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현종

(이융기에서 넘어옴)
당의 역대 황제
5대 예종 정황제 이단6대 현종 명황제 이융기7대 숙종 무황제 이형
묘호현종(玄宗)
시호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
연호선천(先天, 712년 8월 ~ 713년 11월)
개원(開元, 713년 12월 ~ 741년)
천보(天寶, 742년 ~ 756년 7월)
이(李)
융기(隆基)
생몰기간685년 9월 8일 ~ 762년 5월 3일
재위기간712년 9월 8일 ~ 756년 8월 12일
태상황756년 8월 12일 ~ 762년 5월 3일

의 욱일승천과 급전직하, 그 모두를 주도한 군주

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천보(天寶), 즉 하늘이 내린 보물과도 같았던 여인과 후세에 길이 전해질 로맨스 스토리를 남긴 낭만천자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 이름은 이융기(李隆基). 당예종 이단의 아들이다. 시호는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로 줄여서 명황제(明皇帝). 당명황(唐明皇)이라고도 불린다. 묘호는 현종으로 검을 현(玄)을 쓰는 게 특징.

1 즉위 이전

할머니측천무후가 집권하고 있던 무렵에 소년기를 보냈는데 측천무후 집권기부터 내심 반기를 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의 근위대인 남북위군[1] 중 일부인 만기군을 슬슬 포섭하고 있었던 듯 싶다. 사실 반기를 들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측천무후가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당예종의 첩을 여럿 죽였기 때문이다.(...) 이후 큰어머니인 위황후와 그 딸인 안락공주가 큰아버지 중종을 독살(710년 6월 2일)하자[2] 6월 20일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던 만기군을 움직이고 우림군까지 장악한 다음 고모태평공주와 손을 잡아 정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위씨와 무씨 가문 일파[3]를 대부분 참살하고 정국을 수습하면서 아버지를 황위에 복위시켰다.

공헌도로만 따지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태자가 될 수 있었지만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미묘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적장자이자 큰형이였던 송왕 이성기가 스스로 양보함으로써 큰 무리없이 황태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4][5]이 이후 고모인 태평공주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는데 태자로서 길게 있을 경우 위험할 수 있다 여긴 예종은 얼마 안가 그에게 양위하여 27세에 당나라의 6번째 황제가 되었다.

2 황제로서

2.1 개원의 치

즉위하자마자 현종은 태평공주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여야 했다. 태평공주는 여러 번 현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결국 즉위 다음해인 713년 태평공주와 그 일파까지 숙청하는 데 성공하여 측천무후가 물러난 후 연거푸 무력을 동원한 정변이 일어나던 혼란스러운 당의 정치상황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후 유능한 재상들을 등용하고 측천무후 시기부터 진행되던 사회적 변화[6]에 맞추어 제도를 개혁하며, 국방력을 재건하고 대외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라를 최전성기로 끌어올렸다.

이 시기 현종을 보좌한 유능한 재상으로는 요숭, 송경, 장가정, 장열, 이원굉, 두섬, 한휴, 장구령[7]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요숭과 송경은 개원지치 초창기를 빛낸 명재상으로써 '정관지치'를 보좌한 방현령, 두여회와 비견될 정도로 유능한 재상으로 손꼽힌다.[8] 그외에 한휴의 경우 현종에게 자주 간언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한휴가 재상이 되고 나서부터 폐하는 단 하루도 즐겁게 지내신 적이 없습니다" 고 할 정도로 잔소리꾼[9]이였다. 그외에 유명한 정치가로는 유능한 재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정국을 길게 주도했던 원건요, 재정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우문융이 있다.[10]

단순히 이러한 유능한 재상들의 목록만 놓고 본다면 '신하를 잘둬서 명군' 이라고 들릴 수도 있으나, 강력한 현종의 황권을 생각한다면 저러한 명신들은 현종을 보좌하는 자들이고 결국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당현종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즉, 개원지치를 실시해 당이 직면했던 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로는 현종에게 있는 셈.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화적법' 이다. 이 법은 추수기에 국가에서 강남 등 곡창지역의 곡식을 시가의 2~3할 정도 더 높게 처서 사들여(화적) 이를 각지의 군진들에 직접 공급하고 빈번한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수도권 관중지역[11]에도 공급하는 제도로, 기존의 지조(농민들이 직접 부담)와 영전(군사들이 둔전을 행함)을 대체하는 제도가 되었으며, 성공을 거두어 2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데 성공한다. 이런 식의 괜찮은 제도개혁을 지속적으로 이루는 데 성공한 공로는 결국 현종에게 있다.

