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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2년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이 운전하던 미 육군 장갑차량에 의해 일어난 사건(혹은 사고) 및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일컫으며 피해 학생들의 이름을 바꾸어 불러 효순이 미선이 사건 혹은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이라고도 한다. 혹시 음모론같은 것들이 만연하다보니 결론을 우선 말하자면, 단순 과실치사 교통사고다. 물론 과실치사에 무죄를 내린 것까지는 정당한 비판이나, 반미감정으로 격화된 것에 대한 논란이 많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는 호칭은 윤민석[1]이 작곡한 반미노래인 Fucking USA로 유명한 송앤라이프에서 자주 부르던 호칭. 해당 노래에서도 언급된다. 단 많이 알려진 Fucking USA 1편은 만들어진 시점이 여중생 압사 사건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안톤 오노와 그전까지의 미군 만행들만 언급되고 (이 사건은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2편에서 언급된다. ("숏트랙 금메달도 훔쳐가고 / 효순이 미선이를 탱크로 죽이고 / 통일의 길목마다 훼방을 놓는 / 우리 민족의 적 양키들아")
이 사건의 명칭은 처음에 설명되었 듯 미 육군의 훈련 도중 군용 차량에 두 여중생이 압사당한 사고(혹은 사건)와 그에 대한 전국민적인 반미 시위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참고로, 심미선, 신효순 양은 1988년생으로 현재까지 살아 있다면 성인이므로, '미선이 효순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심미선, 신효순 양 장갑차 압사사건'으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피해자의 이름을 내 건 사건명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데다, 고인과 유족들에 대한 예가 아니기도 하기에[2] 이런 시각에서 한글 위키백과에서는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이라 칭하고 이곳에서도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이라고 칭한다.
후술하듯 사건의 고의성 여부를 놓고 정치적으로 매우 시끄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 논란도 사그라졌으며 또한 고의성이 없는 단순 과실성 교통사고로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2 발단
2002년 6월 13일, 즉 2002 월드컵에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경기도 양주군(현 양주시)[3]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 갓길에서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양이 주한 미 육군 제2보병사단의 M60 AVLM[4]에 깔려 현장에서 숨졌다. 이 차량은 M60 패튼 전차의 차대에 미클릭을 탑재한 지뢰제거용 장갑차량이다. 전체적인 모양으로 봤을 때는 일종의 전차인 셈. 장갑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장갑차와 이 차량은 조금 다르다.
반미 성향이 강했던 운동권 세력은 끔찍한 현장 사진을 게시하기도 했다. 단, 가족의 동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가해자인 두 미군을 처벌하라는 서명을 받는 장소에서 지하철역이나 좀 큰 거리 같은 곳이라면 이 사진들이 흔히 걸려 있었다.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썼으나 이후 잔인함 등의 이유로 항의가 들어와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이미 본 사람들이 많았다. 얼마나 심하냐 하면, 뇌 자체가 완전히 깨져 그 내용물이 나오는 정도다.[5]
3 전개
사고 당일 미 육군 제8군은 수습에 나섰다. 사건 당일인 6월 13일에는 8군사령관이 직접 유감 표명하였고 다음날인 6월 14일에는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였다. 그리고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조의금 명목으로 100만 원씩을 전달하는 등 사고 수습에 나섰다. 보상금은 이후에 전달되었고 미8군에서는 각각 2억 원 정도의 금액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조의금을 보상금으로 해석한 유가족들이 2사단장을 만나고자 항의를 계속하자 미군 측은 15일 장례식부터 먼저 치르면 사단장과 면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결국 장례식을 진행하였고 사단장과의 면담은 취소되었다. 이유는 번역 상 실수였다.
같은 달 19일에는 미 육군 2사단 측의 한미 합동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미군 측의 조사 결과는 '이번 사고는 결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인 사고'였다. 즉 과실사고라는 것. 장갑차 조종수인 마크 워커 하사(Sergeant)가 두 명의 여학생을 확인하지 못하였고 전차장이었던 페르난도 니노 하사의 통신 장애까지 겹쳐서 피치 못하게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 것이었다.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여중생들을 보긴 봤지만 당황하여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미 육군이 정신질환자 집단도 아닌 이상, 전시도 아니고 훈련 이후 복귀 중인 대낮에 우방국에서 고의적으로 그런 끔찍한 사고를 냈을 가능성은 없다.[6] 아무리 회의적으로 접근해도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미군들이 현지인들의 생명이나 인권을 '가지고 노는' 사례가 일부 있긴 했지만 그건 사건이 드러나기 힘든 데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이라 누적된 정신적 스트레스에 의해 피폐해진 끝에 정신 상태 자체가 정상이 아닌 상태라 벌어진 것이고,[7] 치안 및 사법체계가 제대로 확립되어 범죄은폐가 힘들고 대규모 전면전이라도 터지지 않는 한 죽을 일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백주대낮에, 그것도 주거지 인근에서 사람을 죽이겠다고 작정하고 장갑차를 몰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한국사법체계에서의 처벌은 피한다고 해도 미국가서 나중에 처벌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데다 그게 아니라도 남은 군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길 것임을 생각하면 고의로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당연히 이런 사고를 치면 바로 군에서 쫓겨나진 않는다 하더라도 진급이나 장기복무는 꿈도 못 꾸며 최소복무기간이 되기 무섭게 전역해야 한다. 실제로 마크 워커 하사는 불과 2년 후인 2004년에 전역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 이 단락의 논지에 의하면, 치안유지가 잘되는 선진국에서 범죄 은폐가 어려운 거주지 주변 백주 대낮에는 살인사건등이 절대 일어날수 없다. 장기 복무 못할게 뻔한데 두려워서 살인을 어떻게 하나? 이런 주장이 논리적인지, 또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사고 당일만 해도 속보 형식으로 짤막하게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으로 보도되기만 했고 거의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당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한국 국민들의 관심은 모두 사고 다음 날에 치러진 한국 대 포르투갈 전에 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한국이 승리하고 16강에 진출하면서 사고 자체가 완전히 묻혔다.
이런 상황은 터키와 월드컵 3, 4위전을 하던 날 오전에 벌어진 제2연평해전 때도 되풀이되었으나 그래도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는 달리 제2연평해전 때에는 출전한 한국 선수들은 제2연평해전의 대한민국 해군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뛰었으며 경기 시작 전 잠깐의 애도시간을 가지고 시작했다. 참고로 이때 한국 선수 뿐만 아니라 타 선수들 역시 같이 묵념했다. 하지만 이 경기를 관람중이였던 일반인들은 '지금 저게 뭐하는 거지?'라는 반응에다가 시작하자마자 11초 만에 터키에게 골을 먹히는 바람에 시작 전 행동에 대해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월드컵이 사그라질 무렵에 운동권 등에 의해 이 사건이 범국민적 주목을 받으면서, 제2연평해전이 주목받을 기회가 2002년엔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2002년 6월 하순부터 사고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던 의정부시 일대에서는 모자이크를 하지 않은 사고 사진을 의정부역이나 시내 광장에서 볼 수 있었고 일부 대학교의 벽보에 사진과 함께 내걸리거나 의정부와 양주시의 중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사고를 낸 이들이 소속된 부대인 미 육군 제2사단사령부가 위치한 의정부시 가능동 '캠프 레드클라우드'에서 산발적으로 집회를 벌이는 데 그쳤다. 사실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사고는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4 판결 결과
미군 측과 유족들 간의 공방은 계속되었고 검찰 측 수사도 시원치 못하자 비판 여론이 점점 확대되자 법무부는 7월 10일에 미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한다. SOFA 규정상 대한민국 내 미합중국 군인들의 훈련 중 사고, 즉 공무집행과 관련된 범죄는 미측이 그 재판권을 가지는 일종의 치외법권의 형태를 보이는데 그 재판권을 한국 측이 가지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8월 7일 미군 당국은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재판권 포기를 거부했다. 이걸 가지고 살인이 맞으니 은폐 혹은 미군들을 실드치려고 그랬다는 운동권의 주장도 있는데 그냥 헛소리다. 애초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도 SOFA 협정 상 미국이 재판권을 우선 가지고 있다. 특히나 이 경우엔 미국 입장에선 훈련 중에 생긴 교통사고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권을 포기할 경우 이후 벌어지는 모든 단순 사고에도 재판권 포기가 가능한 전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거부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11월 동두천 미군 기지인 캠프 케이시 내 군사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은 피고인 미 육군 부사관 2명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내렸다. 다만 무죄 취지는 서로 달랐는데 우선 페르난도 니노 하사가 당황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중생들을 본 적이 맞는 만큼 사고를 막지 못한 죄가 성립한다고 봤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그 사실을 조종수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으니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고(쉽게 말하자면 불가항력이었기에 처벌할 수 없다는 말), 마크 워커 하사는 여중생들을 볼 수 없었고 관측병의 통보를 받아 움직이기에 사고가 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으므로 처음부터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미 형법상 검찰이 무죄에 대해서는 항소할 수 없기 때문에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다만 아무도 책임을 안지고 넘어간 건 아니어서, 이 판결을 근거로 미 육군 2사단의 해당 장갑차 정비 관련자들에 대해서 중징계가 내려졌다.
