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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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斗彦

한국정치의 풍운아

1 개요

한국정치인. 1957년 3월 6일생. 친이계로 보통 알려져있으나, 항목을 보면 알듯 꽤 다사다난하다.(...)

2 생애

2.1 초년시절

1957년 3월 6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군수를 지냈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아버지는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의 운전기사로 일했고, 어머니는 서대문 모래내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그는 5남매 가운데 넷째 아들이었다.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은 그의 먼 당숙뻘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여겼고, 그의 아버지가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도 정성태 의원의 연줄 덕분이었다.[1] 어쨌든 그 덕분에 정두언은 서울창서초등학교와 배문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편이어서,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드러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배문중학교 때부터 그는 팝송을 많이 불렀는데 화장실에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노래만 잘 하는 게 아니라 공부 역시 아주 잘 해서, 1973년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1976년에 서울대학교 무역학과에 진학하였다.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Spirit of 1999'라는 록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엔터테이너 기질이 있어서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2]

그 와중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서울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우수한 고시 성적에도 불구하고 실습 점수가 0점이어서 불합격할 처지에 놓였다. 그와 시비가 붙은 구청 인사 담당자가 앙심을 품고 영점 처리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합격시켰다.

그 뒤 행정고시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강원도 양구군에서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전역 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되었다.

2.2 관료시절

행정사무관시보 임관 후 정무제2장관실에 배속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무제2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 간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쳤다.

노태우가 정무제2장관에서 문화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그를 따라 문화체육부에 배속되어 서울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하였다. 1985년 1월에는 국무총리실로 발령이 나서, 청소년대책반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으로 있을 때에는 상사의 순직을 보기도 했다.

1987년 4월,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일어났을 때는 4.13 호헌조치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그 해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탤런트 공채시험에 지원하기도 했는데,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인해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 2년 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에도 다니면서 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냈다.

2.3 정계 입문

2000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국무총리실에 사표를 제출하고 정계에 입문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장재식 후보에 4% 차로 석패하였다. 이 때의 패배로 그는 우울증을 겪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다. 그러던 그에게 국회의원 이명박이 찾아와 서울특별시장 선거캠프 합류를 권했다. "이명박의 컨셉이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승낙한 다음 이명박의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서 준비하다시피 했다. 그 결과 이명박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그 후 이명박 시장 밑에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서대문 을에 출마하여 이번에는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친이계에 속하여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다. 이후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팀장으로 활동하면서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였다.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이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초기에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이명박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게 2008년 총선 불출마 요구를 했다가 찍혔는지 이후 권력 핵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이상득 및 그 측근들(임태희, 박영준 등)의 권력화를 계속 비판했는데, 그 덕분인지 이명박 당선의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3] MB정권 내내 찬밥 신세로 겉돌았다. 얼마나 왕따를 심하게 당했는지, 한번은 야당에 영포목우회 관련 정보를 넘겼다는 의혹을 받고 여권에서 융단폭격하자 눈물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 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2010년 조전혁 콘서트에서 조촐하게 노래를 불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솔로몬 저축은행 비리 건으로 이상득과 함께 기소되었으나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4]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015년 10월 25일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자기 모순이고, 전략적으로도 큰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2015년 11월 13일에는 중앙일보 인터뷰링크에서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을 비판하며, "나라가 군정 종식은 됐어도 왕정종식은 못했다"라는 발언을 하여 주목받았다. 그리고 여당의 ‘친박 TK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확고부동하다. 이들이 당을 주도하니 당이 수도권에 관심이 없고 민심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 수도권 의원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불평하기도 하였다.

2015년 11월 14일에는 자신의 블로그에 ‘친박·TK’ 출신의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 대해 이들이 전략 공천이니 TK 물갈이니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내년 총선에서 영남과 서울 강남 지역구에 뻔뻔하게 무혈입성하려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고관으로 임명돼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다시 국회의원으로 ‘임명’돼 그 부귀영화를 이어가겠다는 것"이니 이것은 불공정하다고 한마디 한 것. '독재가 보수, 친북이 진보인 기괴한 나라'라는 말에서 모두까기 그의 가치관을 대략 엿볼 수 있다.

다만 과연 이러고서도 친박이 당권을 쥔 새누리당에서 공천받을 수 있을 지(...)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불러일으켰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지역구가 야당 강세 지역이라 공천을 신청하는 사람이 없다고 공천 경쟁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듯3연속 당선되었잖아...했으나 2016년 친박 주도의 공천 과정에서 비박계인 김무성 대표에게 이른바 비박 살생부 명단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론에 터뜨리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이런저런 잡음이 터졌지만, 결국 공천 안 주면 살생부가 사실이라고 시인하는 꼴이라 찔린건지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렇게 같은 지역에 출마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에서 2위로 뒤졌다는 것. 17대와 19대 총선에서는 두번 다 출구조사에서 낙선하는 걸로 나왔는데 정작 개표해 보니 당선이 된 적도 있던 터라 희망을 잃지 않는 듯했으나...

결국 33,852표(39.9% 2위)를 얻어 낙선하였다. 안그래도 서대문이나 마포는 더불어민주당 득세[5]인 곳이라 새누리당에게 정두언이 마지막 서대문 보루였는데, 20대 총선에서 정두언이 털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재오마저 은평 을에서 털리면서 7권역[6]은 싹 다 더불어민주당 장악 확정.(...) 지못미

낙선하고도 새누리당 까기에 여념이 없는데, 2016년 5월 한 인터뷰에선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에서 참패한 이유를 들며 낙선한 본인의 한까지 담아 "(지금) 새누리당의 정체성이 독재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보수가 떠난거다. 보수의 정체성이 독재·권위주의는 아니지 않나. 지금의 새누리당은 거의 권위주의가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로 가고 있다"며 "그러니까 당연히 중도신당도 필요없고 제대로 된 보수당, 제대로 된 우파 정당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2016년 5월 23일부터 10월 21일까지 TV조선의 정치시사프로인 정두언·김유정의 이것이 정치다MC김유정과 함께 맡기도 했다.

