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慈賢
(1872년 12월 7일 ~ 1933년 8월 22일)
1 개요
난공불락, 왜세의 도마 위에섬섬옥수 열 손가락 얹어 놓고 하는 말
천지신명 듣거든 사람세상 발원이요
탄압의 말뚝에 국적 따로 있으리까조선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
피로 받아쓴 대한여자독립원
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고정희.〈남자현의 무명지〉
한국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비판하기 위해,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두 번이나 단지를 한 것으로도 유명해서 붙은 별명이 여자 안중근, 청산리 대첩의 부상자들을 치료한 것으로 붙은 별명이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이다.
2 생애
경상북도 안동[1]에서 유학자 남성한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제자였던 김영주와 결혼했으나, 김영주는 1895년 을미사변 때 의병에 가담했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평범한 전업주부로 아들을 키우던 그는 1919년 3.1 운동 이후 할머니의 몸으로 아들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지원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위해 서울에 잠입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거사 직전에 송학선 의사가 먼저 의거를 일으키는 바람에 경계가 강화되어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33년 주만주국 일본 대사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을 기획하였다. 그는 얼굴에 상처를 내고 거지로 분장하여 잠입하였다. 그러나 삼엄한 경계속에 불심 검문에 걸려서 체포되었다.
이후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 이후 닷새만에 사망하였다.
3 사후
남강 묘지 건립(좌) 묘지터 현재(우상) 현충원 허묘(우하)[2] |
국외 독립운동 가운데 사망했기 때문에 유해는 하얼빈에 있는 남강 외국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남자현은 죽으면서 아들에게 중국돈 248원 80전을 주면서, 200원은 독립을 하면 독립정부에 축하금으로 전달하라[3]고 유언을 남겼다. 광복 다음해인 1946년 첫 3.1운동 기념식에서 남자현이 남긴 돈 200원은 임시정부요인에게 정식으로 전달되었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1967년 국립 현충원에 묘가 조성되었으나, 허묘였다. 유해의 한국 송환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허묘를 만들어버려서 잊혀진 것이다. 이후 후손들이 1998년 유해를 찾으려고 했으나, 이 때는 이미 남강 외국인 묘지 자체가 사라진 뒤였다. 이후 유해가 어디로 갔는지는 행방이 묘연하다.관련기사 발굴조사를 도와달라는 후손들의 요청이 기사화 되기도 했으나, 영화 개봉은 끝난 관계로 후속대책은 발견되지 않는다.
4 그외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 안옥윤의 모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덕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임에도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남자현 의사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다소 환기되었다. 이후 엉뚱한 위치에 생가가 조성되고, 남자현 의사 기적비도 건립되었지만, 현실은 위에 언급된 그대로.
역시 암살 개봉 이후 경북우정청이 호국영웅 우표 도안으로 안동출신 남자현을 포함시켰다. 다른 한명은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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