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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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관계일람 가운데 미국일본의 관계를 말한다.

美日關係. 미국에서는 United States-Japan relations이라고 표시하고, 영어 위키백과에선 Japan–United States relations로 쓰였다.[1] 일본에선 일미관계(日米関係)[2]라 표시한다. 반면 중국에서는 미일관계(美日關係)[3]라 표시한다.

1 현황

미국일본
면적9,826,630km²377,873km²
인구321,368,864126,919,659
수도워싱턴 DC도쿄
언어[4]영어일본어
명목 GDP18조 1247억 달러4조 2104억 달러
군사비6640억 달러481억 달러
정체공화제(대통령제)의원내각제
국가 지도자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아베 신조 총리

2 역사

미국이란 집단이 다른 지역에 비해 출현이 늦다보니 주로 미국이 생겨나면서 접촉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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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常長, 1571-1622)[5]가 미국의 원형인 아메리카 식민지를 1614년에 방문한 것이 미일의 첫 만남이지만 당시 미국이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1650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령을 내리면서 일본인들은 더 이상 해외로 나가지 못 하고 나가사키에서 제한적인 무역만 허용된다.

1791년에 미국인 탐험가 존 켄드릭이 항해 중에 기오시마 제도에서 11일간 머물렀다. 1797년부터 1809년 사이에는 미국 배들이 네덜란드 깃발을 달고 나가사키에서 교역했다. 그 외에도 몇몇 인물이 일본 열도에 간간히 들르긴 했다.

3 페리

미 해군 소속의 매튜 페리 제독은 1852년 버지니아 노포크를 출발해 1853년 7월 8일에 에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도쿠가와 막부는 그에게 나가사키로 가라고 했지만 페리는 밀러드 필모어의 국서를 전달하러 왔다며 버텼다. 일본 수군의 배가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그 배를 쿠로후네(검은 배)라고 불렀다. 그는 요코스카[6]에 들러 편지를 전달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854년에 다시 나타난다. 카나가와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은 개항하게 된다. 다만 미국인들은 곧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일본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4 개화기

1860년 막부는 칸린마루란 배로 사절을 보낸다. 이 중엔 후쿠자와 유키치도 있었다. 미국남북전쟁에 바빴고 일본은 내부에서 들이 막부를 곧 뒤엎었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19세기 말에 가서 가까워지는데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각자 필리핀조선을 집어삼킨다.

1912년엔 우호적인 의미로 일본에서 수백 그루의 벚나무를 미국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또한 하와이 쪽으로 많은 일본인이 이민을 가기도 하였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웠던것이 일본 문화에 심취하고 일본에 호감을 가졌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점이었다.[7]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 미국의 태평양 정책이 맞물려 20세기 초반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순탄했다. 그러나 만주철도 이권 관련으로 마찰이 있었던거나 1910년대부터 미국측에서 일본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다는걸 보면 완전히 순탄하지만은 않았던것 같다.

5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국일본연합국에 참전했다. 사실 연합국이라지만 미국은 유럽 전선에 참가했고 일본은 아시아에 있던 독일식민지남양군도칭따오 등을 영국과 편먹고 점령했다. 식민지 쟁탈전이란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두 나라 다 서로에게 우호적인 편이었다.

6 1920년대

세계 대공황이 터지기 전까지는 좋았다. 하야카와 셋슈 같은 일본계 미국인 배우가 찰리 채플린급으로 인기를 끌고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근데 이건 당시 서양에서 흔한 일이었다. 아시아에서 그나마 서양인들이 관심 있는 곳이 중국과 일본 정도였고 그 중국조차 너무 크고 넓다보니 베이징 시, 난징, 시안, 청두, 톈진, 상하이, 홍콩, 마카오를 빼면 아웃 오브 안중이던 시절이라.

7 1930년대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만주사변을 저지르면서 급격히 나빠진다. 1920년대는 군축을 하던 시대였는데 일본은 탈퇴하고 곧 해군력을 확대하고 중국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다. 미국에선 공화당 정권[8]이 물러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고 일본은 1936년 이후 2.26 사건 이후로 군부가 정부를 장악한다. 미국은 일본과의 협력을 끝내고 중화민국을 원조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일본을 제재한다.

8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을 참고할 것.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은 시작된다. 미국과 일본은 열악한 전황과 항복을 하지 않는 일본군 등을 이유로 치열하게 싸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사망자 18만 5924명이 유럽/대서양 전선에서 발생했고 106,207명이 태평양/아시아 전선에서 발생했다. 역사상 가장 넓은 범위에서 일어난 전쟁이었고 육해군 합동작전이 주효하게 작용한 전쟁이었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합동작전 개념을 완전히 말아먹었다.

