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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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의 구분
선사 시대
(역사 시작)석기 시대동기 시대

石器時代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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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주요한 도구로 사용한 시대. 보통 돌로 만든 도구의 수준에 따라서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이 시기는 인간의 문명이 미약했던 시기이고,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이라는 뜻의 선사 시대(先史時代, Prehistory) 대부분 시대를 차지하는 시기기도 하다.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동기 시대라는 중간기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비교적 짧은 시기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이 규석이다 보니 현대 반도체 시대를 가리켜 또 다른 석기 시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자주 사용되지는 않는 표현.

2 시대별 구분

2.1 구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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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石器時代 / Paleolithic (Period) [1]

인간이 살았던 시기를 100으로 본다면 구석기 시대는 98.8 정도를 차지하는 매우 긴 시기이다. 지질학적인 기준으로는 플라이스토세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옛 석기 시대. 인류 최초의 시대 구분으로, 선사 시대 중 처음을 장식하는 시대이다. 이를 통해 인류짐승을 구분하는 기준은 도구임을 알 수 있다.[2]

이 시대에 사용된 석기는 뗀석기(= 타제석기, 打製石器)[3]를 사용하였으며, 전문가가 아니면 이것이 그냥 돌인지 석기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전문가는 타격법과 가압법을 통해 가공의 여부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긁개의 경우엔 그 유형을 59개로 분류하기도 한다. 전기 구석기일수록 돌을 좌우로 나누었을때 그 대칭이 명확한 편이다.

좌우 대칭의 개념이 생겼으며, 적극적으로 도구에 적용시킨 시대이다. 이 좌우 대칭 개념은 다음 시대로 넘어가 신석기 시대의 간석기 → 청동기 시대의 동검 → 철기 시대의 철검으로 계승되며, 현대인이 사용하는 도구에도 이 개념이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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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도끼클로비스 찌르개청동기 시대 간돌칼요령식 동검

보통 구석기시대 돌도끼를 상상하면 나무에 묶은 돌을 연상하는데, 사실 나무라는 손잡이가 달린 경우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가서야 등장한다. 전기 구석기 시대는 돌 하나가 맥가이버칼처럼 전천후 기능을 가진 것이 많았으나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석기 하나당 1~2가지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 가장 오래된 석기군은 올도완 석기.

석기시대이기 때문에 석기를 주로 이용하였지만, 뼈와 같이 단단한 물질도 많이 사용되었다. 해골은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템 공급원이었던 게다그러한 나를 찾게 될 것이다. 특히나 부수면 날카롭게 갈라지는 흑요석은 주요한 무기자원으로 거래도 되었다고 한다.[4]

이 시대는 주로 수렵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얻었다. 과거에는 'Man the hunter(사냥하는 남자)'라는 개념이 강해서 사냥을 하던 남성에 의해 주도된 시대라고 여겼으나 인류학자들의 최근의 연구에서, 사냥이 식량 수집에서 차지하던 비율에 대한 다른 연구결과들이 제기되면서 의문시 되고 있다. 극지방과 같은 예외적인 환경을 제외한다면, 통상적인 칼로리 공급량에서의 비중은 채집식량이 상대적으로 더 높고(60%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80%까지), 보다 안정적인 식량원이었다는 것. 그러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사냥활동의 중요성 역시 부정하기 힘들므로, 누가 일방적으로 주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과 같은 식물성 단백질원이나 가축의 을 활용할 수 있는 농경 이후와는 달리,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냥과 어로 이외의 단백질 획득방법은 곤충채집 다른 맹수들이 먹다 숨겨놓은 동물사체를 훔치는 것이었다(...).[5] 따라서 채집활동이 '주로' 여성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지, 남자는 절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큰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대체로 남성들의 일이었지만, 수렵과 함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던 어로활동이나, 작은 동물을 잡는 것 등은 그리 성별을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또한 최근 제기되는 주장으로는, 석기시대가 흔히 현대에 생각되듯, 늘 굶주리며 뼈빠지게 일해야 하는 살기 어려운 시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부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수렵/채집 경제에서는 주당 20시간 노동만으로 풍족한 생활이 가능했다고도 한다. 그런 연구 내용 중 일부에 따르면 (흔히 부시맨이라 불리던)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의 저런 정도의 노동시간으로 하루 평균 2,300칼로리 정도를 섭취할 수 있었다고한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북한보다는 잘 먹었다. 순 열량만 따져도 대체로 초기 농경사회의 평균 수준보다 높으며, 나아가 그 한참 이후까지도 대부분 사회의 하층민보다 나은 영양상태다. 단백질 섭취량 등 영양소 균형을 따지면 더 높은 수준. 딱히 돈을 들여서 마련할 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먹고 자고 싸면 그만인 상황이었으니까. 단 이는 어디까지나 주변 환경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먹는다'는, 베어 그릴스 급 식성을 전제해야 가능

