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그리스어 : Ἁγία Σοφία (하기아 소피아)
현대 그리스어 : Αγία Σοφία (아야 소피아)
터키어 : Ayasofya (아야 소프야)
라틴어 : Sancta Sophia (상크타 소피아)
- 상위 문서: 동로마 제국, 성당
- 관련 문서: 셀리미예 모스크, 술레이마니예 모스크,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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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전경[1] |
실내 전경 |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
537년 12월 27일에 거행된 헌당식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외친 말.
..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로 가서, 그리스인들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곳으로 안내받았습니다.그리고, 우리는 그곳이 지상인지 천국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상에는 그러한 장려함이, 그러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그 광경을 도대체 어떻게 형용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단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그곳에 하느님이 존재하며
그들의 예배가 다른 나라들의 의식보다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파견한 사절단이 하기아 소피아에 대해 남긴 기록.
유네스코 세계유산 | ||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 ||
이름 | 한국어 | 이스탄불 역사지구 |
영어 | Historic Areas of Istanbul | |
프랑스어 | Mosquée Selimiye et son ensemble social | |
국가·위치 | 터키 이스탄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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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5년 | |
지정번호 | 356 | |
등재사유 | (i)[2], (ii)[3], (iii)[4], (ⅳ)[5] |
목차
1 개요
동로마 제국 건축의 최고 걸작이자 정교회의 총본산이었고,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모스크로 바뀌었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 박물관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명칭인 'Αγία Σοφία'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으로, 동방 교회에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6]를 의미한다절대로 성녀 소피아를 말하는게 아니다근데 번역이 그모양이라-. 대한민국에서는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등으로 불린다. 터키에서 터키 리라가 굉장히 인플레이션이 심했을 때에는 미국 달러로 입장료를 받은 적도 있다.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 제국의 기술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일 뿐더러, 당시 세워진 그 어떠한 건축물보다도 광대한 실내 공간을 가진 건물이었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스페인 세비야의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기도 했다. 돔의 직경만 하더라도 31.87m로,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 다음 가는 크기였으며 수백년 뒤의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피렌체의 두오모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석조 돔이기도 했다. 물론 이 건축물이 르네상스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2 역사
2.1 동로마 제국
대성당의 변화 양상[7] |
2.1.1 초기의 대성당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 30년이 지난 360년 2월 15일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위대한 교회(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메갈리 에클리시아)'[8]라고 불렸으며 건축은 목조 지붕의 바실리카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창건한지 40년도 지나지 않은 404년 6월 20일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 에브도시아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Ο Άγιος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를 박해하여 추방할 때 수도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된 대성당은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 때인 415년 10월 10일에 재건되었으나 120여년 뒤인 532년 1월 13일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쓴 니카의 반란 때 일어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의 흔적은 현존하는 하기아 소피아의 일부 원기둥 등에 약간 남아 있음
2.1.2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재건
대성당이 전소된지 열흘 후인 532년 2월 23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하기아 소피아의 3번째 재건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며 물리학자인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트랄레스의 안시미오스에게 설계를 맡겼다. 유스티아누스는 그의 정복 사업이 그러하였듯이 이 공사에도 엄청나게 빠듯한 기한을 주고 닥달했다. 그리스인인 두 사람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지만 1만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532년부터 537년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공사기간을 통해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원기둥들을 징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침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나스가 집전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대성당의 웅장함에 감동자뻑한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했다고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완공 이후 하기아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위치한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동로마 제국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된 다양한 성유물들이 봉안된 성소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십자군에게 털렸다(...).
2.1.3 지진으로 인한 피해
헌당식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인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 2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강타한 지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상징인 중앙돔에 금이 갔고, 결국 558년 5월 7일에 발생한 지진을 견디지 못해 중앙돔이 무너졌다. 붕괴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이시도로스에게 즉각적인 복구를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젊은 이시도로스는 중앙돔을 원래의 위치보다 6.25m 가량 낮추고 구조를 보강하여 건축했다.
