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제너레이션

file.jpg

100년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축구계의 최강팀 중 하나로 언급되는 전설적인 팀.

Milan generation

1 개요

유럽 축구계의 손꼽히는 명문 AC 밀란의 최전성기인 88-96시즌까지의 시절을 일컫는다. 멤버를 보면 갈락티코스 레알이나 드림팀 바르셀로나[1]도 한 수 접고 들어가게 만드는 이름값과, 그에 걸맞는 성적을 보여주었다.[2] 한마디로 밀란의 최고 리즈 시절.

80-90년대는 베를루스코니가 신흥 언론 재벌, 00년대에는 정치 생명이 아직 살아있는지라 대규모 투자를 자주 감행하면서 지금의 맨시티, 바르셀로나[3], 맨유, 첼시, 레알 마드리드를 능가하는 쇼미더머니를 보여주었다.

2007년 월드 사커에서 선정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TOP 10에 클럽 팀으로는 유일하게 5위권에 선정 되었다. 그 위로는 펠레가 이끌던 70년 브라질 대표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토탈사커의 네덜란드 대표팀, 50년대를 풍미한 페렌치 푸스카스가 이끌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 대표팀이라는 사기 집단들이 있다(...).

최근에 와서는 최강의 클럽으로 군림하던 펩 바르셀로나와 밀란 제너레이션을 많이들 비교를 하곤 한다.[4] 펩 과르디올라티키타카는 21세기 초 세계 축구를 호령하였고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는 현대 축구의 뿌리라 평가받는지라 어느 팀이 강한지는 유명한 VS놀이의 떡밥 중 하나이다.

더군다나 자국 상위권 클럽들 조차 소위 7공주라 불리는 90년대 말-00년 초반 세리에 A보다 더욱 강력하여 유럽 대항전인 챔피언스리그, UEFA컵, 컵위너스컵에서 온갖 강팀들을 박살내고 우승 트로피를 휩쓰는 최전성기여서 임팩트가 더욱 강력했다.[5] 특히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도요타 컵에서는 그야말로 깡패 모드로 군림하면서 일본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이탈리아 리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결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일본에선 몰락했지만 현재도 세리에 A, 나아가 밀란의 팬덤이 어마어마하다.

2 밀란 제너레이션 이전 상황

지아니 리베라 은퇴 이후 79-80 시즌이 끝나고 구단주 펠리체 콜롬보의 라치오전 승부조작[6]이 발각되어 라치오와 함께 동반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된다. 물론 구단주 또한 축구계에서 영구퇴출된것은 덤. 80-81시즌 세리에B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81-82시즌 세리에 A로 1년만에 복귀하지만 이번에는 실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된다(...). 당시 주전이였던 선수들이 전부 떠나는 시기에 프랑코 바레시, 알베리고 에바니등은 묵묵히 팀을 지키면서 서포터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는다.

실력으로 강등된 82-83시즌을 세리에B 우승으로 장식하고 다시 세리에 A로 복귀하지만 주축 선수들의 이탈 및 승부조작의 여파로 인한 재정난으로 죽을 쑤다 결국 팀이 파산위기에 몰렸고, 당시 신흥 언론재벌이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했다.

3 베를루스코니의 구단주 부임 이후

  • 86-87 시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구단 인수 후 감독을 바로 쳐내지 않고 닐스 리드홀름을 신뢰함과 동시에 당대 이탈리아의 스타 로베르토 도나도니세바스티안 로시, 다니엘레 마싸로등의 굵직한 영입지원을 하며 86-87 시즌을 시작했지만 리그에서는 우승컵을 들어올릴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리그에서는 6위에 그치고,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당시 2부리그였던 AC 파르마에게 총합 2:0으로 떡실신 당하면서 체면을 구긴다.