그리고 두 피고인은 5일 후 한국으로부터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로 안전하게 출국하였다. 그러나 유가족의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마크 워커 하사의 변호사인 가이 워맥은 여중생들을 보지 못한 마크 워커 하사야 무죄가 맞지만 막판이라도 여중생들을 보긴 봤었던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처벌을 받아 마땅했다고 판결을 비난했다.
이들은 출국과 동시에 '본의 아닌 사고'에 유감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조종수 워커 하사는 그때의 충격으로 PTSD를 앓다가 2004년 허리 통증을 이유로 육군을 떠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MBC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자세한 것은 맨 밑 단락 참조.
5 재확산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은 2002년 11월이었다. 6, 7월의 월드컵 4강 열기가 이제 막 식고 있을 즈음 미군 2명이 운전하는 장갑차에 여중생이 깔려 죽었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알려지자 월드컵의 열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갔다. 11월 26일 드디어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를 시작했다. 특정 단체 주도 없이 인터넷을 통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촛불집회의 양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특정 단체의 주도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 분란을 야기한 건 당시 특정 언론사의 기자가 올린 게시물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창 메신저들이 자리잡아가던 시절인 만큼 넷상에서도 이 문제가 뜨거웠고 온 네티즌이 지못미의 전신격인 이모티콘 ▶◀을 자기 아이디 앞에 붙이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일부에서는 리본이 서양의 문물인데 여중생들을 죽인 미군들은 양놈들(..)이므로 우리 고유의 삼베 상복을 본따 ▶◀ 대신 ▦을 쓰자는 극렬 민족주의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리고 당시 넥슨에서는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자는 취지로 무료 이벤트 아이템을 배부하였는데, 크레이지 아케이드에서는 캐릭터 선택 창에서 효순이 미선이의 빈소가 나오는 스킨과, 추모국화를 매달은 깃발을 무료 이벤트 아이템으로 배포했다. 바람의 나라에서는 "채희네상점에서 추모망또, 추모깃발, 추모국화를 개당 100원에 판매했다." 크레이지 아케이드는 무료배포, 바람의 나라는 개당 게임 머니인 100전으로 구입이 가능해 사실상 무료였다. 이건 뭐[8]
11월 27일에는 주한미국대사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12월에는 직접 전화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미국 측의 사과는 '우리가 잘못했다'라기보다는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희생돼서 유감이다라는 입장이었는데 이런 표현을 받아들이지 못한 국민들에게 반발을 사 반미감정을 더 확산시켰다. SOFA 훈련중에 월드컵 보려고 훈련구역 민간인 진입을 통제하는 공무원들이 현장을 무단이탈해서 훈련구역에 들어가려는 여중생들 하나 못막아서 일어난 일이라 사실 미국 입장에서야 오히려 장갑차 승무원들의 PTSD 치료비용을 청구해도 아쉬운 마당이지만 한국이랑 관계 까부숴 보아야 좋을게 없으니 적당히 미안하다고 한걸로 충분하다고 여겼겠지만 어린 학생들이 죽은 사건에 대한 국민감정이 지나칠정도로 격앙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주둔 지역의 문화와 국민감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일을 키운 셈이다. 한국이라서 쿨하지 못하게 어린애들 죽었다고 지나칠 정도로 격앙되었다고 쓴 것이라면 엄청난 착각이다. 서양의 경우 미성년자 사고에 대해 더욱 경앙된 반응을 보인다. 이와 비슷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둔하던 미 육군이 실수로 쿠란을 소각해 분노한 군중에게 애꿎은 UN 직원 등이 죽는 사건이 있었다.
여기에 이전에 계속되던 주한 미군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더욱더 확대되고 안톤 오노 사건이 다시 급부상함으로써 반미 감정은 극에 이르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톤 오노 사건은 전혀 연관도 없고 억지 엮음이었지만 당시 국민감정은 금메달 하나에 나타난 반미 감정은 엄청났다.
안톤 오노 사건은 2002년 2월에 일어났었다. 그 당시 송앤라이프에서는 Fucking USA와 기특한 과자, 또라이 부시 등의 수많은 반미 노래를 만들어 인터넷에 반미 정서를 불어넣으며 인기몰이를 했다. 송앤라이프의 대표 윤민석 작곡가는 젊은 시절 <김일성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 <수령님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 외 여러 NL 민중가요를 작곡한 인물인데, 이 단체는 이 사건 뒤에도 한 달에 몇 번 꼴로 정치 사건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었다. 사건 당시 이 사건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며 월드컵에만 정신이 팔려 이 참극을 외면하는 국민정서를 질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쯤에는 반미감정도 어느정도 가라앉은데다 노골적인 NL성향을 보이는게 너무 확연했기에 송앤라이프는 이미 대중의 관심에서 잊혀져 있었다.
6 의혹과 여파들
이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근거없는 루머(누가 그랬다 더라~ 같은 식의)가 확산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확산된 유언비어들을 아직까지 진지하게 믿는 이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 미군 차량이 왜 여중생을 발견하지 못했나?
이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우선 장갑차가 여중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한다. 상식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데 보고서도 피하지 않았으니 사고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M60 AVLM은 원본인 M60 AVLB[9]보다는 낫다지만 조종수는 전방확인이 가능할 것이라는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생각보다 더 시야가 제한되는 차종이다. 당장 안전상의 문제로 부대 이동 간 도로상 밀폐조종을 하지 않는 대한민국 국군 궤도차량들도 가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물체인 전봇대를 들이받거나 갓길에 주차된 승용차를 깔아뭉개는 사고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차보다도 시야가 제한되는 AVLM이 도로변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는 개연성이 있다. AVLM의 경우 원 M60조종석이 아닌 포탑을 제거한 위치의 왼쪽에 조종석이 있다. 그리고 우측전방으로는 차체 전방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 때문에 아예 보이질 않는다. 때문에 일반전차 이상으로 전차장이 통제관으로서 시야확보와 지시가 중요한데 통신기가 고장이 났다는 게 비극의 원인이었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고의성을 주장하기 보단 이를 미리 인지하고 교체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더 강하게 책임을 물어야 했을 것이다.
- 미군이 의도적으로 살인을 한 것인가?
여중생들이 속도가 느리고 소음을 발생시키는 장갑차를 미리 피하지 못하고 압사당한 것에도 의혹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미군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피하는 여중생들을 일부러 쫓아가서 죽였다'는... 그러니까 '고의적인 살인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제한된 도로에서 쫓아가서 궤도로 찍을 정도로 순간적인 기동성이 좋지 않다는 점이 있으며 위에서 어떻게 여중생들을 보지 못했는가에서 언급되었듯이 AVLM 조종수는 애초 보이지도 않는데 피하는 여중생을 쫓아서 일부러 죽이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통신장치가 고장 난 전차장이 지시하기도 불가능했으며 설령 고장 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서있는 거면 몰라도 피해 도망가는 대상을 조종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통신만으로 방향을 지정해서 일부러 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때문에 반대 측에서는 여중생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AVLM이 자신들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여학생들이 '알아서 비켜 가겠거니'[10]하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평소 군사장비 이동이 대단히 잦은 지역에 살고 있어 장갑차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 그냥 지나가겠거니[11] 하고 관심을 두지 않다가 사고가 발생했다는 의견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종의 안전불감증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동두천이나 포천시 등 미군이나 대한민국 육군 장갑차량이 흔히 지나다니는 곳 일대의 주민들을 살펴보면 군 궤도차량이 바로 옆에서 기동해도 그냥 무심한 듯 시크하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기동훈련이 아니라 군부대 주위에서 사격훈련을 할 때 경고방송을 해도 주민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더구나 기동훈련이 있을 때 도로에서의 일반 차량 및 인원의 통행을 제한해야 함에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건 관할 지역 공무원들의 병크였는데, 당시 국민들의 모든 분노는 사고를 저지른 미 육군들에게 향해 있었기에 스리슬쩍 넘어가 버렸다.
이를 종합해 우연히 벌어진 비극적 사고를 여중생 2명을 고의적으로 장갑차로 짓뭉개 살해한 살인자 미군으로 포장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폭발하면서 빚어진 일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특히 여중생들의 처참한 시신 사진을 곳곳에 뿌리고 다니면서 대중의 분노를 자극한 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특히 이를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한 일부 단체들은 피해자를 앞세우며 반미를 외쳐댔지만 실제론 유가족의 입장 따윈 전혀 배려하지 않았으며 이를 점잖게 비판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폭언을 퍼부은 것은 더더욱 변명할 가치가 없다. 이 문서만 해도 어찌되었든 사악한 미군이 고의로 죽인 게 분명하다는 식으로 편집당한 적 있다.