대외적으로는 현종은 기존의 부병제를 기반으로 하는 당의 군제가 측천무후 집권기에 파탄을 맞자 당의 군제를 모병제 중심으로 개혁하는 데 성공. 개원 말엽에는 부병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리고 당은 이러한 모병제로 구축된 대규모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재정비하고 대외적으로 다시끔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외 활동에는 천운도 따랐다. 측천무후 치세부터 예종대에 이르기까지 돌궐의 가한으로써 군림하며 돌궐 제2제국을 전성기에 올려놓고 하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묵철가한(카파간 카간)이 무척이나 허무한 죽음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학령전과 우연히 만나 참수당했다고 하고, 통감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킨 발예고를 완파하고 승리감에 취해 경비병 없이 홀로 돌아가다가 발예고의 패잔병 일부와 우연히 조우, 공격받아 사망하고 그 수급이 자장 학령전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정말 이것이 측천무후와 대등한 위치에 서서 하북을 총공깽으로 몰아넣으며 유목민족 전체를 아우르던 위대한 가한의 죽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무하다.</ref>을 당함으로써(개원 4년) 돌궐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발예고, 회흘, 동라, 습, 복고 등 돌궐에 복속하고 있던 5개 부족이 한꺼번에 귀부해오면서 북방 국경선은 크게 안정되었다.

이후 대처에서 미숙함을 보이면서 뒤를 이은 비가가한(빌게 카간)-궐특근(퀼 테긴)에 의해 다시 돌궐은 상당한 세력을 회복하지만 묵철의 전성기와 같은 압도적인 위용은 보여주지 못하게 되면서 현종은 상당히 여유있게 돌궐에 대응할 수 있었다. 물론 개원지치 시절엔 그래도 돌궐이 여전히 힘을 내고 있던 시기이기에 기본적으로는 돌궐 수하 부족들을 귀부시키고 돌궐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12]

이러한 왠지 운 좋은(...) 전개는 토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시기의 토번은 매우 강성했으며, 측천무후 즉위 초 가르친링은 당나라에 안서사군 우리에게 넘기고 서돌궐 반 잘라서 나눠 먹는 거 어떠심? 이라고 건의할 정도로[13]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700년 가르친링이 토번 내부의 정변으로 인해 숙청당하고, 이후 토번은 정치적 혼란에 의해 약화되었다. 그래도 개원 초기의 토번은 상당히 강성하였던 데다 경운 2년(예종 시기. 710년) 토번으로 시집간 금성공주[14]의 탁목읍으로 황하의 만곡 일대인 구곡지역을 그냥 줘 버리는[15] 삽질을 한 결과 다수의 기병을 충원하는 데 성공한 토번군이 개원 2년 대규모로 침공해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나[16], 군제 재정비를 마무리지은 당은 점차 토번의 침공을 막아내고 밀어붙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개원 17년 안서-하서-농우 지역 진출에 필요한 토번의 최중요 거점이였던 석보성을 삭방절도사 이의[17]가 점령하면서 기세가 한풀 꺾인 토번은 개원 18년 금성공주를 내세워 화친을 요청하게 된다.

이후 개원25년 다시 토번과 전쟁이 발발하고 석보성을 개원29년 다시 빼앗기는 상황도 나왔으나 당은 그 대신 다른 요충지였던 안융성을 계략을 걸어 점령하면서 토번에 대한 우위를 가져가게 된다.

거란족 또한 마찬가지로, 현종은 이이제이를 적절히 걸어 거란을 분열시키고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발해를 상대로는 실패를 맛보아, 등주를 공격당하고 반격에 나섰으나 이역시 실패해 버렸다.

이시기 당은 모병제로 유지하는 대규모의 군진과, 이를 지역별로 엮어서 통솔하는 절도사직을 신설하였고 천보연간으로 넘어갈 즈음 해서는 10개의 절도사직이 설치되게 된다.