  • 87-88 시즌

이미 리드홀름에 대한 신용을 잃은 베를루스코니는 파르마의 떠오르던 감독 아리고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하기 위해 구단의 전설인 리드홀름을 경질하면서까지 사키를 신용한다. 투자는 전 년도보다 더 과감해져 네덜란드에서 맹활약을 펼치던 신예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와 로마의 스타 플레이어이자 당대 최고의 중앙미드필더 중 하나였던 카를로 안첼로티와 우디네세의 안젤로 콜롬보를 영입함과 동시에 몬짜로 임대되었던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를 임대복귀 시킨다. 극성 맞은 이탈리아 언론은 사키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아니꼽게 보고 언론은 매일같이 사키를 구두팔이라고 폄하하며 그가 영입한 젊은 선수들을 까대기 바빳지만 사키는 "기수(騎手)가 되기 위해서 말(馬)이 될 필요는 없다."라며 응수하면서 부임 첫해 밀란의 리그우승을 이끌며 자신을 비웃었던 모든 이들을 데꿀멍 시켰다.

  • 88-89 시즌

이미 팀의 전력은 충분해서 반 바스텐의 영입으로 출장 기회가 줄어든 마싸로를 로마로 임대보내고, 네덜란드의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스포르팅으로부터 영입하면서 오렌지 삼총사가 결성된다. 사키의 프레싱 사커는 유럽 유수의 명문팀을 개박살내면서 승승장구하고, 준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절정에 이른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휴고 산체스에게 골을 먹으며 끌려가다 77분 반 바스텐의 동점 골로 1:1 무승부에 그치지만 산 시로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전반전에서만 3골을 넣는 등 5:0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개박살 내버리면서 전 유럽에 충공깽을 안긴다. 결승에서도 당시 유럽에서도 최상위권 전력을 뽐내던 슈테아우아 부크레슈티를 4:0를 개박살 내버리면서 축구계에 압박축구의 바람을 몰고 온다. 리그에서는 더비 라이벌 인테르에게 우승컵을 내주는 동시에 나폴리에게도 뒤쳐지며 3위를 기록한다.

  • 89-90 시즌

최후의 챔스 2연패. 바이에른 뮌헨을 4강전에서 만나 홈에서 1:0 승리, 원정에서 2:1로 패했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결승에 진출하고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한다. 리그에서는 마라도나의 나폴리에게 스쿠데토를 내주며 2위에 그친다.

  • 90-91 시즌

후일 바이에른의 전설로 꼽히는 지오반니 에우베르를 반 바스텐의 공백을 대비해서 영입했으나 리그 적응에 실패로 인한 영입 실패작이 되고 만다. 유로피언컵은 3연패를 노리고 준비했으나 8강에서 마르세유 원정에서 조명이 나가자 항명[7]을 하다 몰수패와 다음시즌 유러피언 컵 출전불가 징계를 받게 된다. 리그에서는 로베르토 만치니의 삼프도리아의 돌풍에 무릎을 꿇으며 또 다시 2위에 그치고 만다.

  • 91-92 시즌

사키가 이탈리아 국대 감독으로 부임함에 따라 후임으로 밀란의 전설인 파비오 카펠로가 부임한다. 당시 카펠로는 초보 감독으로 실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리그에서 22승 12무의 무패우승을 기록하며 다시한번 유럽과 이탈리아 무대에 충격을 준다. 신입생으로는 즈보니미르 보반이 있다. 유러피언 컵은 징계로 인한 불참.

  • 92-93 시즌

빅 이어의 열망을 품고 이탈리아로 건너온 장 피에르 파팽데얀 사비세비치와 바리에서 임대 복귀한 보반이 합류하면서 팀 전력이 강화된다. 역시나 어김없이 리그에서의 우승과 슈퍼컵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유러피언 컵이 개편되면서 챔피언스 리그로 명칭이 바뀌고, 2개의 조로 나뉘어 각 그룹의 1위가 결승전을 치루는 방식으로 바뀐다. 밀란은 전승을 거두며 결승에 도달하지만, 결승에서는 약물 논란이 있는 마르세유에게 석패를 당함으로써 2년만의 챔스 우승은 내년으로 미루게 된다.