- 제2연평해전과의 형평성 문제 제기
월드컵이 열리던 당시에는 독일전 패배와 연이은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 그리고 폐막식까지 월드컵만 보면서 조용하게 보내고 싶어하던 분위기가 강해서 당시 미선이, 효순이 관련 행사들도 월드컵이 열리던 시기에는 묻혔던 상태였다. 그런 변명을 하려면 왜 월드컵이 끝나고 미선이 효순이 사건은 불이 붙었는데 제2연평해전은 완전히 묻혔는지에 대한 변명도 준비해오는 편이 좋겠다.
굳이 반미감정과 정치적 이용 등의 사정을 빼고 이유를 들자면 제2연평해전의 피해자들은 사건 순간의 직위가 '군인'이었고 이 건의 피해자들은 '민간인'이라는 차이가 있다. 두 경우 다 애석한 경우지만, 군대 교전으로 인한 피해와 평시 우군이 유발한 사고에 의한 민간인의 피해를 같은 범주에서 논하는 경우가 맞느냐에 대한 의문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싸우다 죽은 군인들의 비극은 묻혀야한다는걸 정당화한다는 반박이 가능하다.
단 명심할 것은 제2연평해전을 결부시켜 장갑차 사고(또는 사건)을 폄하하는 것은 피장파장의 오류다. 애초에 제2연평해전이 주목받지 못한 건 문제지만, 그렇다고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주목받은게 문제는 아니며 이 둘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로 뭉쳐서 따지기보다는 개개별로 각기 따로 문제점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 특정 정치세력의 악용
어찌되었든, 이 사건을 일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했으며 이는 반미감정이 거세던 당시에도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기도 했다. '깃발논쟁'으로 구글링 해 보면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사고 이후 미군은 매년 피해자의 유족과 추모 행사를 치르지만 정작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세력들은 유족을 찾아 위로하거나 하기는 커녕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피해자들의 시신이 찍힌 자극적인 사진을 게시하는 등 피해자 유족들의 심기가 불편해질 만한 행동만 반복하고 있다. 그것도 그나마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아지자 그만뒀다가, 미국 소 수입파장 때 반미감정이 고조되자 다시 나타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한편 유족인 미선양의 부친 심씨는 "미 육군이 매년 남겨두고 간 조화를 누군가 매번 짓밟고 간다."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6.1 미군의 고의라는 음모론
사건 이후 미군의 고의적인 살인행위라는 주장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떠돌았으나, 억지에 불과하다. 이 문서 또한 반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수차레 반달당한 전적이 있으니, 반달이 의심되면 즉시 신고하도록 하자.
장갑차 조종수(운전병)가 여중생들을 못 봤다는 건 거짓말이다.
시야 장애가 없이 고개까지 50m 이상 쭉 뻗은 직선 도로가 사건 지점 이전부터 펼쳐져 있었고 사건 당일 6월 13일 오전 10시경 맑은 날씨였기에 눈 밝은 조종수가 못 볼 이유가 없다는 의혹이다. 그것도 커브를 돌고 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시속 20km이하로 달리는 상황에서 15m전방의 사람들을 못 봤다면 전차장이나 전방사수가 본다는 주장이다.
▷ 반박
M60 AVLM는 전방 시야가 나쁘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전차장(정확히는 차장) 역시 사람인지라 항상 100% 주변 상황을 인지하리란 보장도 없다. "전방 사수"라는 보직은 M60 AVLM에 없다.
장갑차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을 하느라 신경을 쓰다가 여중생들을 못 봤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장갑차 조종수는 오로지 전방 관찰과 운전에만 신경 쓰는 것이 주 임무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은 조종수의 책무가 아니며, 중대장이나 대대장 등과의 교신은 당연히 전차장(지휘관)의 임무고 그의 권한이다. 조종수는 전차장의 명령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단 하나 예외라면 전차장이 죽었거나 의식불명일 때 조종수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을 하며 지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에 신경을 쓰다가 두 여중생을 못 봤다는 말은 것은 거짓말이라는 주장이다. 설사 중대장과 교신을 했다고 해도 조종수는 늘 상 무전교신을 하며 조종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장갑차 조종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 반박
조종수가 늘 상 무전교신을 하면서 조종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장갑차 조종에 별 영향 주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면 운전 중 자주 통화하는 사람은 운전 중에 사고 안날 수 있는 건가? 물론 조종수는 무전교신을 하면서도 장갑차 조종에 우선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교신에 신경 쓰느라 여중생을 못 봤다고 하는 것은 조종수 잘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종수가 일부러 여중생을 치었다는 것도 아니다.
충돌이나 추돌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급히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틀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 역시 거짓말이다.
장갑차가 오르막 10m를 남겨두고 앞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차량이 중앙선 지점을 먹은채 달려와 충돌위험이 있었다면 장갑차 조종수는 5m정도의 짧은 거리에서 상대차량과 마주쳤기에 반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조종간(운전대)을 우로 당겼어야 한다. 그랬다면 사건 현장 도로에 오른쪽 궤도의 찍어 물린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야 하고, 또한 두 여중생들의 시신이 일렬종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다. 횡으로 흩어져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앞서가는 차량과의 추돌 위험이 있었다면 앞서의 충돌 현상 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따라서 충돌과 추돌의 위험이 있어 사고가 났다는 말은 거짓이라는 주장이다.
▷ 반박
시속 20km인 저속으로 움직인다고 위에서 말했으면서, 궤도 자국이 항상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상황에 따라서 궤도 자국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저속상태 + 포장도로에서는.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났다는 건 거짓말이다
장갑차는 차량자체가 무거운데다 일반차량과는 달리 엔진에서 나오는 동력이 스프라겟트라는 쇠톱 같은 톱니바퀴에 전달되어 그 톱니바퀴에 1톤이나 되는 쇠바퀴가 씌워져 굴러가는 것이기에 평균 시속 50km이하 정도밖에 달릴 수 없다.
사건 지점 오르막길에서는 커브를 돌고 난 직후 바로 오르막이라서 시속 20km정도로 달렸을 것이다. 따라서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날 일은 결코 없다는 주장이다.
▷ 반박
오르막이라 시속 20km로 달렸을 거라고 추정하는 것은 너무 비약이 심하다. 궤도차량이라면 오르막길이라도 충분히 가속 가능하다. 20km로 달렸다는 건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며 고의성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도로 폭이 좁아 사고가 났다는 건 거짓말이다
도로는 대형 버스 두 대가 비켜지나갈 정도의 폭이고 큰 도로에 비해 폭이 좁은 만큼 조심하게 되고 오르막길에서 장갑차가 거의 속력이 없는 상태에서 과속이나 도로 폭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헛소리라는 주장.
▷ 반박
도로 폭이 좁으니까 조심하게 되므로 사고가 날수 없다는 주장인데... 그런 식으로 하면 골목도로에서도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안 된다. 운전자가 도로가 좁으니까 알아서 조심할 것이므로(...). 미군 조종수가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그 대신 일부러 살인했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훨씬 더 많고 일리 있는 근거들이 필요하다.
통신장애는 거짓말이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범들은 앞서의 여러 가지 변명들이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이제 마지막으로 입을 모아 통신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둘러대고 있다는 주장으로, 일반 차량의 경우에는 운전자가 혼자서 전방을 주시하며 차량을 운행하는 것이 상례지만 장갑차나 탱크는 조종수가 혼자서 운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전차장이나 전방사수 등 전원이 전후방을 주시하며 보조 운전자가 되므로, 만에 하나 조종수가 사람이나 전방의 사물을 보지 못하고 사고 위험에 처했을 때 전차장등이 곧바로 헬멧에 장착된 통신 장구를 통해 상황을 알려 사고 위험을 막게 되어있다. 이 같은 사실로 인해 조종수가 두 여중생을 보지 못해 사고가 났다는 말이 설득력이 없자 그들 살인범들은 마지막 모의 끝에 마지막 거짓말을 꺼내놓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것은 통신장비가 고장이 나서 즉 통신장애가 있어 조종수에게 알려줄 수가 없어 압살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장갑차는 기동성과 통신이 생명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고로는 통신장애가 나지 않으며 사건 이후에도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통신)에 신경을 쓰다가 사고가 났다는 게 이 의혹을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다.
▷ 반박
그냥 추측성 이야기다. 통신이 생명이라서 어지간한 사고로 통신장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걸 전재로 깔고 있다. 애시당초 미군측에서 당시 통신기가 고장난 상태였다고 공식발표했기 때문에 이걸 뒤집지 못하는 한 의미가 없다.
그리고 무전이라고 해도 전차 내부에서 서로 주고 받는 무전과 외부와의 무선 무전은 다른 계통이다. 중대장과 통신이 가능해도 내부 무전은 고장이 나 있을 수 있다. 게다가..통신장비의 불량과 고장은 생각보다 흔하다. 실제 우리나라 구형 자주포의 경우에도 같은 방식을 이용하지만 통신장비의 불량을 심심치 않게 겪는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살해 증거들이 고의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장에서 떨어진 위치에서 발견된 신발과 궤도 자국 등을 근거로 미군이 고의적으로 여학생들을 죽이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는 주장.
