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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 | ||||
4.19 혁명 | → | 부마민주항쟁 | → | 서울의 봄 |
많은 취재들은 그 때의 분위기를 축제로 표현했다.
목차
1 개요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지금의 창원시 서부)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배경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로 학생 운동, 시민 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이를 누르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 인권 탄압 논란이 불거졌다. 또한 당시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한 증세와 물가 폭등, 그리고 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임금 상승으로 인해 대중들의 불만도 팽배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대중들의 박정희 체제에 대한 불신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중화학 공업 육성이 정부의 조정 실패로 중복, 과잉 투자되면서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고, 이때문에 기존의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지역의 중소업체들은 대출이 급속히 줄어들어 자금난마저 시달리게 됐다. 이렇듯 당시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로 인해 경남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경제난은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 2차 석유 파동이 터지면서 박정희 정부가 한창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 또한 휘청거렸다. 게다가 당시 미국은 독재자 킬러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이었고 덕분에 한미관계도 역대 최악이었다.
결국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득표율에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 이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때문에 국회에서는 유신정우회의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다.
1979년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된다. 그리고 과감하게 민주주의에 관한 사항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때 신민당 당사에서 YH 사건이 일어나 이를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야당 당사에 직접 경찰이 들어갔다)에서 벌어진 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을 강한 논조로 비난했고 이에 국회에서는 국가 체제에 대한 모독[2]을 이유로 10월 4일 날치기로 김영삼을 강제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한다.
3 발단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 이진걸은 민주선언문을 인쇄, 학생들에게 나눠주면서 그 날 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가 경찰에게 쫓기자 이번에는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배포했다. 그래서 10월 15일 도서관 앞에 사람들이 모였지만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그 날 시위는 무산되었다. 사람들이 무력감에 좌절하는 상황에서도 법정대 그룹, 언더 써클 그룹, 아카데미를 비롯한 민주 동아리 계열, 상대 경제사학회 등에서 다시금 시위 준비를 했고 그 결과 10월 16일 오전 도서관에서 드디어 시위가 벌이지기 시작했다.
4 부산에서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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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눌린 우리 역사 터져나온 분노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함성소리 드높았던 동트는 새벽벌 시월이 오면 핏발 선 가슴마다 살아오는 십 일육 동지여 전진하자 깨치고 나가자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내일로 - 부산대학교 제2도서관 10.16 기념비 |
데모 안하기로 유명해 유신대학교라는 오명이 붙던 부산대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3]하자 순식간에 시위 인원이 늘어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일제히 부산 중심가인 남포동과 부산시청 앞, 광복동에 집결해 '유신 철폐' 와 '독재 타도' 를 부르짖었다.
늦은 오후부터는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국제시장 일대를 무대로 게릴라식 전개되었다. 여타 시위와 달리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로 단순한 학생 시위를 넘어 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빵이나 김밥, 청량음료, 캔맥주 같은 먹을거리와 담배음?,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도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을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범 시민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밤이 되어 시민들이 더욱 합세하자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바뀌어갔다. 파출소, 어용 신문사와 방송사, 경찰차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개되었다.
10월 17일부로 부산대는 긴급 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계속 전개되었다. 중구, 서구, 동구 지역의 거의 모든 파출소와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이틀 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소의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KBS, MBC, 부산일보사, 경남도청, 그리고 TBC-TV 취재 차량이 투석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당시 부산시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도합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에서의 시위를 막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5 마산에서의 전개
부산에 육군 공수여단 5000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시위는 오히려 부산을 넘어 마산으로까지 번졌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날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 진해, 함안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경남대학교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나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경찰 차량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가 불타는 등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은 물론, 노동자, 폭력배,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경찰, 군인과 충돌하면서 시위 강도는 한츰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항쟁이 수출 자유 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6 계엄군의 진압
당시 부산 마산에는 육군 특전사 예하 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4] 제7연대(연대장 보병대령 박구일)가 계엄군으로 들어왔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고 혹독했다고 한다. 아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사례들이다.