농경시대 이전의 개개인이 농경이후보다 노동강도면에서 더 편했다는 여러 담론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단 해당 서적에서는 농경으로 인해 사회나 종의 관점에서 도약하는 문제를 경시하는 바가 크다. 지구상 모든 곳이 먹고살기 편한 곳일 수 없는 데, 모든 걸 자연에서 얻어야 하는 석기시대에 어떻게 주당 20시간으로 탱자탱자 하며 먹고살수 있었겠냐'는 의문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답변은, '그럴 수 있는 곳만 찾아 다니며 살았고, 그럴 수 있는 규모의 인구를 유지했다'는 것. 즉 한 지역의 자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지역을 이동하는 생활패턴과, 거의 제로성장에 가까운 인구 저성장 상태가 유지되어야 가능한 것이었고, 어느 정도는 꽤 오랜기간 그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
전자 - 이동성의 결과로 결국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 아메리카 까지 퍼져나간 거고, 후자 - 낮은 인구성장율의 유지는, 높은 영유아 사망률(5-60% 근데, 실상 이 수치는 거의 산업혁명과 근대의학의 발전 이전에는 대체로 엇비슷한 상태였다.) 등 자연적 요인과 더불어, '영유아살해'를 비롯 알려진, 혹은 - 분명한 의학적 효과는 확인되지 않은 약초 등의 - 알려지지 않은 여러 수단이 동원 되었을 수도 있다.[7][8]

덧붙여, '구석기 시대 20시간 노동설'은, 단지 '먹고살기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보다 편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차피 자연자원의 밀도라는 게 뻔한 이상, 딱히 더 뺑이친다고 더 나올 것이 없다는 것도 이유. 어쩌면 뭐라도 더 얻어보려고 뺑이치다가 포기하고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일단 임시 정착지 부근에서 인간 집단이 돌아다니면서 채집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다. 따라서 충분히 채집하고 나면 그 이상의 채집 활동은 그냥 헛고생이다. 한 번 털어가고 나면 더 이상 자원이 나올게 없는건 당연하다. 오히려 그래도 뭔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헛고생하면서 돌아다니다보면 쓸데없이 영양분을 낭비하고 부상의 위험과 자연의 위협에 마주칠 확률을 늘릴 뿐이니까 적당히 식량을 모으면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하는게 좋은 것이다. 구석기 인류의 채집/수렵 활동은 풀밭 산보가 아니다. 육체와 체력을 유지할 영양소를 섭취하면 남는 시간엔 꼼짝 안하고 쉬는 게 에너지를 아끼는 수단이기 때문에 신석기 인류처럼 잉여인력이 전담활동을 하거나 시간을 투자해 생산활동을 하는 등으로 헛되이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사실 농경을 하게 된 뒤에도 수렵채집을 할 때보다 노동량은 늘어났지만 노동을 수용할 생산시설인 농토의 면적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어느 정도 일하고 쉬는 것은 보통이었다. 밭을 10번 더 쟁기질 한다고 작물을 10배 더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만큼만 작업을 하면 되고, 수렵채집보다는 줄었지만 여가시간은 의외로 많았다. 그러나 산업사회는 할 수만 있다면 24시간 일을 시켜도 생산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으므로 노동시간을 한없이 올릴 수 있다.(…) 실제로 바로 그런 이유로 증기기관이 발명되자마자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과 강도가 미친듯이 높아진다.[9]

결국 농경시대 이전의 인류는 소수정예의 개념에 더 가까웠고, 농업이라는 공통적 부역을 집단이 개개인에게 강제로 부과하면서 상대적으로 약한 개체들에게도 생존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발 하라리는 이를 대다수의 고통 증가에 반해 극소수 특권계층만의 편리증가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는 '농사에 실패해 굶어죽어가는 개인의 고통이 머나먼 미래에 문명속에서 편하게 살 인류의 모습으로 위안받을 수 있겠나' 라고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라고 바보들은 아니었다. 모든 수렵인들이 농경인보다 편하고 잘 살았다면 그 누구도 농경집단에 남아 있지 않고 탈주했을 것이다. 자연 환경과의 대항에 있어서 사냥/채집 인류는 잘해봤자 먹이사슬 중에서 상위에 올라가는 수준의 권력을 지닌 것 뿐이었다면, 농경사회로 인한 인구 증가와 사회체제를 구축하고 나서 비로소 인류는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단계를 넘어 자연과 대립하면서 독립된 인류집단 내부환경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 변화나 급작스러운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확률적 안전성, 유전자적 규모를 확보하게 된 것.

