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탁조의

莽卓操懿
한자 훈음[1] : 우거질 망/높을 탁/지조 조/아름다울 의

1 개요

망탁조의
망조의온

중국 역사상 한나라 이후부터 조위 때까지의 4명의 역적(당시 기준에서 역적. 지금은 권신)을 가리키는 역사용어다. 멤버는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다. 망탁조의는 이 4명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말이다. 당나라 사람 조인(趙璘)의 저서 ≪인화록(因話錄)≫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으로[2], ≪송사(宋史)≫[3]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 네 사람 모두 일단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봉록을 먹던 국가를 무너뜨리려 한 자들로, 왕망은 선양의 시조[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찬탈(簒奪)의 시조'로 이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 동탁은 황제를 노렸으나 헌제의 선양이라는 미끼에 걸려 결국 죽음을 당했고 조조와 사마의는 자신의 생전에는 황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 자손들이 황제가 되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우리 중나라 꿀물황제는 무시함?[5] 니네 패거리들 중에서는 무열황제가 있잖아. 뭘 그래?

결국 이 망탁조의 4명은 후세 사람들에게 역적에 대한 기준이자 대명사가 되어서, 누군가가 역모를 꾸미거나 혹은 맘에 안드는 누군가를 디스할 때 반드시 튀어나오는 말이 되었다. 이 구성에서 실제 찬탈은 못한 동탁을 빼고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을 추가하여 '망조의온(莽操懿溫)'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2 구성원

2.1 왕'망'

王莽.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꼭두각시, 허수아비 황제였던 유자에게 형식적인 선양을 받아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이미 그는 유자가 즉위했을 때 가황제와 섭황제를 칭하고 그렇게 부르게 했으며 결국 나라를 세워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결국에는 각지에 세력들이 난립하게 만들었다. 결국에는 경시제 유현의 공격을 받아 장안 점대에서 죽음을 당하고 시신은 수천 갈래로 찢어졌으며[6] 머리는 완에 효수되었다. 더 비참한 것은 백성들이 머리를 때리고 를 잘라 베어먹었다. 여담으로 평제의 황후였던 왕망의 딸 황황실주는 33살 나이에 불타는 건물 속에 들어가 자살했고 왕망의 조상들과 친척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졌으며[7] 일족들은 모두 몰살되는 등 끝이 매우 좋지 못했다.

2.2 동'탁'

董卓. 동탁후한십상시의 난으로 권력자였던 대장군 하진십상시들이 모두 죽은 사이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폐위한 소제는 이유에게 시켜 독살했고 일개 병주자사에 불과했던 동탁 자신은 스스로 상국에 올랐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에게 각종 학정들을 일삼고 경제를 망쳤으며[8]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후한 역대 황릉을 도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아무 고을이나 찍어서 자기 병력들을 풀어서 마음껏 노략질하게 했던 것은 동탁의 학정 중 백미다. 경제를 망친 것 역시 동탁은 돈이 많기만 하면 장땡인 줄 알고 조폐창에서 화폐를 마구 찍어댔는데 개중에는 돈인지 쇳조각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개체까지 찍혀나왔다. 그리고 약 18세기가 지난 뒤 남아프리카의 모 국가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에는 자신의 첩과 놀아나면서 불안해하던 여포가 사도 왕윤의 사주를 받고 동탁을 살해했다. 이후로는 그 죄의 댓가를 받게 된다.

  • 동탁의 일족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동탁의 머리는 효수되었으며 시체는 길거리에 방치되었다.
  • 동탁의 폭정때문에 고통받은 백성들은 효수된 동탁의 머리를 때리고 뚱뚱하고 기름진 시체에 심지를 박아 불을 질렀고[9] 원씨 문하생들은 그 시체를 완전히 불태우고 재를 길거리에 뿌렸다.[10]
  • 동탁의 머리는 여포가 나중에 이각 등에게 패하고 원술에게 달아날때 말 안장에 싣고 가져가 버렸다.
  • 이후 권력을 잡은 이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임자였던 동탁을 예로서 안장하려고 했지만 겨우 뼛조각 몇 조각만 수습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에다 좋은 향나무로 몸을 깎아 왕의 예로 안장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좋은 날을 잡아도 세 번이나 무덤이 침수되었고 결국에는 벼락을 맞아 그 남은 뼛조각도 모두 사라졌다.

정말 하늘이 동탁을 이렇게 미워한 듯하다.