그로부터 약 3백년이 흐른 859년에 발생한 화재와 869년 1월 8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대성당의 버트레스(half dome)가 파괴되었다가 바실리오스 1세 황제에 의해 수리되었다. 120년 뒤인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서쪽 돔의 아치가 붕괴되자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 황제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티리다티스에게 수리를 명령해 6년간의 공사 끝에 994년 5월 13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약 350년이 지난 1344년 10월에 발생한 지진으로 중앙돔에 다시 금이 가더니 2년 후인 1346년 5월 19일에 대성당 곳곳이 또 무너졌다. 백담사? 이때의 피해는 8년 동안 공사에 들어가서 1354년에 끝났다.
2.1.4 성상 파괴와 십자군의 약탈
730년, 레오 3세 황제(Λέων Γ΄, 생몰년 : 685~741.6.18, 재위기간 : 717.3.25~741.6.18)가 모세의 십계명 중 우상숭배 금지를 내세워 성상을 파괴할 것을 내용으로 한 칙령을 공포하면서 제국 전역이 헬게이트로 빠져들었다.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가 너 죽고 나 살자를 외치며 갑론을박 하는 사이,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를 장식하던 수많은 조각상과 모자이크 예술품들이 훼손되어 철거되었다. 성상 파괴의 광풍은 아테네의 이리니 여제(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 생몰년 : 752경~803.8.9, 재위기간 : 797~802.10.31)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일단락되었고, 하기아 소피아에는 다시금 성상과 성화상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1204년 4월 9일, 공격하라는 이슬람은 안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점령한 제 4차 십자군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자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당대의 재부가 모여 부유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때의 약탈로 전성기의 화려함이 괴멸되었다. 도시 곳곳에 있던 수많은 보물들이 십자군들에게 털렸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후 성 헬레나 이래로 동로마 제국이 열성적으로 수집해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에서 소중하게 모시던 각종 성유물 또한 십자군들의 손에 의해 강탈되어 서유럽으로 빼돌려졌다. 이 덕분에 동로마 제국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이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군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고 정복 직후 사망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시신을 매장하여 무덤을 만드는 폭거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다만 단돌로의 무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파괴되어 사라졌으나,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있다. 2층 오른편에 가보면 Henricus Dandolus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돌판을 볼 수 있는데 거기가 무덤 자리(...)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이미 그 위치가 알려져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죽은 사람 무덤이라 그런지 터키인들도 건드리긴 영 껄끄러웠는 듯하며 19세기 이탈리아에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 돌판을 세웠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에야 황폐해진 하기아 소피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환원되었으며 1317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대성당 북쪽과 동쪽에 새로운 버트레스를 증축했다.
2.1.5 예언, 최후의 순간, 전설
로마 제국에서는 언젠가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론적 예언이 오랫동안 전해졌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1453년에 병력을 동원하자 사람들은 "로마 제국은 창건자의 이름과 같은 황제 때 멸망한다"는 예언을 떠올리고는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 황제가 될 거라며 불길하게 여겼다. 또한 달이 차 있을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지만, 5월 24일에 보름달이 떠서 이제 달이 기우는 일만 남은데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날 밤에 월식이 일어나 시민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5월 25일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5월 26일에는 짙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는데,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호하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도시에서 떠나는 걸 숨기기 위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고 수군거렸다.
오스만 제국의 총공세가 시작된 5월 28일,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로 향해 "이교도가 성벽을 넘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해 빛나는 검으로 그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으리라"는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 병사들이 하기아 소피아로 몰려들자 대성당의 거대한 청동문이 닫혔지만 얼마 못가서 병사들이 청동문을 때려 부수고 내부로 난입했다. 반항하던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예배를 드리던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혔으며 성찬예배를 집전하던 사제들은 지성소에서 끌려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성가를 불렀다.
여기서 전설이 하나 생기는데, 최후의 순간 몇몇 사제들이 성반과 성작을 움켜쥐고 대성당의 벽 너머로 사라졌으며,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바뀌는 날 다시 나타나 성찬예배를 마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2.2 오스만 제국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가 이끌던 오스만 제국에게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날, 이 성당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 성당만은 남겨두라고 엄명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성당 안을 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하지만 회칠하고 미나렛 세워서 마개조하고... 답이 없다[9]가 전해진다. 다른 이야기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나서 그날 저녁으로 이 성당에서 저녁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병사들에게 약속한 사흘 동안의 약탈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는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리에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하고 정교회와의 공존을 허락했다[10]. 단, 하기아 소피아는 아야 소피야라는 이름을 그대로 보존한 채 황실 모스크로 개조하고 내부의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여 성화들을 가리며 건물 자체는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모스크로 활용하기 위해 바예지드 2세와 셀림 2세때 건물 주변에 네 개의 미나렛(무슬림들에게 예배 시간을 알리는 뾰족한 등대모양의 첨탑)을 증축했다.