가내수공업자 김○○(24세)은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려고 하다가 계엄군이 육교통행을 제지하자 항의를 했고, 그 대가로 계엄군에게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 세 차례 폭행당한 뒤 군화발로 복부를 두 세 차례 걷어차였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당해 충격으로 실신까지 하였다. 깨어나고 나서도 다른 시민 7~8명과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 폭행당한 복부의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그러다가 낙하산 마크를 단 군인 선임자의 명령으로 광복동 파출소로 인계되었고, 파출소에서 집으로 귀가했다가 급성 복막염으로 실신하여 가족들의 의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당시 김○○을 수술한 부산 복음병원 외과 과장 장○○는 몸 내부적인 원인이 아닌 외상으로 인한 복막염, 그것도 군인에 의해 맞아 발생한 복막염 환자라는 점 때문에 충격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며, 수술 전날에도 군인들이 부녀자를 총 개머리판으로 치는 등 폭행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고 증언했다. 김○○ 이외에 군인에게 폭행당한 다른 환자들이 한두 명 입원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금은방 직원 전○○(29세)은 시위에 참여하던 도중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을 하자 계엄군들이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으며, 그 때 군용차량 뒤편으로 피신하다가 6~7명의 계엄군에게 포위당한 후 총 개머리판에 머리, 얼굴, 팔, 다리 등 전신을 구타당하여 실신하였다. 그 뒤 두개골 함몰분쇄골절로 인해 한독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한독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한○○ 신경외과 의원으로 재차 후송되어 대수술을 받았다. 골절된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지 한달 뒤에도 인공뼈를 심는 두개골 성형술 역시 시행하였다.
부산 소재 동광섬유 직원 신○○(37세)도 1979. 10. 18. 부산시 남포동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시청 부근에서 진압군에게 곤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 등을 구타당하여 뇌 손상, 뇌경막 손상의 상해를 입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제작한 "KBS영상실록" 2005. 9. 25. 방송분에는 “베레모를 쓰고 집총을 한 군인이 군용차량으로 이동하는 영상, 한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적색 상의를 입은 청년을 구타하고 옆에 있던 군인들도 함께 발로 차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고 이는 외신기자가 기록한 18일 부산의 모습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산경찰서 전투경찰(일경) 서○○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나는 시위대를 구타한 사실은 없지만 낙하산 마크가 부착된 군인과 일반 군인들이 마산 시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불심검문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하여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다.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고 진술하였다.
국제신문 취재기자 조갑제의 취재내용에 따르면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은 양민들의 머리를 주로 때렸다.’고 한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발을 했거나 젊어 보이는 남자들 중에 까닭 없이 붙들려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되어 있다.
7 항쟁 그 후
나흘간의 시위 결과로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학생 37명, 일반인 50명) 중 단순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 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 일반인 5)은 전원이 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이 중 208명은 부산 봉기 학생)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군 부대의 주둔으로 인해 시위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조갑제는 시위가 꺾였다고 평가했지만 시위가 언제든 다시 불을 뿜을 수 있던 상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팽팽한 긴장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 위수령 발동 후 6일 뒤에 일어난 10.26 사건이다.
기소된 사람들은 10.26 이후 석방되거나 재판을 거쳐 1982년 전두환 집권 후 사면을 통해 풀려났다.
항쟁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갑제는 시위가 다시 불을 뿜을 가능성을 낮게 보았지만 시위가 다시 불을 뿜었다면 아래에도 나오지만 박정희는 곽영주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허가했고 차지철은 한술더떠 캄보디아를 언급하며 학살을 예고했다. 그리고 실제로 만일 시위가 다시 불을 뿜었다면 무력을 통한 유혈 진압이 일어났을 것이며 부마항쟁의 계기가 된 김영삼의 체포도 임박한 상태였다(김영삼의 체포는 10월 30일에 실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구상했던 무력 진압은 결국 7개월 뒤 광주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체포와 구속, 선제적인 무차별 무력 진압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광주에서 김대중의 체포와 구속, 선제적인 무차별 무력 진압으로 그대로 재현된다(김정남[5] 저, "진실, 광장에 서다" 중).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정권 내내 묻혀 있던 부마항쟁은 민주화 정부가 수립된 후 비로소 부마항쟁 관련자를 대상으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가 이루어졌고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6] 또한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부마항쟁 기념식에 대통령의 축사#가 전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2005년에 통과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였으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11월에 부마항쟁진실규명신청을 접수했다. 그 뒤 2009년 12월에 진상조사가 시작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부마항쟁에 대한 간략한 조사 결과#가 2010년 7월 발표되었다.
그러나 99년에 이루어진 입법청원 추진과, 2010년에 추진된 대규모 진상조사와 피해보상에 필요한 특별법이 모두 통과되지 않아 부마항쟁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명이 유예되었다. 결국 2013년이 되어서야 부마민주항쟁 명예회복 보상법#이 국회 통과되어 부마항쟁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길이 드디어 열리게 되었다.