물론 농경인들이 보기에 저 숲 속 수렵 채집인들은 고기를 실컷 뜯어먹고, 편하게 퍼자고, 건장하고 근육질에 전사들로만 드글드글한 무시무시한 작자로 보였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반대로 수렵인들이 보기엔 농경민들은 하나하나는 비실비실하고 맞다이로는 대충 잡을만해 보이지만 자신들에 비해 소름끼칠 정도로 수가 많은데다(+늘어나고 있는 데다) 서로 가까이 있어서 지원도 금방 오고, 권력체계라는 것을 통하면 별로 같은 부족끼리가 아닌데도 몰려와서 맞서 싸워주는 공포의 군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들이 그만큼 아이를 낳아서 키울 능력도 없고, 낳은 아이들 중 유능한 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는 수마저 한정된 와중에 대충 반복적인 노동만 할 수 있으면 높은 확률로 숨풍숨풍 자손을 낳아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농경인들은 개인의 유유자적함(행복함?)의 고하를 따지기 이전에 그 자체로 막강한 전투종족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던 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물량이다

게다가 수렵민이 고기를 모아서 쉬고 있어도 맹수는 쉬지 않는 반면에, 농경민족의 도시 중앙까지 들짐승들이 마구 들어오진 않는다. 전자는 자연환경이 어떠하느냐가 자신이 지금 당장 쉬느냐 못 쉬느냐 수준까지마저 지배하는 데 반해, 후자는 최소한 오늘 내일 뭘 할 지, 쉴 수 있는지는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다

현대인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물질문명과 집착에서 벗어난 행복' 이라는 것은 항상 긍정적으로 회자되지만 그렇다고 당신 직장일 아둥바둥하느라 불행하네요 모든걸 다 처분하고 산에 들어가면 먹고 사는건 충분해요 한다고 다 그대로 하진 않을거란 점과 비슷하다. 농사를 지으면 사람이 많아서 유흥거리도 생기고 술도 담그고.... 인간이 원하는 쾌락은 잠자고 멍때리는 것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아무튼 현생인류의 부계혈통으로 지목되는 'Y염색체 아담'을 다뤘던 NGC의 Genographic Project 다큐에서도 소개되듯, (다른 때도 아니고 7만 5천년 전 토바화산 분출로 현생인류가 멸종 위기를 겪은 직후인) 7만년 전 인간이 살았던 아프리카 동부 해안 유적에서 하라는 식량채집, 석기제작은 안하고 조개껍질을 갈아 만든 목걸이 따위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인류의 이른바 정신문화라는 것이 탄생한 이유는, 바로 썩어나는 시간을 떼우기 위한 잉여질이었을지도. 실제 농업이 시작된 전과 후의 유물의 수준에 차이가 난다. 채집 시절에 근사하게 목걸이도 만들고 절구도 모양 좋게 다듬어서 썼지만, 농사짓기 시작하면서 바빠서 그런 건 없다가 되버렸다. [1] 유골의 경우도 채집시절에는 영양상태가 고르고 키도 컸지만, 농경시대에 들면서 키도 작아지고, 관절의 마모도 심해졌다. 그러고도 식량이 모자라 다툼이 잦았는지, 이 시대 농부들의 유골의 상당수에서 전투로 인한 타박상의 흔적도 있다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시작되는 인류의 대다수는 이 시기를 거쳤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모두. 그리고 석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현생인류는 뭔가에 홀린 듯 이동[10]호주, 태평양, 아메리카, 북극 근방까지 이동했다. 가히 대여행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보통 최후의 빙하기 시대가 포함되며, 수렵-채집-어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신석기 초기-중기 무렵부터 농경이 시작되니 당연한 이야기.[11]

후기 구석기 시대에 들어서는 막집('움막 집'이란 뜻이다.)을 지어서 살았다. 인구 수가 별로 많지 않았고 자원을 이용하기 쉬웠기 때문에, 오히려 이 바로 다음의 시대보다 전체적인 삶의 질은 높았다. 자원(주로 식량)의 분배 문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서로 다른 부족이나 군락 간에 분쟁과 충돌은 있었을지언정 일정한 생활 공간을 공유하는 하나의 사회집단 내에서는 아직까지 계급적으로 고착된 분배 불평등이 나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 시기를 '원시공산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런 점에 주목한 명명이다.