▷ 반박
광우병 사태와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견해나 수사관들의 의견 없이 그저 사진만으로 추측하고 부풀려진 내용으로, 당연히 신빙성 따윈 없다.
7 사건이 남긴 것들
사건 자체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미국과 미군 당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의 후폭풍을 제대로 겪은 미국은 이후 미군 관련사건, 사고에 있어 '대체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미국 정계에서도 한국의 반미감정을 재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이다.
7.1 한국의 반미감정
한국의 반미감정은 이전에도 계속 존재해왔다. 특히 주한미군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군이라는 집단이 우수인력도 있지만 낮은 계급의 사병들 특히 육군의 경우 '할 일 없는 잉여'가 적지 않으며 범죄경력 등이 많은 사람이 일종의 도피책으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고는 항상 끊이지 않았다. 참고로 이 문제는 이라크 전쟁 이후 인력부족으로 인한 육군 모병 기준의 완화로 인해 더욱 심해지고 있다.
7.2 SOFA는 불평등 조약인가?
이 사건 이후 SOFA 규정 개정 논의가 빈번히 진행되었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이 규정은 파병국가인 미군 측에 상당히 유리하게 쓰여 있는데 그 중 가장 치명적으로 한국 측에 불리한 조항이 바로 이 치외법권이다.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국내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건 매우 불평등한 일이지만 문제는 동시에 대한민국도 파병국가에 이 치외법권을 미국처럼 똑같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12]
이런 조항이 21세기에도 세계 10대 경제 강국을 내세우는 한국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비판적 목소리가 일부에서 적지 않지만 또 다른 일부에서는 한 나라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파견되어 활동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할 필요가 있고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맹국인 미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등가교환의 법칙. 막대한 운영비가 드는 군대를 배치하는데 당연히 공짜일 리가 없다. 전작권 환수와 이러한 문제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도 관심이다.
앞의 SOFA협정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자면 우리나라도 중동으로 파견을 보내고 있으며 SOFA 규약은 반드시 맺고 보낸다. 아니면 절대 가지 않으며 당연히 국군이 뭔가 대민피해를 입힐 시 그 재판은 한국에서 하도록 되어 있다. 특히 중동에서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그쪽 재판정에 서도록 하면 태형 혹은 거세, 사형, 돌팔매질 등의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그 중 상당수는 우리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죄목으로. 그런 측면에서 미국 뿐 아니라 어느 나라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의 사법체계는 미군을 판결하기에 부족한가?"란 반론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지 모르나 사실 이 정도의 반론은 "저 항목의 기능 중 하나가 형편없는 현지 사법체계를 막기도 할 뿐이다."라는 정도로 간단히 재반박할 수 있다. 쉽게 말해 SOFA가 도입된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지, 주둔국의 형편없는 사법체계에 대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논점일탈의 오류란 것이다. 아무리 잘 짜인 사법체계를 가진 국가 간이라도 법체계는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저 조항의 근본적인 이유는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한국과 관련된 예를 들자면 이라크 아르빌 지역에 파병된 국군 부대인 자이툰 부대에서, 한국 육군 상병 1명이 경계 근무 중 장난하다 실수로 쿠르드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를 코앞에서 죽여 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기사
어쩌다가 그랬냐고? 서로 총 쏘는 시늉을 하며 툭툭 치며 친근하게 장난을 치다가 오발사고로 선량한 쿠르드 민병대원의 배에 총알을 박아버렸다...사망한 쿠르드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는 서로 장난치다 그랬으므로 웃고 있다가 총을 맞고 울면서 병원으로 실려 가서 4일 만에 죽었다.
피해자인 헤멘 바카르는 죽기 전에도 실수로 자신을 쏜 병사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그의 친형도 처벌하지 말라고 탄원서를 냈다고 한다. 이 쿠르드인의 유족은 고작 $10,000의 보상금만을 받았다. 사고를 낸 상병은 한국으로 재빨리 송환되어 일단 구속되는 것부터 시작했다. 실제로 SOFA라든가 이와 비슷한 규약이 없었다면 해당 사건을 일으킨 상병의 미래는 암울했을지도 모른다. 이 병사는 1년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여담이지만 이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는 이렇게 사고사로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총을 맞았음에도 처벌하지 말라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일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가정을 해보건대 SOFA 따위의 규약이 없었다면 해당 사고를 낸 한국군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최소한 몇 년 뒤로 계산해야 했을 수도 있다. 거기다 해당 지역이 중동이었다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법정에 끌려가서 고의 살인이 아니라는 게 명백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슬람의 율법으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았을지 모른다. 행여나 정부에서 떼를 써서 데려오려고 해도 그건 전적으로 해당 국가 마음대로다.
국가에서 파병한 군대 소속 인간이 사고를 낸 경우 데려오려고 규정을 만들어 뻘뻘거리며 노력을 하려는 것도 자국민 보호라는 차원에서 사실 가능한 논리이다. 민간인이 다른 나라에 관광 가서 사고치는 거랑 다른 나라에 파병된 군인이 사고치는 거랑은 문제가 같지 않다. 민간인이면 몰라도 군인이 낸 사고라면 자칫하다간 '그 나라 군대가 시킨 일'로 와전될 수 있으며 이는 곧바로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된 그 피의자의 신분은 당연히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번처럼 국민감정으로 번질 경우는 더욱 그렇다.[13]
문제는 이게 의도적으로 저지른 사고라거나 죄가 심각한 경우에 본국 송환을 안 하겠다는 케이스를 고려할 필요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죄가 엄청나게 크다고 본국 송환을 포기하는 경우를 용인하겠다고 하면 송환에 대한 변별력이 엷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애초에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무엇 하러 본국 송환에 있어 자국민을 외국의 법정에서 빼올 기회가 있음에도 그 기회를 쓰지 않는 경우와 같은 예외 케이스를 앞장서서 주장하겠는가?
애꿎은 우리나라 중학생 2명이 깔려 죽은 것에 대해 분통이 터지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다. 이에 대해 개정을 논하자고 할 수 있다. 분통이 터지고 억울하다면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가 힘든 형편이다. 폐지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장 우리도 파병국가인 입장에서 폐지를 논하는 것은 끝나지 않는 토론이 될 것이 뻔한데다가 또한 SOFA 규정의 본국 송환에 관한 것은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어도 어쨌든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파병하는 국가의 입장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보호하는 규정의 존재여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다.
이 사건과 관련한 SOFA 규정이 불평등조약인가에 대한 단락의 결론은 파병한 국가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혹은 유리한 조약이라고 하겠다.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다 적용하고 있고 (타 파병국가들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사항이다.다 집어치우고 애초에 파병한 국가가 본국의 이익에 반하는 불리한 조건을 조약서에 남겨놓을 이유가 없지 않나? 덧붙여 SOFA 규정이 미국에 유리하고 대한민국에 악랄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달라고 호소하는 국민들의 의견을 들어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도 미국처럼 파병국가이고 대한민국에 유리하고 파병지역 국가에 악랄하다는 SOFA 규정을 활용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 점에서 일단 도의적으로 주장하기가 좀 힘든 부분은 있다. 당장 해외파병을 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이 조약이 불평등하고 악랄하다는 점 때문에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포기할 가능성은 그야말로 없다.
그러나 한미행정협정은 한국의 SOFA와는 한 차원 다른 문제도 갖고 있다. 그것은 미군 뿐만 아니라 미군에 관계되는 대부분의 민간인들도 치외법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군속과 미군 가족은 군인이 아니다. 본 사건은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졌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라도 있지만, 만약 민간인인 군속이나 미군 가족이 그랬다면 어땠을까? 이들이 범죄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점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문제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단 이 부분은 이 사고와 큰 연관은 없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일련의 사건들로 SOFA조항이 재조명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 부분도 문제제기가 된 것.
7.3 인터넷의 파워와 부작용
이전만 해도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며 단순히 정보를 교류하는 것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인터넷의 엄청난 정치적 힘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인터넷은 스타 배틀넷을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도구라고만 생각했던 10대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거기에 2002년 6월 27일부로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가 위헌 판정을 받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것도 한몫했다.
이로 인해 인터넷이 더 이상 단순한 오락/정보 도구가 아니라 정치적 이슈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목되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도 있는데, 인터넷이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거나 조작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불과 2주 간격을 두고 터진 제2연평해전은 정부로부터도 여론으로부터도 외면 받아 그대로 묻혀버린 반면, 미선이 효순이 사건은 반미 단체나 반전 단체 등에서 인터넷을 이용하여 적극적인 홍보와 댓글 공세로 인해 월드컵이 끝난 직후의 그 해 여름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되었다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는 점이 요지이다.
