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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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동 선생의 초상화.

강기동(姜基東, 1884년 3월 5일1911년 4월 17일)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다.

서울 명동 출신으로, 1884년에 태어났다. 성장한 뒤에 일본군 기병대에 입대했고, 1908년 6월에는 일본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되어 경기도 양주군 고안의 헌병분견소에서 근무하게되었다.[1]

그러던 어느날, 길인식 등 2명의 의병일본 경찰에 붙잡혀 그가 있던 헌병분견소 내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이들 의병들을 탈주시키고 자신도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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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동 선생이 헌병분견소에서 도망쳤다는 내용을 여주 경찰서에 보고한 문서.

1909년 1월 15일 그는 옥문을 부수고 의병 길인식 등을 탈주시키는 한편, 총 2정, 권총 1정, 총검 5정, 탄환 300발을 탈취하여 의병장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2]에 투신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일제의 첨병인 헌병보조원으로 의병들의 무장투쟁을 일선에서 저지하던 그가, 어떠한 심적 변경을 일으켜 의병으로 투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의병전쟁이 거의 소멸되어 가는 단계에 의병으로 투신한 그의 행동은, 지금까지 그가 해 온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민족으로부터 찾으려는 결단이었음에 분명하다.

당시 창의원수부는 1909년 1월 1달 동안 포천, 양주지방의 산악을 배경으로 약 27회에 걸친 반일투쟁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다시피 한 전투로 인해 군량미와 탄약 결핍, 의병들의 부상과 사망으로 인한 병력 감소, 의병장 이은찬의 부상으로 이탈자가 발생하는 등 진영 내부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이은찬은 의병들의 사기 진작과 군자금 확보, 무기와 군량미 보급투쟁, 병력 보충 등을 목적으로 휴식기를 취하며 부대를 재정비하려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 창의원수부에 들어간 강기동 선생은 의병장 이은찬에게 우편물 탈취를 통한 군자금 확보계획을 건의하였다. 우편물을 단순히 편지로만 생각하고 있던 이은찬은 1909년 2월 9일 “금번 우리 당(黨)에 관여한 전 헌병보조원의 말에 의하면 재무서에 납부하는 공금은 우편국에서 취급, 현금은 우편물과 일괄하여 경성에 송부하는 것이다. 고로 금후 지포와 의정부 사이에서 공금이 있는 우편물을 약탈하고자 한다”고 한 데 이어, 2월 24일에는 경기도 영평군에 나타나 “당 지방으로부터 경성행의 우편물에는 확실히 다액의 현금이 있을 것이다. 전 헌병보조원이었던 강기동으로부터 듣고 알았다”고 선언하였다.[3]

이와 같이 강기동 선생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헌병대 내부의 사정을 의병장 이은찬에게 제공함으로써 창의원수부의 반일투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선생은 투신한 지 불과 1개월여 만인 1909년 2월경 일약 의병장 이은찬의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2월 1달 동안 19회에 달하는 전투를 전개한 창의원수부는 2월 25일 양주군 석곡면 부근의 ‘돌압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전력을 거의 소진한 이은찬 의병부대는 이틀 후 다시 전투를 벌임으로써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 때 타격을 입은 것을 계기로 일제는 3월부터 양주경찰서와 헌병분견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창의원수부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3월 16일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이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 중 사망한 데 이어 3월 31일에는 의병대장 이은찬마저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의병대장 이은찬의 구속은 사실상 창의원수부의 와해를 뜻하는 것이었고, 경기북부 의병들에게는 구심점을 잃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다수 의병들은 서울로 올라가거나 십 수 명씩 집단을 이루어 강원도, 황해도 방면으로 도주하는 등 몸을 숨기기에 분주하였다. 어떤 의병들은 가족을 이끌고 어디론가 이사하여 행방을 감추거나 민가에 잠복하여 무기를 숨기고 양민으로 생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동요 속에서 1909년 6월 이은찬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게 된다.