그러나, 개원 24년(736년) 그 유명한 이임보가 재상의 일원이 되어 장구령을 몰아내 버리면서 불길한 징조가 감돈다. 그리고 개원 25년, 현종은 황태자 이영, 악왕 이요, 광왕 이거를 사사시키고 개원 26년 충왕 이여를 황태자로 세우는 태자교체를 단행한다.

2.2 천보난치

그러나 이런 태평성세가 계속되며 재위 중반을 넘어가자 황제도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명재상들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하여 국정이 문란해지기 시작한다. 즉위 초기의 현종은 상당히 검소한 인물이었지만, 이 시기 즈음부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보통 기점으로 잡는 건 741년에 연호를 개원에서 천보(天寶)로 바꾼 이후로, 이때문에 현종 후반의 치세를 개원성세에 대비하여 '천보난치(天寶亂治)'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외정책에서는 유명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무장 고선지가 서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일시적으로 영토가 크게 넓어졌고 재정도 나아졌으나, 이슬람 세력의 등장, 이들과 충돌한 천보 10재[18] (751년)에 일어난 탈라스 전투 이후로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19]

내치 측면에서는 고종 이후 측천무후의 치세를 거치면서 몰락했던 관롱 귀족세력이 유명한 간신 이임보를 필두로 내세워 다시 정국을 장악했으며, 개원의 치를 건국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빈천한 가문 출신의 과거제로 입문한 관료들은 세력을 상실하고 밀려나게 되었다. 이는 752년 이임보가 사망한 이후 총애하던 후궁 무혜비 사후 맞아들인 양귀비가 등장하면서 양씨 일가의 전횡으로 국정의 문란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에 이임보는 장성 안쪽의 내지절도사직을 문신이 아닌 무신이 담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막았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지방 절도사들의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결국 이임보 사후 절도사직을 셋이나 역임하고 있던 안녹산이 755년 안록산은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까지 들이치고 현종은 사천을 향해 피난가기에 이르렀다. 이인보가 권력을 잡은지 19년만의 일이었다.

피난길에 이게 다 양귀비와 양국충 때문이라고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들고 일어나서, 양국충은 죽고 양귀비는 병사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귀비가 죽자 일단 사태는 수습되어 무사히 피난갈 수 있었지만 현종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하다.

사천에 피난 가 있는 동안에 다른 방면으로 피난을 보내 분조를 이끌고 있던 황태자가 병사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숙종이 되었다. 자칫하면 황실의 분란이 일어날 위기였지만, 현종에게도 공연히 고집을 부렸다가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파악할 총기는 아직 남아 있었는지, 양귀비의 죽음으로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어쨋는지 정식으로 양위를 인정하고 사천에서 순순히 태상황으로 물러난다.

3 퇴위 후

이후 각지에서 반란군을 토벌하려는 세력과 숙종의 반격으로 장안을 탈환하여 757년 장안에 돌아와 은거했으며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762년 78세로 죽었다.

이 늙은 황제는 죽는 순간까지도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죽었다...고 하는데, 안사의 난 진행과정을 보면 별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것 같지 않은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장안 탈환 이후 안록산에게 붙었던 대신들 처벌 내용을 보면 강경처벌을 주장하는 현종에게 숙종이 제발 좀 봐달라고 싹싹 비는 내용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결국 이런 강력한 현종의 영향력에 두려움을 품은 숙종 옹위파가 두 황제 사이를 갈라놓아 결국 현종의 최측근인 고력사를 비롯, 여러 측근들이 귀양가고 그 자신도 말년에는 흥경궁에서 태극궁으로 거처가 옮겨져 유폐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가 죽었다. 그리고, 현종 사후 13일 뒤에 아들 숙종도 죽어 당의 정국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는 나라의 쇠퇴로 이어지게 된다.

4 평가

“그 나라의 바로 전 임금인 당 명황만 하더라도 양귀비란 계집에게 미쳐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탓에 필경 안녹산의 난을 빚어 내어 오랑캐의 말굽 아래 그네들의 자랑하는 장안이 쑥밭을 이루고 천자란 빈 이름뿐, 촉나라란 두메 속에 오륙 년을 갇히어 있지 않았는가.”

