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2 활동사항
권오설은 가숙(家塾)인 남명학교와 하회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수학하고, 대구에 이어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가세가 어려워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18년 전라남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다가 1919년 광주 3·1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11월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를 조직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소작인회, 화성회, 화요회, 조선노동자총동맹에 가입하여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농민·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가하여, 4월 18일에는 조선공산당(제1차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같은 날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석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에는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및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사건의 전모가 발각되어 6월 7일 검거되었다. 1927년 9월 13일 공판이 열려 1928년 2월 14일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30년 4월 17일 옥사하였다.[1]-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