참고로 파팽은 챔스 때문에 밀란에 왔는데 이적한 년도에 전 소속팀이 우승해버린 기이한 경험을 했다.[8]

  • 93-94 시즌

마르셀 드사이, 브라이언 라우드럽, 크리스티안 파누치등을 영입으로 시즌을 시작하고 리그 3연패와 슈퍼컵 2연패를 견인한다. 챔피언스 리그에선 순항하면서 결승전에 진출, 드림팀이라 불린 바르셀로나와 격돌하게 되는데 세간의 예상과 달리 밀란의 4:0 압승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상세내용은 기타 항목 참조.

  • 94-95 시즌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임시직으로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 하던 시기 86-87 시즌을 제외하면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 트로피 사냥에 실패하며 세리에 리그 3위 랭크에 머물게 된다(그리고 그 당시 챔피언스리그 본선 티켓 규칙에 의하여 그 다음 즌 챔스 본선 진출 티켓을 얻는데 실패한다) 뿐만 아니라 리그에서 아쉬웠던 성적을 챔피언스리그 대회에서 나마 회복 할려 했던 밀란의 야심찬 목표는 그 당시에 유벤투스 이전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결승 진출을 3회 연속 올라가는 대업을 이루어냈으나 자신의 친정팀과 제회한 프랭크 레이카르트,훗날 산시로의 위대한 레전드로 거듭나는 클라렌스 시도르프,프랭크 데부어 형제,고글맨 에드가 다비즈의 활약으로 아약스에게 0-2 스코어로 패배 하게 되며 준우승으로 머물게 된다....

이들 외에도 필리포 갈리, 마우로 타소티, 로베르토 바지오, 조지 웨아 등 각 국가대표팀 및 클럽들의 슈퍼스타들까지 영입하지만 밀란의 성공은 슈퍼스타뿐만 아니라 이 당시 밀란의 황금유스가 그야말로 빵빵터져 주면서 파올로 말디니-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로 이어지는 밀란출신 역대급 수비수들과 알베리고 에바니, 딥 라잉 미드필더의 시초인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9]등이 기량을 만개하고 활약한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동안 리그우승 5회[10], 챔스 3회 등 축구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오렌지 삼총사의 퇴장 및 주역들의 노화로 95-96시즌의 유로파 리그에서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스쿠데토를 사수하여 유종의 미를 거둔 뒤 카펠로 감독의 레알 마드리그 행으로 인한 사임 그리고 그 다음시즌 15년간 주장직을 수행하며 밀란 역사상 가장 오랬동안 주장직을 역임한 프랑코 바레시&그리고 밀란의 위대한 철의 백포의 멤버이자 당시 오른쪽 풀백 자리를 담당했던 마우로 타소티 은퇴 및 고질적인 발목 부상으로 인해 2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선수 은퇴라는 결정을 하게된 마르코 반 바스텐,그리고 루드 굴리트의 첼시 이적, 로베르토 도나도니 MLS 진출 등 주요 멤버들의 노쇠화로 인한 은퇴 및 이적으로 인해서 한시대의 최고 존엄 지위를 유지했던 축구 클럽의 역사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 당시 밀란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다른 클럽으로 떠난 유망주로는 파트리크 비에이라,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옌스 레만, 에드가 다비즈 등이 있다.

4 암흑기

즈보니미르 보반, 올리버 비어호프, 조지 웨아,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레오나르두, 세르징요로 대표되는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암흑기는 선수들의 이름값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확치고 올라온 리그 라이벌들과 위닝 멘탈리티의 부재등으로 99년도 알베르토 자케로니가 일궈낸 깜짝 리그우승을 제외하면 10위권에 맴돌았다. 결국 개혁의 칼을 빼들면서 1999년 안드리 셰브첸코젠나로 가투소영입을 시작으로 기존의 즈므니미르 보반, 데미트리오 알베르티니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또한 미국에서
돌아온 도나도니의 은퇴까지 더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세대교체를 하기 시작한다.