8 의의
10월 유신 정권의 종말을 고한 사건.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아니 킬링필드의 참극이 부산·마산에서 벌어질 뻔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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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벌어졌을때, 박정희는 4.19 혁명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허가했다. 그리고 차지철은 여기에 덧붙여서 캄보디아[7]를 언급하며, 부산·마산 시민 100~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망언을 했기 때문이다.
10월 유신 체제의 정당성의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사건으로 부마항쟁은 서슬퍼런 긴급조치 시대의 숨막히는 억압 구조를 뚫고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을 다시 열었던 사건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다.
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지식인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4.19 혁명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반독재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5.18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부마항쟁은 단순히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으로만 머물지 않고 박정희의 유신 정권을 붕괴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부마항쟁은 정권 내 권력 암투를 보다 급속히 자극하여 10.26 사건과 박정희 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8.1 부마항쟁과 10.26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8]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김재규가 10.26 재판에서 증언한 것처럼 그는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해 이 사건이 단순한 학생시위가 아닌 민중봉기이며, 더이상 유신체제 존속이 어렵다는 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못느끼는 차지철과 대립, 결국 박정희 살해로 이어졌다는 설은 바로 이것. 이 설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의 증언을 들어보는게 좋다.#
9 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가?
부마민주항쟁은 4.19 이후 다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된 민주화 대장정의 분수령임에도 불구 의외로 4.19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달리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다. 실제로 위 세 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식도 가지지만 부마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기념은 드문 편이고, 다른 민주화 운동에 비하여 정부의 관심은 낮은 편이다. 흔히 부산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정도로 알려져 있거나 아예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흔히 부마민주항쟁은 부마사태로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이의 방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의 원인에 대해서는 몇가지 해석이 있다.
부마민주항쟁 직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사살되고 곧바로 다시금 전두환에 의한 군사독재의 철권 통치가 이어지는 동란의 과정 속에 항쟁을 주목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부마항쟁이 일어난지 불과 7달 뒤에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민주화를 추구하던 세력은 믿기 어려웠던 학살에 더 많은 관심과 부채감(서울역 회군)을 가진 것이라는 시각.
이는 박정희는 죽었으되, 군사독재가 종결되지 않은 시기적 사건전개에서 역사적 관심편중의 원인을 찾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4.19 혁명은 이승만을 물리치는데 성공했고, 5.18은 충격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6월 항쟁은 전두환을 물리쳐 낸 것에 비해 부마민주항쟁은 10.26의 계기가 되어 유신정권 철폐의 철퇴를 가한 의의가 있었음에도,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한 신군부 정권이 창궐한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 서강대 손호철 교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적 딜레마설이 있다. 부산-경남 지역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화의 길을 걸으면서 상대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정치권에서 논의되지 않은 채로 잊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3당 합당 이후 자연스럽게 박정희를 계승한 정당을 지지하게 되면서 그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이를 옹호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연히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혹은 묻어버리는 방향으로 갔다는 지적이다.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가 존재하고, 이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이 부산-경남 지역의 주류 집권 세력이 되면서 그를 전면부정하는 이 항쟁에 대해서 높게 평가할 수 없다는 해석으로 이런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부마민주항쟁이 받는 무관심은 그것이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딜레마에 희생된 결과이다.
10 기념 운동
- 현재 부산에는 민주공원이 있어 부마민주항쟁을 기리고 있다. 문제는 2009년경 보수 단체의 압력을 못 이기고 민주공원 버스 종점 이름을 중앙공원으로 바꿨다는 점. 부산시의 병크. 다행히 2011년부터는 종점 이름이 중앙공원, 민주공원으로 바뀌었다.[9] 그런데 시내버스 LED는 '중앙공원' 으로 나오고, 행선지 스티커의 상당수가 '중앙공원' 만을 표기하고 있다.[10]
- 부산대에는 10.16 기념관을 건설하고, 10.16부마민주항쟁탑 및 여러 기념물 등을 통해 부마민주항쟁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부산대학생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시월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매년 10월 초에 개최하고 있다.[11]
- 교향시 여명의 발표를 통해 여러 차원에서 이를 기리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2011년 부마민주항쟁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 2011년 야권통합정당인 민주통합당에서 강령으로 부마민주항쟁을 새롭게 추가시켰다. 이는 부산, 경남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재인 이사장이 통합에 참여하면서 된 것으로 보인다.
- 마산(지금 창원)에도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위치는 한국 방송대학교 마산 학습관 옆의 공원(해운동)
11 부마항쟁의 진상규명 상황과 논란
현재 부마항쟁 진상규명을 하고 있으나, 박근혜정부의 태도에 논란이 심하다.