2.3 조'조'

曹操. 조조는 이각에게서 도망친 헌제를 옹립하고 황실을 자신의 세력으로 채워넣어 황실을 매우 약화시켰고 결국에는 위왕까지 올라 그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되어 위나라가 세워지게 만들었다. 실제로 역사가들의 평가 역시 조비는 이미 아버지가 깔아준 판에 오르는 걸 좀 앞당겼을 뿐이며 실질적인 찬탈자는 조조라고 못박고 있다.

헌제를 허창으로 강제로 옹위한 후 황제 앞에서 칼을 차고 다니며 협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암살 의혹에 연루되긴 했지만 황제의 후궁이자 황실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던 동귀비를 잔혹하게 죽이고 후에 황후인 복황후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딸을 그 자리에 들어앉히면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물론 조조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까지 관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조조의 패륜스러움을 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후 항우의 진인 20만 학살사건인 신안 대학살 이후 400여년만에 벌어진 대규모 학살극인 서주 대학살과 원소군 투항병 8만 생매장 사건, 여포군을 공격할 때 팽성을 함락해 학살하는 등 여러 학살을 일으켰다. 스탈린에 버금가는 각종 백성 강제이주정책[11]의 시행 등 중원 쟁패의 결과를 떠나 백성들의 민심을 잃을 행위를 많이 했고, 자신의 최고 공신이자 모사인 순욱마저 위공의 구석을 받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자결하게 함으로서 왕조찬탈의 의지가 있음을 인증, 결국 뛰어난 업적을 많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12] 후세인들에게 간웅의 이미지를 크게 남기고 말았다.

2.4 사마'의'

司馬懿. 사마의 또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여 두 아들 사마사사마소[13]의 대를 지나 결과적으로는 그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올라 조위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세웠다. 다만 사마의의 경우 본인은 그냥 권력만 찬탈했고 따로 한 것이 없었으며 실제 제위찬탈의 작업은 둘째 아들이 주도해 행했다는 점이 좀 다르긴 하다.[14]

그런데 정작 사마의의 유언은 "나라에 충성하라."였으나 그 자식들이 말 안 들은 것 때문에 끼였으니 좀 억울하겠다. 하지만 일부러 자식들을 위해 자신은 충성을 바치는 식의 연기를 했다는 의혹도 강하다. 실제로 이 부분은 조조도 비슷하게 지적받는 부분이다. 말년에 갑자기 기존 황제가 받던 특전과 같은 것을 누리고 위왕(魏王)이 되려고 하는 등 권력에 크게 집착하고 한 황실의 권위를 최대한 망가뜨리려는 모습(헌제의 금교전을 대놓고 사용하거나 헌제 앞에서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등)을 많이 보였는데, 사실상 아들이 황제로 쉽게 추존되게끔 멍석 깐 걸로 해석한다.

재미 중국인 리둥팡(黎東方; Orient Lee; 1907년 ~ 1998년)의 경우 조조와 사마의에 대한 평가가 좀 다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조조-조비로 이어진 찬탈의 경우는 그래도 변호할 만한게 한나라는 사실상 조조가 재건설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즉 승상으로서 조조가 재건설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 아들인 조비가 이어받고 이름을 위로 바꿔도 그 나라를 만든건 조조였기 때문에 그나마 변호가 가능했지만 사마의의 경우는 위나라 황제를 구속하고 친족들을 죽인데다가 사마의가 위를 건설한데 미친 영향은 조조가 한을 재건한데 미친 영향보다 미미하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후한은 암군들과 환관들의 집정,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집권과 이각의 집권 이후로 쇠약했던 정권을 조조가 20여년 동안 안정시켰다는 점에서 변호해줄 수 있지만, 사마의는 위나라가 아직 쇠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황제였던 제왕 조방이 즉위한 틈을 타서 조상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을 똑같이 대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상이 무능하긴 했어도 국가를 대놓고 말아먹거나 한 자는 아니었다는 점도 관건이다. 다만 낙곡대전으로 한번 말아먹긴 했다.