현진건, 「무영탑」中

개원성세라는 전성기를 이끌었으면서 나라의 쇠퇴까지도 초래한 군주라서 평가가 여러 가지로 엇갈리곤 한다. 역시 인생은 말년까지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현한 임금.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거의 그를 상징하는 요소이며 그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거리와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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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현종이 양귀비와 놀아나다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가인데, 이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도덕적 역사관이기도 하지만, 사실과도 좀 다르다. 후기의 현종이 암군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은 잘 따져보면 정치적인 영역에 가깝다. 바닥까지 몰락했던 관롱 귀족집단이 완전히 정국을 장악하여 국정을 전횡하는 것을 다름 아닌 그가 방관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개혁도 몇차례 시도했지만 이에 반하는 귀족들이 정국을 장악했는데 그게 과연 먹히겠는가.

이런 상태에서 자신에게 간언하는 과거제 출신 관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 정치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는 현종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변화들을 학자들이 상징적으로 평가한 것이 '양귀비와 놀아나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임보 사후 양국충이 집권하면서 이들 관롱 귀족세력은 다시 힘을 크게 상실한다. 양국충은 가문이 빈천한 과거급제자 출신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삼아 이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과거출신 관료들은 외척인 양국충의 지원으로 기용되었다는 게 약점이 되어 양씨가문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개원의 치 즈음에 군진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절도사 제도도 문제가 심각했다. 막대한 수의 직업군인을 지방의 군사지휘자가 단독으로 통솔하여 군벌이 되기 쉬운 태생적 단점을 가진 절도사제는 그렇기에 엄중한 통제가 필요한 제도였으나, 천보시대부터 관리가 극도로 소흘해진다.

대표적인 안록산의 경우 평로절도사로 14년, 범양절도사로 12년, 하동절도사로 5년을 재임했고, 이들 셋을 겸임하는 상태로 있었는데, 절도사의 원래 정해진 임기가 2년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건 말 그대로 관리를 손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안록산이 통제하던 병력은 지방 절도사들이 관리하던 총 병력인 48만 6,900명 중 37.8%인 18만 3,900명, 여기에 수만명에 달하는 사병집단까지 확보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통제 불능의 세력이 된 것. 이걸 방관한 말년의 현종이 과연 암군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결국 이런 거대한 병력을 통제하고 있던 안록산이 반기를 들면서 말 그대로 대책이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결국 당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그 책임을 현종과 양귀비라는, 정국 혼란의 상징적이자 책임이 있는 인물들이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5 기타

한국의 성씨인천 이씨가 이 사람과 연관이 있다.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6대조 할아버지인 허기라는 사람이 사신으로 당에 왔다가, 안사의 난 당시 피난가는 현종을 따라가게 됐다. 그 인연으로 나중에 현종이 그에게 이씨 성을 줬다고 한다.

황자였을 때 장안성 동쪽 춘명문 부근에 있던 융경방(隆慶坊)에 저택이 있었는데, 황제로 즉위한 후 방의 이름을 흥경방(興慶坊)으로 고치고 여러 차례의 공사 끝에 방 전체를 흥경궁(興慶宮)이라는 이름의 궁궐로 만들었다. 732년에는 장안성 북쪽의 대명궁과 남쪽의 곡강지 인근에 있던 이궁인 부용원 및 그 중간에 있는 흥경궁을 연결하는 협성(夾城)을 장안성 동쪽 성벽에 잇댄 이중 성벽으로 완성해 황제 전용 통로로 사용했다.

현종 때의 특기할 사항 중 하나는 천보 3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친 것. 즉 천보 3년 이후부터는 천보 3재, 4재... 이런 식으로 써야만 했다는 뜻. 그래도 지엄한 천자의 명령인지라 당나라 전역은 물론 이웃나라 신라에서도 천보 ~재라고 표기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는 천보 11재(752년)라고 적힌 습자용 목간이 있다. #

이런 괴악한 표기가 끝나고 '재'에서 '년'으로 회복된 건 현종의 아들 숙종 때인 건원 원년 2월. 그동안 천보(天寶), 지덕(至德), 건원(乾元)의 3개 연호를 가지고 20년 넘는 세월 동안 백성들만 생고생. 이렇게 난리를 쳤는데 안록산의 난이 안 날 수가 있나.

78세까지 장수했기에, 차기 황제가 될 아들, 손자, 증손, 현손을 생전에 모두 봤다. 현종의 현손인 순종이 태어난 해가 761년, 바로 현종이 붕어하기 1년 전.

