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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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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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행각을 벌이다 구속되고 있는 장영자.

일명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 제5공화국 시절 길이 남을 흑역사.

한국판 닉 리슨[1]

201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금융사기 사건이었으나, 그 후 다른 사건에 밀려 결국 순위가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인가?

2 인물 소개

장영자는 사채시장의 거물로 사건이 터지기 전에 이미 엄청난 재력가였다. 하지만 그녀의 재산 형성 과정은 이후의 사기 행각에 비해 잘 드러나지 않았고, 사람들도 그에 관해서는 관심이 적은 편이다. 장영자가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장영자의 언니의 남편, 즉 형부 이규광 장군이 증권 정보나 거물을 소개해주고 정치 자금 관리 등의 방법을 알려주는 식으로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견해도 있으나 미확인이다. 어쨌든 사건이 터졌을 당시 이미 부동산과 사채 시장에서 큰손으로 유명했다.[2]

장영자는 여러가지로 대단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먼저 장영자의 남편은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인 이철희인데, 육군방첩대HID 부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창설요원이며 정보 관련 업적이 대단했다. 대북 작전에도 어느 정도 개입했었고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관련된 업무를 직접 수행하기도 했다. [3]

그리고 바로 윗문단 장영자의 재산 형성 과정에서 언급된 장영자의 형부 이규광은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의 작은 아버지(즉 이순자 아버지의 친동생)이다.

또한 당시는 야당 지도자였으며 훗날 대통령이 된 김대중도 장영자에게 사촌형부가 된다. 왜냐하면 김대중의 첫부인 차용애(두 아들을 낳고 일찍 사망했음.)가 장영자에게는 고모의 딸, 즉 고종사촌 언니였기 때문이다.

3 사건의 발단 및 진행

1980년 7월,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이었던 정도영 준장은 어느 중년 여인이 군부대 불교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거액을 뿌리고 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여인이 해당 부대의 부대장들과 아무런 인연도 없으면서 거액을 뿌리는 게 의문점으로 대두되었다. 조사 결과 여인의 이름은 장영자로 당시 나이 40세로 법명은 보각행(普覺行)이며[4], 엄청난 재력가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빚 독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곧 장영자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고 각 부대에는 장영자를 조심하라는 지휘 조언이 보내졌다.

1981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산하 민정수석비서관실에 장영자 부부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었고, 민정수석비서관 이학봉국가안전기획부유학성에게 통보해줬다. 유학성은 처음엔 별 거 아니라고 여겼으나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1982년 4월 공영토건이 장영자에게 어음 사기를 당했다며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했는데, 검찰 내사 결과 어음 사기와 관련된 기업이 더 있다는 게 밝혀진다. 처음 대검 중수부 2과에서 이 사건을 맡았으나 곧 중수부와 서울지검들이 맡게된다.

1982년 5월 7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이종남 검사)이 장영자 부부를 구속하며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장영자는 주로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건설업체들을 찾아가 남편 이철희의 과거 경력을 들먹이며 특수자금이니 절대 비밀로 하라며 현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업체들로부터 수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공영토건의 경우 빌려준 현금의 9배에 달하는 1279억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아냈다. 이들 부부는 이렇게 받은 어음을 할인해[5] 다른 회사에 빌려주었다. 이런 식으로 받아낸 어음의 총액은 7111억원이고 이 중 6404억원을 할인해서 사용하였다.

참고로 신군부가 3공화국, 4공화국의 대표적 부정축재자로 지목한 10명의 부정축재액 총액이 853억원이었다.[6] 장영자 부부가 받아낸 어음의 총액 7111억원은 지금도 엄청난 액수지만 당시 사람들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서민용으로 지은 개포동 주공아파트 18평짜리의 분양가가 600~700만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말 다 했다. 지금의 환율로 따지면 약 7조원에 달한다! 거기에 당시 GDP의 1.4%, 당시 한국정부 예산의 10%나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워낙 엄청난 규모의 사기 사건이고 장영자가 전두환 부인네 집안과 얽혀 있다 보니, 이 사건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가령 태양금속의 경우 단 한 푼의 현금도 받지 않고 어음을 끊어주는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의혹이 제기될만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포항제철에 이은 업계 2위 일신제강, 도급 순위 8위였던 공영토건 등이 모두 부도가 나 버렸다! 순식간에 대기업 두 개를 날려버리는 장영자의 능력. 그리고 장영자, 이철희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형과 미화 40만 달러, 엔화 800만엔 몰수형, 추징금 1억 6254만 6740원이 선고되었다. 또한 장영자의 형부이며 영부인 이순자의 작은 아버지 이규광에게도 징역 1년 6개월 및 추징금 1억원이 선고되었다. 그 외에 구속된 사람이 30여명에 이르렀으며, 장영자 집에 침입해 물방울 다이아 등 1억 2천만 원 어치를 훔친 유명한 절도범 조세형을 잡은 사례로 장영자로부터 50만원을 받았던 경찰관 8명은 옷을 벗게 됐다. 참고로 당시 경력 10년의 평교사 월급이 25만원 수준이었다. 지금 물가와 한 번 비교해서 계산해보시라.