정리하자면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활동이 크게 부각되었다는 것이며 기존의 매스미디어 만큼 광역적이면서도 오프라인 정치활동만큼이나 인터랙티브한 점을 통해 기존의 정치적 활동보다 장단점이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건 모두 월드컵 기간 중에 일어난 사건이라, 처음 터졌을 때에는 뉴스에 보도가 되어도 여론이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선이 효순이 사건의 경우 월드컵이 끝난 뒤 온갖 커뮤니티, 포털 및 뉴스 게시판에서 (아직 미군의 고의적인 살인인지, 과실치사인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여중생들을 살해한 미군에 대해 많이 퍼뜨려주세요."라는 식으로 여론의 관심을 호소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고 이 사건이 조명 받으면서 시사고발 프로에서도 방송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7.3.1 반박
촛불집회는 특정연령층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많은 전연령대가 참여한 집회였다.
또한 앞 문단에서 설명이 있듯이 이 집회를 형성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사고발프로그램 특성상 특정여론을 그대로 여과없이 방영하기보다는 문제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한다. 그렇기에 만약 이 사건이 조명받는데 있어서 특정정치세력이 개입하여 여론을 호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사고발프로그램이라는 정제과정을 통해 알려졌기에 특정정치세력의 여론을 호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인터넷이 이 사건에 조명을 비춘 것은 맞으나, 인터넷 여론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루어서 시위까지 이어졌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오히려 이 사건은 미디어가 여론을 어떻게 이끌어가는지 보여주는 사례 아젠다세팅의 사례로 보는것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있다.
7.3.2 재반박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은 2002년 11월이었다. 11월 26일 드디어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를 시작했고 열기는 2003년까지 이어졌으며, 그 뒤로부터 10여년간 매년 1주기,2주기 식으로 추모식을 성대하게 열었는데, 그때마다 인터넷에서는 온갖 거짓선동이 판을 쳤었다. 서울에서는 2002년 정도만 돼도 이미 지금과 다름 없을 정도로 인터넷이 깔린 상태였다. 당장 인터넷 패러디 언론으로 주목받았던 딴지일보의 전성기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2002년말까지였다. 그 뒤에는 인터넷 언론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데다가, 원래 딴지는 비틀고 까야 제맛인데 딴지 자체가 친노라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6년인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김구라의 시사대담이 2002년 즈음에 제작된건데 당시 딴지일보의 인터넷라디오 방송이었으며, 슈퍼주니어의 모 멤버도 당시 그 방송 팬이어서 팬클럽에도 나갔다고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김구라 일행의 안톤오노 테러기행 동영상(안톤오노 버르장머리 고쳐주겠다며 미국까지 찾아감) 역시 딴지일보에서 당시 제작하여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2002년 초 안톤오노 당시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노래가 Fucking U.S.A였는데, 당연히 이 노래는 딴지일보에서 밀어주며 인터넷으로 MP3파일로 퍼져나간 것이다. 헌데 2002년을 일부 지방에 인터넷이 덜 깔린걸 근거로 국민들이 TV나 보며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던 시대로 호도하면 안된다. 2001년만 해도 서울에 상당히 인터넷이 보급되었고, 그래서 미국 911테러때만 해도 여러 언론사의 자유게시판이나 기자들의 칼럼게시판에선 911테러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이때도 일부 정치세력들이 911테러세력을 독립군에 비유하여 논쟁이 되기도 했었는데, 당시 인터넷 일간스포츠 기자 칼럼에서 어느 기자가 이에 대해 독립군에 비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는데 이 칼럼의 댓글로 많은 논쟁이 오갔었다. 다만 이때는 반미여론은 적었는데, 이듬해 안톤오노 사건으로 반미여론이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서울의 어느 대학가에든 효순,미선 사건이 충격적인 노모자이크로 걸려 있었다. 대학가는 물론 역세권 같은 데에서 처참한 시체 사진을 노모자이크로 버젓이 걸어놓고 미군을 악으로 묘사하는 글을 올려놓아 사람들을 선동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이런 대학가의 학생운동이란게 성향이 뻔했고, 실제로 미군 주둔지에 찾아가서 성조기 불태우기 등 온갖 반미추태를 벌이며 미군철수 시위 운동을 벌였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당시 짤방이 떠돌아다니는데, 미군의 성조기를 빼앗으려는 대학생 무리 중 덩치좋은 여대생이 나이키 운동화 신고 있어서 '나이키 신고 반미한다'라는게 다음카페에서 조롱받기도 했었다.
물론 나이키 신는 것과 반미는 상관없다고 볼 수 있으나, 당시 다음에서는 심지어 '맥도날드도 미국꺼니 가면 안된다'라는 선동마저 돌았었고, 어떤 다음 카페 회원은 맥도날드에 출입하는 한국인들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서 인민재판하자는 글을 올려 논쟁이 되기도 했을 정도로 극단적인 반미열풍이 인터넷을 뒤덮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2003년만 해도 인터넷과 디카의 보급이 어느정도 대중화된 상태라서 특히 다음카페에는 온갖 사진들도 많이 올라오고 엽기사진들도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심지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먹는 한국인들도 매국노라고 욕하며 사진찍어 올리자는 네티즌들이 있었을 정도로 거의 광기 수준의 반미열풍에 휩싸였었고, 이렇게 광기수준으로 변했던 것은 물론 인터넷의 자극적인 선동이 원인이었다.
애초에 시사고발프로그램의 뉴스는 정제되어 보도되기에 이것만 보고 극단적인 반미투사로 변신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인터넷 선동은 미국을 '악'으로 규정하여(마치 반공투사들이 북한 대하는 수준) 미국과 미군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감성을 자극하는 게시물들을 퍼나르며 당시 네티즌들을 극단적인 광기의 반미투사로 변신시켰던 것이다. 물론 시사방송에서는 당연히 효순,미선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로 보도되나, 당시 인터넷에서는 모자이크 처리 없이 그대로 올려져 더욱 더 감성을 자극했고, 이들은 다같이 모여 미군철수 시위를 연호하면서 특정 정치세력들의 의도대로 움직였는데, 이는 인터넷 여론을 일부 세력이 음흉한 목적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광우병때도 그 위험성을 증명했다.
실제 이석기의 녹취록에는 광우병같은 선전선동 더욱 강화하라란 구절이 있었는데, 일부 정치세력들은 '너희들은 깨시민이야'라는 최면을 걸어서 네티즌들을 거리로 뛰쳐 나오게 하여 경찰들과 싸움을 붙였는데, 순진한 국민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닛으로 만들어 활용한 것이다.
이 시위가 결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없는게, 사건이 처음 보도되고 묻힌 지 약 6개월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첫 시위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갭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즉, 처음 기사가 보도된 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분개하여 시위를 벌였던건 절대 아니란 얘기. 당시 언론에서도 단신 뉴스 정도로 보도하고 더이상 후속기사도 없었다. 월드컵때문에 묻힌 감도 있으나, 월드컵 열기도 길어야 한두달인걸 감안해보자. 보통 뒤늦게 화제가 되는 경우는 가족들이 인터넷을 통해 피해를 호소하거나 그런 경우인데, 이건 가족들이 아닌 반미단체가 이 기사를 발굴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사상을 듬뿍 버무려 과장하여 '살인마 미군'스럽게 묘사한 선동 게시물을 여기저기 퍼날랐고, 인터넷의 특성상 삽시간에 여기저기로 퍼졌다.