위의 성당 내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건물과 제대의 방향이 약간 틀어져 있다. 이는 원래 예루살렘 방향으로 세워진 제대를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모든 예배는 메카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 만약에라도 요 건물의 입구와 제대의 위치가 반대였다면, 묵념(...)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2.3 터키 공화국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5.19~1938.11.10)는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아야 소피아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개방한다.[11] 무슬림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제한도 폐지하고, 미국 및 유럽 고고학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당시 덧칠했던 회칠을 제거하여 성화가 드러나게 하는 것도 허락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회칠 위에 그려진 쿠란의 내용과 이슬람의 온갖 문양이 훼손된다는 반발에 1931년 회칠 제거를 금지시킨다.[12] 그러자 그리스에서 여길 예전처럼 정교회 성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아타튀르크는 이에 대하여 거절하고 1935년에 새롭게 박물관으로 문을 열게 했다. 이와 함께 하기아 소피아 내부에서의 모든 종교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2013년에 들어와 하기아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논란이 일고 있다. 그나마 에르도안 총리도 "바로 근처에 블루 모스크가 있는데 뭣하러?" 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고 엄청난 돈줄인 이 곳을 그렇게 해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며 이스탄불 시장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여론도 반대가 많다.역시 돈이 최고야
하지만 갈수록 이슬람 우경화가 되는 터키에서 이런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메니아 학살을 20세기 최초의 학살이라고 발언하여 터키에서는 분노하고 있다. 우습게도 콩고에서는 벨기에가 저지른 (레오폴드 2세 참고) 학살은 거들떠도 안 본다고 분노하고 있는데 터키도 이걸 들먹이며 가톨릭이 대다수인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20세기 초 학살을 외면하는 교황이라고 분노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되돌리자는 움직임까지 부채질하고 있다.(사실 이건 좀 어거지이긴 하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열강이 저지른 학살 문제도 있거니와 이미 과거 개신교 국가인 독일이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헤레로족 학살이라든지 다른 20세기 최초 학살이란 것도 나온 상황에 이 말도 맞지 않는다. 다만 아르메니아 학살에서 1차 학살인 1894년 학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학살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다. 그렇다 해서 교황도 역사를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러나 이에 대해 터키에서 반발이 여전히 많다. 2015년 5월말, 아야 소피아 앞에서 모스크로 되돌리는 걸 촉구하는 시위대 1000여명이 시위를 벌이자 이곳 근처 가게 주인들은 욕을 퍼부었고 "이 색히들이 터키를 이란처럼 만들려고 한다!" 라는 비난이 터져나오며 반대 시위도 거세게 일어났다. 2016년 5월 28일에 수천명이 다시 모스크로 되돌리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2012년만 해도 여기를 방문한 관광객이 330만명이 넘을 정도로 터키에서 가장 방문자가 많은 여길 모스크로 만들면 경제적, 관광적 타격이 크다는 반발도 극렬하여 맞서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무단으로 변경하여 특정 종교건물로 만들면 세계 유산 선정 제외도 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터키 여러 문화유적에 대한 선정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중립적인 성격인 박물관으로 운영됐던 아야소피아가 특정 종교를 위한 예배 장소가 될 경우 정교회 등 다른 종교와 갈등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지적을 제기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의 불길은 터키 뿐만 아니라 그리스를 비롯한 기독교 국가로도 번져가고 있다. 2015년 5월 15일 독일의 방송 도이체 벨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와 만난 자리에서 에르도안 정부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강력 비난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2015년 5월 21일 미국의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도 에르도안 정부의 아야소피아의 이슬람 사원화 주장에 대해 종교 간 다양성과 공존의 정신을 해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그리스 정부는 아른츠 부총리의 발언 직후 “터키 관리들이 옛 동로마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자고 요청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의 종교적 감정을 해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3 건축
3.1 설계, 구조와 재료, 보수
동로마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역사적 건물이다. 하지만 기존 건축물을 뛰어넘는 규모와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와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왼쪽은 로마의 판테온, 오른쪽은 537년 당시 하기아 소피아 성당.