또한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일은 아니지만, 검찰은 사건 조사 후 장영자 부부가 생활비를 포함해 15개월 동안 약 49억원을 사용했다고 발표해서 국민들을 경악시켰다.[7]

4 사건의 여파

이 사건으로 법무부장관 이종원, 검찰총장 정치근, 국가안전기획부유학성,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권정달, 정무수석비서관 허화평, 사정수석비서관 허삼수 등 당시 5공의 실세들은 물러나게 되었다. 유학성의 후임 국가안전기획부장에는 노신영이 임명되었다.

단, 허화평과 허삼수는 바로 경질되지는 않았고 그 해 말에 경질되었다. 허화평과 허삼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김상구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사무차장 등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려고까지 하였고 심지어는 전두환 정권의 개국 공신들인 유학성, 노태우, 정호용 등을 궁정동 안전가옥에 초대하여 전두환에게 친인척의 2선 후퇴를 건의할 것을 결의하기까지 하였다. 이 점 때문에 그들은 전두환의 눈 밖에 났다. 여담으로,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에 의하면 허화평과 허삼수는 경질되기 몇 달 전부터는 청와대 본관 출입도 경호원들에 의해 통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랑 격으로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 겸 정무비서관 신분으로 해당 사건을 수사한 검사들을 TV에 출연시켜 의혹을 잠재우는 데 기여했다고 하였다.

이후 장영자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영부인 이순자의 아버지 이규동이 명성그룹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의혹으로 세간이 시끄러워지자, 전두환 정권에서 그를 무마하려고 장영자-이철희 부부를 대신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장영자가 출소한 후에도 사기 사건을 일으켜 다시 구속 수감되는 행각을 되풀이 한 것을 생각하면, 이순자 친정 식구들이 비리를 저지른 것은 저지른 거고 장영자는 장영자대로 사고를 친 게 분명하다.

5공 정부는 이 사건을 무마하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두 차례의 개각[8]과 1982년 5월 민주정의당 당직 개편을 단행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5공 정권 구호를 빗대어 '정의사회구현 좋아하네'라고 빈정대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은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제2의 장영자, 이철희 사건을 막기 위해 시중의 음성자금을 양성화해야 한다는 점과 조세 부담의 불균형을 시정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전두환 대통령에게 금융실명제 시행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기득권층에서는 정치 자금 모금의 어려움, 기업 활동의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여서 없던 일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 때 불발된 금융실명제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3년에야 시행되었다.

장영자는 1991년 가석방된 후에도 자신은 억울하다며 언론 플레이를 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1994년에 다시 140억원대 어음사기 사건을 저질러서 4년간 복역하였다. 일명 '2차 장영자 사건'으로 여기에 연루된 동화은행서울신탁은행도 징계를 받았다.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서 이번에는 좀 조용히 살려나 했지만 또 다시 구권 관련 사기를 일으키며 2000년에 다시 구속되었다가 2015년 1월에야 석방되었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았을 때 2,3년 안에 또 다시 일을 저지를 듯?

5 트리비아

당시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은 장영자에게 코오롱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코오롱건설을 팔려고 하였다. 그런데 팔기 직전 장영자가 검찰에 연행되는 바람에 이 사건에 연루되는 화를 면하였다.

여담으로 장영자는 전 남편(즉, 이철희와의 결혼재혼.)과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는데, 이 남매는 부모가 이혼한 후 장영자의 전 남편의 손에 컸다. 전 남편이 크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경제적으로는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엄마의 복잡한 팔자를 물려받았는지 남매 모두의 인생이 평탄하지는 못 했다.

먼저 남매 중 맏이인 배우김주승과 결혼해서 딸까지 낳고 한동안 잘 살았는데, 장영자가 출소하고 다시 사기 사건을 일으켰을 때 김주승의 사업이 그 여파로 부도나면서 김주승이 미국으로 도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과 그 밖에 알려지지 않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부부는 파경을 맞았고, 김주승은 2007년, 으로 사망했다.