2.3.1 서대문구 을 지역구에서의 그의 위상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 험지인 서대문 을 지역구에 공천을 받았으나 현역 장재식 의원에게 불과 4% 차로 석패했다. 당시 은평, 서대문, 마포의 6개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이 유일하게 패배한 지역. 이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 영입되어 당선에 기여하고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관악구 을과 함께 서울에서 보수정당의 양대 험지로 통하던 서대문 을 지역구에 16대 총선에 이어 두 번째로 출마하여 탄핵 역풍을 뚫고 당선되었다!!! 그가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남가좌동, 북가좌동 일대에 가재울뉴타운을 유치한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데다 새천년민주당 안완길 후보가 열린우리당 박상철 후보의 표를 어느 정도 잠식한 것이 정두언 후보의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전년도인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이 당선되면서 일약 정권 실세로 떠올랐다. 그의 지역구에 통합민주당에서 단 한명도 공천 신청자가 없었을 정도였다. 서대문을의 미친놈은 나야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에게 썰린 정동영의 출마설이 나돌았지만 동작구 을에 공천되었다. 정두언을 피하려다 정몽준 만난 정동영 결국 통합민주당은 후보자 등록을 며칠 앞두고 김상현 전 의원의 아들 김영호 후보[7]를 전략공천했고, 선거 결과 정두언 후보가 서울 강북 지역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8]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18대 총선 때처럼 김영호 후보와 맞대결했다. 전년도인 2011년 서울시장 보선에서 당시 무소속이던 박원순이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등 여론이 한나라당의 후신 새누리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된 선거였지만 17대 총선 때처럼 정통민주당 홍성덕 후보가 김영호 후보의 표를 잠식하는 바람에 정두언 후보가 625표차로 당선되었다.
  • 서울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 중 17, 18, 19대 세 번의 총선에서 모두 이긴 유이한 새누리당 국회의원[9]이다. 용산구가 강남 3구의 뒤를 이어 새누리당의 새로운 강세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16대 총선[10]까지 보수정당의 험지에서 3회 연속으로 보수정당 소속으로 당선된 정두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진영, 이재오 등이 공천에서 탈락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지역구에서 또다시 공천을 받았다.[11] 만약 정두언이 20대 총선에서도 당선된다면 그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같은 정당 소속으로 단일 지역구에서 4연승을 하는 후보자[12]가 될 수 있었지만...결국 낙선하였다.(...)

3 트리비아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정율성이 정두언 의원의 가까운 인척이 된다고 한다. #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을)한나라당31,304 (42.7%)낙선 (2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을)한나라당39,734 (45.6%)당선 (1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을)한나라당36,931 (59.1%)당선 (1위)
2012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을)새누리당35,380 (49.4%)당선 (1위)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을)새누리당33,852 (39.9%)낙선 (2위)
  1. 이때문에 그의 가족은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을 큰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
  2.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현재에도 이따금씩 자신의 노래를 담은 음악 앨범을 만들며, 가장 최근에 낸 앨범이 2009년에 낸 4집이다. MC두언
  3. 빈말이 아니라 당시 한나라당 주요인사들이 대부분 방관하거나 아니면 박근혜캠프에 있을때, 처음부터 MB와 함께 한 정말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4. 함께 기소되었던 이상득은 징역 1년 2개월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5. 마포구는 특히 더 심하다. 진보성향 유권자가 많은 대학가 지역이기 때문.
  6. 서대문, 마포, 은평구로 다니는 시내버스 번호. 경기도 고양시와 파주시를 포함하나 여기서는 서울 관내로 한정하여 묶었다. 고양까지 포함하면 심상정이 있으니.....
  7. 17대 총선에서 서대문 갑 지역구에 출마한 바 있다.
  8. 정두언과 함께 이명박의 남자로 불리던 이재오는 이 선거 은평구 을 지역구에서 한낱 정치신인이자 군소정당(창조한국당) 후보였던 문국현에게 1만 표 정도 차이로 처발렸다. 물론 문국현이 의원직을 잃어 2010년 재보선에서 다시 당선되었지만.
  9. 나머지 한명은 용산구진영 의원.
  10. 서대문구 갑 선거구를 비롯하여 은평구 갑을, 마포구 갑을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는데 서대문 을만 새천년민주당이 당선될 정도로 서대문구 을은 서울에서도 민주당계의 성지였다.
  11. 애초에 본인 외에는 신청자가 없었다. 친박계에서 눈엣가시로 여기고 컷오프하려 했지만 신청자가 없어서 그냥 공천했다.
  12. 17, 18, 19대 총천에서 용산구에서 새누리당(舊 한나라당 시절 포함) 소속으로 3연승을 한 진영 후보는 20대 총선을 앞두고 컷오프당하자 진영을 바꿔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또 은평구 갑동작구 갑에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내리 각각 3선을 한 이미경, 전병헌 의원은 20대 총선에서 공천에 탈락하자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불출마했다. 이재오 후보는 18대 총선 본선거에서 낙선한 데다(재보선으로 당선) 20대 총선에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했다. 5선 고지에 오른 추다르크도 정당이 바뀌었던 데다가 2004년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