2013년 5월 당시까지 상황은 이랬다.
- 처음에는 여야 모두 ‘부마민주항쟁특별법안’이었다. 4·3 항쟁이나 5·18 민주화 운동처럼, 특별법으로 진행되다가 국회 상임위에서 일반법으로 바뀌었다.
- 법의 명칭에서 여야 원안에 있었던 ‘진상규명’이 빠지고 결국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됐다.
- 부마민주항쟁의 시간적 범위도 제한적이다. 공간적으로 ‘부산과 마산·창원을 포함한 경남 일원’으로 넓게 규정하면서 시간적으로는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로 한정했다. 10월 16일 이전 사전 시위계획을 했다가 실패하고 수배된 사례나 20일 이후 10·26사태 이전에 유사 사례는 포함되지 않는다. 항쟁 당사자인 부산의 김종세 씨는 “10월 15일 부산대에서 주동자들이 유인물을 뿌리고 300여 명을 모았지만 결행하지 못했다. 이런 활동이 있었기에 다음날 시위가 가능했다”며 “기간설정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5·18 특별법’에는 ‘12·12부터 5·18 전후’로 기간을 잡았다.
- 여야 원안의 위원 수 20명이 15명으로 축소됐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와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수를 6명에서 2명으로 크게 줄이고 대통령의 임명 위원 수를 크게 늘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누구 딸인지를 생각하면 공정성을 해치는 자세이다. 때문에 중립성 걱정이 나오고 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참여 폭을 넓히거나 대통령 지명 위원보다 국회의장이나 대법원장 추천 위원을 포함해야할텐데······.
- 동행명령권도 결국 삭제됐다. 진실화해위원회에도 있었던 동행명령권의 삭제는 당연히 부실한 진상조사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가해자 조사가 부실하게 될 것이며, 피해자의 보상 청구권도 실질적으로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 이후엔 정부가 부마항쟁 측의 항의를 받아들여 물러서는 모습이 나왔다.[12] 그러나, 실질적 후속 조치는 '지지부진'해 비판을 받고 있다. [13] 2014년 6월, 부마항쟁 단체는 “정부는 스스로 편성해 놓은 38억여원의 예산은 전혀 집행하지 않고, 위원회 지원단도 구성만 했을 뿐 7개월 동안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면 “박 대통령은 부마민주항쟁위원회가 법에 명시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속한 시일에 위원을 임명하고, 합리적 총리 인선으로 총리 산하 부마민주항쟁위원회를 구성, 활동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박 대통령과 정부는 △부마민주항쟁위원회 임명시기 및 임명원칙 △부마민주항쟁위원회 구성 시기 △부마민주항쟁보상지원단의 사업에 관한 향후 일정(진상규명, 신고접수, 보상지원계획, 예산 등)에 대해 답변하라”고 박근혜 대통령한테 요구를 하였다. [14]
2014년 10월 13일에 부마항쟁 진상규명·보상위원회 가 드디어 공식출범했다. [15] 그러나 부산지역 부마항장 단체들한테 여전히 비판을 받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위원회'의 몇몇 위원은 집권여당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인사이고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는 학술대회에 참가하거나 독재와 친일 미화의 물의를 빚은 역사 교과서를 옹호한 인사도 있다"며 "이러한 위원회 구성을 보면 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기보다 오히려 그 역사적 의미를 무력화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수십 년간 부마항쟁 진상 규명을 위해 온 힘을 다해온 단체가 추천한 인사는 배제되고 급조된 단체의 추천인사가 선정된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다"고 지적했다. [16] 실제로 부마항쟁 규명위의 상당수가 친박인사라고 한다.[17]
2014년 10 18일 경남대학교에선 부마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참석한 인사들은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의 위원 구성에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18]
- 문재인 의원: "언론에서 '친박모임'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유신독재를 찬양·지지한 인사들이 부마항쟁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부마민주항쟁과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 우무석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부마민주항쟁법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우리 사업회가 위원회에 배제된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 김광수 부산민주공원 관장: "부산에서 열린 항쟁 35주년 기념식에서도 잘못된 위원 선정에 대한 규탄이 있었다" "앞으로 위원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겠다."
12 기타
- 온건한 시위대처를 주도한 진압대장 박구일 대령은 13년 후, 유력한 대선후보 김영삼이 이끄는 신당 민주자유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당선이 유력시 되는 후보 3인[19] 중 2사람의 소속 정당이 러브콜을 보냈을만큼, 박 대령이 부산-마산에서 쌓은 덕이 컸다는 방증,.