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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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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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쇼주기철최중호함석은함태영호머 헐버트장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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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宮憶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이다. 1863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884년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였다. 이후 내아문 부주사, 칠곡군수 등으로 일하였다. 1894년 내부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한성부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 ~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그 해 7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활동 중 체포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羅壽淵)·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독립협회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붙잡혔다.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군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사임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노력하여 그 해 10월 배화학당[1] 교사가 되었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자 강원도 홍천군으로 내려갔다. 1919년 9월 모곡학교를 설립하고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3년 11월 개신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을 조직,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는 그가 설립한 한서감리교회와 한서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교회 옆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초등학교 뒷편에는 선생의 묘역이 있고, 초등학교 주변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무궁화 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1. 現 배화유치원, 배화여자중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대학교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