단백질 섭취량과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도 일부 수렵 채집인들은 잘 먹고 잘 산다. 농경의 이점은 삶의 질보다도 부양할 수 있는 인구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유목민족과 정착민족의 수만 세어 봐도 농경에는 많은 인구를 지탱할 수 있는 압도적인 생산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대표적으로 중국). 그러나 원시적인 농경으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고, 특히 일시적인 기상변동등 국지적인 자연적 압력에도 취약했던 것은 분명. 여기에 급작스런 인구밀도 증가와 무엇보다 가축사육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전염병 등으로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기를 겪게 된다.

현생인류라 볼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약 20만년 전 쯤 아프리카에서 등장했으며, 10만 년 이후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했다.아프리카를 빠져 나온 시점에서 당시에 생존해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접촉한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는 혼혈이 발생할 수 없을만큼 유전적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었지만 실제로는 약간의 혼혈이 발생했다는 것이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유전체 분석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아시아와 유럽인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비율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볼 때(2% 내외), 레반트/코카서스 인근에서 막 아프리카를 벗어난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로도 네안데르탈인과의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초기에 아시아로 이동한 멜라네시아/네그리토 사람들은 추가로 아시아 데니소바인과의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12] 덧붙여 막연히 현생인류보다 무식하고 투박할 것으로 인식되어 오던 것과 달리, 석기제작기술로 비교할 때 네안데르탈인의 기술이 같은 시기 현생인류보다 딱히 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한때 전기 구석기 유물 중 하나인 아슐리안형 석기(석기의 양면에 모두 날이 선 형태가 특징)를 기준으로 문명의 정도를 평가하고, 때문에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되지 않은 채 외날석기만 발굴되던 동아시아를 미개 문명으로 평가하는 고고학자(대표적으로 모비우스(Movius)라는 학자가 있다.)들이 있었으나[13] 1977년에 우리나라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흔히 양면핵석기라 부른다.)가 발견되었는데 연대 추정 시기에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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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발견자 그렉 보웬. 당시 주한미군이었던 그는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다가 전곡리 석기를 발견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곡리 선사유적지 참고.

참고로 일본에서는 한국 만큼 오래된 구석기 유물이 나오질 않아서 관련 학자들은 꽤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만다. 후지무라 신이치 참고.

2.2 중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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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石器時代, Mesolithic. 중석기 시대를 따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고, 구석기 시대의 일부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홀로세가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이 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작고 날랜 동물들이 많이 나오면서 이에 맞춰 이 개발되었다. 또한 작은 동물 및 물고기를 잡거나(화살, 작살, 작은 투창 등) 해체하기 위하여 조각이 작은 잔석기가 많이 쓰였다.

이는 유라시아, 아프리카 대륙에 따른 구분법으로, 지역에 따라 중석기 시대의 구분이 굉장히 모호한 지역도 있다. 가령 고고학자들은 동아시아에서의 중석기 시대를 기원전 8,000-6,000년 대로 추측하지만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초기 농경과 금속기(구리)를 가공해서 초기 도시국가단계로 접어든 상태였다. 또한 동아시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산물로 여겨지는 토기가 이미 구석기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화살촉과 같은 잔석기 사용이 분명한 흔적은 기원전 10,000년 이전에 이미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5,000년경과 기원전 40,000년경에 인류의 이주가 시작된 아메리카 대륙이나 오세아니아에서도 초창기에는 활을 사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 지역에서는 활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잊혀졌을뿐. 여전히 중석기 시대에 대한 구분은 굉장히 모호하며, 보편화되어있지 않기때문에 연구할 거리가 무궁무진하다고 하겠다.

2.3 신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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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 토기, 움집, 밭농사

新石器時代 / Neolithic

신석기 시대와 구석기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토기의 등장과 간석기(=마제석기)의 사용, 농경과 정착생활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고 한 가지만 등장해도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약 1만년전에 등장한 제주도 고산리식 토기가 신석기 시대의 개막을 알리지만, 이 토기는 제주도에서만 한정되었을 뿐더러 그 후 몇천년 동안에 존재한 토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신석기 시대로 편년해야 할지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기본으로 생활하였으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등에서 당대의 수렵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기초적인 농경이 시작되어 , ,수수등의 잡곡으로 약간의 농경생활을 하기도 했다. 예외도 있어서 수렵 및 채집 생활이 충분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경우, 아예 농경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

기존에 한국 사학계는 기원전 4000 ~ 3000년 경에 농경(신석기 혁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뚜렷한 농경의 흔적을 남긴 유적은 없다시피 해 신석기 시대 농경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강원도 고성에서 신석기 시대에 이미 밭에서 농작물을 재배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이 발견됐다. 이 발굴 결과 신석기 후기 농경은 실질적으로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체계적인 농경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성인병이 처음으로 발생한 시기라고도 추측되고 있다. 이유는 곡물 재배가 활성화 되면서 탄수화물(섭취 후 당으로 변환되며 지방으로 축적됨) 섭취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대로 신석기는 구석기와 마찬가지로 수렵과 채집이 기본 생활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석기 후기에 들어서도 농경은 조악한 형태와 소규모로 할 수 밖에 없었고, 본격적인 농경(벼농사)은 아무래도 철제 농기구 사용과 관개수로 정비에 노동력 동원이 가능한 계급제와 국가제도가 정비된 청동기, 초기철기 시대 이후의 일이다.