이은찬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선생은 곧바로 4월 초 남학서, 오수영, 임명달 등과 함께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이은찬이 사용했던 ‘창의원수부 중군장’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계승, 사용하면서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 후 선생은 1909년 6월경부터 본격적인 대일항쟁을 시작하면서 경기 동북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생은 일본군의 의병토벌 기간 동안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면서 군자금 확보와 군기 마련 등 조직 강화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과정 등을 통해 조직을 정비한 선생은 1909년 6월 8일 의병 20여명을 30년식 보병총 4정과 스나이돌식 총으로 무장시키고 양주군 ‘바뎅이’촌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고안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추격해오자, 양평군 남종면 우천동으로 유인한 그는 계속 추격해 오는 헌병대원들과 우천동 부근 한강연안에서 교전을 벌인 뒤 양주군 분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선생이 이끄는 의병부대를 보고 일제조차도 보고서에서 “그의 행동은 자못 교묘하여 산병선(散兵線)을 펴고 그 퇴각함에 당하여서도 30년식 총을 소지한 자 4명을 전부(殿部)로 하고 질서 정확하게” 퇴각하였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1909년 7월 당시 일본군이 포착한 선생은 “헌병보조원의 모자와 다갈색의 양복을 착용하고 권총을 휴대하였으며 의병의 총기는 무라타(村田)총 3정, 나머지는 전부 모-젤 총을 휴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빈약한 무기를 소지하고서도 선생은 일본군 및 친일파 주구를 상대로 한 게릴라전을 계속 감행해 나갔다. 1909년 6월부터 8월까지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벌인 세 차례의 전투를 제외하면 의복, 식량,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보급투쟁과 밀고자 처단 등이 그 활동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보급투쟁적 성격의 강기동 의병부대가 본격적으로 대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9월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1909년 9월 13일 선생은 22명의 의병을 이끌고 퇴계원에서 주재헌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 후 9월 중, 하순경 의병 양평군 면종면 매곡을 습격하였으나, 양주군 마석우리 헌병대의 추격을 받아 1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한강을 건너 양주군 하도면 백월리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고안헌병대의 습격을 받은 의병부대는 재차 한강을 건너 양평군 북면으로 이동하였다. 9월 하순경 20여명의 부하를 대동한 선생은 가평군 외서면 대성리 화랑동에 나타나 군자금을 모집한 뒤 양평군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이와 같이 9월 1달간 17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인 선생은 일본군과 직접적 전투는 될수록 피하고 소규모로 부대를 편성하여 산악을 근거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천금을 내거는 등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10년 2월 10일부터는 2달에 걸쳐 순사와 밀정들을 변장시켜 그가 활동하던 광주, 포천, 양주지방을 샅샅이 뒤지는 등 선생의 체포에 혼신을 기울였으나 그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헌병대의 활동으로 1910년 3월경부터 선생 부대의 한인수와 김순복이 피체되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소규모 부대의 유격전으로는 일본군을 궤멸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선생은 군자금을 모집, 저축한 후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액수가 부족한 까닭에 필요한 액수를 모을 때까지 국내에 잔류하면서 다시 활동하였다.

그러나 항일운동이 치열하게 지속되자 일본군은 1910년 9월부터 40여 일간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해 활동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에 선생은 독립군으로 전환해 대일항전을 계속하기 위해 국외로 망명을 결심했다. 그러나 1911년 2월 북간도 방면으로 이동하던 중 함경남도 원산에서 구속된 선생은 4월 17일 서울 용산 일본군 형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출처는 일제가 의병들의 토벌과정을 기록한 「폭도에 관한 편책」.
  2. 중군장 이은찬을 정점으로 우군장 윤인순, 좌군장 정용대가 포진한 경기 동북지방 최대의 연합의병부대.
  3. 이때의 인식은 "우편물 중의 현금은 한국 신민으로부터 징수한 것으로 왜적 관리의 회(懷)를 배불리하는 것이다. 이를 약탈하여 한국 빈민을 구휼함은 우리 의병의 의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