밀란 역사상 최악의 먹튀라 평가받는 이브라힘 바[11], 호세 마리, 하비 모레노, 호케 주니오르[12]가 이 시절 선수들이다.

5 밀란 제너레이션 2기

일명 New generation. 96년부터 시작된 팀의 암흑기를 벗어나 2002-2007 동안 유럽을 호령했던 시기로 당시 감독은 이후 레알 마드리드라 데시마를 이끄는 카를로 안첼로티이다. 당시 안첼로티는 초보 감독으로 유벤투스를 2년 연속 2위로 이끌지만 이름값과 유벤투스의 기대(우승)에 부합하지 못했으며, 라이벌 팀의 레전드라는 이유[13]로 서포터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밀란 감독 부임 후 02-03 챔피언스 리그 우승코파 이탈리아 우승, 03-04 세리에 A 우승과 , 06-07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견인하며 대표적인 젊은 감독으로 우뚝섰다.[14]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선수들은 안드리 셰브첸코, 카카, 클라렌스 세도르프, 안드레아 피를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01-2002 시즌 여름 이적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베를루스코니는 파산해버린 피오렌티나의 후이 코스타마르셀로 리피의 개혁의 일환으로 내쳐진 유벤투스의 필리포 인자기를 사재 7000만 유로를 풀면서 영입하였고[15] , 이후 인테르에서 영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던 안드레아 피를로와 셰브첸코와 함께 디나모발 돌풍을 이끌던 카카베르 칼라제등을 영입하면서 2001-2002 시즌을 4위로 마치면서 지난 시즌만 못한 순위를 기록했지만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02-03시즌에는 인테르에서 그저그런 활약으로 네라주리에서 쫏겨나다시피 했던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영입, 그 외에도 바르셀로나 에서 히바우두를, 2002년 월드컵 이후에 송종국이 처음으로 유럽 클럽으로 입단 하게될 페예노르트 에서 욘 달 토마손을, 라치오의 주장이자 유스 출신인 알레산드로 네스타를 영입하면서 93-94 시즌 이후 8년만의 챔피언스 리그 6번째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통산
5회 우승을 견인하며 다음시즌에 입게될 유니폼에 코카르다 크리콜로레 패치를 달게됐으나 리그에서는 맹주 유벤투스와 더비 라이벌 인테르에게 밀리며 3위를 기록한다.

03-04 시즌 개막 전 as로마에서 맹활약하던 카푸를 영입하고,당시 브라질 축구의 10년 대계를 열어줄 대표적인 유망주였던 카카등을 영입하면서 드디어 17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데포르티보에게 원정 4:1 참패를 당하면서 일찌감치 짐을 싼다.

04-05 시즌에는 야프 스탐, 에르난 크레스포를 영입하면서 말네스카라는 역대급 수비라인과 셰브첸코, 크레스포라는 막강한 투톱과 그를 받쳐주는 카카, 세도르프, 가투소, 피를로라는 환상적인 미들진과 그를 받쳐주는 두터운 백업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리그에서는 파비오 카펠로가 부임하고 입맛에 맞게 뜯어고친 유벤투스에게[16],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이스탄불의 악몽으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05-06 시즌에는 마르시오 아모로소, 요한 보겔, 크리스티안 비에리,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마렉 얀쿨로프스키, 젤리코 칼라치등을 영입하면서 다시금 기대를 높였으나 크레스포의 대체자로 데려온 비에리의 폭망 등으로 또다시 유벤투스에게 막혀 리그 준우승[17],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는 바르셀로나에게 1:0으로 패하고 탈락한다.