세계사적인 신석기 시대 초기의 유적으로 괴베클리 테페가 있다. 인류 최초의 신전으로, 수렵 채집을 하던 유목민들이 이 시기에도 대규모의 사회 구조를 가질 수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신석기 시대는 각 지역마다 토기를 기준으로 편년이 나뉘지만 크게 3가지로 나누자면, 융기문토기의 전기, 침선문(= 빗살무늬 토기)의 중기, 민무늬의 후기로 나눌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각 시대 토기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나오지는 않고, 토기 내에서도 다양한 구분과 변형이 존재한다. 흔히들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 아는 포탄형의 빗살무늬토기는 중서부지역에서 등장하는 토기이다. 그 외의 토기는 대부분 평평한 바닥을 띄고있다. 세계 각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양식의 토기가 존재하며, 이미 원시적인 형태의 문화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시가 되고 있다.

여담으로 초기형 물레와 베틀은 이 시기에 이미 존재. 즉 이 시기엔 천옷이 존재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석기 시대의 끝 무렵에 인류는 금속을 다루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어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람의 해골을 토대로 얼굴을 복원했더니, 오늘날 웬만한 현대인 저리가라할 크리스 햄스워스 닮은 영화배우급 핸섬함을 자랑하는 결과물이 나와버렸다.(…)덕분에 5,500년 뒤 후손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열등감 제대로 폭발중...관련기사. 최고 평점 덧글란을 주목해보자.(…)

2.3.1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의 개시는 상당히 이른 편인데 이는 동아시아가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 생산을 일본 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13500년 전) 중국 하북성 남장두(Nanzhuangtou, 南莊頭), 호남성 옥섬암(Yuchanyan, 玉蟾岩), 강서성 선인동(Xianrendong, 仙人洞) 등에서 초기 토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러시아 아무르 강 유역의 Gromatukha, Gasya, Khummi 유적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초기 토기가 발굴되었다. 한반도의 경우 절대연대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양양 오산리와 제주도 고산리에서 신석기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동아시아 토기 제작 기술의 발명과 토기 사용의 확산은 어느 한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전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별개의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역별 토기의 장식 형태나 토기 모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기가 출현한 지역이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주변 지역에서 모방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초기 토기는 아직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용도별 토기가 등장하지 못했고, 토기를 굽는 온도도 낮아 무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풀이나 동물 털을 섞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농경이 시작되기 전에 토기가 등장하고 있으며, 초기 토기의 용도는 저장용이 아니라 조리용으로 추정된다. 국을 끓여 먹는 문화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겠지?

참고문헌
유태용 (2010) - 고고학적 측면에서 본 한민족의 정체성, 민족학연구, 9, pp83-118.
임상택 (2013) -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토기문화
YV Kuzmin (2006) - Chronology of the earliest pottery in East Asia: progress and pitfalls. Antiquity, 80, pp 362-371.

2.3.2 황하유역의 신석기 문화 전개 양상

자산문화(Cishan culture, 磁山文化), 배이강문화(Peiligang culture, 裴李崗文化), 가호유적(Jiahu site, 賈湖)

배이강문화는 1977년 하남성 정주시 배이강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대표로 하는 기원전 7천년 경에 시작된 신석기 문화이다. 가여하(賈汝河)에서 복우(伏牛)산맥 북쪽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초기부터 숫돌을 사용해 석기를 갈아서 다듬는 기술적 진보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토기 제작은 초기에는 모래와 같은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점차 개선되었다. 가마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더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구워내기 시작했고, 용도별로 기종이 분화하기 시작했다. 바닥이 평평한 물항아리, 바닥이 둥근 사발, 입구가 좁은 호리병, 술잔이 대표적인 기종이다. 이와 더불어 토기를 받치는 삼발이 구조나 토기 바닥에 덧댄 지각(支脚)이라 불리는 구조가 배이강문화의 대표적인 지표이다.
집자리는 땅을 반쯤 파고 만든 움집이었고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원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개나 돼지 등을 사육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축을 키우는 것보다 수렵이 식량 확보에 더 기여했을 것이다. 십여명 내외의 가족이 3~4집이 모여 씨족을 이루고, 여러 씨족이 모여 하나의 부족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부족을 구성하는 가족 집단이나 부족 집단 사이의 격차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장방식은 시신을 반듯이 눕힌 형태로 묻은 개인장이다.