기본 구조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와 같은 석조 볼트 천장을 활용한 광대한 면적의 건물과 "판테온"과 같은 돔형 천장을 가진 건물의 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었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써는 한계가 명확하여 하기아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험이 많았다.
하기아 소피아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거대한 반구형의 돔 무게를 버티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돔은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건축자재들을 활용해 만들어졌지만, 높이 56m에 직경 31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인해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지지하기는 돔을 받쳐주던 30.5m 폭의 대형 아치 4개로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볼트의 일종인 펜덴티브(삼각궁륭)를 사용해 대원개를 형성한 결과, 펜덴티브가 각 아치 사이의 틈을 메꾸어 돔의 무게로 인해 옆으로 벌어지려는 아치의 수평추력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돔이 계속해서 아치와 그 밑의 기둥을 짓눌러 기둥이 바깥으로 쓰러지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공사 와중에 붕괴 위기가 오자 돔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들의 바깥 부분인 회중석 부분에 좌·우에 4개의 대형 버팀목을 만들고, 한쌍의 버팀목을 연결시켜 위·아래로 아치형의 회랑들을 개축해 기둥이 밀려나는 것을 버티게 하였다.
이런 급한 땜질에도 불구하고 회랑들의 가장 윗쪽 아치에 균열과 함몰, 뒤틀림이 발생했는데, 이는 아직도 버티는 힘이 모자라다는 증거였다. 각 버팀목마다 4군데의 아치형 회랑을 너무 크게 뚫어서 버팀목이 약해진 것이었다. 만약 회랑의 아치를 좀 더 작게 만들거나 메꿔버렸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버팀목 위에 기둥과 아치를 더 세워 힘을 보태고, 가로 지지대를 추가한 후 가장 위에 있는 아치를 벽돌로 겉을 메꿔서 좁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진행된 상단부의 뒤틀림을 고칠 수는 없어 지금도 이 공간에 가면 천장이 뒤틀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앙 기둥들이 밀려나게 되자 당연히 돔이 올라갈 공간 역시 정사각형이 아니라 좌우로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이 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던 건축가들은 완전한 원형 돔은 포기하고, 대신 타원형으로 돔을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봤을 때 타원형 돔은 완전한 원형 돔보다 비균일하게 무게를 전달하므로 다소 불안정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당은 완공될 수 있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성당이 건설될 때부터 이시도로스와 안시미오스는 이 지역이 지진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둥이 허용된 것 이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턱을 만드고 주두와 기둥, 기둥과 주초 사이에 납판[13]을 넣는 등 어느 정도 내진 설계를 했다. 그러나 완공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발생한 기록적인 지진으로 인해 558년에 돔이 붕괴되고 만다. 안시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이미 사망하였기에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젊은 이시도로스가 공사를 맡게 되었다. 새로운 이시도로스는 이 성당의 돔을 연구한 뒤 돔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기존의 돔은 채광을 위해 짧은 기둥들을 빙 둘러 원형으로 세운 드럼인 스트롱길롱을 놓은 뒤 그 위에 돔을 올렸는데, 이는 지진에 매우 취약하였다. 그래서 젊은 이시도로스는 기둥을 사용한 스트롱길롱 대신 훨씬 두꺼운 벽들로 바꾸고 돔의 위치를 6.25m 정도 낮춰 벽에 좀 더 안정되게 지지되도록 바꾸었다. 또, 젊은 이시도로스는 전체 공사기간과 비교하면 매우 긴 4년이란 시간 동안 돔을 보수할 수 있어 돔에 쓰인 회반죽 등이 마른 후에 건축용 지지대를 철거하는 등 안정된 방법을 쓸 수 있었다.