당시 미군의 규모는 육군이 1126만명(육군 항공대 340만명), 해군 418만명, 해병대 66만명, 해안경비대 24만명, 상선사관 24만명 등 총 1659만명이 동원됐으며 이 중 120만명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고 35만명은 여성이었다. 여성 가운데 16명이 전사했다.(출처) 일본군의 경우 육군이 630만명, 해군이 210만명 규모였다. 당시 두 나라의 인구가 1억 3천만과 7천만 수준임을 감안하면 20-30대 청년 남성의 대부분이 전선에 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과 인구가 비슷했던 독일(6985만명)은 1820만명을 군인으로 뽑았다. 소련(1억9000만명)은 3447만명이 참전했고 군인만 1천만명 가까이 전사했다. 민간인도 1500만에서 2000만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본다.

당시 인구전사자전시 민간인 사망[9]
조선23,400,000미상[10]37만8천-48만3천
미국131,028,000416,8001,700
중화민국517,568,0003백만-4백만7백만-1600만
일본71,380,0002,120,0005십만-1백만

9 GHQ

일본 열도에 상륙한 미군은 GHQ를 세우고 일본을 1952년까지 통치한다. 자세한 것은 GHQ를 참고할 것.

10

미군한국전쟁주일미군의 상당수를 투입시키고 일본의 방위를 위해 자위대를 설치하도록 한다. 그 후 미국과 일본은 주요 우방으로 지내고 있으며 반공 성향의 일본 우익들은 미국과의 연대를 굉장히 중시한다. 다만 일본제국 시절을 경도하는 극우 같은 경우에는 반미 성향을 보이기도 하는데 분케이슌슈(文藝春秋)의 마르코 폴로란 잡지가 유대인 갖고 비아냥대다가 미국의 분노를 사자 폐간한 사건도 있었다.

1950년대에는 대규모 안보투쟁이 있기도 했다. 1960년대에 가면 일본은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는 1960년대 후반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이 운동은 대규모로 일어나긴 했지만 현실 정치에 거의 변화를 바꾸지 못 했고 지방선거에서 약간의 혁신세력이 집권하는 수준으로 끝났다. 특히나 1970년대에 운동권이 과격화되고 1980년대의 대규모 호황으로 일본이 미국을 뛰어넘을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당시의 대중문화 작품을 보면 그런 기질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버블이 꺼지면서 일본은 침체되고 미국은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 등을 바탕으로 단일한 초강대국으로 올라선다.

11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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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中-日-美 3국의 모습. 저 바다에 보이는 돌 중에서 하나가 우리인가...
중국 뒤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현재 중국은 믿을 만한 동맹국이 단 한개도 없다. 북한은? 그 나라를 뭔수로 믿나?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우방관계
GDP 2위를 견제하기 위한 GDP 1위3위의 동맹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터라 미국의 반일감정이나 일본의 반미감정은 굉장히 희석된 상태이다. 특히 중국이 부상하면서 두 국가의 공조는 강화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바라는 눈치다. 2014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 순방 중 일본을 방문해 아베 신조 총리와의 정상 회담에서 센카쿠 열도 역시 미군의 방어 의무 대상이며, 일본의 집단 자위권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2016년 5월 오바마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지를 방문하고 원폭 피해자를 만나 위로를 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면 미국과 일본은 2차 세계대전 과거사를 청산하고 협력을 더욱 강화하자는 수순으로 볼수있으며, 미국이 일본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한다는걸 볼수있다. 현재, 미국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극히 호의적으로 바뀐 반면에,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 피로증'이라는 말이 미국 내에서 먹히고 있다는 소문이 나오는 등 예전에 비해서 인식이 안 좋아진 것[11] 은 분명해 보인다. 당장 미국인의 68%가 일본을 신뢰하고, 청년층의 대부분이 일본이 사과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 전통적으로 일본 총리들은 미국에 가서는 과거사를 외면하거나 대놓고 미화하지 않고 적당히 돌려 말하고 넘어가왔다.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은 2차 세계대전 때나 80년대와 달리[12] 전반적으로 좋은 편인데 일본 문화가 미국에 널리 퍼지면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스시는 고급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13] 더 나아가 대중화 되었다. 라멘, 오코노미야키등의 일본 식문화는 미국 내에서 트랜디한 문화로 자리잡았다. 하이쿠는 미국 교과서에 오르게되었고[14] 일본 만화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도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고 현대 미국 대중문화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품들이 계속 나오게 되었다. 수많은 와패니즈가 양성되었고 이들은 일본 문화에 대한 열광을 너머 일본 자체에 대한 호감을 보이며 일본에 대한 긍정적 감정을 표하거나 지지를 보내곤 한다. 몇몇 개념없는 미국인 와패니즈들은 과거사 문제에서 노골적으로 일본을 옹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에게 영향을 받은 것보다 일본이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훨씬 거대한데 당장 2차대전이후 일본은 정치,문화적으론 미국에 종속된 상태이다.