이후 마지막을 불태우며 준비한 06-07 시즌은 시작부터가 암울했다. 칼치오폴리로 인한 승점 7점 감점 및, 3차예선부터 참가하게 된 챔피언스 리그 및 안드리 셰브첸코의 이적과 대체자로 데려온 히카르두 올리베이라의 대 폭망, 월드컵 우승으로 인한 주전 이탈리안들의 부상 및 후유증으로 리그에서는 챔피언스리그 마지노선인 4위도 간당간당했으나 챔스에서는 카카의 원맨쇼로 16강에서 셀틱을 격파하고, 이후 인자기와 세도르프의 각성으로 호구[18] 전력상 열세가 점쳐지던 바이에른 뮌헨을 8강에서 원정에서 2:0으로 꺾은 후 4강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다시 한 번 카카의 맹활약으로 5:3 격파하고 결승전에서 2년전 악몽을 안겨준 리버풀에게 2:1 승리로 설욕하며 다시한번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한편 리그에서는 겨울 이적시장 신입생 호나우두마시모 오또의 맹활약으로 4위를 수성하면서 07-08 시즌 챔스 티켓을 손에 넣는다.

이 시기에도 항상 성공적인 영입만 있던게 아니라서 크리스티안 비에리, 히바우두,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요앙 구르퀴프, 리카르도 올리베이라등의 실패작도 많았다.

그 후 밀란은 세대교체 실패와 지나친 주전 선수들의 노예화 및 노쇠화로 인해 4위권에서 놀면서 눈이 썩는 예능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결국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호비뉴, 안토니오 카사노, 이냐치오 아바테, 지안루카 잠브로타, 치아구 시우바 등이 활약한 10-11 리그 우승 이후로는 3위한번 찍어주더니 수직하락...

