은찬이인영이재명이종일
이종훈이필주임예환장건상장인환
전명운전해산정환직조성환조완구
주자화주시경지청천채상덕천청
최석순최성모탕지야오편강렬홍기조
홍범도홍병기황싱

1 개요

1881~1928 호는 우성(又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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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일본에 황무지 개간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석방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1년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무장훈련을 하고,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는 것. 이 당시 하와이에는 이미 5천여 명의 한인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므로, 하와이로 건너가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면서 일본에 대하여도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하와이의 교포 사회는 박용만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고, 박용만은 결국 대한인국민회에서 밀려나 1918년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 대조선독립단을 창설하였다. 하와이에 정박한 일본 해군 순양함 이즈모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이승만의 밀고로 체포되어 그 뒤 하와이를 떠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총장에 선임되었으며 그 후 주로 중국에서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그 뒤 임정에 실망을 느껴 임정 반대자로 바뀐다. 그뒤 무장투쟁론을 버리고 새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이 신천지 계획이다.

2 신천지 계획

현재의 조선반도는 지역이 협애하여 도저히 독립군으로 만들기 부족하다. 구조선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고의 땅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을 여기에 이주시켜 발전을 추구하여 사실상 동포의 영유로 귀속하게 할 것이다. [1]

코리안 엑소더스

기상천외하다[2]

조선 반도는 독립국가로 만들고 지키려하기엔 땅이 너무 좁아서 좁지않으니깐 대신 시베리아, 몽고, 만주를 '고조선의 땅'이라 주장하며 거기서 독립국을 세우자는 사상이다. 그러기 위해 하와이로 1925년에 가서 동포들을 설득하려한다. 자신이 조사한 만주를 설명하여 동북아 대륙은 땅이 넓은데 인구가 적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한 민족이 영주하고 토착하여 자손의 발전을 꾀하기에 최고로 적합한 땅인 것을 의심한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거기다 이 계획을 위해 일본에 대한 방식을 바꾸게 된다.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 때 실패했고 국내와 국제문제 때문에 대부대를 동원하는 출병은 하기가 어려우니 내놓은 대안) 나의 우견으로 볼 때 일본은 오히려 조선인민을 지휘하여 움직여 정노의 임무를 맡겨 시베리아의 동부를 숙청하는 것이 제일의 양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일본이 박용만 선생이 한 제의를 받아들이면 적화방지(즉, 소련 및 공산당 반대)를 공동작전으로 전개해 "즉시 전위전초의 첨병이 되어" 싸울 것이라 한다.[3] 물론 친일파로 변절한 건 아니고, 일제한테 방해받지 않고 군대를 만들며 한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것뿐 인 것이다.[4] 일본은 이 상태에서도 박용만 선생을 불령선인이라 한 걸 보면 일본도 믿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걸 감안해도 흠좀무 계획이다.

3 별세

1923년 말 비밀리에 한국에 다녀온 이후 변절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고, 1928년 다른 독립운동가의 손에 암살되고 말았다. 한때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의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규준은 20살의 나이로 병사하는데 박용만이 사망할 때는 이규준이 사망한지 1년 후이다.[5]

4 기타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이 미국에 유학한 동안 부친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일한은 박용만과 대립한 이승만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당시 미주 지역의 인식처럼 박용만 암살의 배후가 임시정부라고 여기고 임시정부에도 협력하지 않았다고.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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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용호(하와이주립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박용만 -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강좌 47집 132)
  2. 최용호(하와이주립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교수와 부흥카페 회원들이 보인 반응이다
  3. 참고 논문: 최용호(하와이주립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박용만 -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강좌 47집 126~127)
  4. http://cafe.naver.com/booheong/104373
  5. 당시 임정에서는 박용만이 변절했다고 여겨 그의 죽음을 정당화했는데, 미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임정이 박용만 암살의 배후라고 여겨 임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특히 그의 최대 정적이었던 이승만김구로부터 박용만은 변절자가 맞으니 미주 지역을 달래 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나 그럴 리 없다며 씹고 임정을 까는 데에 동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