게다가 많은 조조의 일족들을 문초하고 죽였는데 이 과정에서 조위는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잃었다. 내정에 매우 뛰어난 치적과 업적을 달성한 바 있는 하후현은 끌려가서 사형당했고 하후연의 차남이자 조위 차세대 유망주 격인 장수인 하후패촉한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나마 촉이 암군 유선과 간신 황호에 의해, 그리고 오는 폭군 손호와 간신 손준, 손침, 잠혼 등에 의해 망해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역으로 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륭 같은 유능한 인재를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에 투입한 거야 둘째쳐도 그 뒤 서량에 머물게 하는 등 사마씨들, 그 중에서 특히 사마염은 인재 보는 눈은 몰라도 인재를 쓰는 능력은 없었다.

뒷날 오호십육국시대의 후조를 세운 석륵고구려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신하인 서광과의 대화를 하던 중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당시 이미 역적으로 인정되던 왕망과 동탁은 빼고 조조와 사마의를 디스한 것이다.

대장부가 일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마음이 호탕해서 일월과 같아야 하오. 짐은 조맹덕 부자사마중달 처럼 고아나 과부[15]를 속이며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

3 재평가

왕망은 어느 정도는 재평가를 받는다. 물론 자신이 창업군주이자 유일한 황제였던 신나라가 겨우 15년 만에 망했고 한서와 후한서 등의 정사에서는 얄짤없이 까인다. 특히 후한서의 경우 후한 자체가 전한을 멸한 왕망을 토벌하는 것을 정통성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는 폭군이 아니라 주나라식 사회에 심취한 소위 이상주의자였기에 참작할 만한 부분은 있다.

조조와 사마의는 각각 조위서진이라는 새 왕조의 창건자로 황제에 추존되었으며, 역성혁명 논리에 자유롭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현대에 와서는 어쨌든 후대로 이어진 왕조를 건설한 둘을 창업군주로 평가하는 편이다. 고대의 정권교체(민주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쿠테타 말고)의 주체들을 무조건 나쁘다라고 평가하면 어린 황제를 몰아내고 송나라를 건설한 조광윤같은 자들도 다 개쌍놈이 된다. 결론은 정치 못하고 실패하면 역적이고 어쨌든 후대로 이어지는 왕조를 건설하면 창업군주가 되는 것. 그래서 현대에는 반란자를 특별히 나쁘게 평하지 않는다. 거기다 모택동이 조조를 상당히 좋아하여 중국에서 한때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마의가 조상을 죽일 때는 이미 조조는 한참 전에 사망했지만 관심없는 사람들은 '알 게 뭐야.' 라고 생각한다. 사마의는 아직 조조처럼 전면전인 재평가가 이루어지지는 않고, 고평릉 사변 같은 모습 때문인지 조조처럼 압도적인 최종보스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4 선양 받은 후 황제에 대한 행적

재미있는 것은 동탁은 실질적으로 신왕조를 세우지 않았으니 논외로 친다면[16], 망탁조의의 멤버에 추가로 환온을 친다고 해도 이들 전원이 선양받은 선대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모범적인 선양이라서 그렇다고 카더라.

사실 동탁이 선양받지 않았다고 해서 황위에 대한 욕심이 없는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동탁의 입버릇부터 이미 "유씨 가문은 황제로서 자격이 없어."\[출처 필요\]였고 동탁이 황명을 밥먹듯 거절해가면서까지 지킨 자리가 병주자사였으며 황제였던 소제 유변을 자기마음대로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다 헌제 유협을 박아넣은 데다가 그 유변마저 나중에는 이유를 시켜서 독살했으며 동탁이 죽은 것 역시 선양을 받던 도중 여포가 난입해서 죽여버린 것이다.

왕망이 폐위시킨 유자영은 왕망 때에는 유폐되었긴 해도 살아 있었고[17] 조비가 폐위시킨 헌제는 천수를 누리었고 사마염이 폐위시킨 조환은 천수를 누린데다가 한술 더떠 사후 황제로 추봉되기 까지 하였다. 환온이 폐위시킨 사마혁 또한 천수를 누렸고, 사마덕종 또한 환온이 아닌 유유에게 죽는다. 이는 이들이 충신이거나 역성혁명을 일으킨 선구자여서는 당연히 아니고 정치적으로 이것이 유리하다는 분위기가 그당시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위해서는 전 황제를 죽여서는 곤란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선양 후 전 황제를 죽이지 않는 관습은 망조의온 시대 뿐만이 아니라 고대시대 부터 망조의온시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깨진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요순시대의 선양도 전황제의 피가 흐르지 않은 상태에서 선양이 이루어졌고, 연나라왕 쾌 또한 살아 남았다가 제나라의 침공으로 자살했으며, 그외에는 삼국지보다 고대에 선양 기록은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러나 동진의 공제 사마덕문유송의 고조 유유가 죽이면서 그 후의 왕조는 송태조대인배적 행동을 할 때까지 무조건 선양 후에 이전 왕조의 황제를 죽여버리게 된다.