6 기타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 압권인 기록은 최후의 챔스 2연패도 있으며 또 한 세계 축구사에서 여덞번째로 긴 58경기 무패 행진 및 91-92시즌을 무패우승으로 마무리를 한 대 기록과 더불어 동시기의 또다른 강팀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끌던 원조 드림팀을 93-94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4:0으로 개박살낸 것이다. 시즌 전 이미 레이카르트가 이적하여 오렌지 삼총사는 붕괴되었고, 주전들의 줄부상과 경고누적 컨디션 난조 등으로 세간의 예상은 바르셀로나의 완승을 점쳤다. 심지어 요한 크루이프는 경기전 인터뷰에서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같이 형편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라는 자신감을 내보였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밀란이 평소 전술[19]과 달리 맞불작전을 놓는 바람에 준비한 전술이 모두 물거품이 된데다 팀 내부의 균열과 더불어 밀란의 미친듯한 경기력으로 초장부터 밀리기 시작해 전반전에만 마싸로에게 2골을 얻어맞아 패색이 짙어지고, 후반전 사비세비치 1골에다 크루이프 자신이 조롱한 축구 못하는 드사이에게 까지 골을 헌납하면서 4:0 떡실신을 당해 드림팀 해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만다. 이후 크루이프는 이탈리아 축구계와 수비에 중심을 둔 소위 안티 풋볼[20]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게 된다.
  1. 바르셀로나의 드림팀은 크게 3기수로 꼽힌다. 1기는 당연히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등이 활약한 요한 크루이프 감독 체제의 90년대 초반, 2기는 호나우지뉴, 데쿠등이 버티던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 체제의 2000년대 중반, 3기는 당연히 펩의 바르셀로나. 최근에는 MSN#s-3의 바르셀로나도 바르셀로나의 드림팀 중 하나라는 말도 늘고있다.
  2. 현재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생명이 끝장남과 동시에 자금지원이 동결되어 밀란은 과거의 위용은 커녕 10-11시즌 이후 망란화되었다.
  3. 2000년대 유스가 빵빵 터져 이미지가 희석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원래 바르셀로나는 이적시장에서 이적자금을 효율적으로 더럽게 못 쓰는걸로 유명했다.
  4. 바르셀로나에 대해 당시 밀란의 에이스 마르코 반 바스텐은 바르셀로나가 더 강력하다고 했지만 립 서비스인지 진심인지는 불명.
  5. 이때 기록은 세리에 클럽이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년도가 더 적을 정도(...). 특히 UEFA컵은 99년까지 딱 한번을 제외하곤 전부 결승에 진출했다. 2000년대 중반의 EPL 클럽들의 유럽 돌풍은 챔스 트로피 갯수도 갯수지만 UEFA컵에선 독일과 스페인의 강세인지라 초라한 감이 없잖아 있다.
  6. 이때 당시의 승부조작을 토토나로 승부조작 스캔들이라 한다.
  7. 어차피 밀리던 상황이다.
  8. 이후엔 마이클 오웬 또한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9. 밀란 유스이나 파도바에서 기량을 만개하고 돌아온다.
  10. 당시 리그 우승 경쟁상대가 디에고 마라도나의 나폴리, 클린스만ᆞ마테우스브레메의 게르만 삼총사를 앞세운 인테르, 전통의 강호 유벤투스, 비알리와 로베르토 만치니를 앞세운 삼프도리아 등 일명 7공주 시절보다 더한 경쟁상대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였다.
  11. 청대나 보르도 시절엔 지단 이상의 기대를 받던 선수였으나 현재의 발로텔리 이상의 또라이 기질을 보여주었다. 매 경기 머리색을 바꾸면서 축구계의 데니스 로드먼으로 불렸을 정도. 결국 임대를 전전하다 방출당하고, 이후 방출을 밥먹듯이 당하다 보다 못한 밀란이 밀란에서 은퇴시켜줬다.
  12. 일명 3R. 호케는 월드컵 때 브라질을 우승으로 견인한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돌고래짓을 해댔고, 나머지 스페니쉬들은 라리가와 청대에서의 기량은 전부 스페인에 두고왔는지 쓰레기 돋는 플레이를 보이면서 세대교체의 선두주자에서 먹튀로 전락하며 일명 스페니쉬 징크스와 이탈리아 클럽들이 스페인 선수들을 꺼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13. 안첼로티는 로마와 밀란의 레전드이다. 인테르, 토리노에 비하면 라이벌 의식이 적은 편.
  14. 노안이라서 덕장 및 노장 이미지가 심어져서 그렇지 안첼로티는 무리뉴와 꼴랑 4살 차이다(...).
  15. 이는 베를루스코니가 이 두선수의 열혈 팬인 이유가 가장 컸다. 더불어 보반 대체자와 안드리 셰브첸코의 파트너를 영입하는 계획도 있었고.
  16. 덧붙이자면 이 당시 유벤투스 또한 무시무시한 스쿼드를 자랑했다.
  17. 후에 칼치오폴리로 인해 4위로 조정.
  18. 바이에른은 밀란과의 유럽대항전 전적이 1승 2무 6패로 극열세이다.
  19. 당시 감독은 파비오 카펠로 당시엔 초짜 감독에 불과했다. 게다가 밀란의 93-94 시즌의 주요전술은 1골 넣으면 걸어잠그기라는 무진장 재미없는 경기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토털풋볼의 원조라는 자부심을 가진 크루이프가 자신의 축구와 상반되는 경기를 하는 밀란과 카펠로를 곱게 보지않은것은 당연했다. 09-10시즌에도 마찬가지라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는 자신의 축구철학에 반하지 않아 지지하는 한편 카펠로의 전술과 비슷한 조세 무리뉴의 인테르는 안티 풋볼이라며 산란하게 깟다. 결과는 보다시피 인테르의 총합스코어 3:1 승리.
  20. 수비전술도 하나의 전략인데 자신의 철학에 반한다고 안티 풋볼이라 하는 것에서 크루이프의 독단적이고 고집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