자산문화는 배이강문화 지역의 북쪽에 존재한 지역 변이 문화로 하북성의 하북평야와 태행산맥 동쪽 지역에 존재했다. 토기를 포함한 물질문화 양상을 보았을 때 배이강 문화와 강력한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배이강문화에 속하는 문화로 판단된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토기에 지각이나 삼발이를 사용하는 배이강 문화와 달리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아 맥주컵과 같이 옆면과 아랫면이 평평한 토기가 함께 만들어졌다. 이런 영향력은 다른 황하 지역에서 확인할 수 없는(후리 문화는 예외이다.) 옥이 나오거나 도자기가면이 나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자산문화는 황하유역 문화 중에서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곳으로 생각된다. 흥륭와문화 지역과 함께 최초로 기장 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장과 조는 곧 황하 유역의 주요 농경 작물이 되었다.

가호유적은 배이강문화 지역의 남쪽에 존재한 유적으로 배이강문화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유적이다. 기본적으로 배이강문화에 속하지만 양자강 유역의 물질문화와 생활양식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배이강문화에 속하는 토기 이외에 손잡이용 두 귀가 달리고 토기 아랫부분이 볼록 부풀어 오른 긴 모가지-입구 좁은 병과 같은 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기장과 조를 기른 배이강-자산 문화와 달리 곡물은 쌀에 의존했고, 기장/조는 전혀 재배하지 않았다. 매장 양식 역시 양자강의 영향을 받아 이차장(매장으로 모든 예식이 끝나지 않고 추가로 매장 의식을 더 치르는 행위)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DJ Cohen (2011) - The Beginnings of agriculture in China: A multiregional view, Current Anthropology, 52,pp. 273-293.
YV Kuzmin, AJT Jull, and GS Burr (2009) - Major patterns in the neolithic chronology of East Asia: Issues of the origin of pottery, agriculture, and civilization, Radiocarbon, 51, pp891-903.
X Liu, HV Hunt, and MK Jones (2015) - River valleys and foothills: changing archaeological perceptions of North China's earliest farms, Antiquity, 83, pp 82-95
Z Yanping (2013) - The Early Neolithic in the Central Yellow River Valley, c.7000–4000 bc, A Companion to Chinese Archaeology

2.3.3 참고

3 작품에서의 석기 시대

시대적으로 원시시대이거나 금속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원시적인 부족이 주로 석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실제 사용된 석기와는 달리 그냥 나무 손잡이에 돌멩이 매달아 놓은 식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가장 대표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다름아닌 돌도끼다.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은 일단 배경이 석기 시대. 다만, 배경만 석기시대지 돌 도구나 공룡을 이용해서 현대에 있을만한 물건은 어지간하면 다 있는 오버 테크놀러지스러운 광경을 보여준다. 스톤펑크 만화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초기 캠페인 중에 하나인 다크 선은 환경 파괴로 인해 금속 자체가 씨가 말라 사실상 이 시대에 머물러 있다. 일반적인 무기 중에 가장 쓸만한 날붙이가 흑요석이고, 그 외에는 뼈 도구 정도나 보이는 수준.

마인크래프트 플레이의 시작과 끝. 돌 곡괭이와 가죽옷으로 일어나 다이아 곡괭이와 다이아 갑옷으로 귀결된다. 게임 내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으면서 가장 범용성 좋은 재료가 바로 돌인지라 어느정도 금속을 얻게 된 후에도 돌 도구를 그야말로 징하게 쓰게 된다. 모드를 떡칠해서 온갖 기상천외한 자원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처음 시작하면 돌 도구는 반드시 만들어 쓰게 마련이다.

학원기이야담에서 희대의 개깡패 여주인공인 유소연이 어린시절 홍콩할매귀신에게 산속에서 극한생존수련을 받을 때 사용하는 것이 나왔다. 주먹도끼를 받아라.

파 크라이 프라이멀은 아예 석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다. 트레일러에서는 기초적인 언어와 함께, 창과 활로 매머드를 잡는 모습이 나왔다.

4 기타

미 전략공군의 아버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아주 좋아했던 시대. 자세한 내용은 커티스 르메이 항목 참조.

비슷한 경우로 아인슈타인의 인터뷰 내용이 있다. "장차 어떠한 병기들로 전쟁을 수행할 것 같습니까?"라는 언론의 질문에 "3차 대전에서 쓰일 무기가 어떤 것들인지 모르겠지만 4차대전에선 돌과 나뭇가지가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유튜브 채널 Primitive Technology는 촬영용 카메라바지 외에는 어떠한 현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석기와 자연에서 채집한 재료만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므로 알맞는 광석만 찾으면 청동기 시대철기 시대로 옮겨갈 가능성도 있다. 드디어 철을 굽는데 성공했다.