남매 중 둘째인 아들은 2000년 구권 사기 때 장영자와 함께 잡혀갔다가 풀려났는데, 교도소까지 다녀와 자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뺑소니 사고를 크게 치고 외국으로 튀었다(...). 그러나 몇 년 후 희귀병에 걸려 시한부인생이 된 상태로 귀국했는데, 알고보니 외국으로 도피하기 전에 사귀다가 헤어진 여배우 차주옥[9]이 둘 사이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라 자기 핏줄에 애착이 느껴졌던지, 장영자 아들은 죽기 전 차주옥과 혼인신고를 해서 정식부부가 되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장영자의 아들이 거액의 재산을 남겼는데 법적으로는 부인과 아들인 차주옥 모자가 1순위 상속인이지만... 문제는 혼인신고가 장영자 아들이 사망하기 불과 얼마 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즉, 실질적인 부부생활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애초에 재산을 노린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됨.). 그래서 고인의 누나인 장영자 딸과 차주옥 사이에서 재산 분쟁이 일어났다.

또 장영자 부부 소유였던 땅에 빌딩이 지어졌는데 하필이면 폐건물이 된 적이 있다. 일명 장영자 빌딩. 그러다가 소유주가 바뀌면서 2014년 10월에서야 15년만에 완공됐다.

'2. 인물 소개'에 설명한 것처럼 공교롭게도 장영자의 친언니는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이규광과 결혼했고, 장영자의 고종사촌 언니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던 김대중과 결혼했다. [10] (당연히) 이규광의 부인(장영자의 언니)도 김대중 첫 부인의 고종사촌 동생이라서, 이규광과 김대중은 사촌동서가 되고, 이규광이 손아랫동서라 김대중에게 형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순자는 자기 작은 아버지 이규광의 형님뻘인 김대중에게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리고 전두환은 처삼촌 이규광의 손윗동서인 김대중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물론 전두환과 김대중은 어디까지나 '사돈의 사돈'일 뿐이라서 촌수니 항렬이니 하는 것을 따질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억지로 따져보자면 전두환이 김대중의 조카사위뻘이 된다.(...) 그래서 가끔 '전두환과 김대중이 사실은 친척 사이라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희대의 사기꾼 장영자를 매개체로 해서 묘하게 얽혀버린 전두환과 김대중.

또 다른 여담으로는 100년 만에 한 번씩 장씨 여자가 큰 일을 벌인다.라는 입소문(?) 같은 말이 있다. 어르신들이 이 사건을 두고 때에는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시는 경우가 있다. 또한 큰일을 벌이는 장씨 여자로는 장영자 외에 조선시대에 이름을 날린 장녹수와 장희빈이 거론된다.
  1. 그래도 이 사람은 자기가 을 흥청망청 써제끼지는 않았다.
  2. 참고로 전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순자가 장영자를 따라 부동산 투기에 나서 연희동 집을 샀다는 내용이 나온다.
  3. 박정희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는지에 관하여는 논란이 있지만 이철희가 핵심 라인인 것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로 때문인지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4. 실제로 장영자의 종교불교로, 원래는 천주교였으나, 후에 불교로 개종하였다.
  5. 중앙일보 연재물인 '청와대 비서실에서 나온 증언'에 의하면 이때 불법으로 어음을 할인하지 않았던 은행장 하나는 좋은 고객을 놓쳤다고 한동안 상사들에게 시달렸다는데, 사건이 터지고서는 사람 보는 눈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반대로 어음을 할인해주었던 은행 중 하나인 조흥은행은 이 사건 여파로 기업 CI를 바꿀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야말로 인생만사 새옹지마.
  6. 사실 이건 대국민용 쇄신 분위기 조성을 위한 쇼의 측면이 있어서 전액을 공개했다 하긴 어렵다.
  7. 이는 하루에 평균적으로 1089만원을 썼다는 말이다. 지금도 하루에 1000만원 넘게 썼다고 하면 사람들 눈이 튀어나올텐데 그 당시 물가수준을 감안하면 매일 1억가까이를 썼다는 것.
  8. 1982년 5월과 6월에 각각 한 번씩 개각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6월 개각 때는 유창순 국무총리가 경질되고 김상협 고려대학교 총장이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다.
  9. 이 사람이 누구냐면 한지붕 세가족에서 강남길의 부인인 말자 역으로 나왔던 배우이다.
  10. 물론 김대중의 첫 부인은 앞에서도 설명했듯 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 한~참 전인 1950년대 말에 죽었다. 참고로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에 김대중은 다들 아시는 대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받고 복역중인 신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