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덕순(1876년 ~ 1950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 주역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생애
본관은 단양(丹陽), 호는 단운(檀雲)이며, 이명(異名)은 연준(連俊)이다. 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으로, 서울 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국외에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1907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과 함께 의병 양성에 힘썼다.
1908년 300명의 정예 용사와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흥(慶興)·회령(會寧)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교전하다 체포된 뒤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감옥에서 복역 중 탈출하였다. 1909년 봄 노우키에프스크연추(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하였으며, 그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차이자거우(蔡家溝 역에서 대기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대기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는 차이자거우 역을 그냥 지나쳐 하얼빈역에서 정차하였다. 이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뒤 공범자로 체포되어 뤼순旅順에서 함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징역 3년 형을 언도받았으며, 옥고를 치르던 중 함흥 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 2년의 형량이 추가되어 1915년에 출옥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고, 광복 후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서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동포들의 본국 수송에 힘썼다. 귀국한 뒤에는 1948년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해 9월 26일 북한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