5 롯데제과의 초콜릿

르메이제과
석기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불규칙하게 생긴 초콜릿 조각에 코팅을 해서 흡사 돌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후에 저 초콜릿들 사이에 딱 하나 꽤나 신 맛 사탕이 들어있는 '신석기시대'가 나오기도 했다. CU에 가보면 일부 점포에서 이 초콜릿과 유사한 맛과 모양의 '펀스톤 초콜릿'을 판매하고 있다. 대형마트나 향토백화점 등에서도 같은 형태의 PB상품이 있고, 외국의 비슷한 제품을 수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 상품도 정발명은 따로 있지만 역시 석기시대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어이없는 고증오류가 있는데, 인간과 공룡이 한 시대에 공존하고 있다는 거다. 실제로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서 위와 같은 사진을 제시한 후 오류가 있다고 문제를 냈다. 만화일기 땅콩찐콩에서도 석기시대에 공룡이 등장한다.

최근 편의점 등에서 1,000원 내외에 다시 팔고 있다. 맛은 똑같으나 이 대폭 줄어 진짜 한 줌 정도라 몽땅 털어내면 한 손에 담을 수 있을 정도고 무엇보다 고증 때문에 공룡알이 초코볼이 됐다.
  1. 구석기시대를 뜻하는 고유명사와 형용사가 스펠링을 공유하기때문에 Period/Age/Era 따위의 명사를 뒤에 붙여도 되고 빼도 된다. 다만 생긴게 생긴거다보니 형용사처럼 쓰는 편이 일반인들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들리는 편이다. 단독으로 쓸 경우 The Paleolithic이라고 하면 보다 확실한 느낌을 줄 수 있다.
  2.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정의는 '걸어다니는 원숭이'가 아니라 '도구를 쓰는 동물'이었다. 그 때는 동물 행동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침팬치가 석기를 쓴다든가 하는 모습 등이 관찰되지 않았던 시기였다(제인 구달에 와서야 겨우 전문적으로 연구되었다.). 결국 당시 수많은 석학들은 해달이 사람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돌로 조개를 깨서 먹는데 돌은 도구인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토론을 했었다.차라리 도구를 쓰는 영장류를 정의로 했다면...
  3. 돌을 서로 후려쳐서 파편이 떼어져 나가서 만들어진 석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먹도끼 같은 걸 보면 어지간한 생명체는 골로 보낼 만한(…) 모양을 하고 있다.
  4. 추리만화에서 트릭으로 쓰일 만큼 요긴한 암석이다.
  5. 그런데 인간이 언제나 맹수들의 먹이를 가로챈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점은 맹수는 사냥감의 뼈 속에 있는 골수는 먹을 수 없었다. 석기시대 인간은 버려진 뼈들을 부셔 단백질로 구성된 골수를 빨아먹었다. 여담으로 이런 생생한 채집활동 묘사가 가능한 이유는 아프리카에선 아직도 이런 생활을 하는 부족이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로 소개된 적도 있는데, 사자가 먹다남긴 고기를 들고오며 하는 말이 '사자들은 별로 깔끔하게 먹지 않아요'라고. 실제로 초원을 장시간 어슬렁거리며 걷는데 유리한 인류로선 이런 스캐빈징도 꽤 괜찮은 단백질 획득 방법이다. 물론 이 또한 대체로 남성들이 하는 일로 되어있다.
  6. 이누이트 처럼 자연환경이 극한적이어 거의 수렵활동만으로 살아가는 극지방의 경우, 직접 동물을 잡는 것은 남성들의 몫이지만, 사냥이 식량공급의 주 원천이고, 또한 다른 지방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더 장시간의 사냥여행을 요구하는 성격상 사냥과정 전체는 사실상 남녀를 아우르는 공동체 전체의 일거리에 속하며, 여성들도 사냥그룹에 동행, 사냥도구와 의복 수선등의 '야전지원업무'를 분담한다. 말하자면 메딕.
  7. 원시사회에서 영유아 살해의 대상은 남아보다 여아가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여아를 줄이는 것이 인구조절에 더 확실한 수단이므로. 그리고 남아는 굳이 영아 때 죽이지 않아도 사냥을 하면서 어차피 소모되니까.
  8. '쿵'족에 대한 인류학 연구 - 대표적으로 마저리 쇼스탁의 '니사'- 에서는 쿵족이 전통적으로 식물에서 채취된 일종의 낙태약을 사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국내의 '아마존의 눈물'에도 소개되었던 아마존 '조에족'을 다룬 해외 다큐에서도 조에족이 나무껍질등을 피임약 혹은 낙태약 비슷하게 사용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이상의 정확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인류가 동식물에서 구해지는 화학물질을 치료제나 독극물, 나아가 환각제까지 여러 용도로 사용해온 것 역시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식물 중에는 포유동물의 에스트로겐이나 프로게스테론 처럼 작용하는 물질을 포함, 동물에게 작용하는 유사호르몬 성분을 지닌 녀석도 꽤 있다. 