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쇼

1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를 참고할 것.

2 아일랜드 출신의 상인, 한국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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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강기덕고광순고두환권기옥권오설기삼연김단야
김덕제김도원김도현김동식김마리아김상덕김상옥
김석김석진김석황김성숙김수민김이원김정익
김진묵김철김철수김학규김홍일남궁억문일민
민양기박상진박장호박재혁박희광반하경방순희
백남규백정기석호필선우혁손정도송병선송진우
송학선심남일안경신안공근안규홍안명근안승우
안태국안희제엄항섭우덕순유관순유림유석현
유일한윤동주윤자영이강훈이상룡이상정이애일라
이윤재이인이재유이재현이춘숙이회영이희승
장도빈장지연정인보정화암조동호조명하조병옥
조지 쇼주기철최중호함석은함태영호머 헐버트장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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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880-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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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인물이다. 얼굴을 봐선 서양인치고 상당히 동양인스러운 느낌도 나는데 아버지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고 어머니일본인이었다. 1880년 1월 25일 청나라 복건성(푸젠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새뮤얼 루이스 쇼(Samuel Lewis Shaw)는 선원 출신이었다. 어머니 엘런 오씨(Ellen Oh'sea)는 아일랜드풍의 이름[1]을 쓴 탓에 후손들도 일본인이 아니라 아일랜드인으로 착각했다. 일본 정부에서도 중국인으로 알았을 정도. 새뮤얼과 엘런은 1879년에 결혼했고 1880년에 조지를 낳았다.[2]

조지는 1900년부터 한국의 금광에서 회계로 근무했는데 채산성이 맞지 않아 1907년에 단동[3]으로 옮겨 무역회사 겸 선박업 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세웠다. 1912년에 일본인 사이토 후미와 결혼하였다. 후미와의 사이에서 아들 새뮤얼 조지 쇼와 루이스 쇼를 낳았다. 둘째 아들인 루이스도 일본인과 결혼해 막내며느리도 일본인이었다.

1919년에 아일랜드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해 3월에 3.1 운동도 일어났는데 조지 쇼는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자회사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와 국내 사이의 연락책을 수행했으며, 1919년 일제가 회유를 위해 남작 작위까지 수여한 김가진의 임정 망명을 돕고 같은 해 11월 한국의 황족인 의친왕 추가 망명 계획에도 동참[4]하나 후자는 불발에 그쳤다.

1920년 7월에 일본 정부는 조지 루이스 쇼를 내란죄로 체포하여 4개월간 구금하였다.

1943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후손을 찾지 못 해 수여되지 않았다가 2012년에 친손녀인 마조리 허칭스(Majorie Hutchings)에게 수여되었다.
  1. 이동 얼핏 보면 오셔(O'Shea)와 굉장히 유사하다.
  2. 이동 정작 쇼 본인은 "내가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정확한 출처 및 발언 전문은 수정 바람.
  3. 이동 당시에는 안동현이란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가 경상북도 안동에 살았던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4. 이동 前 부평군수 전협이 조직한 대동단이 중국 안동역까지 의친왕을 수행하고 이후 이륭양행에서 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이륭양행의 사무실이 안동역 부근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