게다가 당시는 인터넷 초창기 시장이라 주요 포털도 다음 등 극히 제한적이라 인터넷 유저들은 다음을 많이 했으니(당시 한메일이 국민 이메일이었다) 인터넷이 무한대로 광활해진 지금보다는 훨씬 여론을 퍼트리기가 용이했던 상황도 한몫했다. 흔히 드라마에서 상대에게 '이 바닥 작은거 알지? 금방 다 퍼져 나가' 이러는데, 당시 인터넷 바닥은 작아서 여론 퍼트리리가 훨씬 용이했던 상황이었으며, 또한 지금은 하두 낚시를 많이 당해봐서 학습효과가 생겨 누군가 글을 올린다고해서 바로 믿거나 퍼트리지 않고 의심하는 여론도 있으나, 당시엔 초창기라 그냥 올려진 글을 액면 그대로 다 믿는게 당시 네티즌 수준이었으니 인터넷 바닥이 작은 것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삽시간에 여론을 장악해버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뒤 광우병때만 해도 온갖 터무니없는 괴담 등이 정제되지 못한 채 그대로 퍼져나가 고등학생조차 '죽기 싫다'라면서 길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당시 '살인마 미군'에 분개했던 여론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시사방송때문에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됐다는 것은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인터넷여론때문에 시사방송이 관심을 갖게된 것이다. 알다시피 원래 언론 자체적으로는 사건 초기 단신 뉴스로 보도되고 그대로 묻혔고 후속기사도 없었으며 매일같이 기사가 쏟아지는 언론의 특성상 잊혀진 사건이었다. 헌데 특정 정치세력들이 기사를 발굴하여 각색하여 '살인마 미군'프레임으로 퍼트리기 시작했고, 당시 바닥이 작은 인터넷 특성상 삽시간에 여론을 장악하였고, 당연히 네티즌들은 방송사 게시판 여기저기에 효순,미선 사건 다뤄달라는 게시물로 도배를 하게 되었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인터넷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처음 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이라면 몰라도, 서울에서는 대학가는 물론 번화가 거리에서 몇몇 주도자들이 끔찍한 피해 사진과 선동 글을 올려놓고 워낙 선동하였기에 인터넷 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대충은 알았을 것이다. 확실히 정상적은 아니었던게 '살인마 미군'프레임으로 몰고 가 이런 나쁜 미군은 한국에서 꺼져야 한다면서 '미군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과열된 시위를 보면 어느새 효순,미선은 뒷전으로 밀려나있고 그냥 예의 반미시위로 변질되어 난동부리는 장으로 변질되어있었을 뿐인데, 이는 2016년 묻지마 사건으로 여성이 희생되자 일부 여성단체들이 추모를 한다는 명분으로 모여서 남자혐오 구호를 외치며 남혐의 장으로 변질된 것과 유사하다. 특히 서울의 대학생들은 훨씬 과격하여 아예 미군부대에 직접 찾아가 깽판 치기도 했었는데, 막 미군부대 무단침입을 시도하거나, 경계서고 있는 미군의 장비를 빼앗으려다가 몸싸움이 발생되는 등 난장판이었다. 굳이 미군을 도발한건 미군이 과격하게 진압하면 바로 사진 찍어 '살인마 미군이 순수한 대학생 폭행했다'라는 프레임으로 여론을 몰려고 의도했던 것 같은데(전경과 맞설때 수법 응용), 미군은 그런 잔꾀에 넘어가지 않았기에 별 문제 없었다. 지금도 당시 사진보면 미군의 성조기를 여러 대학생들이 달려들어 빼앗으려하고, 미군 혼자서 성조기 안뺏길려고 발버둥치는 사진도 있는데, 입장 바꿔서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에게 태극기는 더욱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걸 고려해보면, 머나먼 타국에 와있어 외로울 미군이 성조기를 두 손에 쥐고 안뺏길려는 모습을 보면 짠하기도 하다.[14]물론 성조기 빼앗겼으면 그 성조기는 찢어지거나 불태워졌을 것이다. 당시 반미시위의 흔한 퍼포먼스 중 하나였으니까.
과거 KBS인간극장에서 백인혼혈-흑인혼혈 커플 부부 사연을 다룬 적이 있다. 둘 다 아버지가 미군이었고 가족없이 어렵게 자란 '한국인'이었다. 남자가 백인혼혈이었는데, 영어를 못하고 한국말만 할 줄 아는 완전 한국인이었다. 근데 당시 자신이 크게 상처받았던 일화를 얘기하는데, 그게 바로 효순미선으로 촉발된 과격 반미시위였다. 그냥 거리를 지나가는데 일부 시위대들이 '어 저기 양키 지나간다!!' 소리쳤고, 갑자기 우루루 달려들어 자신을 마구 구타했다고 한다. 놀라서 '저 한국인이에요' 소리치면서 지갑 꺼내 주민등록증 보여줬더니 '뭐야 이거? 튀기잖아!?' 하면서 침 뱉고 갔다고 하는데, 그때 심한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 시위대 한국인들이 딱히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고 그들도 나름 순수한 시민이었을 수 있다. 근데 왜 저렇게 네오나치스럽게 변해버렸을까? 확실히 당시 인터넷에 퍼진 난세의 격문같은 선동글과 피해 사진을 보면, 피끓는 청년들을 열혈 청년으로 변신시킬 정도로 감성을 후벼파도록 잘 만들어지긴 했다. 그런 글을 무비판적으로 맹신하게 되면 정말 미국을 혐오하여 미국인만 봐도 양키 지나간다라고 두들겨팰 정도로 눈 뒤집힐 수 있도록 정교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시위대들을 옹호한다면, 따지고보면 네오나치들도 선동당한 애들이고 지들딴엔 정의라고 생각하므로 이들도 비판할 수 없게 되니 시위대의 행동도 분명 나쁘고 비판받아야 하지만, 당시 음흉한 목적으로 선동글을 퍼트리며 반미를 조장하던 세력에 대한 경계와 반성도 잊어선 안될 것이다.
효순,미선 사건 몇년 후, 금강산에서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만약 과실치사만으로도 살인마 군대라며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면, '고의로' 관광객을, 그것도 비무장한 아주머니를 사살한 것은 완전 전국적으로 반북 촛불집회가 일어나야할텐데, 그런 거 없었다. 오히려 북한군을 두둔하며 박왕자씨를 질타하는 상식이하의 여론몰이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이것은 마치 미군 탱크를 피하지 못했다며 피해자를 질타하는 상황과 뭐가 다른가? 북한은 사과는 커녕 되려 적반하장으로 정당하다며 북한군에게 포상을 하였고 화가 난 이명박 정부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자, 이들 정치세력은 이명박 대통령을 질타하며 북한 사과 필요없고 조건없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당시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보도로 자발적으로 국민들이 반공여론이 조성되려하자 이들은 어이없는 북한군 두둔하며 물타기를 하거나 이명박을 까는 등 박왕자씨 피살사건을 의도적으로 묻으려 하는게 보였으며, 살인마 북한군 규탄 박왕자씨 추모 촛불집회 따위 열지도 않았다. 똑같은 소중한 민간인의 생명이 군인에 의해 희생된 사건인데 북한군이냐 미군이냐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다른 태도를 보면 이들이 진정 효순,미선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추모집회를 연 것인지 의문을 들게 했다. 만약 효순,미선이 북한군의 도발에 사망했어도 이들 정치세력이 '살인마 북한군' 규탄하며 전국적인 추모집회를 소중히 열었을까? - 반대로 북한에 거주하는 주민이 한국의 군사지역에 들어와서 사망했다면? 미선이 효순이는 하굣길이었는데.. 반미대학생들이 미군기지에 무단침입해서 깽판친다고 미군이 다 쏴죽이나? 1명이라도 죽였다간 난리나지. 더군다나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군인이 '관광객'을 쏴죽인 예는 전례가 없다.
*후첨
1.평화시위였다?
당시 싸이가 국내 반미집회에 참가해 부른 노래 가사를 보자.
'개씨발 양년놈들의 딸래미 에미 며느리 애비 코쟁이 모두 죽여 아주 천천히 죽여 고통스럽게 죽여'
이런 노래가 울려퍼지던 시위장의 분위기가 평화로웠을까? 오히려 당시 대마초 사건으로 망해가던 싸이가 반미열기에 편승한 이 노래로 면죄부를 받고 기사회생했을 정도니, 괜히 당시를 광기였다고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2012년 싸이가 미국 진출하면서 뒤늦게 미국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자 이라크 전쟁과 두 한국 여중생의 사망과 관련한 감정적인 반응이었다며 사과했는데, 이에 대해 특정 정치성향의 네티즌들은 미순이,효순이도 상업적으로 이용한 거냐며 돈 앞에 양심 자존심 나라까지 팔 놈이라고 비난했고, 넌 산채로 장갑차에 깔려죽은 효순 미선 두 아이가 받은 고통 100배는 더한 통증 느끼며 장갑차에 깔려 죽어라고 힐난했다는 댓글이 언론에 보도되었다.싸이 사과 반미노래 가사 보니 '코쟁이 모두...' 사고 10년이 넘고 반미열기가 많이 식은 2012년 12월에도 저런 과격한 댓글이 언론에 보도될 정도니 하물며 2002년~2003년 당시의 반응은 어땠을지 각자 판단에 맡긴다.
3.1운동이 처음엔 평화시위였으니 훗날 폭력시위로 변화돼도 폭력시위로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애초에 이름부터 '3.1'이라고 날짜를 찍어놨으니, 그 날짜의 시위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매년 3월 1일이 삼일절 휴일인 것도 그 날의 시위를 떠올리며 애국심을 다지자는 것이다. 헌데 효순 미선 시위는 장장 10여년에 걸친 광대한 시위였기에 초반부의 시위가 아닌 전체적인 시위의 양상으로 판단해야 한다. 물론 모든 시위가 폭력시위였던 것은 아니다. 초반엔 분명 평화적인 시위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점점 사이비종교스런 광란의 시위로 변질되어 가며 결국 국민들에게 외면받았기에 전체적인 양상으로 보면 결코 평화시위라고 할 수 없다. 마치 광우병 시위가 초창기엔 분명 평화시위였으나 점점 시위가 과격해지며 예비군까지 나서서 물대포를 대신 맞는 등의 양상이 보이더니 결국 경찰과 엄청난 물리적 충돌을 빚어서 난장판으로 변질되었기에 지금은 광우병 시위하면 당시 혼돈의 시위로 기억되는 것과 같다.
광우병 시위를 평화로운 시위였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물론 처음엔 평화시위였던 것이 사실이나, 결국 헬게이트 시위로 막을 내렸으니 헬게이트 시위로 기억되는 것이다. 선수생활 내내 별 스캔들 없이 사랑을 받아 온 운동선수라도 선수생활 말미의 약물 스캔들 한방에 추락하여 '약물러'라는 오명을 받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선수생활 전체적으로 '클린'했다고 해서 이런 선수를 클린하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다.