특히 미국문화는 종전 후 일본문화와 일본인들 자체를 바꾸어놓을 정도의 엄청난 영향력을 주었다. 현대 미국문화에 제법 인기를 끌고있는 재페니메이션, 망가,비디오게임 모두 결국은 미국에서 넘어간 문화이며 이외에 음악 영화 문학 어떠한 장르도 미국의 영향을 안받은 곳이 없다.[15] 그러나 거대한 자본과 기술력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미국대중문화에 그것도 다른 문화권이며 어레인지된 일본대중문화가 다시 역수출되어 미국과 서구권에서 긍정적인 펑가와 일부 분야에서 인기를 끌며 문화의 일방통행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그 예가 많지 않은 경우로 마땅히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언어의 차이와 선호하는 외모, 음악 장르의 차이점 때문에 일본 배우나 가수가 자연스럽게 미국에 건너가서 성공한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다. 캐나다, 호주, 남미, 영국과 기타 유럽에서도 미국으로 넘어가는 연예인이 굉장히 많음을 생각하면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강고한 벽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16]

일본의 재무장화 움직임에는 미국이 배경으로 있다. 당장 초강대국으로 부상 중인 중국을 견제하는데 일본이 가장 좋은 대응책이기 때문. 무엇보다도 일본은 경제대국인 데다가 중국에 대해 적개심과 갈등이 심하다는 더할나위 없이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결국 독일이 과거 냉전체제에서 나토군의 주축이었던 것처럼 현재 일본도 미중 패권 경쟁에서 충실하고 믿음 가는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

여담으로 일본계 미국인의 숫자는 130만 정도이며 일본 내에 체류하는 미국인은 주일 미군을 제외하고 5만 명 수준이다.
  1. 이 경우는 그냥 자국타국 여부에 상관없이 알파벳 순서대로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키백과가 영어 사용 국가의 (즉 미국 또는 영국 등의) 위키백과가 아니라 영어로 된 위키백과이기 때문. 그래서인지 애국정신이 투철한 미국인들은 발끈하여 United States-Japan relations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지미 웨일스 등 운영진들에게 강력히 주장하며, 이때문에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이 항목이 여러 번 수정전쟁이 벌어진 흠좀무한 사건도 일어났고 지금도 현재진행형.
  2. 발음은 Nichibeikankei(니치베이칸케이)이다.
  3. 발음은 Měi Rì guānxì(메이르관시)이다.
  4. 두 나라 다 공용어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
  5. 가톨릭 신자로 유럽아메리카 등을 방문했다.
  6. 당시에는 쿠리하마란 지명이었다.
  7. 오륜서추신구라를 애독하고 백악관에 유도스모선수들을 초빙해 대련했다.
  8.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물론 이 시점엔 고인이 됐지만...
  9. 자연사, 병사 이런 거 말고 전쟁 때문에 죽은 민간인을 말한다.
  10. 당시 20만 가량이 군인군속으로 끌려갔고 2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본다. 이 인원에 공장으로 간 강제징용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11. 한국이 최근에 친중 성향을 보였던 것도 문제가 됐다. 사실 반일보다는 친중이 더 문제인 것이,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은 가상 적국이다
  12. 이때는 경제동물이라고 부르며 경제 패권이 일본으로 넘어갈까봐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강했는데 디트로이트에서는 일본차의 인기로 직장을 잃은 미국 자동차 회사 실업자들이 중국인을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때려 죽였을 정도였다. 이를 피해자의 이름을 따 '빈센트 친(Vincent Chin) 사건'이라고 부른다. 중국인을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때려 죽인 이 범인들은 무죄 판결을 받아 큰 논란이 일어났고 범인 두명 중 한명은 나중에 중국계 갱에게 살해당했다.
  13. 한때는 젓가락질을 할줄 아는게 미국 상류층을 가르는 척도였지만 지금은 간장을 스시에 어느 부분에 찍어먹는가를 아는것, 눈을 가리고 스시 한점을 먹은 후 스시의 원재료 생선이 무엇인지 맞추는것이 상류층의 기본상식으로 통한다.
  14. 미국 내에서 하이쿠는 상당히 인기가 많은데 회사의 CEO가 직원들에게 신년맞이 기념으로 자신이 지은 하이쿠를 적은 카드를 보내는 곳도 있다. 하이쿠 짓는 법을 알려주는 강좌도 있다.
  15.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현대문화가 미국의 영향력을 피해가기 힘들지만 일본은 과거 전쟁까지 치뤘던 적대국의 문화들을 받아들인다는게 차이점. 이는 독일도 마찬가지.
  16. 선호하는 이성상만 하더라도 아시아와 서구계는 매우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