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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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강기덕고광순고두환권기옥권오설기삼연김단야
김덕제김도원김도현김동식김마리아김상덕김상옥
김석김석진김석황김성숙김수민김이원김정익
김진묵김철김철수김학규김홍일남궁억문일민
민양기박상진박장호박재혁박희광반하경방순희
백남규백정기석호필선우혁손정도송병선송진우
송학선심남일안경신안공근안규홍안명근안승우
안태국안희제엄항섭우덕순유관순유림유석현
유일한윤동주윤자영이강훈이상룡이상정이애일라
이윤재이인이재유이재현이춘숙이회영이희승
장도빈장지연정인보정화암조동호조명하조병옥
조지 쇼주기철최중호함석은함태영호머 헐버트장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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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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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金學奎
(1900-1967)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1900년 평안북도 평원군 태생. 10살의 어린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만주 통화현 이밀에서 개간을 하면서 지내다 신흥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 지면서, 만주 봉천 신민현의 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뒤 동명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9년, 양세봉 등이 조직한 조선 혁명군에 들어가 양세봉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1935년 남경 통일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게 된다.

이후 조선혁명당 등을 거쳐 1940년 광복군이 결성되자, 광복군 제3지대장에 임명되었다. 미국 OSS와 연계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지만, 1945년 8.15 광복으로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

광복 후 중국내 동포들의 국내귀환을 추진해서 동포들의 귀국에 일조했고, 1948년에야 10살에 떠난 조국에 귀환할수 있었다. 귀국 직전까지 광복군 평진지대(平津支隊)[1]의 지대장을 역임했다. 일본군,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인 병력을 대거 받아들여, 해방된 조국에서 창설될 군대의 기반을 닦을 심산이었으나... 일체의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던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어 물거품이 되었다.[2]

귀국한 뒤인 1949년, 이승만 정권에게 맞서다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직후 1960년 6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에 의해 석방되었다.[3] 이후 1960년 한국 독립당을 재건하여[4] 최고 대표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1967년 별세했다.
  1. 북평(北平)과 천진(天津) 일대에 주둔하여, 지역명을 합성한 부대명.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으므로, 베이징은 북경이 아닌 북평으로 불렸다.
  2.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던 나라는 없었다...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던 중화민국마저 '한국 독립당 정부'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일개 정당의 정권 취급을 했다.
  3. 앞서 김학규 장군이 평진지대 지대장을 역임할 때, 박정희는 평진지대 중대장을 맡은 인연이 있었다. 이후 군부의 숙군작업에서 박정희 소령이 체포되자 여러 인사들이 구명활동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김학규 장군이었다. 박정희로서는 김학규 장군에게 진 빚을 보은한 셈.
  4. 앞선 주석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한국 독립당 정부'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