물론 당시 국민들이 실제로 분노할 요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무죄'판결 내려졌기 때문이다. 탱크로 죽였는데 무죄라니! 하지만 지금도 우리 주변에 의료사고를 내어 사람을 죽이고도 '무죄'판결 받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시사방송에 보도되는데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던가? 의료사고를 내었는데 무죄인 경우는 불가항력적인 경우엔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번 사고도 해당 군인의 명백한 과실이었다기보단 불가항력적이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항목을 보면 수 명의 장교를 포함해서 상당수의 아군 병력이 매복이나 수색 도중 다른 아군의 오인사격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작전을 수행하다 보면 아군끼리 서로 죽이거나 실수로 민간인을 쏘아 죽이는 경우도 발생하긴 하는데, 확실한 과실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해당 군인들은 불가항력적이었다고 판단하고 선처해주고 대신 국가에서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줄 뿐이다. 물론 해당 군인이 처벌받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마 한국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나마도 한번 정도 끓어오르는 시위 정도야 그럴 수도 있다고 보나, 장장 10여년간 추모집회의 열기가 이어졌다는 것은 확실히 비정상적이긴 했다. 보통 한국인들은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금방 식는다는 점에서 냄비근성이라 비판받는다는 점을 감안해보자. 게다가 무엇보다 효순,미선 가해자 규탄을 넘어서 미군에서 나아가 미국까지 반대하는 반미시위로 변질되었으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2.작은공간에서 형성된 여론이 과연 전국적인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가?
당시 그 작은 공간이 국내 인터넷의 전부였다. 따라서 당시 인터넷 이용자들 중에 효순,미선 사건 모르면 간첩일 정도였으며, 물론 이들은 10~30대로 한정되나, 당연히 이들이 자신의 친구나 가족에게 알리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 물론 이들도 인터넷 여론이 절대 전체적인 여론이 아닌 것을 알기에 방송사 게시판에 효순,미선 다뤄달라는 게시물로 도배를 했던 것이다. 방송에서 다루면 전국적인 여론으로 퍼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인터넷 여론을 장악했다고 해서 전체적인 여론으로 보기 힘들고 방송의 힘이 확실히 막강하기에 보통 인터넷 여론이 형성되면 그 다음 단계는 방송게시판에 달려가 방송해달라고 요구하며 인터넷(일부)->공중파방송(전국구) 테크를 타는데,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당시 방송국의 시사방송 게시판은 물론 일반 예능 게시판에도 '퍼트려주세요'라며 효순,미선 사건 글이 꼭 올라와 있었고, 시사방송 홈피에는 '제보 게시판'이 별도로 있었는데, 거기에도 효순,미선 다뤄달라는 문의가 폭주했고 실제로 방송이 되었으니 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지금도 그것이알고싶다 등에는 제보게시판이 있으며 제보 글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제보 게시판의 글과는 상관없이 그냥 우연의 일치로 효순미선 방송이 제작된 것일 수도 있으나, '제보 게시판'은 그냥 단순 장식이 아니고 실제 제작진들이 주의 깊게 모니터링하는 것은 사실이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 확실한 것은, 방송되기 전 이미 방송사 게시판엔 효순,미선 다뤄달라는 글이 먼저 올라왔었다는 것이다. 즉, 방송때문에 인터넷에 효순,미선 사건글이 퍼진 것은 아니란 얘기.
그리고 2002~2003년 당시 서울의 대학생들은 방송을 떠나서 거의 다 알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당시 어지간한 대학교 학생회는 특정 성향의 세력이 꽉 잡고 있던 시절이었고 당연히 학생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효순,미선 게시물을 올려놓고 시위참가자들을 모집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학생회 가입까지.
7.3.3 재재반박
1주기, 2주기를 거쳐가면서 시위의 성격이 크게 변질되었기에 이 시위가 처음부터 특정세력에 의해 선동된 시위라 보기는 어렵다. 3.1운동은 평화시위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폭력시위로 변화되었다고 해서 3.1운동을 폭력시위라고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2002년의 인터넷의 보급율을 높았지만 과연 지금과 같은 여론을 형성할 정도로 다양한 인원이 인터넷을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먼저 1998년의 경우에는 천리안 등의 소규모 집단이었고 이것이 성장하고 있었지만 과연 대중의 여론을 조정할 정도로, 미디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당시에 성장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20-30대에 한정된 사용층이었고, 인터넷 카페라는 것도 지금 막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보급이 되었기 때문에 인터넷 여론이 크게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당시 김구라가 인터넷 방송에서 받은 금액이 상당히 턱없이 낮았다는 증언을 통해서도 지금처럼 인터넷이 여론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2류 문화라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또한 이석기의 녹취록에서는 광우병 같은 것이라 구절이 있듯이, 미선이 효순이 사건보다는 인터넷 여론이 형성되고 그것이 여론을 선동한 것은 광우병사태 이후 주목하게 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미군을 적대한 것은 아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에서 장례식을 먼저 치르면 사단장을 면담하고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은 이후 번역상의 문제가 있었다며 이를 거부하고 이후 무죄판정등을 통해 유족들이 이 문제에 대해 호소하였다
또한 과연 작은공간에서 형성된 여론이 과연 전국적인 여론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 것 이다. 작은공간의 여론은 그냥 작은공간에서의 여론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일베에서 XX절이라는 것을 만들어 몰아간다고 과연 그것이 전국적으로 퍼졌는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다 작은 공간에서 형성된 여론은 단지 작은 공간에서의 여론일 뿐이다. 그것이 전국적으로 퍼지는데에는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이 필요하다.
시사방송 때문에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은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이라 이야기하는데 인터넷 여론 때문에 시사방송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근거도 미약하다. 시사고발프로그램은 원래 뉴스와 다르게 운영된다. 시사고발프로그램은 다양한 제보를 통해 다양한 주제를 선정한다. 거기에는 단신으로 끝난 사건까지 포함된다. 그 중에서 토론 속에서 하나의 주제를 선정한다. 황우석 사태의 경우처럼 단신으로 끝난 사건을 PD수첩이 파고들어 밝혀낸 진실이다. 그런데 당시 인터넷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가 되묻고 싶다.
그리고 시사방송은 보도국 소속이 아니라 교양국 소속이다. 보도국과 교양국은 같은 방송사지만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없지만 과거에는 시사고발프로그램은 독자적인 주제선정권을 지녔었다.
그리고 과실치사도 범죄이지 무죄가 아니다. 그러나 해당미군은 무죄를 받았고 당연히 이는 시위가 커지는 계기점을 제공했다.
또한 과연 시위가 반미시위로 변질되어 난동을 부렸는가도 의문이다. 당시 시위가 진행되었을 때, 유족들이 참여하여 모든 시위에 참석할 수 없어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발언을 하였다. 즉, 유족을 무시하고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유족이 참여한 시위였던 것이다. 물론 그 시위가 이후에 특정세력에 의해서 변질된 것은 맞으며 이에 대해서 유족은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전국적인 추모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이 시위가 촉발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내리가 어렵다. 하지만 인터넷도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며, 또한 미디어로 인해 촉발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시위가 유족을 무시한 2016년도 강남역 시위 사건과는 달리 유족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 후첨 반박
1. 평화시위였다.
특정 인원이 특정 시위에서 불렀던 노래가 과격하다고 해서 해당 시위가 폭력시위라 규정지을 수 없다. 또한 당시 시위에 대한 언론은 평화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1]],한겨례,동아일보
또한 이 시위는 2002년에 일단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2002년 12월 31일 전국적인시위 이후에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후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故) 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책위)”가 계속 유지되어 시위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시위는 지속적으로 열리기만 할뿐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지 않았다.2002년 12월 31일 시위 , 2003년 3월 15일 시위 , 2003년 5월 31일 시위 이에 범대책위는 성대한 1주기 시위를 구상했으나 구상으로만 끝이 났다.
무죄판결에 대한 판단에 대한 부분은 평가내리가 어렵다. 하지만 앞에서 예시로 든,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이 사건과 합리적인 비교가 될 수 없다. 강릉무장공비침투사건은 적군이 침투한 준전시상태이고, 이 사건은 평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준전시상태와 평시상태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비교이다.
전시의 경우에는 군인은 민간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고, 1톤이상의 차량은 군대가 모두 수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시에 군인이 민간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시위는 10년동안 지속되지도 않았다. 시위는 2002년에 일단락되었다. 보상금이 지급되고, 추모비가 건립되어 종료되었다. 물론 범대책위가 이 시위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고, 몇몇 특정세력들만 참여하는 시위로 변화되었다. 과연 그렇기에 추모열기가 10년간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추모열기는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건 인터넷공간에서의 여론이었지 이를 전국적인 추모열기라 보기는 어렵다.
