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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琦燮
1887년 4월 4일 ~ 1959년 2월 27일
1887년 경기도 장단도호부(현 파주시 장단면)에서 태어났다. 한성부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하였다. 1911년 봄 신흥무관학교 학감이 되었다가 교장이 되어 독립군 병사 훈련을 지도하였다. 1912년 경학사의 후신 부민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초 만주 서간도의 한족회 조직에 참여하여 한족회 학무부장이 되었다.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육군 무관학교 교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국무원 군무차장,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군무부장을 지냈다. 1927년 3월 한국국민당에 참여하였다.
1935년 김규식, 지청천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 민족유일당 운동 전개에 참여했다. 이때 그는 한국혁명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하여 국무위원이 되고, 1943년 3월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 당원 신분에서 민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중도우파 스탠스의 정치노선을 지닌 그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참가. 그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위원에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50년대 중립화통일론 주장하다 1959년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