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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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강기덕고광순고두환권기옥권오설기삼연김단야
김덕제김도원김도현김동식김마리아김상덕김상옥
김석김석진김석황김성숙김수민김이원김정익
김진묵김철김철수김학규김홍일남궁억문일민
민양기박상진박장호박재혁박희광반하경방순희
백남규백정기석호필선우혁손정도송병선송진우
송학선심남일안경신안공근안규홍안명근안승우
안태국안희제엄항섭우덕순유관순유림유석현
유일한윤동주윤자영이강훈이상룡이상정이애일라
이윤재이인이재유이재현이춘숙이회영이희승
장도빈장지연정인보정화암조동호조명하조병옥
조지 쇼주기철최중호함석은함태영호머 헐버트장태수

1 소개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2 활동사항

권오설은 가숙(家塾)인 남명학교와 하회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수학하고, 대구에 이어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가세가 어려워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18년 전라남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다가 1919년 광주 3·1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11월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를 조직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소작인회, 화성회, 화요회, 조선노동자총동맹에 가입하여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농민·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가하여, 4월 18일에는 조선공산당(제1차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같은 날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석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에는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및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사건의 전모가 발각되어 6월 7일 검거되었다. 1927년 9월 13일 공판이 열려 1928년 2월 14일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30년 4월 17일 옥사하였다.[1]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