등극하기 전에는 당나라 격구 대표 선수였다고 한다.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앙아시아 소그드인[20]으로 추정되는 조야나희와의 사이에서 혼혈 수안공주를 두었다.

  1. 남군 16위군과 북군 우림군 및 만기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 독살 건은 현종이 쿠데타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
  3. 무삼사 사후에도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씨 가문은 위씨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융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태평공주까지 정변에 동참한 걸 보면 무씨 가문과 측천무후의 자식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 실제로 무씨 가문의 전횡은 말년의 측천무후의 심기를 어지럽힌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4. 형인 이성기와 신왕 이성의는 각각 근면성실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황제에 오른 뒤에도 현종과의 우애가 지극했다고 한다. 즉위하자마자 식사와 생활은 물론이고, 기다란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형제들과 같이 잠을 잤을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말 그대로 '그림자 형제'로, 당태종은 같은 뿌리를 두고 엮어 자라는 대나무와 같다고 하여 '죽의(竹義)'라고 그 우애를 정의하기도 했다. 특히 이성기는 개원 29년, 재위 30년만에 숨을 거두자 고력사에게 시를 짓게 할 정도로 애도했다고. 이성기는 피리에, 동생 이융범은 비파에 능했다고 한다.
  5. 동생 이융범과 설왕 이융업은 태평공주 숙청에 동참한 즉위 공신급이었으며, 이융범은 선비와 예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이융업은 개원 13년 처형인 위빈과 황보순이 당현종 중병 중 길흉을 논하다가 발각 되어 위빈은 몽둥이로 맞아 죽고(...), 황보순은 좌천되었다. 물론 우애를 깨진 않은 정도. 당현종은 이융업을 손수 위로하며 "내가 만약 형제를 시기하고 막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천지신명이 벌을 내릴 것"이라고 다짐했고, 이후로도 이융업이 아프자 당현종은 손수 간호를 하다가 촛불이 바람에 날려 수염을 태워먹은 적이 있는데, "아우가 낫는다면 수염이 문제냐"면서 대범하게 넘겼다고 한다. 오오.
  6. 균전제의 붕괴로 인한 율령제도의 변화
  7. 참고로, 이 순서는 재상으로써 정국을 주도했던 시대순이다.(...)
  8. 요숭 같은 경우 조정의 관리 중 하나였던 제한이 '공은 당시의 문제를 구해낼 수 있는 재상이다' 고 하니까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을 어찌 쉽게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무진장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 이란 뜻의 '구시지상'
  9. 이때 현종의 대답은 전형적인 명군의 발언이다. "짐은 야위었으나 천하의 백성들은 반드시 살이 쪘을 것이다. 내가 한휴를 기용한 것은 사직을 위한 것일 따름이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참고로 이 발언이 나온건 개원 21년. 초심이라기엔 20년은 좀 길다.
  10. 단, 뇌물을 밝히는 게 심해서 우문융은 재상직은 올랐으나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다.
  11. 당은 수도를 장안에 잡고도 자주 낙양으로 정부가 움직이곤 했는데, 이는 관중지역의 식량부족으로 인한 것으로 '축량천자'(逐糧天子)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12. 비가가 개원 22년 독살당하면서 돌궐 제2제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13. 이 제안은 당시 조정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14. 이렇게 정략적인 이유로 외국에 시집보내는 공주를, 중국에서는 화번공주라 불렀다.
  15. 이 건의는 토번의 뇌물을 먹은 양주도독 양구의 건의에 의한 것이였다.
  16. 이에 상당히 다혈질이던 현종은 기존의 농우 일대의 병력에 더해 병력 10만과 군마 4만필을 추가로 징발하고 스스로 토번으로 친정하려는 의도까지 내비첬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친정은 그만뒀다.
  17. 황족이지만 현종의 형제는 아니었다.
  18. 당현종 천보(天寶) 3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쳤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결론적으로 당숙종의 건원(乾元) 원년부터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
  19. 참고로 탈라스 전투로 인해 제지술이 이슬람을 거쳐 유럽까지 전해졌고 결과적으로 유럽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탈라스 전투 항목 참조.
  20. 이란계 백인 민족으로 상업에 능했다고 한다.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소수민족인 야그노브인이 이들의 직계후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