외벽에 추가된 버팀목 |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지진 등으로 인해 돔과 성당은 부분적으로 계속 파손되었고, 수백년이 흐르면서 돔의 무게 때문에 점점 기둥들이 바깥쪽으로 기우는 것이 보이게 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건물 외부에 서유럽의 고딕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버트레스와 비슷한 버팀목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훗날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비슷한 땜질을 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울어져 있는 기둥들이 보인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설계상의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세월의 풍파를 맞아오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자재의 품질 덕도 있다. 먼저 벽돌의 경우 로도스 섬의 점토로 만들어진 것인데 물에 던져도 뜰 정도로 가볍고 미세한 균열같은 것들은 벽돌의 탄산염 등의 물질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메워진다고 한다. 또 로마의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쇠퇴한 중세 유럽과는 달리, 포졸란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이어져서 이를 성당을 개축할 때 사용하였다. 포졸란 시멘트는 지중해 서부의 채석장에서 발견되는 화산재인 포졸라나와 석회 등을 사용하여 만든 시멘트로 인장강도가 매우 우수하다.[14] 하지만 최대 강도에 이를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서[15] 단기간에 공사가 이루어졌다면 위에 언급된 뒤틀림 문제에 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6] 포졸란 시멘트 기술은 계속 전승되어서 오스만 제국까지 이어졌다. [17][18]
3.2 의장과 모자이크
원래의 하기아 소피아 내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닦달로 인해 빠르게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장식이 간단한 편이었다. 기둥 하단 등도 조각 장식이 없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이른 기독교 시절이라 성인들의 인물묘사인 이콘의 법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도 있다. 아무튼 성당 내부는 금빛 모자이크를 쓰되 간단한 도안들로만 장식되어졌다.
그러나 이후 수백년 동안 성당은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예수와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 천사,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하게 되었다. 하기아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동로마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였지만 20세기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으로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위에 나온대로 회칠하고 그려진 이슬람 문양 제거에 반발도 커서 이젠 회칠 제거 및 모자이크 복원은 80년 넘게 중단된 상태이다.[19]
사진 | 설명 |
황제 전용 입구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를 출입하는 입구 중에서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의 위쪽 박공벽(tympanum)을 장식하는 9세기 말~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옥좌에 앉은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Ο Χριστός Παντοκράτωρ)'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은 레온 6세 현제(Λέων ΣΤ΄ ὁ Σοφός, 생몰년 : 866.9.19~912.5.11, 재위기간 : 886.8.29~912.5.11) 또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 황제(Κωνσταντῖνος Ζ΄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생몰년 : 905.9.2~959.11.9, 재위기간 : 913.6.6~959.11.9)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가 든 책에 적힌 문구는 요한 복음서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이다. 좌우의 원형 공간에는 각각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을 나타냈다. | |
남서쪽 입구 모자이크 우측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자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옥좌에 앉은 성모는 무릎에 앉힌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데, 아기 예수는 왼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성모자의 좌우에 있는 ΜΡ와 ΘΥ는 Μήτηρ(어머니)와 Θεού(하느님의)의 모노그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 곧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 |
300px | 후진(apse) 모자이크 후진의 반 돔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쎄오토코스(Θεοτόκος, 하느님의 어머니) 모자이크라고도 하며, 6세기에 제작되었다가 8세기의 성상 파괴 때 훼손되었던 것을 9세기 경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대좌와 옥좌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
300px |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 모자이크 2층 천장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Αλέξανδρος Γ', 생몰년 : 866.9.19~913.6.6, 재위기간 : 912.5.11~913.6.6)가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모습을 표현했다. |
조에 여제의 모자이크 조에 여제(Ζωή, 생몰년 : 978경~1050.6, 재위기간 : 1028.11.12~1050.6)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Κωνσταντίνος Θ΄ Μονομάχος, 생몰년 : 1000경~1055.1.11, 재위기간 : 1042.6.11~1055.1.11)가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세기에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좌우에 있는 IC와 XC는 Ιησούς Χριστός(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이다.[20]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 황제가 들고 있는 돈자루는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한다. 여담이지만 조이 여제는 결혼을 3번 했는데 남편이 바뀔 때마다 이 모자이크의 남편 얼굴과 문구도 바뀌었다고 한다. | |
