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 1932년
함남 북청(北靑) 배후(倍厚) 사람이다. 1919년 3·1 운동 후 만주로 망명한 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 국내특파원으로 이명서(李明瑞)·민양기(閔良基)·박기영(朴技榮) 등과 함께 의주(義州)·구성(龜城)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8월에는 만주독립단원으로 이명서(李明瑞)·이근영(李根永)·박기수(朴基洙)·주의환(朱義煥)·이지표(李芝杓)·원사현(元士賢)·박기영(朴基永)·민양기(閔良基) 등과 함께 황해도 송화군(松化郡) 구월산(九月山)에서 무장독립대를 결성한 후 부근 전역에 독립단 기관을 조직하고 활동을 개시, 동년 8월 15일 일제의 주구 은율 군수(殷栗郡守) 최병혁(崔丙赫)을 사살하고 유격전을 전개하던 중 일제주구의 밀고로 신천(信川)경찰서 일경과의 교전 끝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2년만인 1932년 12월에 감형되어 출옥하였으며 그 해 사망하였다. 향년 39세.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
추가 바람.- ↑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2·422·447·456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8면 ·동아일보(1932. 12. 17字)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5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