5 예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들을 까는 부분이 끝도 없이 많다. 업적도 많고 조선왕조의 처지로 봐도 그럭저럭 정당화가 가능한 조조나 사마의보다는 왕망을 까는 드립이 넘치는데, 왕망에 비유해서 까니까 어떻게 왕망에 비교할 수 있냐고 화를 내면서 반박하는 부분도 있을 정도다. 심지어 조광조도 사후 왕망 소리를 들었다.

위안스카이 또한 신해혁명 직후 혁명 진압을 위해 청조에 기용되었을 때 황족 중 하나로부터 '사마중달과 같은 자'라는 평을 들었다. '을 불러 집을 지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라는 것이었는데, 청조로서는 당시 북양 신군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의 기용 없이 혁명군의 진압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결국 그냥 선양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왔다. 당장 청 황실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나마 존중을 해준건 북양군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적대하던 혁명 세력이었다.
  1. 성어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2. ≪인화록≫권 5 : ... 而莽、卓、操、懿以降,行滔天之心,援此為法,尤可悲也。출처
  3. ≪송사≫권 409 : ... 而大奸之必還,莽、卓、操、懿之禍,將有不忍言者。출처
  4. 흔히 말하는 임금이 임금에게 선양했다는 아름다운 전설 말고 반강제적 선양을 말한다.
  5. 원술이 망탁조의로 발탁되지 못한 이유는...다른 네명의 경우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황제를 압박하여 선양을 받아냈으며, 이를 통하여 이전까지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왕조를 교체한 데 비해 원술은 지방 군벌로써 임의로 황제를 자칭하였기에 자기 지배지역 바깥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저기 낄 레벨이 못된다
  6. 항우도 공을 세우기 위해 다섯 장수들이 다섯 갈래로 찢었지만 왕망은 훨씬 더 비참했다.
  7. 그나마 원제의 황후이자 왕망의 고모였던 왕씨(왕정군)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수모는 면했지만 곧 들이닥친 적미군에 의해 왕씨의 시체는 수모를 피하지 못한다.
  8. 동탁이 싸이코패스마냥 사람을 죽여댄 것도 크나큰 문제였지만 가장 치명적인 실책은 돈이 모자라다고 말 그대로 막 찍어대면서 후한 경제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가져온 것이다. 아쉽게도 삼국지연의에는 이것이 묘사가 안 되어서 동탁은 그냥 단순한 살인마로 알려졌다.
  9. 이쪽은 연의에서 묘사되는 부분.
  10. 원소의 숙부였던 원외가 태부로 있었는데 원소가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키자 분노하여 원외의 일족을 멸했었다. 이에 그 문하생들이 복수를 한 것이다.
  11. 주로 회남 지역에 시행되었는데, 유수구 전투 직후 조조의 뻘짓으로 회남의 백성들이 집단으로 오나라로 이주하는 일도 생긴다. 손권/인간 사냥 참고. 한중의 무력화 같이 제대로 생각하고 이주시킨 것도 있지만, 애초에 이 때의 집단 이주는 제대로 분양을 해주는 등의 행동을 기대조차 하면 안 된다. 그냥 안 가려고 하면 패 죽이더라도 강제로 이주하게 하는 것이 당대 정책이다. 이것을 현대의 이주 정책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12. 이것이 지금 재평가를 받더라도 예전에 역적취급을 받던 이유이다.
  13. 사마의는 승상이었고 사마사는 대장군이었다. 사마소는 대장군이었다가 진왕까지 올랐다.
  14. 이 점은 사마사도 마찬가지. 황제의 지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결정적인 조치는 그가 아니라 동생 사마소가 했다.
  15. 고아는 헌제와 위의 어린 황제들, 과부는 후한과 위의 태후와 황후들을 말한다.
  16. 기실 동탁은 황제를 폐위하고 그가 왕위에 오른게 아니라 헌제를 즉위시킨거기에 반란의 여지 등을 생각하면 죽이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다른 3명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것.
  17. 어릴 때부터 철저히 유폐되어서 세상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훗날 경시제 유현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