콤니노스 모자이크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Ίωάννης Β΄ Κομνηνός, 생몰년 : 1087.9.13~1143.4.8, 재위기간 : 1118.8.15~1143.4.8)와 이리니 황후(Ειρήνη, 1088~1134.8.13), 그리고 황태자 알렉시오스 콤니노스(Ἀλέξιος Κομνηνός, 1106.2~1142, 측면에 그려져 있어서 정면에서는 안보인다)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짙은 청색 옷차림의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22년에 제작되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의 손에 들린 돈자루 역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 |
데이시스('Δέησις, Deësis) 모자이크 '데이시스'란 간청, 애원을 뜻하는 단어로, 심판자 그리스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거느린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261년에 제작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내부의 다른 모자이크보다 훼손 상태가 심각해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아 있고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보다는 양호한 편이라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 |
북쪽 박공벽(tympanon) 모자이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역임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왼쪽)와 성 이그나티오스(오른쪽)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은 모습과, 이들을 포함한 여러 성인을 형상화했다. 이 모자이크들에는 유독 회칠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나 기독교권은 높은 곳에 못 올라서 회칠을 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터키에선 그럼 높이로는 무시 못할 블루 모스크라든지 그런 건 누가 지었냐며 반론하고 그냥 놔둔 거라고 주장한다. 결국 정확한 이유는 불명(...) 다만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도 그렇고, 오스만 시대에 모스크로 개조된 많은 옛 동로마 건축물에서 이런 현상이 발견된다. 아마도 자잘한 성화 한 두개 정도는 남겨두어 이 건물이 원래 성당이었음을 밝히는 목적이었는 지도 모른다. 참고로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 같은 경우, 같은 건물을 둘로 나눠 한쪽은 정교회 성당으로, 한쪽은 모스크로 사이좋게 나눠 썼었다(...) |
3.3 옴팔리온(Omphalion)
내부 바닥에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옴팔리온이 있다. 옴팔리온은 그리스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다. 원형 대리석들이 바닥에 끼워져 있는 형태이며,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가 이 자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세운 이래 니케아 제국 시대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못한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이다.
3.4 서예 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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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압뒬메지트 1세 때 추가된 원판이다.
직경은 7.5m이고 8개의 원판이 있는데 각각 알라,무함마드,4명의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우스만 이븐 아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와 무함마드의 손자 2명 (하산과 후세인) 이다.
현재 이 원판은 이슬람에서 가장 큰 서예 원판이다.
4 라이벌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한 오스만 제국의 사람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파괴하지는 않고 훼손해서 모스크로 고쳐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16세기에 술레이만 대제는 건축가 시난에게 좀 작지만, 하기아 소피아와 유사한 구조의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세우게 하였고, 이후 술탄 셀림 2세는 역시 시난에게 하기아 소피아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모스크를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맞은편에 세우게 하였다. 그것이 1574년 완성된 셀리미예 모스크다. 하기아 소피아보다 돔 실내 면적은 약간 작지만 구조적, 외형적으로는 보다 발전되었다. 또한 1617년에 술탄 아흐메트은 건축가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에게 하기아 소피아의 가까운 곳에 보다 넓은 면적을 가진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트 자미)를 세워 마주보게 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하기아 소피아는 이들보다 천 년이나 전에 지어졌다는 점이라고 무시할 수 있으나 실상은 오늘날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멀쩡한 상태로 서 있는 것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계속해서 유지, 보수, 관리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비웃을 일은 아니다. 특히 중앙의 돔이 무너지지 않은 데에는 쉴레이만 대제 시대의 건축가이자 세계 최초로 지진을 염두에 둔 건축가로 알려진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터키에서도 그리스가 저렇게 비난하면 코웃음치며 놔뒀더라면 진작에 무너져 그림이나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깐다.
인근에는 이리니 성당이 톱카프 궁전 바로 앞에 있고 2014년부터는 정식으로 박물관으로 개장하고 있지만, 성상파괴주의 시대의 양식을 대변하는 성십자가 문양을 제외하고 모자이크는 사실상 전무하다. 대신, 이스탄불 서쪽의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 너머 에윱구(Eyüp Belediyesi)에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이라는 이름의 동로마 성당이 하나 더 있는데, 동로마 양식의 성당 건축과 모자이크를 보기 위해서는 그쪽도 함께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카리예 박물관 또한 오스만 시기에 회칠로 덮여 모스크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 오히려 회칠로 덮힌 덕에 훨씬 더 나은 상태로 이콘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곳은 트라브존(구 트레비존드)의 아야 소피아 성당과 마찬가지로 13-14세기, 즉 팔라이올로구스 양식의 이콘들 가운데서도 걸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회칠 전부가 벗겨진 상태라 성당으로서의 옛 모습도 확인해 볼 수 있다.