이는 사실은, 일부 식물이 살충 성분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의 방어전략의 하나다. 즉 '포식자'인 대형 초식동물 - 그런데 그게 주로 포유류다... - 에게 '피임약'을 먹여 번식율을 떨어뜨리는 전략. 때문에 한 지역에서 오래 돌아다닌 집단이, 뭔가 약발이 듣는 걸 발견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9. 이 때문에 산업사회에 익숙해진 근대인들은 수렵민, 농경민을 보고 '게으르다'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일을 해도 그 만큼 생산량이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노동을 할 이유가 없어서 쉬는 시간이 많을 수 밖에 없다는걸 편견으로 무시한 것이다.
  10. 애초에 채집과 동굴생활이라 해당 근거지의 자원미네랄을 전부 소모하면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체로는 다른 동물이 그렇고, 아직 수렵-채집사회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소수 부족들처럼 일상적으로는 '계절적 이동'을 하며 생활 했을 것. 하지만 거주지역의 기후나 식생 등의 변화가 발생했을때 이동하는 범위에서 인류는 다른 종에 비해 확연히 넓었고 또 다양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 지질학적, 혹은 생물학적 시간으로 따지면 유례없이 짧은 시간동안 전 세계로 퍼졌다.
  11.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농경을 하지 않은 이유를 '몰라서'라고 하기는 힘들다. 농경생활을 하지 않는 집단도 씨앗이 떨어져 새 식물이 자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수렵-채집집단은 대부분 자신들의 거주지역 주변의 환경과 식생에 대해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갖고있다. 심지어 호주의 원주민들은 주변 지역의 지리를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노래형태의 '구술지도Oral Map'으로 외우고 다니는데, 현대인의 기준으로 깜짝 놀랄만큼의 넓은 범위의 지역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담고있다.(자원밀도가 낮은 척박한 환경이 될수록 집단의 활동범위는 넓어질 수밖에 없으며, 호주의 건조지대에 사는 원주민들 역시 그렇다.) '호모사피엔스'의 지능과 신체적 능력 또한 기본적으로는 구석기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애초 수 만년~10,20만년은 진화의 문제에 있어선 비교적 짧은 시간에 속하므로. 인류의 발상지인 아프리카 초원에 오늘날 살고 있는 동물의 상당수가 인류가 '사피엔스'가 아니라 '에렉투스'이던 시절에도 존재하던 동물들인 것 처럼. 앞서서 누가 1만년에 농경에 적합한 식물이 등장해서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적어놓았는데, 교잡으로 생긴 6배체 밀 뿐만 아니라 원래 자연상태로 존재하던 2배체 단립종 밀도 작물화가 되었으니 말이 안되는 소리이다. 오히려 6배체 밀이 등장하게 된 계기를 초기 농부들이 2배체 밀 선조와 4배체 밀 선조를 집 앞마당에 가깝게 모아 두었기 때문에 우연찮게 발생한 교잡의 결과로 보고 있다. 또한 작물들의 알갱이가 커지게 된 것과 곡식이 잘 떨어지지 않게 된 것 역시 농부들이 그러한 특성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자연적인 변이가 농부들에게 선택되어서 얻어진 결과물로, 때마침 1만년 즈음에 이러한 작물이 생겨났기 때문에 농경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농경으로의 이행과정을 설명하는 가설들 중에는 특정 야생곡물이 서식하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 같은 곳을 회유하며 생활하던 일군의 인류 집단이, 때마침 발생한 기후변동 등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며 특정 식물에 의존하는 생활패턴으로 바뀌며 발생한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12. K Prufer et al. (2014) - The complete genome sequence of a Neanderthal from the Altai mountains, Nature 505, pp43-49.
  13. 사실 모비우스 라인(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고 되지않는 지역을 나누는 가상의 선)의 의의는 미개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이동에 대한 가설을 제시하는것에 있다. 한동안은 인도 동부에서부터 이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지 않는단 점을 들어 인류의 동아시아 진출이 (이 석기를 지니고 들어간) 유럽보다 빨리 이뤄지지않았나 추정했다.(물론 이 석기에 맞는 재료의 부족이나 유행 때문에 바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