2. 작은공간의 여론이 전국적인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박
PD수첩이 이 사건을 3차례에 걸쳐서 보도하는데, 그중 첫 번째 보도는 7월 16일이었다. 사건이 6월 16일에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방송프로그램은 편집과정을 거쳐 최소 2주의 시간이 걸린다. 시사고발프로그램의 경우, 여러 자문과 정보확인절차[15]를 거치는데 이로 인해 시간이 1-2주의 시간이 더 걸린다. 이를 고려하여 취재기간을 3주로 가정하면, 6월 25일부터 이 사건을 취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월드컵기간이었다. 한국-터키전인 4강전이 6월 29일에 열렸으니 최소 6월 29일까지는 인터넷 여론이 효순이 미선이 사건글이 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 이후에 급격히 형성되어 6월30일부터 각종 게시판에 올라가기 시작했다고 해도, 이 주제를 선정하고 이를 방영하는데 15일만에 이루어내는 것은 불가능이다. 이는 당시 촬영기재의 한계로 인한 부분도 있다. 당시 카메라는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였는데 이게 편집이 아주 고약하다. 요즘이야 디지털화시켜서 영상파일을 옮기고 편집을 하는게 매우 쉽지만, 당시에는 아날로그 필름이기에 편집하는것도 옮기는 것도 지금보다 배는 더 어려웠고, 시간도 많이 소모되었다.[16].
그러므로 PD수첩이 이 사건을 다루는데 인터넷 여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8 여담
-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후 미선 양의 아버지는 "사고를 낸 미군도 이젠 편히 지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당시 사고를 '미군의 살인'이라고 규정하는 반미단체와 다른 견해도 밝혔다. 미선 양의 아버지 심씨는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는데 (미군이) 애들이 미워서 낸 게 아니지 않나."라며 "얼굴도 모르지만 그 미군들도 이젠 마음의 짐을 덜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효순 양의 부친 신현수 씨(58)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라고 전했다.# 2005년 MBC에서 퇴역한 마크 워커 하사를 찾아가 인터뷰한 바가 있는데 여중생들을 치여 죽였단 죄책감에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허리 통증과 설사에 시달리고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한다.
- 매년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으로 인해 유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위키러들도 추모하려고 한다면 조용히 방문하기를 바란다. [2]
- 경기도지사[17]는 "미선·효순양 사고는 길이 좁은 게 원인"[18]이라 했다. 2014년 59번 지방도의 해당 구간은 왕복 4차로로 확장 이설했고, 기존 도로는 마을길로 사용중이다.
- 사건 발생 이듬해인 2003년 4월 북한 평양의 모란봉 제1중학교에서는 두 학생을 6학년 9반 명예학생으로 제멋대로 등록시킨 후 2005년 3월에는 졸업장을 줬다.(...) 한마디로 반미감정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조선노동당의 프로파간다.12
이게 무슨 지거리야
- 카투사로 복무중인 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를 낸 해당 장갑차는 여전히 부대에서 사용 중이라고 한다. 기체의 이상으로 인한 사고가 아니었던 만큼 사용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지만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찝찝해할 듯하다.
- 사고가 난 이듬해에 주한미군에 이상하게 안전사고가 많이 발생해서 사망자가 여럿 나오자 억울하게 죽은 두 원혼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돌았고 주한미군 측에서 찜찜했는지 위령제까지 지냈다고 한다. 흠좀무
- 10년도 더 지난 요즘 시점에서 주한미군 입장은 과실치사 행위에 대한 반성, 피해자 유가족의 입장은 과실치사 행위에 대한 용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된다. 사실 당시에도 미국 정부 입장은 반성의 태도가 확연히 드러났으나 반미단체는 그저 닥치고 미국 반대!! 만 외쳐댔으니 10년이 지난 지금은 관심이 사그라질 수밖에. 극좌 성향의 다음 아고라에서조차도 이제는 이 사건에 대해 반미운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이 사건 이후, 주한미군은 자신들 예하 군인 및 군무원 등에 의해 벌어지는 범죄 및 사건/사고에 대해 보다 한국인들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사과 및 재발 방지 제스쳐를 취하는 등 예전보다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10년 뒤에 평택에서 미 공군 헌병들이 엄연히 미군 부지 밖에 있었음에도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는 이유로 한국인 3명을 권한도 없는데 체포해 기지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고 한국 경찰과도 시비가 붙은 바 있는데, 이 때는
한국 육군 대변인 어깨에 손 얹고 사과 비스무레한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성의 없어 보이는 태도를 취했던 옛날과 달리제7공군사령관[19]이 정복을 입고 직접 한국식으로 기자들 앞에서 고개 숙여 사과하는 등 보다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이며 성의있게 수습했다.
- 이 사건 이후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던 맥도날드가 사라졌는데 좀 미묘한 시기에 없어져서 항간에는 해당 사건에 항의하는 지역 주민들의 시위로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런데 이때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현 장유동)에 있던 맥도날드는 정말로 미국상품 불매운동으로 인해 없어졌다.
- 2000년에 발매된 서태지 6집 2번 트랙의 '탱크'라는 곡이 이 사건으로 인해 뒤늦게 주목받았다.
- 2002년 12월 당시 노무현 당선자가 촛불시위 자제요청을 했다.
- ↑ <김일성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 <수령님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 등 많은 NL계열 민중가요를 작곡하여 논란이 있는 인물.
- ↑ 보통 피해자 이름을 사건 사고에 붙이면 유족들의 고통이 더 심하다는 인식이 있다.
- ↑ 2003년 시 승격
- ↑ Armored Vehicle, Launched MICLIC.
- ↑ 시신상태가 매우 처참하므로 절대 링크 걸지 말 것. 운동권 세력들은 이보다 이전에 미 육군에 의한 윤금희씨 살인 사건 때도 이와 같이 적나라한 사체 사진을 공공연한 장소에 전시하곤 했었는데 분위기가 좀 가라앉자 미군에 대한 비판도 좋지만 고인에 대한 무례를 범하는 이런 식의 태도는 과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 ↑ 사건 당시에는 본 사건의 사고자들이 그런 사이코패스 집단이라는 마타도어가 운동권을 중심으로 돌기는 했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 ↑ 애초 저런 사건의 경우 작전 중에 일어났거나 부대를 몰래 빠져나가(AWOL) 벌인 사건들이다. 대대급 이상 지휘관의 제대로 된 감독 하에 벌어진 사건은 사실상 없다. 물론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인권을 가지고 논 미군 장병들은 전쟁범죄를 저지른게 맞고, 지휘관은 관리소홀책임이 있다. 전쟁 스트레스에 정신이 맛이 갔다는건 이해는 가지만 구 일본군들의 전쟁범죄도 그런식으로 묻을 수 있는가? 이미 한국전쟁 때 국군, 조선인민군 등이 저지른 전쟁범죄도 그런식으로 묻혔다. 일본군이 전범이라는 것도 진주만 공습 등 큰 것들을 일컫는거지, 개개인이 저지른 자잘한 범죄들까지 따지고보면 끝이 없기에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 이상은 대부분 묻힌다. 연합국 등 승전국이라고 해서 독일이나 일본에서 민간인 대상으로 절대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서 모르는게 아니다. 전쟁이 그래서 무서운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앞에서는 고의냐 아니냐를 언급하기 위해서 예를 든거지, 전쟁범죄가 아니라거나 묻자거나 하는 것과 하등 관련이 없다.
- ↑ 그리고 이 이후로 포탈은 물론 각종 게임 등에서 전국적인 관심을 가진 사망사고에 추모 관련 행사나 문구 등을 포함하는 게 크게 유행하게 된다.
- ↑ AVLB는 AVLM과 차량 자체의 시야는 큰 차이가 없으나 커다란 가교가 얹혀있기에 더욱 시야가 제한된다.
- ↑ 해당 사고지역은 인도가 없기 때문에 사람을 발견했으면 회피하여 중앙선 너머로 기동했어야 했다.
- ↑ 그리고 실제로도 옆으로 피해가고 여의치 않거나 대열이 많아서 기동에 문제가 있으면 차량을 급히 세우는 경우도 있고 경로 상에 있는 사람에게 비키라고 외친다.
- ↑ 이 부분을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외교에서 외교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관적인 정책을 세우고 이를 활용하는 사실과 그 이유에 대한 부분은 애초 논리학이 들어올 부분도 아니며 피장파장의 오류 자체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피장파장의 오류가 된다면 형평성은 그 자체가 논리적 오류란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 ↑ 참고로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판결에 국민의 법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나라다.
- ↑ 안타깝게도 미군이 쪽수에 밀려 성조기를 뺏기고 말았다.
- ↑ 예를들어 법적인 고발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든지, 전문가와의 면담을 한다든지, 해당관공서 또는 해당기업에 대해 문의를 한다든지 등
- ↑ 괜히 요즘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찍을 수 있는게 가능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질도 더 떨어지고 있지….
- ↑ 도지삽니다의 그 양반 맞다.
- ↑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인도라고 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 거의 없었으며 사실 그런 공간만 있었어도 두 여중생이 위험한 위치에서 걸어갈 일도 없었을 것은 사실이다.
- ↑ 공군 중장으로, 한반도 주둔 미 공군 장병들 중 최선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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