5 기타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비잔틴족의 불가사의로 나온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시리즈에서 문명 4부터 불가사의로 나온다. 공학 기술을 찍으면 건설 가능한데 노동자의 자원 활용 시설 건설 속도를 50% 상승시켜준다. 허나 시기상 르네상스 시기 정도에만 활용되고 증기기관을 개발해서 산업사회로 들어가면 퇴보한다. 증기기관을 개발하면 또 노동자 시설 건설 속도가 50% 향상되기 때문에 밸런스 문제상 그런 듯 하다. 사실상 메리트가 별로 없기 때문에 거의 안 짓는 불가사의. 문명 5에서는 신학 기술을 연구 완료하면 만들 수 있으며, 보로부두르 사원, 젠네 모스크와 함께 그 시대 만들 수 있는 3대 종교 불가사의이다. 오리지널에서는 위인관련 불가사의였으나 신과 왕 이후부터는 위대한 선지자를 얻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 빠른 종교 플레이를 위한 불가사의가 되었다. 문명 6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
- ↑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이지만, 하기아 소피아의 정면이 아니라 측면이다. 정면은 이런 사진을 찍을만한 공간이 없다.
- ↑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 ↑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요한 복음서 1장 14절 참조
- ↑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테오도시우스 대제 때, 537년 때, 557년 때의 모습이다.
- ↑ 이 당시의 그리스어는 이미 고전 그리스어와는 1000여년의 갭이 있으며 확연히 다르다. 이후에 나오는 그리스어 어휘들도 모두 중세식으로 수정함.
- ↑ 또 다른 이야기론 병사들이 성당을 약탈하자 기분나쁘듯 쳐다보긴 했지만 약속했던(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병사들에게 대가로 사흘 동안의 약탈 행위를 허락한다) 게 있어서 놔두었다. 다만 몇몇 병사들이 불을 지르고 하자 분노하면서 그들을 채찍질하며 '약탈은 허락해도 불태우는 짓은 허락 안했다'며 주의를 줬다고 한다.
- ↑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대대로 동로마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메흐메트 2세가 총대주교 취임식에 필요한 은제 십자가도 손수 마련해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한 것은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동로마 황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 ↑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개관식 날 아타튀르크가 신발을 벗지 않고 아야 소피아로 들어간 것이다. 모스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 사실 아야 소피아 안에 꾸며져있던 이슬람식 장식과 타일들도 이미 500년 가까이 묵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를 보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한국의 한 개신교인이 쓴 여행 책자에서 회칠 제거로 고생한다고 쓰기도 했는데 회칠을 제거한 건 미국 및 유럽 고고학자이고 현재 80년 넘도록 중단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적어도 터키인 상대로는 적절한 감상은 아니다.
- ↑ 이것은 기둥과 천장 간의 유연성을 주어서 지진이 일어나도 건물이 붕괴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고 이후 돔의 무게로 인하여 천장과 바닥의 어긋나는 등 건물 자체가 변형이 되어가는 과정에도 기둥 등의 구조물이 파괴되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 ↑ 1993년도 논문 Materials analysis of the Masonry of the Hagia Sophia Basilica, Istanbul 참고
- ↑ 거의 연 단위로 현태의 포틀랜드 시멘트(100-150일)에 비해 꽤 긴 편.
- ↑ 1993년도 논문 Materials analysis of the Masonry of the Hagia Sophia Basilica, Istanbul 참고
- ↑ 오스만 제국 때에는 포졸란 모르타르를 Khorosany mortar라고 불렀다는 설명. 1993년도 논문 Materials analysis of the Masonry of the Hagia Sophia Basilica, Istanbul 참고
- ↑ 오스만 제국 시기 댐을 지을 때 포졸란 시멘트를 사용했다는 설명. 책 Hydraulics of Dams and Reservoirs, p.15 링크
- ↑ 종종 한국의 개신교 책자에서 이걸 비난하는데 위에 서술하듯이 수백여년 이슬람 문양도 문화재임은 틀림없다. 반대로 어느 목사는 이슬람만 고생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회칠 제거 비용과 인력 동원은 모조리 미국이나 유럽 기독교권 나라들이 부담한 것이라서 터키 측이야 돈 1푼 들이지 않았다.
- ↑ 중세시대 그리스어 철자로는 C가 시그마의 소문자(σ,ς)형태였으며, 이는 키릴문자에도 전해져 С,с가 's'음가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